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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원정 자료실 스크랩 [이 클라이머의 삶] 부산 고산등반계의 늦깎이 견인차 김진태씨
쌍둥이 추천 0 조회 26 09.12.21 01:3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산 상봉산악회 회원


94년 한국등산학교 동계반 수료
94년 국제 설악산악마라톤대회 9위 입상
95년 엘브루즈 등정(북면)
00년 미국 휘트니 등정, 요세미티 등반
01년 히말라야 초오유 등정
03년 토왕폭, 소승폭, 대승폭 등반
06년 에베레스트 등정(노스콜 루트)
07년 K2·브로드피크 등정




“오를 때 고통스러운데 하산하면 그리워요”


7월27일 새벽 1시, 김진태는 후배 2명, 셰르파 3명과 함께 마지막 캠프를 출발, ‘죽음을 부르는 산’ K2(8,611m) 정상으로 향했다. 한 발 한 발이 천근만근이었다. 그래도 몇 시간 뒤면 세계 제2고봉 정상에 올라선다는 생각을 하면 힘이 솟았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새벽 4시30분경, 위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리더니 동시에 낙석이 떨어지고, 그 직후 밑에서 불빛 하나가 스르르 밀려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낙석을 피하려다 균형을 잃고 남동벽 아래로 떨어지는 누군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보틀넥(8,300~8,400m)을 향하던 10여 개의 불빛이 꼼짝 않고 멈춰섰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누굴까. 잠시 후 올라온 김지우는 사고자가 누구인지 알려주었다. 니마였다. 이럴 수가 있나. 불과 1시간 전 그의 손으로 산소마스크 밴드를 조절해준 친구인데-. 지난해 아일랜드피크(임자체·6,189m)와 에베레스트(8,848m)도 함께 등정한 사이였다. 당시 원정을 마치고 하산길에 니마의 집을 방문하여 가족을 만났을 때 그의 아버지도 등반 중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산은 이렇게 비정하다. 니마와 파트너를 이룬 김지우는 슬픔에 잠긴 다른 셰르파들과 함께 하산을 결정했으나 김진태는 망설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화가 치밀면서 오기가 생겼다. 베이스캠프의 대장, 대원들, 그리고 공격대원 모두 마찬가지 심정이었다. 니마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정상을 밟아야한다고 다짐했다. 슬픔에 잠긴 셰르파들을 뒤로하곤 정상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그 날 오후 3시15분경, 사고로 2시간 반 이상 지연되기 했지만, 김진태는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14시간 뒤 세계 제2고봉 정상에 올라섰다.

셰르파 추락사하자 오기 발동, 정상까지 밀어붙여

▲ 파키스탄 히말라야의 맹주 K2 정상.

부산 산악인 김진태씨(43·金鎭泰)는 지난해 에베레스트 등정을 이룩한 데 이어 올해는 K2에 이어 브로드피크(8,047m)에도 올라서 한 시즌 2개봉 연속등정이란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이 두 거봉 등반에서 그는 죽음의 수렁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고통도 겪었다. 특히 K2는 고산이 얼마나 냉혹한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첫 번째 공격에 나섰다 마지막 캠프인 C4(8,000m)에서 악천후를 만나 탈출과도 같은 하산을 하고, 두 번째 등정 시도를 위해 C4에 올라섰을 때는 첫 공격 때 올려놓은 텐트부터 산소통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비가 사라져 버렸다. 1차 공격 때 불어닥친 폭설과 강풍이 모든 장비와 식량을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 것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나선 제3차 공격 때는 두 차례의 고산등반을 통해 피를 나눈 형제처럼 끈끈해진 셰르파가 사라지는 모습을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멍하니 지켜봐야 했고, 등정 후 하산길에선 ‘살아서 내려간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심정이 들만큼 혹독한 악천후에 시달려야했다. 하산길에 후배 대원과 여성대 대원이 추락했다가 설동을 파고 악천후를 피해 5시간만에 캠프로 돌아오는 기가 막힌 일도 겪어야했다.


브로드피크는 정상을 두어 시간 남겨놓고도 등반 자체를 후회할 만큼 힘겨웠다. 등반 시작 나흘만에 나선 정상 공격이었다. 김창호 대원과 둘이서 알파인스타일로 등반에 나선 그는 날씨가 나빠 C3에 머문 하루까지 포함해 3박4일째 되는 날 정상 공격에 나섰다. 해발 7,800m대 능선 안부에 올라서면 바로 정상이려니 예상했건만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장갑 안에 핫팩을 넣은 채 올라 손은 그런 대로 견딜 만했으나, 지퍼가 얼어붙는 바람에 우모복 안에 넣어둔 비상식도 못 꺼내먹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험악한 상황을 그는 이겨냈고, 그 날로 베이스캠프까지 하산하는 쾌속 등반을 해냈다.


10월6일, 모처럼 쾌청한 가을 날을 맞아 부산 금정산 산릉 곳곳은 억새가 물결치고 있었다. 이 날 김진태씨는 지난해와 올해 원정에서 대장을 맡았던 홍성보씨 부부와 함께 금정산을 올랐다. 배낭이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이 날 저녁 신불산에서 열릴 히말라얀클럽 모임에 참가했다가 여관 밖에서 비박할 생각에 침낭까지 넣어온 배낭이었다.


▲ 1)깊은 눈을 헤치며 K2 정상으로 향하는 김진태씨. 브로드피크를 비롯해 카라코룸 히말라야의 고봉들이 장엄하게 솟아 있다. 2)2006년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김진태(오른쪽)와 서성호 대원. 3)2007년 브로드피크 등반. 4)2006년 에베레스트 북릉.

그의 걸음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그는 163cm의 단신에 몸무게 56kg 안팎의 왜소한 체격이지만, 마라톤 풀코스를 2시간56분17초에 주파했을 만큼 뛰어난 준족이다. 94년 열린 국제설악산악마라톤대회 때는 오색에서 대청봉을 넘고 천불동계곡과 소공원을 거쳐 캔싱턴호텔로 이어지는 코스를 2시간24분35초라는 엄청난 기록으로 완주하기도 했다.


그의 자존심 때문에 등반에 입문했다. 워킹산행에 한창 빠져 지내던 87년 여름이었다. 설악산 탐승에 나섰던 그는 계단길을 따라 울산암을 오르던 중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바로 옆에서 한 여성 클라이머가 빤빤한 바위벽을 오르고 있었다. 자존심이 무너짐과 동시에 욕구가 생겼다. 암벽등반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이었다.


방법을 몰랐던 그는 장비점에서 암벽화를 사 신은 다음 그동안 봐왔던 암벽을 찾았다. 뜻대로 될 리 없었다. 손을 집어넣기 적당한 크랙이 보여도 요령을 몰라 머뭇거려야했고, 완경사 슬랩이 있어도 추락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선뜻 올라설 수 없었다. 해도 해도 안 되자 이럴 바에는 지리산이나 실컷 다니자는 생각에 시간 날 때면 지리산으로 향했다.


그러던 중 부산 상봉산악회가 등산교육을 한다는 사실을 등산전문지를 통해 확인했다. 곧바로 신청했다. 교육 수료와 동시에 상봉산악회에 가입한 그는 이후 바위에 빠져들었다. 74년 창립한 상봉산악회는 고산등반을 목표로 전문등반을 추구하는 산악회다. 그에겐 기술등반 위주의 활동이 너무도 좋았다. 부채바위의 ‘어린 왕자’와 ‘외로운 별’, 나비암의 ‘슈즈킬러’ 등 금정산 일원의 암벽 루트를 훑으면서 등반기량을 익히고, 지리산 불일폭포을 시작으로 설악의 거대한 빙폭을 찾아다니면서 빙벽 실력을 향상시켜 나아갔다.


하동 태생인 그는 고향을 찾았다가 동생과 함께 불일폭포 빙벽등반에 나섰다가 큰 사고를 겪을 뻔한 적도 있었다. 90년이었으니 빙벽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어설픈 시절이었다. 설 쇠러 갔던 길에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불일폭포가 모처럼 얼었다기에 찾아갔다. 동생은 등반에 대해 문외한이었으니 확보를 봐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아침마다 조깅

▲ [좌]96년 설악산 천화대. [우]90년 1월 지리산 북일폭포. 어설픈 실력으로 단독등반에 나섰다 혼쭐났던 등반이었다.

“그래서 줄도 없이 올랐어요. 하단은 그런 대로 올라섰는데 상단에 접어들면서 문제가 생겼죠. 아이젠이 살짝 밀리자 깜짝 놀라면서 바일을 휘둘렀는데 다행히 피크가 잘 박혔어요. 그 후가 더 큰 문제였죠. 겁에 질려 버렸던 거예요. 바일을 밑으로 집어던지고 옆쪽 바위지대로 살금살금 이용해 탈출했는데 당시 어찌나 당황했던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조차 없어요. 그 일로 동생은 놀람증이 생겼고요. 이후 자일 없는 등반을 절대 하지 않는답니다.”


94년 한국등산학교 동계반을 통해 빙벽기술을 체계적으로 익힌 그는 꾸준히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리곤 9년이 지난 2003년 토왕폭, 소승폭, 대승폭을 한 시즌에 해냈다.


“토왕폭 등반을 마치고 그 다음주 대승폭 등반에 나섰어요. 한 해 전 도전하려했는데 결빙되지 않아 시도하지 못한 빙벽이었기에 기대가 컸죠. 생각보단 수월하게 끝냈어요. 그래서 등반을 마친 뒤 룰루랄라 하면서 내려서는데, 장수대 입구에서 공원사무소 직원이 딱 버티고 있지 뭐예요. 금지구역에서 등반하는 것을 다 봤다면서 말이에요. 후배와 둘이서 50만 원이란 거금을 냈답니다. 그것도 봐줘서 두 명 중 한 명만 딱지를 끊은 거랍니다.”


금정산은 토요일을 맞아 억새가 한창 멋을 부린 가을을 맞으려는 탐승객들이 줄지어 오르내렸다. 김진태씨와 홍보성씨 부부는 한창 가을빛에 물들어 가는 능선길을 따르다 나비바위를 둘러보고 부채바위로 향했다. 부채바위는 금정산의 여러 암벽 중에서도 고전 루트가 많이 몰려 있는 암벽. 그는 루트가 몰려 있는 북벽 대신 빛이 좋은 남벽으로 접근해 ‘펌핑 스페셜’ 등반에 나섰으나 장비 부족으로 애를 먹었다. 고정확보물에 어렵게 끼워넣은 카라비나나 슬링이 빠져나오지 않아 팔에 펌핑이 오기도 했다. 과연 펌핑 스페셜이었다.


94년 설악산악마라톤대회에서 체력에 관해 자신감을 얻은 그는 이듬해 국제캠프 원정대에 합류해 유럽 최고봉인 엘브루즈(5,642m) 등반에 나섰다. 한국 산악인들이 흔히 등반하는 남면 노멀루트가 아닌 북면 등반이었다. 그런데 그는 93년 대만 옥산(3,952m) 트레킹 중 해발 3,455m 고지에 위치한 배운산장에서 겁없이 마신 술 때문에 이튿날 정상에 오를 때는 거의 기어갈 정도로 고생했음에도 헬리콥터를 타고 엘브루즈 북면 해발 3,800m 지점의 산장에 도착해 홀로 텐트를 치고 지내던 중 또다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 부채바위 펌핑스페셜 등반과 하강.

“평소 술을 좋아하지 않는데 산에만 가면 술을 마시곤 해요. 분위기 때문인가 봐요. 산장에 도착했을 때는 고소증세가 살짝 오더군요. 그래서 많이 움직였죠. 산장에서 몇 백m 위쪽에 올랐다 내려오기도 했고요. 그래서 겨우 컨디션 조절을 마쳤는데 또다시 분위기 때문에 마신 술로 고생을 많이 했어요. 바람이 너무 강해 출발시간을 늦추다가 정상으로 향했는데 머리가 깨져나가는 것 같더군요. 그래도 국제캠프 상업등반 행사에 참가한 17명 중 엄홍길씨를 비롯해 3명만 정상에 올랐어요. 날씨가 워낙 나빠 정상에서 사진도 못 찍고 어찌나 고생이 심했던지 다시는 고산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하산했답니다.”


그러나 그는 1999년 일본 북알프스에 이어 2000년 미국 휘트니(4,392m)을 오른 뒤 2001년 부산시산악연맹 원정대원으로서 세계 제6봉인 초오유(8,201m) 등반에 나선다.


“환갑을 맞은 선배와 함께 휘트니를 오른 다음 엘캐피탄도 등반했어요. 엘캡은 함께 등반할 사람이 없어 혼자 선등을 서고 짐도 끌어올리면서 올랐어요. 노즈 12피치에서 손이 뻣뻣해지더군요. 안 되겠다 싶어 이튿날 탈출하는 데도 4시간 이상 걸렸어요. 초오유는 8,000m급 14개 거봉 중 가장 쉽다고 하는데 만만치 않았어요. 특히 발이 어찌나 시리던지 고통스러울 정도였답니다. 그래서 빨리 등반을 끝내려고 서둘러 운행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동료들에게 미안하더군요. 함께 호흡을 맞춰가면서 정상까지 올랐어야 했는데 말이에요.”


그는 지난 해 티벳쪽 노스콜 루트로 세계 최고봉 등정에도 성공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타고난 고소체질이라는 평을 받고 있지만 그보다는 꾸준한 노력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는 캐러밴 중에도 틈틈이 운동하고, 베이스캠프 구축 이후엔 남들보다 더 움직이고, 일부러 더 높은 곳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등 고소적응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아일랜드피크 캐러밴 중 해발 3,400m 고지인 남체에서 운동 삼아 뛰어다니고, 초모랑마 베이스캠프에서 아침마다 조깅할 정도라면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해 고소적응력이 뛰어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부채바위 남벽 등반을 마치고, 북벽을 둘러본 다음 다시 능선에 올라서자 김진태씨는 “저기가 부채바위 안부”라며, “정말 이가 갈리도록 오르내렸다”고 회상한다.


“원정마다 선발과정이 등반보다 더 힘들었어요. 올해 K2 원정은 자연스럽게 대원으로 선발되었지만 지난해 에베레스트 원정 때는 40명 넘는 후보대원들과 여러 달 동안 경쟁을 벌여야 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정이 들어가는 대원들과 경쟁에서 이겨야한다는 게 심리적으로 어려운 일이죠. 다른 대원들에 비해 나이가 많기 때문에 아무래도 미안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어요.


주중과 주말 훈련에 매번 참가해야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소수 인원만 남기고 다른 사람들을 떨어뜨리기 위해 훈련할 때는 정말 힘들어요. 부채바위 안부가 대표적이에요. 에베레스트 선발전 때 20kg 무게 배낭을 멘 채 부산외대 운동장에서 부채바위 안부까지 여덟 번이나 왕복했으니까요. 오후 4시부터 시작해 다 마치고 나니까 이튿날 새벽 1시가 넘었더군요. 그런데 홍 대장님은 여덟 번 다 왕복하지 않았죠?”

▲ 2006년 에베레스트 원정과 2007년 K2-브로드피크 원정 대장 홍보성씨와 함께 금정산 부채바위에서.

부채바위에 앉아 얘기를 듣던 홍보성씨는 “대장과 대원이 똑 같으면 어떻게 하냐? 정 하기 싫으면 나보다 나이 더 먹으면 될 것 아니냐”며 응수한다.


그는 요즘도 아침이면 출근 전 사하구 당리동 집 뒷산인 승학산(496.5m)을 뛰어 오른다. 평지보다 오르막이 적성에 맞는다는 그는 마라톤에서도 수준급 기량을 과시해왔다. 2003년 가을 부산마라톤대회에서 첫 완주한 그는 2004년 3월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59분5초의 기록으로 아마추어들이 꿈의 기록으로 일컫는 서브스리(sub 3)를 달성한 이후 지난해에는 2시간56분17초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94년 설악산악마라톤대회 때는 제한시간인 4시간 안에 들어오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참가했는데 뜻밖에 좋은 기록이 나왔던 거예요. 그런데 마라톤은 첫 대회 때 3시간29분57초라는 저조한 기록이 나왔어요. 자존심이 상하면서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열심히 운동했던 거예요.”


지난해까지 마라톤 풀코스(42.195km)를 9차례 완주했다는 김진태씨는 “좀 더 열심히 운동하면 좋은 기록을 세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등반과 원정 준비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상황인지라 할 수가 없다”며, “마라톤이 등산보다 훨씬 어려운 운동 같다”고 말했다.


“기회 닿는 한 계속 오르고파”

▲ 2002년 남알프스 종주산행.

나비바위에서 북문으로 향하다 억새밭에 앉아 쉬던 그는 선배 부부를 위해 큼지막한 배를 깎을 때는 세계 제1, 2위 고봉을 오른 이 답지 않게 부드러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산에 대해 얘기를 나눌 때는 20대 청년과도 같은 열정적인 표정을 지었다. 마흔셋의 나이에 아직 미혼인 그는 꿈이 많다. 특히 히말라야 고산에 대해. 그는 이미 내년 부산시연맹 시샤팡마-로체 원정대 대원으로 내정돼 있다.


“오를 때 고통스러운데 내려서면 다시 가고픈 마음이 불끈불끈 일어나곤 해요. 그렇다고 산에 대해 뚜렷한 목표가 있는 건 아니에요. 처음에 푸른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산이 좋아 다녔듯이 고산도 흰 눈이 좋아 다닐 뿐이랍니다. 정상을 오르면서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고봉들을 보는 기분도 좋고요. 기회가 닿는 한 계속 오르고 싶고요. 아무튼 회사 상사들이 이해해주시는 덕분에 초오유와 에베레스트도 가고, K2도 올랐어요. 물론 내년 시샤팡마-로체 원정도 가고 싶어요. 하지만 이태 연속 여러 달 자리를 비우다 보니 동료들에게 미안해요. 아무래도 제가 할 일이 다른 직원들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결혼이 8,000m급 거봉 오르는 것보다 어려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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