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길
오윤영
얼마 전부터 내 핸드폰으로 며칠에 한번 씩 부지런히 날아오는 문자 메시지가 있었다. “선운사 이벤트 전원 참석요망 안가면 평생후회” 한때 학문에 뜻을 함께했던 스터디동기모임에서 보내오는 공지 안내문 이었다. 이 모임 에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선운사에 당도해서 미당생가를 거처 채석강 에서 서해안을 돌아오는 코스였다.
따사로운 햇살의 유혹에 작구만 마음이 들뜨는 늦봄을 그냥 보내기는 아쉬웠는데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게다가 이번 여행지는 기회가 닿으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남다른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창은 내 부모님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고향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서너살의 어린 아이였을 무렵 부모님 품에 안겨 서울로 이주를 해 와서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이곳에서 살고 있다. 그러니 고향에 대한 정 이랄까.향수를 느낄만한 추억도 내게는 없다. 뿐인가 고향의 산천이 어떤 풍경인지, 그 곳의 특산물은 무엇이며, 지역이 갖는 독특한 문화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체, 나는 이곳 서울에서 성장을 했고.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지금도 여기서 살고 있다. .
그러나.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한 아련한 동경 이랄까, 제 뿌리에 대한 본능적인 연민이라 할까 그런 감정들이 내 가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나 보다. 이번 여행지는 다른 때 보다 유난히 가슴이 설레이는 것이……
어렵게 여행 계획을 잡아놓고 여행 떠나기 전날 밤엔 소풍가는 초등학생처럼 들뜬 마음에 잠도 오지 않았다. 하루 잠 좀 못잔들 어떠랴? 여행 가방을 챙기는 손길이 신바람으로 분주하다.
새벽 4시 30분 집결 장소로 가기위해 집을 나선다. 신선한 청량감을 뿌려대는 새벽바람이 상쾌하다. 한 사람 한 사람 모여드는 일행들의 얼굴은 이제 막 새벽이슬 머금고 꽃잎을 활짝 피워낸 꽃분홍색 분꽃 같다.
관광차에 몸을 실은 일행들의 들뜬 기분은 노래방의 열기로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다. 연 초록 으로 뒤덮인 산과 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야산 곳곳에 무리지어 피어난 노오란 들꽃들의 화음에 묵은 일상을 훌훌 털어버린다.
드디어 선운사에 도착한 일행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고적 답사 길에 오른다. 백제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가 창건 했다고 전해지는 선운사는 전라북도 내 조계종의 2대 본사란다. 동백이 흐드러지게 피는 겨울철이 오히려 화려 하다는데 우리는 늦은 봄에 갔으니 동백꽃은 자취도 없어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무성한 잎사귀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동백나무 밑에서 보물찾기 이벤트를 하면서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가 본다. 내 어릴적 못다한 추억 한 조각이라도 남기 려는듯……
금강산도식후경 이라더니 새벽같이 여행길을 재촉 하느라 차 안에서 미리 준비한 간단한 김밥과 떡 으로 아침을 대신한 일행들 시장기가 발동한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까?
여기까지 왔는데 이곳의 명물.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서 잡아 올려 그 맛이 일품 이라는 고창군 풍천면의 풍천장어를 아니 먹고 갈순 없다. 서해안을 끼고 빽빽하게 자리를 차지한 장어집의 붐비는 여행객들 사이에 둘러앉은 일행들. 장어가 나오기도 전에 그곳 노지에서 직접 길러서 뜯어온 쌉쌀한 상추로 입맛을 돋군다. 드디어 기다렸던 장어가 등장. 배가 납작하게 갈라진 장어의 머리는 신경이 살아 꿈틀 거리고 있었다. 몸통을 불에 달궈진 석쇠에 올려놓자 몇 번은 온몸을 뒤틀더니 이내 잠잠 해진다. 순간 잔인한게 인간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허기진 뱃속에서는 이내 구수한 장어 냄새에 타협하고 혀끝에서는 살살 녹듯 부드러운 맛에 타협한다. 짠! 하고 건 내 오는 술잔의 부딪침에 한껏 분위기는 무루익어가고, 한잔 또 한잔 건아하게 술잔의 정이 오고 간다.
소박한 이야기가 두잔 세잔 길어진 틈을 타서 잠시 밖으로 나와 물이 빠져나간 둑길을 걸어본다. 하늘과 맞닿은 끝이 없는 넓은 갯벌이다. 까맣고 조그만 바닷게가 옆으로도 아주 재빠른 동작으로 겟벌 속을 들고 날고 하는 모습이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 때문에 갯벌 곳곳엔 뽕뽕뽕 구멍이 패여 있었다. 갯벌 한가운데 저만큼 멀리서 경운기 몇 대가 줄을 지어 띨딸딸 거리며 둑길을 빠져 나가고 있다. 내겐 처음으로 만나는 편안하고 여유로운 고향마을 풍경이다. 그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바닷물이 언제쯤 들어오느냐고 물었더니 잠깐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더니 앞으로 두 시간 후면 다시 물이 들어와 갯벌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거대한 바다가 된다한다. 생명이 살아 숨쉬는 자연의 움직임은 끊임없이 태동하고 사라지며 순환을 거듭하고 있음을 실감 한다.
아직 갈 길이 분주한 일행들. 발그레한 얼굴로 장어 집을 나온다 . 서해안을 끼고 따라가다 보니 요즘 TV에서 한참 방영중인 “불멸의 이순신” 촬영지의 셋트장이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었다, 마이크에서 낯익은 촘무의 안내 방송이 들린다. ‘시간이 너무 지체된 관계로 처음 계획했던 미당 생가는 건너뛰고 바로 채석강으로 갑니다’. 아! 내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인데……어쩌랴?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니 아쉬움은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둘수밖에.
물에 침식되어 퇴적한 절벽이 마치 수 만권의 책을 쌓아 올려놓은 듯한 채석강. 중국 당의 이백이 배를 타고 술을 마시다가 강물에 뜬 달을 잡으려다 빠져 죽었다는 그 채석강과 흡사하다 해서 지어진 이름 이란다. 채석강 방파제 위에 펄적 펗쩍 휘젓고 다니는 갑오징어의 유혹에 구미가 당기는 일행들. 시장기가 가시기도 전에 포장마차에 둘러앉는다. 연신 절벽에 처얼썩 처얼썩 부딪치며 부서지는 강물을 술잔에 담아 마신다. 술과 분위기에 취한 일행들.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서해안을 돌아 나오는 중이다.
엷은 석양햇살에 반짝이며 출렁이는 바다, 하늘과 맞닿아 수평을 이룬 끝이 보이지 않은 바다. 저 바다 끝 너머엔 우리가 알지 못한 무수한 이야기가 있을법하다. 오늘 하루의 너무나 짧기만 한 여행길에 무엇을 그리 많이 보고 느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묵은 가슴을 풀어헤친 두 팔 벌린 어머니의 품처럼 넉넉한 바다가 있는 곳. 이곳이 내 고향 이란다.
마지막 정열을 온 몸으로 쏫아 부으며 바다를 붉게 물들이는 석양 햇살은 이제 나그네가 되어 돌아가는 여행객의 가슴에도 붉게 붉게 물들인다.
첫댓글 옛날에 먹던 풍천장어 아직도 있으려나. 갯벌에서 잡는다는 풍천장어가 그리도 맛이 있었는데.....장어는 암수의 사랑만으로는 실뱀장어가 탄생하지 않는다. 오직 바다물과 강물이 만나는 지점의 특수한 온도에서만 실뱀장어가 탄생하는 신기한 동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암수가 사는 양식장에서는 10년이 지나도 실뱀장어가 탄생하지 않으니. 실뱀장어 탄생 비법만 안다면 돈을 벌 수 있을텐데. 지금부터 그거나 연구해 볼까요? 여행 잘하고 돌아갑니다. 새해에는 자주 뵐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마흔이 넘도록 태어난 고향을 한번도 못 가봤다구요? 철조망이 가로막은 북한 땅도 아닌데...미당생가는 옛집이 그대로 보존 되어 있고 인근에 있는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미당 기념관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시 짬내어 가족들과 한번 다녀오시지요. 인근에 인촌 김성수씨 생가도 있고, 청보리 밭 공원도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늦었지만 고향을 찾은 보람있었군요. 선운사 동백나무도 보고 풍천장어도 맛보면서 서해바다 갯벌체험까지... . 오랜 친구들과 꽉 찬하루 여행이 눈으로 보는 것처럼 잘 그려졌습니다. 그런데 제목을 그냥 '여행길'보다 고향냄새나는 이름 같은 것은 어떨까요?
잠깐! 선운사에 가셔서 동백나무만 보고 오셨어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셨네요. 선운사 입구 왼쪽 절벽에 보면 '송악'이라는, 천년기념물 367호로 지정된, 나무가 있어요. 늘푸른 덩굴 식물인데 절벽을 타고 오르며 줄기와 잎이 무성합니다. 다음에 가실 때는 꼭 보고 오세요.
윤영샘! 아름다운 고장 고창을 댕겨오셨군요. 글감도 하나 물어오시고.... 고창 선운사 동백꽃, 고창 복분자 술, 인근의 채석강이 유명하지요. 인근에 곰소의 젓갈시장도 유명하던데...... 한번 가보고 싶네요.
가을엔 꽃무릇이 화사하게 객을 반기기도 합니다. 예전에 보았던 '선운사 동구 시비'도 여전히 그자리에 잘 있겠지요 ? "....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 선생은 한 때 친일행적 및 군사정권 예찬 등으로 구설에 오르기도 했었지요. 그래도 미당선생의 문학은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