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휴가를
이 한 재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시간을 1년이라 하고, 그 1년을 365일로, 하루를 24시간으로, 또 한 시간을 60분으로 정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우리 인생은 자기가 만든 바로 그 시간의 제약(制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기상(起床) 출퇴근 등 하루의 생활은 물론 삶의 전 과정이 시간에 쫓기며 그 테두리 안에 갇혀 살고 있다. 왜 그럴까? 어떻게 해야 이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름대로 해답을 찾아 보려고 발리로 가는 딸네의 휴가 여행에 참여했다. 사위의 권고에 못이기는 척하며---.
가루다 인도네시아의 여객기가 발리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7시30분으로 저녁 어스름 무렵이었다. 공항을 나와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예약된 호텔을 찾았을 때는 주위가 완전히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이 때부터 4박 5일간의 휴가인지, ‘아기 보는 일’의 연장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저녁에 그들의 속셈이 들통났다. 산책을 나갔다 온다며 손자를 맡기고 나간 딸과 사위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시간이 늦어지자 엄마가 보고 싶다고 칭얼대는 손자와 함께 두 번이나 로비로 내려가 보았다. ‘혹시 길을 잃지는 않았을까?’걱정하는 손자를 달래주지만, 걱정도 전염되는 것 같다.
머리 위로 유난히 밝은 별 몇 개가 십자(十字)모양으로 떠 있으니 십자성(十字星)인 모양이다. 십자성 아래서 엄마를 기다리던 손자가 잠들고도 한참을 더 지나 12시가 다되어 돌아온 딸네를 꾸짖자, “미안해요 아빠! 시간이 이렇게 된 줄을 몰랐어요.”하며 씩 웃는다. 휴가 탓인지 아니면 열대의 기후 탓인지 그들은 벌써 시간의 제약(制約)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창 밖이 환하여 커튼을 여니 텃밭의 바나나 잎새 위로 굴러다니는 햇살이 무척 한가롭다. 요람을 흔드는 듯 잎새를 건드리는 바람도, 온종일 같은 곳에 떠 있는 구름도, 또 그 아래 자리잡은 느티나무 그늘도 한가롭기만 하다. 꼬리를 흔들어 파리를 쫓는 소도 마찬가지다. 집에서라면 손자 데려다가 밥 먹여, 옷 입혀 유치원에 보내는 등 한창 바쁜 시간인데, 이곳에서는 그 모두에서 해방된 탓인지 내 마음도 느긋하다. 언제 일어났는지 손자녀석은 제 아빠랑 엄마랑 수영장에서 놀고 있다. 참으로 평화로운 풍경이고 참으로 한가한 풍경이다. 사람은 물론 동물도 식물도 다 한가로운 것은 이곳이 열대지방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모두가 시간이 주는 제약을 벗어난 탓일까?
발리는 인도네시아의 쟈바 곁에 있는 작은 섬이지만 면적은 제주도의 3배가 넘고 인구도 300만을 넘는다. 열대지방이라 기온은 높지만 바다 바람이 있어 그렇게 덥지 않았다. 5월부터 9월까지가 건기(乾期)이고 10월부터 다음 해 4월까지가 우기(雨期)라고 한다. 또 발리에는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이 없다. 관광객은 택시를 이용하고 주민들은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화폐단위는 루피아로 대 원화 환율은 대략 10:1이니, 우리 돈 1천원은 1만 루피아에 해당된다. 물가(物價)도 아주 싸서 우리나라의 1/3정도다. 며칠 남지 않은 7월 초순에 대통령 선거가 있다는데, 출마자들의 플래카드만 눈에 뜨일 뿐 너무나 조용하다. 이것도 열대 지방의 여유 덕분인가? 아니면 시간의 제약을 느끼지 못하는 탓일까?
발리의 첫날은 허리가 아플 때까지 침대에서 뒹굴다가, 호텔에서 제공되는 차편으로 가까운 사누르 해변으로 갔다. 늘씬한 몸매의 귀공녀 같은 야자수 그늘에 누어 끝없이 푸른 바다를 보았다. 상념이 물결을 타고 지평선을 넘고 있다. 잔잔한 파도와 하얀 모래가 밀고 당기며 장난을 치자 손자녀석도 끼어들어 같이 어울린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온종일 자유 시간이지만 스스로 포기하고 가이드의 도움을 받아 몇 군데 관광 명소를 둘러보았다. 처음 찾은 곳은 푸푸탄 박물관. 이곳에선 이 나라의 슬픈 역사를 보았다. 평화롭게 살던 원주민이 침략자의 총에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과 350년의 긴 세월을 식민지로 굴욕을 당하며 살던 모습이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다. 우리와 똑 같은 일을 겪었던 그들의 과거와 함께 지금도 뭉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생각나 마음이 울적해 진다.
가루다 공원에선 그들의 종교를 엿볼 수 있었다. 가이드에 따르면 가루다는 힌두교의 비슈누 신(神)이 타고 다니는 새로, 용을 잡아먹고 산다고 한다. 그 새를 타고 있는 신상(神像)을 만드는 중인데 완성되면 높이가 150m가 넘는 세계 최대의 신상이 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영화 ‘빠삐용’의 촬영지라는 울루와뚜 절벽 사원에서 인도양의 거친 파도와 싸우고 있는 절벽을 보았다.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데도 묵묵히 자기 할 일을 다하고 있다. 사원 여기저기에서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과자나 바나나를 받아 먹는 원숭이들, 이들의 삶은 또 어떤가? 시간도 모르고 속도도 모르고 경쟁도 없는 것 같다.
발리의 5일은 이와 같이 그 어떤 시간의 제약이나 행동의 구속이 없는 완전한 자유의 생활이었다. 알람도 없고 전화 벨도 없고 세상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이나 TV도 없으니 당연한 것일까? 나뿐 아니라 이곳의 원주민도 그렇고 동식물도 다 그렇다. 심지어 바람이나 햇볕까지도 마찬가지다. 정말 휴가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삶도 이래야 될 것만 같다.
성경에 의하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반드시 죽게’ 되는 벌을 받았다. 아담이 비록 930년이란 긴 세월을 살았지만 결국은 죽었다. 이처럼 사람이 자기 생명의 유한(有限)함을 깨닫고부터 속도의 중요성과 함께 효율을 따지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때부터 늘 시간에 쫓기게 된 것이 아닐까?
젊은 날의 내 삶도 시간과의 다툼 속에서 휴가도 휴일도 없이 보냈고, 나이 들어서도 늘 기한에 쫓기며 살아왔다. 그래도 퇴직 후에는 그러지 않으리라 생각했으나 손자 녀석은 매일 아침 나의 기상(起床)을 재촉하고, 교회의 종소리는 내게 일주일이 흘러 갔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이처럼 지금도 내 삶은 시간의 굴레 속에서 쫓기듯이 살고 있다. 본래 생각했던 퇴직후의 삶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바쁘지도 쫓기지도 않는 여유만만한 삶,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는 삶을 기대했다. 시간도 아랑곳없이, 속도도 무시하며, 경쟁도 없는 그런 삶을 꿈꾸었는데----.
그러나 역시 꿈은 현실과는 달랐다.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난 삶, 발리에서 5일은 정말 행복한 날들이었지만 그 정도가 한계였다. 자유로운 삶이라고 해서 매일을 빈둥거리며 산다는 것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이래서 헨리 포드도 “휴가 없는 삶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이지만, 일 없는 삶은 엔진 없는 자동차다”라고 말했던가. 또 그 시간의 제약이란 것도 나 스스로의 생각일 뿐, 나를 강제하는 어떤 물리적이거나 심리적인 금제(禁制)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게으르고, 연약한 내 마음이 만든 것이었다. 하루살이는 그 하루뿐인 삶을 춤추며 보내고, 매미는 이 땅에서 사는 7일을 오직 노래하며 보내는 것처럼 나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제약이라 생각지 말고 기쁘게 즐겁게 보내면 될 것이다.
이곳 발리에서 5일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면서 가벼운 발길, 기쁜 마음으로 되돌아 간다. 사랑스런 손자와 함께하는 그 시간의 제약 속으로----.
첫댓글 "발리의 5일은 이와 같이 그 어떤 시간의 제약이나 행동의 구속이 없는 완전한 자유의 생활이었다." --그런데 돌아와 쓰신 작품이 말미에 말씀하신대로 곧장 그 제약의 표현들입니다. 글 곳곳에 숫자와 수치가 많이 나와있네요. 365일, 24시간, 60분, 1/3, 10:1, 300년, 150m, 930년, 1만루피...... 하루살이와 매미를 참으로 낙관적으로 보셨네요. "손자를 맡기고 나간 딸과 사위가 밤이 늦도록..." 제가 우리아이들 내려올때마다 늘 당하는(?) 일이랍니다. ㅎㅎ~ 잘 읽었습니다.
사실 '자앙 노는 사람'에게는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의 구분이 없어요. 그러다 보면 모든게 다 제약으로 느껴져, 이런 불평도 합니다. 그리고 노는 것도 시간 계획을 세워 그 안에서 놀아야지 무턱대고 놀아보니 그것이 더 힘듭니다. 쓸 때는 몰랐는데 숫자가 너무 많군요.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휴가와 일! 브레이크와 엔진~!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나도 가보고 싶은 발리....
젊었을 때나, 해양스포츠를 좋아하시는 분 외에는 권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국내에도 4~5일을 조용히 보낼 곳은 많습니다.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멋진 여행이었겠습니다. 근데, 사모님은 안가셨나용?ㅋㅋ
혼자 따라 갔다면 멋진 여행이었겠지만 그럴리가 있나요. 바늘이 가는데 실이 따라오지 않을리 없지요. 사실 그 때문에 발리마저도 제약 속의 삶이 되었습니다.
알라스카 앵카리지에서 뉴욕으로 가는 항로는 카나다 북쪽지대의 넓은 평원을 지나갑니다. 푸른 숲, 아름다운 호수, 맑은 공기가 있는데도 사람이 살지않는 그런곳, 내가 죽었다 또 이승에서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저런 곳에서 골치아픈 채면도, 미적분도, 모르는 그냥 원시 생활을 하였으면 했던때가 있었습니다. 시간의 구속에 얽혀서 사는 현대인들, 李 作家님 글에 공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미적분 골치아프죠. 그러나 인간사에 비하면 그래도 쉽습니다. 공감하신다는 말씀에 힘을 얻고 앞으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휴가도 일상의 연속이라고 하죠? 그 귀한 시간을 손자와 함께 하였으니.... 그래도 부분부분 행복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아마도 시간의 제약을 느끼셨다면 아쉬움 때문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