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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시, 생동감 있는 시에 대한 열망
-이시영 대담
1.
이시영 시인하면 많은 독자들이 그의 시「정님이」나「후꾸도」를 떠올릴 것이다. 70년대 중반에 발표돼 한국시단의 주류를 이뤘던 민중시의 진로 개척에 중요한 몫을 담당한, 서사가 있는 이들 이야기 시는 앞 세대의 이용악의 「낡은 집」과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흰 바람벽 속으로」에 젖줄을 잇대고 있으며 70년대 이후 세대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시이다.
실제로 식모살이 하다가 야반도주해 용산역전의 윤락녀로 변한 정님이와 머슴이었던 후꾸도에 대한 상징을 통해 70년대 당시 산업화로 인해 해체되기 시작한 농촌현실을 선명하게 그려냈던 이 작품은 이시영 자신뿐 아니라 한국시사에서도 대표작으로 꼽히며 또한 많은 후배시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나의 경우도 이에 해당된다.
문학평론가 염무웅 선생이 내 두 번째 시집 『기차소리를 듣고 싶다』의 해설을 쓰면서 내 시가 일정 부분 이시영의 영향 아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시영이 내 시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을 상기하니 새삼 나와 이시영과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우선 이시영은 현재까지 자신의 유일한 산문집『곧 수풀은 베어지리라』(한양출판, 1995) <작가의 말>에서 "난생 처음 내는 이 산문집은 존경하는 스승이자 '형님'인 염무웅 선생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서이다. 세상에 나와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헤어졌지만 나는 그에게서처럼 그토록 지속적이고 격의없는 우정과 신뢰를 받아본 적이 없다. 여기에 감사의 뜻을 적는다."라고 쓰고 있는 염무웅 선생을 나 역시 20대 초반에 대구에서 만나 40대 후반이 넘은 반세기 동안 가까이서 모시면서, 못난 자식이 늙은 부모에게 보살핌을 받듯 여러가지 폐를 끼치면서 성가시게 굴고 있다. 염 선생님께 이시영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비교적 자주 들어서 평소에도 가깝게 느끼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를 문단에 등단하도록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이 두 사람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하면서 당시 대구에서 활동하던 <예각>문학동인(이 동인이 순수주의 일색이던 대구문단에 처음으로 현실 참여문학의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문학평론가 민현기 교수는 밝히고 있다. 민현기「대구지역 문학운동의 역사적 성격과 그 활성화 방법연구」『어문학 80집』2003. 275쪽) 작품집을 발간해 문단 선후배에게 보냈다. 이 동인지에 실린 작품을 보고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나는 당시 11사단 유격훈련 도중 부상당해 군부대에 입원해 있었는데 청탁서를 받고 감격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마 내 일생 중 손 꼽을 수 있는 가장 기뻤던 때 가운데 하나였다. 그게 84년 1월에 나온『마침내 시인이여』라는 시 무크지이고 나는 그 지면을 통해 문단에 공식적으로 얼굴을 내민 셈이다. 이 무크지의 편자가 바로 신경림과 이시영 이었으니 실제로 이시영이 나를 발굴한 셈이다.
나는 언젠가 어떤 자리에서 이시영 시인에게 농담 삼아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는데 은혜를 갚아야 되겠다고 했더니 '은혜는 무슨' 하면서 대수롭잖게 받아넘기던 기억이 난다. 내가 문단활동을 하면서 이시영 시인에 관해 들었던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이 냉정한 사람이라는 인물평이었다. 그에 관한 이런 인물평은 그의 첫 산문집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뒷 표사 글에 대학 동기인 소설가 김민숙도 지적하고 있다. 전화 받는 그의 딱딱한 태도 때문에 되도록 빨리 용건을 말하고 전화를 끊어야 될 것같지만, 그 밋밋하고 투박한 표정 뒤에는 '말랑한 다정함'이 숨겨져 있다고 쓰고 있는데 사실 나는 그의 다정함을 느낄 만큼 자주 만나거나 가깝게 지낸 적은 없다. 어떻게 보면 그는 나에게 문단의 스승이자 선배요, 대구와 서울로 떨어져 있어 만날 수 있는 기회도 많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역시 용건이 없이는 전화하지 않는 비사교적 성격 때문에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다.
사람들이 그를 냉정하다고 평해도 나는 그것을 판단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나는 그를 냉정하게 느낀 적은 없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다. 내가 87년 초에 첫시집『푸른별』을 내고 문단 여기저기서 서평을 받을 때였다. 신경림 선생이 조선일보인가 어떤 신문지상 좌담에서 내 시를 칭찬한 적이 있다. 마침 서울 작가회의 사무실에 회의 차 들렀더니 그게 화제였는데 이시영이 내게 오더니 "(신 선생이 칭찬하는 것은)정실비평이니 너무 좋아하지 마라"고 정색을 해서 말한 적이 있다. 90년대 중반 어떤 자리에서는 한창 유명세를 날리는 한 시인의 처신을 예로 들면서 "용락이는 유명해지지 않은 게 천만 다행 이라구"라고 짧게 한 마디 하기도 했다.
그의 짧은 시를 모은『무늬』(문학과지성사, 1994)에 대해『녹색평론』지면에다 내가 그 시집에 대해 비판적인 서평을 썼더니 그걸 읽었는지 얼마 뒤 나를 보고는 "녹색평론을 봤더니 용락이가 나를 깠어" 툭 던지고 지나갔다.
지난해(2003년) 여름 세계시인대회 교류 차 몽골에 갔을 때 첫날밤 룸메이트로 그가 나를 지목했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 "용락이 고향인 의성의 낡은 장여관에 온 것같다"고 한 마디 한 뒤 별 말이 없길래 내가 무료함을 깨려고 내년 총선에 출마를 생각하고 있다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더니 대뜸 "김용락 같은 인격이 정치하겠어, (돈을) 오른 손으로 받고 왼 손으로 받지 않았다고 거짓말해야 하는데 그게 되겠어"라고 하더니 내가 낙선하고 난 뒤 올 가을 서울에서 만났더니 "문학을 더하라는 거겠지"라고 위로인지 조크인지 지나가는 소리를 했다.
이밖에도 나와 관련한 이시영의 어록이 더 있지만 여기서 계속하지는 않겠다.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는 한 마디만 더 언급하고 넘어가자. 산문집 "곧 수풀은..." 작가의 말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나친 야망을 가진 (혹은 과시하는) 사람들을 전적으로 경계하는 편이지만 한편으론 내게 그러한 것이 너무 없는 점을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한다" 아울러 그의 네 번째 시집 『이슬 맺힌 노래』(들꽃세상, 1991)에 발문을 쓴 그의 아내 이경희 씨는 "그는 순정한 사람이며, 가슴이 뜨겁습니다. 미적지근한 사랑을 할 줄 모르며, 적당 알맞은 관계를 잘 맺지 못합니다"고 그를 평하고 있는데 이 말 역시 인간 이시영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단서가 될 듯하다.
그리고 이시영은 첫 시집『만월』'후기'에서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다소의 겸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시관을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이다.
"설익은 관념의 토로가 시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는가 하면, 낯뜨거운 말재주들이 곳곳에 버티고 있고, 가슴에 이르지 못한 분노들이 다스려지지 않은 채 튀어나오기도 했다. 이 모두가 우리들의 절실한 체험에서 유리되어 있다는 점에서나, 한 편의 시로서 형상화를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나 나의 시는 아직도 실천의 뿌리를 내릴만한 든든한 실체를 못 찾고 있는 것일시 분명하다"
이 진술을 근거로 한다면 이시영은 '체험의 절실성'과 '시적 형상화'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흔히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정님이」나「후꾸도」는 이러한 자신의 시론에 부합하는 시임에 틀림없다. 이제는 우리 시사에서 고전의 반열에 오른「정님이」를 읽어보자.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정님이 누나가 아닐지 몰라/이마에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학교를 못 다녔으면서/운동회 때만 되면 나 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를 보면/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콩깍지를 털어주며 맛있니 맛있니/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슬프지 않다고 잛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어느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을 캐러 갔다가/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잉웃 처녀들에게 업혀와서도/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왜 가버렸는지 몰라/목화를 따고 물래를 잦고/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정성껏 삼을 삼더니/동지섣달 긴긴 밤을 베틀에 고개 숙여/달그당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통금에 쫓기던 내 팔을 붙잡다/날랜 발, 밤거리로 살아진 여인
-「정님이」전문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바처럼 70년대 산업화 그늘 아래 해체된 농촌공동체와 산업노동자에서 다시 유곽으로 흘러 들어간 당시 이 땅의 딸들의 운명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시이다. 철저히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형상화도 거의 완벽하게 이뤄져 있다. 비극적 서정성과 인생에 대한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게 해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인간에 대한 따듯함이 배어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시영을 70년대 중요한 시인으로 자리 매김하는 데 역할을 한 게 사실이다.
평자들과 독지들은 이시영의 시 가운데 앞서 언급한「정님이」나「후꾸도」같은 이야기 시를 주목하고 나도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만, 그러나 나는 그의 시 가운데「이름」이라는 시를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첫시집에 실린 이 작품에서 나는 민주주의나 인간해방에 대한 어떤 준열한 선언이나 정언성을 떠올린다.
밤이 깊어갈수록
우리는 누군가를 불러야 한다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
잠시라도 잊었을 때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뜨거운 소리를 듣는다
이 밤이 길어갈수록
우리는 누구에게로 가야 한다
우리가 가기를 멈췄을 때
혹은 가기를 포기했을 때
칼자욱을 딛고서 오는 그이의
아픈 발소리를 듣는다
-「이름」부분
이 시를 읽으며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채찍 아래서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듣게 되다는 주장은 사실 섬뜩한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인간해방)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결국 독재와 억압의 채찍 아래서 신음해야 한다는 이 시를 70년대 후반에 읽으면서 어떤 두려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역사에 대해 좀더 치열하게 각성해야한다는 각오를 새롭게 일깨워가던 기억도 있다. 말하자면 70년 대적 시대정신이 잘 구현된 작품이다.
「정님이」「후꾸도」「이름」같은 시는 말 그대로 민중의 삶을 형상화한 민중시인 것이다. 이시영은 한 글에서 "진정한 민중문학은 무엇인가. 자기 땅의 민중들의 염원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문학일 것이다"(「진정한 민중문학」『곧 수풀은 베어지리라』91쪽)고 주장한 바 있는데 바로 이 땅 민중들의 염원에 응답하는 시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이와 관련하여 그의 네 번째 시집 『이슬 맺힌 노래』에는 의미심장한 시가 한 편 나온다.
당신의 글에선 창조적 소수의 백랍 같은 얼굴이 보인다
당신의 논리는 齒車처럼 정확하고 빈틈없고
무엇보다 이론적 정합성이 빛나지만
그리고 행간 마다에선 억압의 세계를 깨뜨리고
새 세상을 열려는 전략의 푸른 불꽃이 튀지만
당신의 언어는 대중의 바다에서 건져올린
우리의 언어가 아니다
그리고 당신의 역사 운행에는
오늘의 전선 속에 흩어진 동지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리하여 당신의 첨예한 논리는 이론의 철옹성 속에서 견고하지만
실천의 영역에서는 인간적 뿌리가 없는
너무도 허약한 자족의 다리,
역사는 당신과 같은 소수 정예가 콤파스로 밀고 나가는
싸늘한 죽은 무덤이 아니다
당신들이 전위에서 처참히 패배했을 때
대중들은 그 시체를 딛고 서서
역사의 산 무덤을 와락 젖히리라
거기 살아있는 뜨거운 가슴들이
벌떼같이 싱싱한 꽃을 피워내고
-「이 꽃을 보라」전문
이 시는 이시영 전체 시편가운데서도 독특한 위상을 차치하고 있다. 형상화를 중요시하는 이시영의 시법에 비해 이 시는 주장을 직설적으로 펴고 있다. 일종의 이시영의 시론이다. "논리는 齒車처럼 정확하고 빈틈없고/무엇보다 이론의 정합성이 빛나지만" "대중의 바다에서 건져올린/우리의 언어가 아니다" "동지들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점에서 "너무도 허약한 자족의 다리"일 뿐이라는 이 주장은 이시영의 문학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 짐작케 해준다. 창조적 소수의 빛나는 이론적 전위보다는 동지들에 대한 따듯한 배려가 있는 우리(민중)의 언어가 결국은 "역사의 산무덤을 와락 열어 젖히"고 "벌떼같이 싱싱한 꽃을 피워"낸다는 것이다. 엘리트주의보다는 말그대로 자기 땅의 민중의 입장에 서서 민중의 염원에 응답하는 문학에 대한 시적 옹호인 셈이다.
이시영은 첫시집 『만월』을 낸지 근 10년 만에 두 번째 시집『바람 속으로』(창작과비평사, 1986)를 펴낸다. 이 시집은 '발문'을 쓴 염무웅이 잘 지적하고 있듯이 첫시집의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염무웅은 이 시집이 기본적으로는 첫시집의 연장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이와는 달리 '단형 서정시'에 대한 이시영의 관심을 날카롭게 지적해 낸다.
실제로 이시영은 첫시집에서부터 짧은시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드러낸다. 첫시집 『만월』에도 짧은 시가 여러 편 나온다. 그러던 것이 네 번째 시집 『이슬 맺힌 노래』(들꽃세상, 1991) 다섯 번째 시집『무늬』(문학과지성사, 1994) 여섯 번째 시집『사이』(창작과비평사, 1996) 『조용한 푸른 하늘』(솔, 1997)로 이어지다가 최근 들어 『은빛호각』(창비, 2004)『바다호수』(문학동네, 2004)에 이르면 가히 단형시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다.
이렇게 볼 때 이시영의 짧은 시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있어온 것이다. 다음 글을 보자
"「정님이」같은 시는 그러므로, 70년대 사회변동의 한 흐름을 담고 있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참다운 민중문학으로서의 필요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볼 수 없다. 다분히 복고적인데 기울어져 있으며 무엇보다도 특정한 시기의 자본에 의한 농업·농민층의 분해라는 것을 한국 자본주의의 논리가 관철되는 역사적인 필연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야기 시' 못지않게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짧은 시'에 대한 것이었다. 이야기 시 자체가 갖고있는 양식상의 한계-일정한 스토리를 담아야 한다거나 단편소설이 아니면서도 인물의 전형성을 확보해야 한다는-에서도 그랬지만 자기 스타일을 파괴해보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기 때문이다. 말을 서술하는 시가 아니라 함묵하는 시, 서늘한 울림을 주는 시를 써 보고 싶었다. 옛 한시의 교양이나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이 작용했는지 모른다"(「이야기 시와 짧은 시」『곧 수풀은 베어지리라』131쪽)
이시영이 왜 짧은 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가 어느 정도 해명된 셈이다. 실제로 그는 긴 이야기 시 못지 않게 짧은시에서도 일정한 성취를 이루고 있다.
저 강이 없었다면
누가 이 산에 고인 핏자국을 씻겨주었으리
저 강의 쉬임없는 흐름이 없었다면
누가 이 산야에 스러진 수만 恩讐의 넋들을 잠재워주었으리
오 어머니인 섬진강이여
새벽녘 주검 위에 주검 위에 더 큰 형제봉을 낳고 물러서는
거친 물굽이의 흰 落下여
-「지리산」전문(『이슬 맺힌 노래』)
역사 내게 마주 오라 두려워 않겠다
옛 사랑 이리 마주 오라
돌다리 위에서 너 애써 피하지 않겠다
역사라면 숨가쁜 역사 안고
옛 사랑이라면 거치른 사랑 안고 돌다리 아래로 떨어져
몇날 며칠밤을 내 살과 함께 지새운 뒤
아침이 오면 내 비로소 거센 여울 위에
역사의 사랑의 핏빛 스민 새하얀 꽃 한송이 피우리
-「대결」전문(『이슬 맺힌 노래』)
네 번째 시집에 실린 짧은시이다. 그러나 형태적으로도 이 즈음 시들은 극도로 짧지 않다. 이후 짧은시로만 시집 전체가 구성된『무늬』나『사이』에 비하면 시의 길이가 긴 시와 짧은 시의 중간 형태를 취하고 있고 내용도 역사적인 맥락에 잇대어 있다.
인용한 두 편의 시는 지리산의 비극성과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겠다는 대결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아래 인용한 시는 이 두 편과는 조금 다르다. 이 시영의 시가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성보다는 자연에 대한 관심과 인생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더 큰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무늬』에 해설을 쓴 평론가 김주연은 이시영 자연시의 "힘찬 기운"에 대해 지적하고 있지만, 반대로 나는 이 시집에 드러나는 자연이 "지나치게 대상적이고 관념적"(「생명의 교감과 시적 진정성」『녹색평론』1994. 9-10월호)이라고 비판 한 바 있다. 실제로 그런지 작품을 보자
오늘 부는 솔바람 소리엔
어릴 적 마을 서쪽 응달진 애장터를 돌아나오던,
거기 묻힌 내 다섯 살짜리 동생의 뺨 붉은 숨결 소리도 묻어 있어요
-「솔바람 소리」전문 (『무늬』)
산기슭 양지녘에 주춤주춤 물러앉아 저무는 마을
순한 산짐승 같다
-「연기 속에」(『무늬』)
지구의 한 끝에서 한 끝으로
참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내려와 앉는다
작은 눈을 들어 사방을 불안스레 돌아보는 것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영혼이다
-「밝은 날」전문(『무늬』)
미루나무 연초록 잎사귀가 뿜어내는
저 겨울의 강렬한 향기
-「봄 들에서」전문(『무늬』)
몸을 구부려
아이를 가슴에 꼭 품어 안고 잠든 어미의 얼굴에서
산짐승의 강한 겨울을 읽는다
-「忍冬」전문(『무늬』)
오늘밤에도 나뭇잎들은 지상에서 오래 나부낀다
삶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죽음은?
바람 속에서 저처럼 오래 나부끼다가
영원 속으로 짧게 스러지는 것?
-「새벽 두시」전문(『사이』)
고통을 통과하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
오늘밤에도 강물 잔잔히 굽어 흐르고
별들은 머나먼 星河로 가 반짝인다
-「시월」전문(『사이』)
에미 목에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잠든 새기의 팔둑에
아, 파란 정맥이 돋아 있다
-「새벽」전문 (『사이』)
장마 지난 뒤 맑은 하늘엔 흰 구름떼 드높이 나니
빨랫줄 위의 고추잠자리떼 나래를 활짝 펴겠다
-「가을의 기운」전문 (『사이』)
『무늬』에 실린 시 가운데「솔바람 소리」「忍冬」과『사이』에 실린 시「새벽」은 가족에 대한 애틋한 정서가 녹아 있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고,「밝은 날」과「가을의 기운」은 참새와 고추잠자리라는 매개물을 통해 시적 공간을 지구와 맑은 하늘로까지 확대시킨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억압과 쟁투가 상존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정서적 해방감을 고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적 변모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일탈이 시집『사이』에 실린「새벽 두시」와「시월」에 이르면 시적 공간이 삶과 죽음, 성하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 우주적인 상상력, 존재에 대한 관심은 이전에 이시영이 추구해 왔던 시와는 다르다.
앞서 언급 한 바도 있지만 시인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초기에 이시영은 체험과 형상화, 민중 정서에 대한 응답을 자신의 시법으로 삼아왔다. 그러던 것이 이 무렵에 이르면 형식과 내용 면에서 다 변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자기 스타일을 파괴하고 말의 서술이 아닌 함묵의 시를 써 보고 싶었다"(「이야기 시와 짧은시」)는 주장이 실제로 시로 현재화 된 것이다. 그러면 시인에게 왜 이렇게 변화가 일어났을까? 알려진 바처럼 90년대 초반은 세계적으로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고 국내 정치에서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문학판에서도 기존의 민중문학, 민족문학에 대한 대중추수적인 전향선언이 일제히 일어났다. 이시영의 경우 기존 자신의 이야기에 느겼던 형식과 내용상의 어떤 답답함과 현실에서 정치적 변화, 즉 시인이 처한 내외적인 변화가 시인의 마음을 동시에 추동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일찍부터 짧은시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무렵 짧은시에 대한 관심이 전면적으로 나타난 것은 현실변화에 조응해 새로운 문학적 전망을 모색하는 일종의 모색기였던 것이다.
이런 판단을 가능케 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조용한 푸른 하늘』에 실린 몇몇 시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상품, 상품」「홀리데이 인 서울」「에스컬레이트에서」「자본주의」와같은 시는 홈쇼핑, 마일리지 적용, 광고전단지 등으로 상징되고 세계가 모두 상품으로만 평가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이다. 이 시들은 전통성에 기반하고 있는 민중서사와 맑은 서정으로 생의 본질을 탐구하던 이시영의 기존 시의 내용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물론 편 수가 많지는 않지만 이 무렵 이시영의 시적 모색이 어떤 궤적을 그리고 있는 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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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상품」부분(『조용한 푸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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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데이 인 서울」 부분(『조용한 푸른 하늘』)
티비 홈쇼핑과 광고전단지 내용을 별다른 시적 수사를 붙이지 않고 그대로 옮겨 놓았다. 시인 자신의 감정을 배제함으로써 차가운 자본주의 문화를 더욱 차갑게 느껴지도록 함으로써 시적으로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울러 첨언하자면 이시영이 짧은시를 쓸 때는 아무래도 시집을 출간하는 기간이 짧다. 첫시집에서 두 번째 시집이 10년 걸린 데 비하면 짧은 시를 쓸 때는 시집들간의 간격이 3년에서 1년 사이다. 짧은시는 아무래도 쓰기가 쉬웠거나, 아니면 충분한 사색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쉽게 쓴 게 아닐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쉽게, 빨리 썼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태작이란 말은 아니지만.
어쨌건 민중적 내용과 이야기 형식이라는 이시영의 시적 브랜드가 90년대 초반 우주적 서정과 짧은시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올해 『은빛 호각』과『바다 호수』를 펴내면서 다시 일정하게 변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의 형식은 여전히 짧은시를 기본으로 하는 산문시를 애호하되 시의 내용은 다시 민중과 역사라는 광활한 무대로 되돌아 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원식의 "그가 걸어온 고통의 역사 속에 보석처럼 박힌 기억을 순정한 언어로 호출한 그의 산문시는 시와 산문의 스파크를 보여준다" 는 표사는 수긍할 만하다.
『은빛 호각』은 80년대 민중현실에 대한 거대한 벽화이다. 시인의 개인적 체험이 기본이 되어 있지만 그 체험이 개인적인 사적 공간이나 단순한 회상, 혹은 문단 뒷골목의 야담 정도에 머물지 않고 역사적 지평으로 확대됨으로써 시집 전체가 진정성을 얻고 있다. 이 진정성은 시집에 실린 각각의 시편들이 반어와 날카로운 해학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시집이 갖고있는 장점은 70-80년대의 어려운 시대를 횡단해온 동시대인에게 집단적인 추체험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문학적 계몽성뿐 아니라 역사에 대한 교훈을 획득하게 해 준다는 점이다. 문학의 영역이 허망한 수사적 기술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문학의 중요 미덕임이 틀림없다.
1980년 여름이었다. 계엄 검열을 받기 위해 잡지 대장(臺帳)을 들고 시청 안 너른 중앙홀로 가면 거기 느닷없이 울려 퍼지던 피아노 연주곡. 격무에 지친 검열단장이 둔중한 어깨로 내리치던 브람스의 긴 레퀴엠이었다.
-「레퀴엠」전문(『은빛 호각』)
1982년 6월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납본필증'없이 사전 배포하였다고 하여 이틀간 안기부 조사를 받은 뒤 풀려날 때였다. 퇴계로 뒤에서부터 트럭 하나가 우리 뒤를 따라붙더니 중앙청 문공부까지 따라 오는 게 아닌가. 수사관들과 함께 어느 국장 방으로 갔더니 백지를 내밀며 '재산포기각서'를 쓰라고 하였다. 그 트럭에는 시중 서점에서 압수한 1만여 권의 시집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원효로 경신제책에선 나와 수사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형과 함께 시집 1만 권이 분쇄되었는데 분쇄기를 직접 잡은 김상무의 엄지손가락 없는 오른 손이 마구 떨었다. 그리고 일 주일 후 김상무에게서 폐휴지값 5만8천 원이 나왔으니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
-「타는 목마름으로」전문(『바다 호수』)
80년대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간단치 않는 시대이지만 문학인들에게는 무엇보다 검열과 압수수색, 폐간의 시대였다. 인용한 두 편의 시도 이런 당시의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역사적 현장 바로 그때 바로 그 자리에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시인의 운명(?)은 어떻게 보면 불행이다. 그러나 그때의 체험을 멸실 시키지 않고 이렇게 절실한 시 한 편의 남길 수 있는 능력은 행복이다.
시인의 주관적 감정이나 가치판단을 철저히 배제한 채 마치 사진 찍듯이 정황만을 고스란히 점묘한 이 즉물성은 시적 효과를 배가시켜 준다.
2.
이시영은『은빛 호각』『바다 호수』, 두 권의 시집을 내고 현대불교문학상, 지훈문학상, 백석문학상을 잇따라 수상했다. 세속적으로 말해 상복이 터진 한 해였다. 그러나 그간 그가 성취해온 문학적 성과에 비하면 늦 상복인 것도 사실이다. 이즈음 이시영 시인을 직접 만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가을이 한창 익어가던 10월 어느날 나는 동대구역에서 서울행 KTX에 몸을 실었다.
지하철 영등포역에서 빠져나와 삼일회계빌딩 앞에서 잠시 기다리니까 그가 마중을 나왔다. 최근 근무하기 시작했다는 문학수첩 사무실로 향했다. 넓은 사무실은 책상만 두 개 달랑 놓여있는 검소하고 단정한 사무실이었다.
녹음기를 꺼내 작동준비를 마친 후 말머리를 덕담에서 시작했다. 작가출판사에서 '작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추천에서 『은빛 호각』이 1위를 했는데 소감이 어떠냐고 물었다.
"별 느낌 없어. 동업자들이 재미있게 읽었구나 하는 정도야"라고 간단히 답했다.
아무래도 이시영과 창비를 데어 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내가 처음 그를 안 것도 시인이자 창비 직원으로 이시영을 창작과 비평사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다.
김용락- 창비에는 몇 년 근무했어요?
이시영- 20년 근무했어. 창비에 근무한다는 것은 어떤 책무같은 걸 갖는 것이었어. 창비 자체가 무거웠는데 이젠 좀 가벼워져야지.
1978년 근무하던 학교를 그만두고 복간된 『학원』편집장으로 6개월, 이후 쌍용사보에서 1년을 근무한 뒤 80년 2월 창비에 입사해 2003년 3월 말까지, 그러니까 30대에서 50대까지를 창비에서 보냈지.
김용락- 왜 학교를 그만 두고 직장을 옮겼어요?
이시영-나는 본래 성격이 반체적인지 몰라도, 유신시절 제도교육이 갑갑했고 또 학교에서 군사교육을 시키는 그런 분위기가 싫어서 당시 신흥명문으로 이름을 날리던 서라벌고에서 사직했어.
김용락- 20여 년을 창비에서 근무했는데 혹시 자신의 문학이나 인생에 창비의 영향은 없습니까?
이시영-10년 동안 시를 쓰지 못했어. 76년에 첫 시집을 낸 후 86년에 두 번째 시집을 냈으니... 창비 시선을 편집했는데 에디터의 입장에서 수준 높은 작품을 선별하는 데 주력했는데 자신이 직접 시를 쓰는 것과 남의 작품을 읽는 것 사이에서 많이 갈등했어. 또 창비에 근무하면서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고 영향을 입기도 했지. 창비시절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지침을 형성한 시기였어. 74년부터는 자실(자유실천문인협의회) 활동을 했는데 자실과 창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어. 어떤 의미에서 창비라는 생산기지에서 전선으로 뛰어 든 격이었는데 당시 창비를 맡고 계시던 염 선생이 대구로 내려가면서 일종의 문단관리 담당자로 창비에 입사한 것이지. 편집장으로 입사해 많은 문학생산자를 만났어. 『창작과 비평』 80년 여름호에 김정환, 홍일선을 발굴했고, 창비 폐간 후 신작시집, 신작평론집을 통해 김용택 김영현 채광석 김사인 등을 발굴해 인격체로 형성시켰지.
김용락-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해 말 해주세요.
이시영-집안 이야기는 쓰지 말지.(참고로 이시영 산문집 『곧 수풀은 베어지리라』한양출판, 1995에는 그의 문학적 자전과 가족 관계를 알 수 있는 자세한 내용이 있다-필자)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하려는데 담임이 정헌조라는 대구 사람인데, 당시 광주일고에는 원서를 못써주겠으니 광주고를 가라고 하길래, 전주고에 응시했다가 낙방해 후기인 전주 영생고에 장학생으로 입학했지. 이기반 시인이 국어교사였는데 시를 쓴 분이야.
중 1 때는 축구선수로 도 대표였고 포지션은 윙이었지. 호적에는 식 자 돌림으로 忠植이었는데 시영으로 바꿨지.『학원』에 투고하면서 정호승 시인을 알았어. 대구 대륜고 정호승은 그때 이미 문사였어.『학원』에도 많이 투고했고 성균관대 백일장에 입상하기도하고, 고등학교 때『현대문학』을 읽었어.
서라벌예대를 입학했는데 서정주, 김동리, 박목월 등이 교수였고, 김종철 송기원은 신춘문예에 당선해서 입학했어. 내가 입학하니 오정희가 3학년이고, 이동하가 4학년 김형영이 4학년 등 현재 문단에 나온 사람이 20명이 넘어. 윤정모 이경자와는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지.
문창과는 4년제였는데 굉장했다구. 치열했지, 그 당시가 피크였어. 그 전해에 신춘문예를 석권했지. 지금 서울예전이라고 생각하면 돼 오정희, 이경자 우리 또래가 문단에 나온 게 20명이 넘는다고.
서정주 선생은 분위기 만드는 사람이고, 박목월은 또박또박 수업을 했지, 김구용 선생에게 고문진보를 배웠고 김현 선생에게도 배웠는데, 이형기에게도 배웠어. 김현에게 교양불어를 배웠는데 B학점을 주더라고. 교양학점을 2년 배웠는데 교양불어뿐 아니라 불문학도 배웠어, 김치수도 나왔어.
김용락-요즘 강의는 어디 나가세요?
이시영-중앙대 겸임교수로 나가고 있어. 대학 1년 선배인 감태준 시인이 학장이지. 서정주 선생이『동천』을 쓴 때가 53세 때인데 현재 내 나이가 55세야. 학교에서 1학년은 서정주 전집을 강독하고, 2학년은 백석 전집을 강독해. 서정주 선생은 새록새록 술을 많이 먹었어. 주로 500cc 잔에 배갈을 붓고 활명수를 태워 마셨지. 서정주는 학생들과 가깝게 지냈어. 서정주 집에 놀러 갔다가 고은씨에게 나를 소개해 줬는데 이후 자실 활동을 하면서 서정주는 멀어지고 고은과 가까워졌지. 2000년에 서정주 선생이 작고했을 때 고은 선생과 둘이 문상을 갔어.
김용락-문단에서 누구와 친하게 지내십니까?
이시영-염무웅과 송기원인데 염 선생은 가끔씩 만나고, 송기원과는 흉허물이 없는 사이야. 1970년에 김지하의「오적」을 읽고 충격을 받았어. 이런 시도 있구나 세계가 뒤흔들리는 느낌을 받았지. 그래서 당시 목죄 오는 현실을 써서『다리』지에 발표해달라고 이문구 선생에게 부탁했더니 이문구가 조태일을 소개 시켜주더라고. 조태일이 다시 염무웅을 소개해줘 1971년 창비 가을호에「부역」「오빠」등을 발표하게 되지.
김용락-언제 등단했어요?
이시영-1969년에 중앙일보에 시조가 당선되고, 『월간문학』에 시가 당선 됐어. 대학 2학년 때인데 그때는 당선되면 장학금을 주었지. 그래서 열심히 썼어.『월간문학』은 지금은 그저 그렇지만 당시 중요한 잡지였어. 『현대문학』과 맞수였지. 『현대문학』은 3회 추천제였는데 『월간문학』은 신인상 당선을 등단으로 쳐주었지.
김용락-시와 시조로 동시 등단했는데 왜 시조는 포기했어요?
이시영-시조는 아무래도 규격에 얽매여서 포기하게 되었어. 뒤에 짧은 시 쓸 때 시조 훈련이 영향을 끼친 것 같애.
김용락- 대학 재학 중 문학공부 한 것 이야기 좀 해주세요.
이시영-대학 다닐 때는 엘리엇, 미국의 형이상학파 등 외국시를 많이 읽었지. 불시도 읽고 영시도 읽었어. 특히 T.S엘리엇의「황무지」나「프로프록의 연가」는 외웠지. 젊은 시절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 물론 번역본이었지만 뒷날 상당한 자산이 된 것 같아. 이 시절 읽은 책들이 사유의 폭을 넓히는데도 도움이 되었지.
당시 서라벌예대는 컬리큐럼이 좋았어. 김동리는 고전을 많이 읽으라고 해서 고전을 많이 읽었지. 방학이 되면 읽어야할 고전 도서목록을 만들어 줘. 도스토옙스키, 스탕달 등 나중에 세계문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지. 김동리는 도스토옙스키를 최고로 쳤어. 삼중당 문고처럼 당시에는 <양문문고>를 많이 봤어. 그리고 콜린 윌슨의『아웃사이더』『들어라 양키들아』등도 젊을 때 읽었는데, 주로 문학작품을 많이 읽었지.
김용락-대표작이「정님이」「후꾸도」예요?
이시영-첫시집『만월』에 실린 「정님이」「후꾸도」등을 써서 『문학사상』주간이던 이어령에게 줬더니 안 싣더라고. 시가 아니라 산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야. 정님이 후꾸도 등은 내가 독특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용악의 「낡은 집」의 영향을 입었지. 정님이 후꾸도는 실제 인물이야. 74년 고려대대학원 국문과에 입학해 이용악 오장환 등 월북시인을 읽었는데, 대출목록을 보니 오탁번이 먼저 읽었더라고.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이용악 등 월북문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지. 백석은 못 봤고,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같은 작품은 내가 산 50년대 농촌서사야.
74년 11월 18일 자실 창립 일에 염무웅의 안내로 참여했다가 종로서에 잡혀갔는데, 이용악은 종로서에서 유명해. 최원식의 연구에 따르면 이용악은 남로당 서울 이화여고 책임자였다는 설이 있어.
김용락-영향 입은 선배문인은 누구예요?
이시영- 김수영과 서정주인데, 서정주는 좋아했지만 영향은 받지 않았고, 김수영 산문에 영향을 받았어. 시의식 특히 현대성에 많은 영향을 받았지. 바로 윗세대에는 이성부의 「우리들의 양식」「서울식 해녀」그리고 김지하의 「빈산」등에 영향을 받았어.
짧은시를 쓰게 된 것은 당대 시단에 대한 반발이지. 당시 민중서사가 주류였는데, 당대 민족문학의 주류인 민중서사시에 반발해 짧은시를 시도한 것이지. 내 내면의 흐름에도 변화가 왔어. 긴시의 호흡은 못 따라가고 세계를 순간의 시학으로 응축시키는 미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지. 『이슬 맺힌 노래』 『무늬』『조용한 푸른 하늘』이 세 권이 짧은 시인데, 이후에는 그것도 질려서 그만 두었지.
김용락-혹시 짧은시에는 선시(禪詩)의 영향이 있습니까?
이시영-선시 개념 없어, 선시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하이꾸와도 관계가 없어. 하이꾸는 싫더라구. 너무 의도가 드러나. 하이꾸를 뒤늦게 읽어 봤지만 흥미를 못 느꼈어. 시적 경의는 있지만 삶이 결여되어 있고, 삶의 응축이 없어.
김용락-본인의 시관(詩觀)이 있습니까?
이시영-어떤 시가 좋다면 너무 추상적인 말이 되겠지. 유종호 선생이 어디에선가 말한 "훌륭한 시는 제각기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이 있던데 공감이 가는 말이야. 첫째, 나는 언어조직이 생동감이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생각하고 둘째는 경험의 실감이 밑바탕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신뢰감이 없어. 가령 젊은 시인 손택수의 경우 경험(체험)의 실감이 있는 것같애.
최근에 낸 『은빛 호각』『바다 호수』 두 권 다 내 체험의 소산이야. 그리고 내 취향이라고 할 수 있어.
사과를 그린 게 아니라 묘사한 게 아니라 그것 자체로 살게 내버려두었다. 살아있는 예술, 그것자체로 밀어버려서 세잔느의 사과가 더 사과다웠다. 인간과 그를 둘러 싼 우주 사이의 관계를 살아있는 순간에 드러내는 것이라고 D.H 로렌스가 말했어. 언어조직이 생동감이 있어야 할 것 같아. 그게 좋은 시가 아닌가 몰라, 손택수에게는 그게 있는 것 같애. 로렌스 이야기는 시를 이야 하는 게 아니라 문학 일반에 대한 이야기 같아. 세잔느 이야기도 마찬가지이고. 일단 살아있어야 해, 생동감이 있어야 해,
(이 부분을 이야기 할 때 시인은 수첩을 꺼내들고 참고하면서 말했다)
김용락-그거 강의 노트예요.
이시영-아니 메모 노트.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하는 편이지. 시를 쓰기도 하고. 그냥 강의 할 때 문예진흥원에서 하나씩 불러다가, 손택수 박형준 장철문 등 젊은애들과 박영근 나희덕 등과 젊은비평가 불러서 문진원에서 내가 진행하던 우리시대 시인들, 세 달 동안 그때 메모하던 거야.
김용락-그전에도 메모했어요.
이시영-그럼 시도 쓰고, 강의 할 때도 쓰고, 착상이 떠오르면 적기도 하고, 시를 메모해서 쓴 적은 없어. 박목월은 대학 노트에 연필로 가득 써서 그것으로 시를 섰다고 하데. 나는 그러면 시가 안 되더라고. 그 노트를 박동규 씨가 갖고 있겠지.
김용락-하루 일정은 어떻게 되요.
이시영-강의 나가거든 안산까지 내려가야 돼. 화 수 목 금은 여기 나와 있고, 오전에는 혼자 있고 오후에는 사람을 만나고.
김용락-문학수첩의 자문 역할이요.
이시영-자문역할이 아니라 자문이야.
김용락-이런 걸 여쭤봐도 되나 돈은 얼마 받아요?
이시영-그건 노코멘트야. 많이 주겠어. 적당히 주는 거겠지. 거액 스카우트 전혀 아니야. 일 많이 하고 돈 많이 벌어 주어야 되. 부담스러워서
김용락-구례가 고향이지요.
이시영-마산면이야. 토지 쪽으로 4킬로. 일년에 한 번 간다. 추석 피해서.
김용락-시에서 보니 아버지가 이 선생 데리고 가고 이 선생이 아들 데리고 가고 하던데 실제예요.
이시영-실제지. 그러면서 약간 변형시킨 것이지. 아들이 없으니까. 은빛 호각 교통순경 20년 그 자리에 서 있었지. 마치 박정희 뒤통수처럼 생겼지.
김용락-과거 청산 이라크 파병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시영-그런 것 유보하고 이라크 파병 반대할 리 없고 친일청산 반대할 리 없고 국가보안법 폐지 해야돼.
노 정권에 한 마디 하자면 이제는 경륜과 실력을 가지고 해야돼. 만약 노 정권이 실패하면 우리 민주화운동한 모든 세력이 실패하난 것이잖아. 수구에게 돌려주는 거잖아. 아마추어적인 것은 버리고 경륜과 실력을 가지고 매사에 덤볐으면 좋겠어. 하나라도 이뤄야지. 수도이전, 과거청산, 국보법 세 개를 걸어놨잖아.
세 개 중에 하나도 못 건지면 어떡하나. 최장집 교수가 말하는 게 바로 그거잖아. 국가보안법 불러내는 시기가 잘못된 거잖아. 사실 놔 둬도 죽은 자식이거든. 그런데 공연히 이 경제가 어려운 때 불러내서. 적절한 시기에 의제를 불러내는 것도 정치적 경륜인데, 현정권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경륜과 실력이 갖춘 사람이 조화롭게, 타이밍을 맞춰야돼.
조선일보도 그래. 지금 조선일보 탓해서는 안 돼. 벌써 2년이 지났잖아. 정치란 게 뭐냐? 조선일보를 다스려 나가면 되잖아. 타협하라는 게 아니라 그런 생각이 들어. 노 정권이 실패하면 우리 전체가 실패하잖아. 보수수구 기득권 세력이 한줌 밖에 안 남았거든. 김용갑, 서정갑 이런 사람이 모두 노인이거든. 정권 넘겨주면 안 되잖아. 우리가 막강한 지지세력을 갖고 있는 건데. 정말 실력과 경륜을 겸비해야 돼. 조선일보 탓하지 말고 말이야.
김용락-49년 생인데 실제 49년 생이에요
이시영-호적에는 50년으로 돼 있어. 여순반란군 때 등화관제 시대 대 태어났지. 지리산에 여순부대가 진주했지.
김용락-언제 태어났어요.
이시영-8월에 태어났어.
김용락-한창 더울 때네.
이시영-아니지, 음력 8월9일이니. 노무현하고 음력 생일이 같더라고.
김용락-내가 시인이고 문인인데 한계같은 것 생각해본 적 없어요. 이랬다면 좀더 업적을 이뤘을텐데 같은 거.
이시영-나는 커다랗게, 고 선생님처럼 자기 문학에 대해 큰 목표를 가지고 있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런 생각 별로 못해봤어. 자족한다는 것은 아니고 큰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어. 나는 김종삼이 같은 사람 좋아해. 작지만 자기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 박용래 김종삼 같은 사람. 백석 같은 사람, 작지만 자기 세계를 가진 사람. 나를 뛰어넘어 커다란 성취를 이뤄야겠다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김용락-서울 올라오면서 찻간에서 신문을 보니 외국도서전 가겠데요.
이시영-몰라. 누가 하는 건데. 98년에 독일 낭독회 하러 한번 간 것 같애. 낭독을 한국어로하면 독일 성우가 독일어로 번역해.
김용락-창비 나오시고 생활 자유롭고, 시가 쏟아져 나오고 좀 편하십니까?
이시영-그렇게 편안한 것은 아니고. 이 시집( 은빛 호각, 바다 호수)을 쓸 때 많이 쏟아져 나왔어. 항상 그런 건 아니고. 창조적인 순간이란 게 흔한 것은 아니잖아.
김용락- 그렇군요. 오랜 시간 고맙습니다.
(이 대담은 2004. 10. 5일 화요일 오후 4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서울 영등포 문학수첩 사무실에서 있었다.)
두 시간 여에 걸친 대담을 마치고 우리는 신현림 시인이 사진전을 한다는 인사동의 한 까페를 찾아갔지만, 도착하지 이미 전시회가 끝나고 문이 닫혔다. 작가회의 총회 마치고 가끔씩 가서 밥도 먹고 술도 마신 적이 있는 부산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와 맥주 두 병을 마시고 헤어졌다. 김용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