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에 관한 오해
궁중을 다룬 사극에 꼭 등장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내시(內侍)다. 중국에서는 환관(宦官)이라고도 하고 중관(中官)이라고도 한다. 흔히 ’고자’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다.
중국 북경대학(베이징대학)은 북경시 중관촌(中關村)이란 곳에 있다. 이곳의 원래 지명은 중관촌(中官村)이었다. ’내시들의 촌’이라는 의미다. 명나라 때부터 내시들이 이 일대에서 공동묘지를 매입하다가 청나라 때에는 이곳에 내시들의 묘지가 대거 조성되었다. 이와 함께, 퇴직한 내시들이 이곳에서 살 집을 찾음에 따라 중관촌이란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내시들이 거론될 때마다 우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는 ’이들이 왕권 혹은 황제권을 위협했다’는 것이다. 조선 성종 때의 내시인 김처선을 주인공으로 한 SBS 드라마 <왕과 나>에 나타난 내시의 이미지 역시 그러했다. 자신들만의 독자적 이해관계를 추구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왕권도 위협하는 내시의 이미지 말이다. 이 드라마의 초반부에서는, 세조에 이어 즉위한 예종이 집권 초기부터 내시부 개혁에 착수하자, 이에 맞서 내시부의 수장인 판내시부사 조치겸(전광렬 분)이 왕권에 맞서 활로를 모색하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드라마 속의 이야기다.
<왕과 나>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 것처럼, 많은 사람들은 내시를 ’궁중에서 왕권을 위협한 존재’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환관의 폐해’니 ’환관의 농간’이니 하는 표현이 그런 인식을 더욱 더 부채질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내시제도가 본래 어떤 정치적 기획 하에서 출발한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내시가 왕권을 위협했다는 통념이 별로 근거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오스만제국의 궁정노예들
이 점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사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년)의 궁정노예들이다. 오스만제국의 궁정에 있던 노예들은 동아시아의 내시와 ’신분적’으로 별로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오스만제국의 군주인 술탄의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이 제국의 통치구조에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군주 전제정치가 확립되었으니 술탄이 정치의 전면에 나섰을 법도 한데, 도리어 술탄은 뒤로 물러나고 제3자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 제3자란, 술탄의 대리인으로 나선 사드라잠(대재상, 국무총리)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사드라잠의 대부분이 귀족이나 관료가 아닌 궁정노예 출신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그만큼 술탄의 권력이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대기업 회장이 자기 집의 가사고용인을 사장 자리에 앉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회장의 힘이 막강하지 않고는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럼, 이를 통해 술탄이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가? 첫째, 국정운영이 파행에 처했을 때에 술탄은 사드라잠에게 정치적 책임을 떠넘길 수 있었다. 둘째, 아무런 사회적 기반이 없는 궁정노예에게 사드라잠 자리를 맡김으로써 사드라잠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화되지 못하도록 견제할 수 있었다. 셋째, 귀족들과 아무 연관 없는 궁정노예들을 통해 귀족들을 통제함으로써 귀족들을 한층 더 강도 높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귀족 출신의 사드라잠은 귀족들의 입장을 배려할 수밖에 없었지만, 궁정노예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기에 술탄의 의중을 보다 더 확실하게 관철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넷째, 다른 사람을 앞에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귀족들로부터 세금을 많이 거둔다거나 귀족들을 죽여야 할 경우에는, 궁정노예들을 내세우고 술탄 자신은 뒤로 빠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전제정치가 확립된 15세기 후반부터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은 측근인 궁정노예들을 권력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귀족들을 견제하는 한편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고독한 군주
동아시아 전통시대에 군주는 기본적으로 백성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군주는 귀족의 압제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는 ’호민관’의 역할을 했다. 군주가 귀족들과 한패가 되어 백성을 압제한다는 것은 동아시아 정치에서는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천명사상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천(天) 즉 민(民)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고 있었고, 이로 인해 동아시아에서는 군주와 귀족 사이에 이념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되었다. 조선시대에 왕권과 신권(臣權) 사이에 대립이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데 백성에게 권력의 정통성을 두었다고는 하지만, 귀족세력과 대립하는 군주는 본래 외롭고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수적인 측면에서 귀족세력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군주 편이라 할 수 있는 백성은 멀리 있고, 군주의 대립자인 귀족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에게는 별다른 권력(경제력·군사력·정보력)이 없지만, 귀족에게는 그런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백성은 조직되어 있지 않지만, 귀족은 잘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래서 군주는 귀족과의 대결에서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군주에게는 ’힘 있는 남자’들이 필요했다. 그들이 바로 내시이고 환관이었다. 내시를 ’힘 있는 남자’라고 표현하니까, 좀 어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시들은 정말로 힘 있는 남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군주의 통치를 보조하는 데에 필요한 실무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군주를 보좌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었다.
군주의 입장에서 볼 때에, 충직한 관료보다는 충직한 내시가 더 믿을 만한 존재였다. 동아시아 전통시대의 관료들은 대개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유교적 지식인들이었다. 그런데 유교는 본래 신권(臣權)보다는 왕권을 제약하는 측면이 더 컸다. <맹자>에 나온 폭군방벌 사상이 그것을 보여준다. <맹자> ’진심’(盡心) 편에 따르면, 제자인 공손축(公孫丑)이 "군주가 어질지 못하면 정말로 추방할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자, 맹자는 "뜻이 있으면 할 수 있다"고 답변했다. ’뜻이 있으면 할 수 있다’는 표현과 관련하여, 주자는 "천하를 공정히 하는 마음을 가져, 한 터럭의 사욕도 없는 것"이라고 주석을 달랐다. 사심이 없으면 폭군을 추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사상이 사회를 지배했기 때문에 관료가 아무리 충성스러울지라도 그 역시 언제 돌변하여 "폐하, 아니 되옵니다!"를 외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귀족이나 사대부 출신의 관료는, 군주의 정책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판단되면 "금상(今上)에게서는 천명이 떠났다"며 언제든지 반기를 들 수 있었다.
내시의 효용성
하지만, 내시들은 달랐다. 그들은 신체의 특정 부위만 없는 게 아니라, 군주가 보기에 ’더 중요한 그 무엇’도 없었다. 그것은 군주의 권력을 위협할 만한 사회적 이해관계였다. 대개 가난하거나 미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들인데다가 어려서부터 군주만 쳐다보면서 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군주를 위협할 만한 사회적 무기가 별로 없었다.
또 궁녀들과 비교할 때에도, 그들은 군주에게 사심을 가질 만한 이유가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다. 궁녀들은 군주에게 성적 욕구를 느낄 수 있었기에, 그들의 충성심은 남녀관계가 그렇듯이 언제 돌변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시들에게는 그럴 만한 이유도 없었다.
또한 왕실의 남자 구성원들과 비교할 때에도, 내시들은 신뢰할 만한 존재였다. 왕이 아닌 남자 왕족은 왕의 자리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내시들은 그럴 가능성이 없으므로 왕이 의심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내시들은 군주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최고의 가치로 배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군주가 설령 실정을 저지른다 해도 군주를 배반할 가능성이 낮았다. 군주가 귀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그렇고 백성의 이익을 침해한다 해도 그랬다. 내시들은 어디까지나 ’왕의 남자’들일 뿐이었다. 바로 이러한 충성스러운 내시들이 있었기에, 동아시아의 군주들은 귀족이나 사대부와의 대결에서 힘의 균형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군주가 귀족이나 사대부를 억누르고 애민정책을 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애민정책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백성을 위하는 정책인데, 이런 정책을 펴다 보면 자연히 귀족이나 사대부의 이익을 침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합격한 관료들이 왕의 정책을 수용할 가능성이 낮아지게 된다. 평소에는 충성스럽던 신하도 막상 자기 집단의 이익을 침해하는 정책이 시행되면 ’천명이 금상에게서 떠났다’며 자신의 변절을 합리화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경우에 왕이 속마음을 터놓고 ’작전’을 의논할 대상은 내시들뿐이었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내시는 본질적으로 군주와 귀족의 대결에서 군주의 권력을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내시가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은 별로 없었던 것이다. (내시이야기-2편에서 계속됩니다.)
글 사진 = 김종성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논문심사 중). 삼성경제연구소 SeriCeo에서 역사 강의를 하고, 오마이뉴스에서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연재하고 있다. 월간 <말> 동북아 전문기자와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를 역임했다. 역사 관련 저서로는 <철의 제국 가야>, <최숙빈>, <한국사 인물통찰>, <조선사 클리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