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창 한국의 國力이 눈에 띄게 신장하고 있을 때, 일본에선 주간지 등의 표현에 「한국이 쳐들어온다」가 등장하는 등 호들갑스런 경계론이 일은 적이 있다. 지금은 모두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 이 무렵 일본에 살고 있는 한 中國系 일본인이 자신이 쓴 책에 「조만간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언적인 분석을 해 놓았다. 이 사람이 이유로 든 것 중에 한국 사람들의 창조성이 일본 사람들보다 윗가는 것 같다는 것과 한국 사람들의 고난의 세월이, 고난의 역사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이 있었다. 고난의 세월이 오래라서, 즉 고생을 더 많이 했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을 추월할 것이라는 얘기는 옆구리를 찔린 것 같은 감으로 오랫동안 뇌리에 남게 되었다. 受侮(수모)와 忍苦(인고)와 白骨로 쌓아 올려진 역사의 저수지가 魂(혼)이 살아 있는 민족을 향해서 분발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무궁한 정신의 動力源(동력원)일 수 있다는 것을, 위의 필자는 한국인들을 두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빗나가고 있다. 1990년대 들어 IMF 관리가 온 것은 두고라도 對일본 무역의 누적 적자는 더욱 불어나고 기술 의존 구조는 심화되어 가고만 있다. 앞에 든 中國系 일본인의 코멘트를 다시 받는다면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민족적 자존심이 없는 사람들인 줄 몰랐다」고 할지 모른다. 겨우 밥술 먹을 만하다 싶으니까 샴페인부터 터뜨렸고 허리끈 같은 것은 진작 풀어 버렸다. 그같은 삶의 자세가 불러온 경제행위의 누적이 원천적으로 IMF를 불러온 것을 우리 모두가 모르지 않으면서, 정부 관리 몇 사람 닦달하는 것으로 책장을 넘겼다. 누군가의 책임일 뿐 스스로의 반성이 없었기에, 우리 모두가 건진 교훈도 있을 것 같지 않다. 이 모든 과정을 가까이 지켜본 일본인들이 한국을 다시 한 번 그들의 계산 밖으로 밀어내지 않았나 싶다. 다시 고개든 「한반도 경멸史觀」 그동안 있었던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와 日本 수상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문제는, 한국인의 민족적 자존심과 관계되는 요구를 일본은 더 이상 계산에 넣지 않을 것임을 드러낸 경우이다. 대중문화 개방이나, 군사교류 등에서 우리 정부가 취한 대응조치가 효과를 본 것 같지는 않다. 임박한 2002년 월드컵 개최뿐만 아니라, 각각 미국에 대해 전략적인 파트너인 兩國 정부가 현실의 필요를 언제까지나 외면만 할 수는 없을 터이라, 10월 중순 고이즈미 수상의 訪韓 의사를 한국이 받아들이니까 그동안 역대 일본 수상들이 일본 사람들 속마음과는 무관하게 혼자서 십자가를 지는 비장감으로 해보인 사과 같은 것을, 레토릭을 바꿔 강도 높게 해보이니 兩國 관계는 또 땜질이 되고 진창 속에서라도 굴러갈 것이다. 문제는 그동안 天皇의 사과성 발언이나 역대 수상의 사과를 통해서,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극복한 것으로 알고 있는 한국인에 대한 편견과 한국 역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멸시감이 한 세기가 바뀐 21세기 초두에 그대로 재현되어 그들의 후계세대에 전수하려는 데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양국 간에 문제되고서도 바로잡을 계기를 얻지 못하고, 땜질된 양국 관계 속에 內在하면서 증폭될 형국 속에 있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우리 정부는 일본 당국의 검정을 통과한 역사교과서의 내용을 두고 35개 항의 서술을 바로잡을 것을 일본에 요구한 바 있다. 사실착오나 왜곡된 시각을 바로잡는 것은 필요하다. 일본 朝野는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에 대한 수정요구가 內政 간섭이라는 논란을 일으켜 논점을 회피하려 드는 교활성까지 보였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서술되지 않은 史實들 속에 더 많고, 史實의 서술과 非서술을 통해 드러낸 「한반도 경멸史觀」의 전개에 있다. 한반도 경멸사관, 즉 太平洋전쟁 패망과 함께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皇國사관이, 이웃의 침탈과 强占에 원용됐던 皇國사관이 이 21세기 초두에 일본의 후계세대에게 개진하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現정부는 일본의 수뇌와 21세기 韓日 파트너십 공동선언까지 한 마당이니 당연히 일본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는 한반도 경멸사관 자체를 문제 삼았어야 한다. 0.03%의 숫자에 안심하면 안 돼 근세 實學의 대가 茶山 丁若鏞(정약용)의 말에 「日本 無憂論(무우론)」이라는 것이 있다. 판단 시점은 18세기 말엽으로 보이는데, 당시 유명했던 일본의 유학자인 이토(伊藤仁齋)나 오규(荻生徠) 등의 經典해석을 읽어 본 茶山이 그들의 유교에 대한 이해 수준과 문화를 수준급이라고 보고, 文治와 禮儀(예의)를 일본이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 이웃을 침략하지 않을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誤判이다. 茶山은 일본 사회 속의 일상적 질서가 武에 의해 규율되는 핵심적 측면을 관찰할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우리 정부가 25개 항이나 수정을 요구했던 문제의 扶桑社(부상사) 역사교과서를 올해 최종적으로 채택한 학교는 13개교, 전체 비율로는 0.03%, 총 학생수는 1300명이다. 公立학교는 하나도 없고 사립학교나 地自體의 양호학교들이다. 국민운동단체이기도 한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신규 참여한 교과서인데도 10%(약 15만 권) 채택을 호언하면서 전국적인 운동을 벌인 결과가 0.03%이므로 「새역사교과서」는 일단 실패한 것이다. 일본 정치로부터 수정을 거부당한 우리 정부가 실낱 같은 기대를 걸었던 것이 문제 교과서의 불채택이었으므로 걱정은 덜었다 할 것인가. 이같은 데 茶山을 인용해서 안 됐지만, 단순히 채택 비율만 보고 日本 無憂論 같은 것이 나올까 싶어 해본 소리다. 扶桑社의 교과서는 특수 史觀을 지닌 한 개인 필자의 우발적 산물이 아니다. 교과서 뒤에는 前後 일본의 여권 세력(自民黨, 산하 국민운동조직, 지지계층 등)의 국민운동이 있다. 이를 지켜보는 일본內의 다른 목소리는 이 국민운동의 목표는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문제 교과서는 이 국민운동의 작은 표현이고 운동목표 달성을 위한 작은 수단의 하나에 불과하다. 경우가 이와 같으므로 교과서 채택이 안 되었다고 그만둘 운동도 아니고, 또 올해 채택이 안 되었다고 해서 채택을 포기할 운동도 아닌 것이다. 운동의 뿌리는 깊고 그 指向하는 바는 원대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관되게 일본의 집권 주축 정당인 自民黨은 1993년 당내에 「역사검토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하여 2년 간에 걸쳐 연구회를 가졌다 한다. 이 무렵은 冷戰이 끝나고 소련이 해체되는 등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고, 걸프戰이 터져 135억 달러의 거금을 갖다 바치면서도 국제 관계에서는 왕따를 당하는 상황에도 빠져보고, 서양을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던 경제가 거품이 빠지면서 좌절감이 번져 나가던 때이다. 일본 당국자들은 당연히 국가전략을 새롭게 모색하려고 들었다. 국가전략을 再구축하는 시기였다. 바로 이 시점에 국민들의 역사 인식 검토부터 시작한 自民黨의 예는 우리 정당들한테 참고가 될 법하다. 自民黨의 「역사검토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검토 결과를 총괄해 보였다. 8년 전부터 예고된 교과서 투쟁 <大東亞전쟁(太平洋전쟁)은 自存, 自衛의 아시아 해방전쟁으로 침략 전쟁이 아니었다. 南京사건이나 「從軍위안부」 등의 加害, 전쟁범죄는 없었다는 결론이다. 그리하여 이같은 전쟁인식, 역사인식을 국민 속에 정착시키기 위한 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기존 교과서의 침략·가해 관계 기술을 비방하는 「새로운 교과서 투쟁」이 요청된다> 自民黨은 일본의 청년들이,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잔학행위를 하고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역사인식을 갖게 되면, 두 번 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행동할 것을 우려한 것이다. 自民黨의 이같은 움직임이 교과서 문제의 始源的인 伏線(복선)이며,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후 「새역모」)의 운동은 그 구체화로 알려져 있다. 이웃 나라의 침탈과 식민지배를 정당시하고 침략전쟁을 긍정토록 日本人의 역사인식을 변질·정착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새역모」가 1996년 여름, 활동을 개시한 이래 2000년 초에는 회원이 1만명을 넘어섰다. 自民黨의 외곽 국민운동단체로 보이는 日本회의(재계 거물이 會頭로서 黨소속 국회의원, 청년회의소 회원, 일반 지지계층 등이 참여)가 「새역모」에 가세하고 있다. 이들은 지방 지부조직까지 一體되어 침략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기존 교과서를 「自虐的(자학적)」, 「反日的」이라며 공격 캠페인을 벌여왔다. 이들의 활동 중점은 도서의 출판과 보급 및 전국 각지에서의 강연회, 심포지엄 개최이다. 운동 개시 이래 「새역모」 관계자들의 도서출판이 100건을 넘었고, 강연회·심포지엄은 전국 각지에서 560회를 넘었다고 한다. 참여 회원은 학생, 교수, 샐러리맨, 중소상공업자 등등, 그저 보통사람이 대부분인데, 이 일본 사람들이 역사를 두고 벌이는 愛國운동의 열정에, 우리 형편을 둘러보면서 刮目(괄목)하지 않을 수 없다. 옳고 그름은 따로 따질 일이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서, 1998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時의 수상으로 초A급 戰犯인 도오죠히데키(東條英機)를 일본의 명예를 지켜낸 영웅으로 묘사한 영화 「프라이드」를 제작·상영하여 13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기도 했다. 이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히트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로는 만화의 수법을 교묘히 활용하여 「大東亞전쟁」을 긍정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 건 영령을 찬양하라』고 외쳐대는 만화 「戰爭論」으로 63만 부의 베스트셀러를 내기도 했다. 「새역모」와 自民黨 외곽의 운동단체인 日本會議가 連動한 교과서·역사 관련 국민운동은 근년에 일본에 있었던 국민운동 중에서는 가장 고양되고 성공한 운동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최근 1~2년 간 이 운동의 최대 力點은 「새역사교과서」(扶桑社)의 파일럿版(판)으로 기획·출판된 「국민의 역사」라는 774페이지짜리 책의 보급에 둔 것 같다. 扶桑社 교과서 채택을 위한 의식의 整地작업으로 「국민의 역사」는 운동조직에 의해 대대적으로 뿌려졌다. 「어린이 교육을 생각하는 부모 모임」 등의 이름으로 각급학교의 교장, 교사, 교육위원, 지방의원 들에게 무료로 송부되고, 「새역모」 회원들은 대량으로 학교에 가져가 동료교사나 학생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고, 어느 지방에서는 역 앞에서 배포하고, 도쿄의 어떤 아파트 단지에는 모든 가구의 우편함에 던져 넣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책이 출판으로서도 超베스트셀러로 성공한 측면이다. 일본 내셔널리즘의 기관지 같은 산케이(産經) 신문의 계열사가 1999년 10월 말에 발행했던 이 책은 초판이 35만 부였고, 하루에 1만 부씩 팔린다는 선전 문구와 함께, 2000년 1월 말로 72만 부를 돌파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일본에 약 200만 부를 보급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史論의 테러」로 兩國의 상호 이해 바탕은 초토화됐다 우리가 문제 삼았던 扶桑社 교과서에 담겨진 史觀의 원형질은 말할 것도 없이 그 파일럿版인 「국민의 역사」 속에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厚顔無恥(후안무치)하게 개진되어 있다. 교과서 수정요구를 일본 측이 받아 주었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파일럿版만으로 볼장 다 보았는데 말이다. 1965년 國交 정상화 이후, 일본인들이 뿌리깊은 對韓 편견을 조금이라도 바로잡아 올바른 善隣(선린)의 바탕으로 해보겠다고, 왕래교류다 해외홍보다 문화홍보다 하면서 쌓아올렸던 그나마의 가녀린 城이 일본 사람들 마음자리에 생겨나 있었다면, 그것은 이제 허공 중에 흩어져 버렸다.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가해진 하이재크 테러 폭파같이 「국민의 역사」가 한국사와 한국인에 가한 史論의 테러리즘과 그들 국민운동에 의한 증폭으로 兩 민족 상호 이해의 바탕은 초토화되고 말았다. 앞에서 「국민의 역사」가 일본서 히트한 출판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국민의 역사」의 무엇이 야마토族(倭族-日本을 구성하는 절대 다수의 族名)의 마음을 건드린 것일까. 이 책이 倭族 대중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共鳴板(공명판)의 문제를,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은 한 교사는 제기하고 있다. 이 책이 倭族 대중의 비위를 共鳴(공명)케 한 데는 대강 세 가지 측면이 있어 보인다. 첫째로 일본 아이덴티티 문제이다. 대부분의 일본 識者들이면 갖고 있다는 일본 아이덴티티의 번민에 어거지로라도 이 책은 정면으로 답해 보려고 들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일본 아이덴티티의 근거를 염두에 둔 倭族 중심적인 열정의 토로와 날조와 왜곡일지라도 자기 나라 자랑式인 집단적 나르시즘 감정을 건드려서 「갈채몰이」를 했다는 지적이 있다. 셋째는 倭族 일반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문제다. 倭族들이 한국이란 말만 들어도 뭔가 마음이 편치 않은 역사의 淵源(연원)은 깊어 보인다. 倭族인 것의 表徵(표징)의 첫째가 한국을 싫어한다는 것이지 싶다. 얼마나 표출되느냐는 다른 문제다. 일본인들은 속마음과 바깥에 뱉는 말의 알맹이가 서로 다른 言行 습관이 몸에 배어 있어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없는 게 아니다. 그 감정은 內在하고 있는 것이다. 親韓右派의 표변 거기다가 國交 수립 이후 冷戰시절에는 공산주의 앞에 전략 파트너라 생각했던지 右派들은 한국을 향해 감정 분출을 자제 했다. 冷戰이 끝나고 나니까 뒤바뀌어 日本 내의 左派들이 對韓 감정을 자제하는 것 같다. 1990년대 이후 그 전에 親韓이란 말을 들었던 右派로부터 한국을 향한 감정 분출이 많아졌다. 그 결정판이 右派 국민운동 단체라 할 「새역모」가 뿌려대고 있는 「국민의 역사」속에 있다. 평소에 이런 저런 사정으로 눌러놓고 지내던 한국·한국인을 향한 감정을 마음놓고 토로할 배설구를 倭族 대중은 이 책에서 발견한 것 같다. 이것이 이 책이 히트한 최대의 이유일 것이다. 배설은 니시오(西尾)가 해놓은 것이지만, 읽으면 배설은 자기 체험이 되고 심리적 해방에 연결되기 때문이다. 神話를 역사 속에 접속시키다 이 책의 저자 니시오(西尾幹二)는 「새역모」의 회장이다. 이 책의 구상을 얘기하는 한 강연회에서, 그는 역사 서술에 즈음해서 마음을 떠나지 않던 것이 「日本人이 明治 이래 자기라는 것을 놓쳐버린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일본인들이 明治 이후 근대화를 먼저 했다고 한국·중국을 우습게 보고 할 짓 못할 짓 다 해보았지만, 서양을 마냥 흉내내다가 놓쳐버린 「역사적 자기」, 즉 아이덴티티가 약체되어 버린, 혹은 상실되어 버린 자각과 번민을 니시오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脫亞 같은 것을 눈치 빠르게 주저할 것 없이 해치우고, 上京한 시골 수재가 검정고시 합격하듯, 흉내내던 서양을 발빠르게 따라 잡았다고 생각하는 21세기 초두인 지금, 서양문명이 日本 아이덴티티일 수는 없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더욱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自存·自大하고 싶은 니시오는 構想의 入口에서, 일본의 정통 사학이 도달한 마당 속에는 일본 아이덴티티의 앵커를 박을 데가 없다는 황폐감과 당혹감에 일순 빠졌을지 모른다. 니시오는 뛰어넘었다. 神話를 歷史에 접속시키고 환상과 날조를 통해 夜郞自大(야랑자대)사관을 구축해 좋았다. 니시오는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 얘기다』면서 시작한다. 일본학계의 한 원로는 『이는 실증과학으로서의 역사학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으로서 역사 수정에 길을 열려는 것』이라고 했다. 니시오의 論調는, 韓半島로부터 半島人이 건너가서 벼농사가 규슈(九州)에서 시작되는 야요이 시대(BC 3세기-AD 3세기) 이전인 죠몬(繩文-새끼무늬 토기가 발견된다고 붙인 이름)시대 1만년을 통해 「삼림과 岩淸水」의 혜택 속에 형성된 「문화의 동일성」이 日本 문명의 起點이라 해 놓았다. 이때 시작된 일본의 역사는 단절 없이 오늘까지 연속되었는데,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 문명, 유럽 문명과도 이질적인 독자적 문명세계를 이룩해 놓았다는 것이다. 절대로 싫은 한반도의 韓人들이 벼농사와 철기 문명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에 문명시대가 시작된 게 아니라 이미 「그 전에 1만년을 넘는 일관성과 일체성을 가진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꿈을 日人 독자들에게 주어 나르시즘(자기 도취)을 통해서라도 허약한 일본 아이덴티티 문제를 어찌해 보겠다는 시도는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내려와서 「排外(배외)주의적 自民族 중심 사관」으로 전개되고, 『일본 민족의 생명력이 변함없이 이어졌다는 걸 얘기하기 위해 他國, 他民族의 역사를 폄하하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특색』이라는 지적에 이어 『自國의 근거 없는 우월과 他國에의 모멸을 마구잡이로 과장하려 든 것은 너무나도 난폭하다』는 일본 사학계의 評은 또 어찌할 것인가. 이웃 민족을 끌어 내려야만 일본 아이덴티티의 의지처를 찾을 수 있다고, 니시오는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의 논리 전개에는 철학자 야스퍼스의 세계사 인식의 키 개념인 軸(축)이 동원된다. 니시오는 AD 6세기에서 AD 10세기까지를 「제2의 축」의 시대라 하고서, 세계 역사 전진의 원동력인 주축 민족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에 게르만 민족이 그리고 동족 끝에는 고대 일본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신라도 아니고 古代 일본만이 東아시아에서 독자적 길을 걸은 유일한 민족으로, 「제2의 축 시대」를 걸머진 역사주체로서의 사명을 가진 민족이라고 니시오는 주장한다. 이만하면 倭族 대중의 집단 나르시즘에 불을 붙이고도 남을 것이다. 이를 두고서는 『유럽에 대한 열등감을 뒤집은 대항 의식과 東아시아의 다른 여러 민족에 대한 우월감이 반죽된 오만한 自國지상주의의 情念의 표출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란 얘기를 사학계로부터 듣고 있다. 『왜 식민 지배시에 한국을 더 착취하지 못했는가?』 이 책이 한국사 혹은 韓日관계사를 테마로 하고 있는 3개 章은 「16장, 秀吉은 왜 朝鮮에 출병했는가」, 「23장, 朝鮮은 왜 계속 잠만 잤는가」, 「32장, 나는 지금 日韓 문제를 어찌 생각하고 있는가」이다. 이 세 장 속에서 니시오가 진실의 악의적 왜곡, 철면피한 無知의 의도적 노출, 日帝 特高의 모략정보 같은 편견, 식민지 일제가 곧잘 활용했던 매수된 변질 부류의 言說 등을 동원해서 한국사와 한국인에 모멸과 악담을 쏟아부어 놓았다. 이것이 그동안 일본을 대표하는 자들이 한국을 향해 사과와 반성을 많이 해보인 다음인 이 21세기 초두에, 倭族 대중의 마음 바다에 공명하면서 등장한 것을 치부해야 할 것이다. 졸면서 수학문제 풀고 있는 우리 아이들한테 이 세 장을 읽게 하면 잠 쫓는 효능이 있을 것이다. 줄거리는 풍신수길의 조선침략을 明과 인도까지도 정복·지배하는 「세계국가 구상」의 구현을 위한 것이라 변호하면서, 그 구상은 『일본인의 近代의식의 최초이면서 최대의 자기 표현이었다』고 평가·찬미한다. 이같은 사고 위에서, 明治 이후의 한국과 중국에 대한 침략, 강점, 침탈이 일본의 자존·자위를 위해 필연적이었다고 정당화하고 있다. 거기서 나가, 식민지배를 두고는 대만과는 달리 열등한 조선인을 일본인과 같이 취급하고 善心 행정을 베풀었는데 무슨 사과가 필요하느냐는 것이다. 좀더 조선을 혹독하고 매몰차게 지배·착취하지 못한 것은 그때의 일본 사람들이 덜 떨어져서 그렇다고 니시오는 오히려 질책하고 있다. 책갈피마다 풍겨나는 윤리적 저능아性, 기존의 연구 결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변질 분자들을 논거로 동원하여 史論을 펴는 비열성을 더 상대하기가 넌덜머리가 난다. 反韓 감정의 원점은 한국의 侮日자세 참고로 하나만 더 볼 것이 있다. 이 책은 근대일본의 韓·中 등 이웃에의 침략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일본이 그같은 길을 가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세 가지 전제를 들고 있다. 첫째와 둘째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地政學的 문제인데, 그같은 인식에도 문제는 있는 것이지만 주목해 두려는 것은 세 번째이다. 여기에 옮겨본다. <중국과 한국은 無力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에게 이유 없는 우월감을 보이는 데다, 다루기 힘들고, 귀찮고, 어찌해 볼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양국은 함께 고색창연한 東夷(동이)사상, 中華(중화)사상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건방지고 아니꼬운 東夷, 日本」이라는 侮日(모일)감정을 최초부터 품고 있었다. 그들과 오늘에 이르는 감정적 꼬임의 원점인 것이다. 양국은 歐美(구미)의 진출에는 비교적 관대히 대응하면서, 우리나라(日本)의 진출에 대해서만은 신참자-일본은 건방지고 허용하기 어렵다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일본이 섬에만 엎드려 있던 근대화의 벽두인 明治의 시작기에 한국과 중국은 멍청할 정도로 일본을 향해 무심했을 뿐이다. 그것이 진상일 것이다. 2000년에 걸친 대륙 두 나라로부터의 문화 전수에 대한 은혜 속에 열등 콤플렉스만 쌓아올렸다가 한 발 먼저 서양을 흉내내어 힘 좀 쓰니까, 힘 생기는 만큼 이웃을 침탈하여 그것을 근대화의 징표로 삼고, 역사적인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게 누군데 이런 소리가 있을 수 있나. 위의 인용 몇 페이지 뒤에 니시오는 「중국과 한국은 2000년의 문화와 역사로 맺어진 隣人(인인)」이란 표현도 쓰고 있으니까, 앞의 지적이 틀렸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2000년에 걸친 그들 마음밭에 釀成(양성)된 열등 콤플렉스를 상대한테 投射(투사)해 놓고는 그들 스스로의 惡行의 빌미를 오히려 거기서 찾으려 드는 것이 일부 일본인이라는 것을 니시오의 글은 용케도 알려 준다. 최근 신문에, 작년에 발견됐다고 떠들석했던 일본 도쿄 근교 치치부의 50만년 전 原人(원인)유적이 날조임이 밝혀져, 「치치부 原人」의 존재가 부정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동안 일본에 돌팔이 사기꾼 같은 고고학자가 있어서 일본의 구석기시대 유적을 날조했던 것이 심심찮게 보도되기도 했다. 한두 번의 착오는 몰라도 수천, 수만년 전의 일이 오늘에 날조되어 몇 건이나 등장되는 것은 하나의 사회현상이다. 수만, 수십만년 전부터 일본 열도에 일본 사람이 살았다는 관념을 필요로 하는 국가적 갈망에 그 돌팔이는 답하려 했을 것이다. 하늘 아래 세계 어느 나라에 이런 현상이 있을까. 인디언의 역사가 미국사의 출발인가? 1980년대 나카소네 정권 때에 日本의 文化 아이덴티티 문제가 제기되고 나서, 한반도에 도래한 쌀 농사가 시작되는 야요이 시대 이전 1만년이라는 죠몬시대 연구 붐이 일본에 일은 것 같다. 죠몬시대를 통해 오늘날 일본 문명의 기저가 형성됐다는 니시오의 소론은 위와 같은 흐름을 타고 있다. 일본 학자의 깨우침이라면 니시오가 거들떠볼까. 『죠몬시대 1만년에 비하여 야요이 시대의 경우 수백년, 이처럼 짧은 기간에 無계급의 원시사회로부터 계급사회로 변화한 것은 …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발달한 대륙의 특히 朝鮮 반도로부터의 우수한 산업기술 도입의 하사물이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가까이 東北아시아, 朝鮮에서의 우수한 문물의 발전과 경제적 사회의 성장이 있었기에, 일본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古代통일국가 형성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 죠몬시대 이래의 기저문화가 세계에 冠絶(관절)하게 우수했기 때문이 아니다』 (「국민의 역사의 잘못된 죠몬관」,「철저비판·국민의 역사」, p156, 石部正志) 이시베(石部) 교수 얘기가 맞다. 그러나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야 할 것이다. 「국민의 역사」가 뿌린 미망을 조금이라도 걷어내고자, 지면이 없으니까 史感만 던져 놓겠다. 열도에 반도의 문화충격을 흡수할 문화 변용의 主體가 있었을까. 규슈(九州)의 야요이 유적에 半島로 부터의 長身人 유골과 短身 죠몬인 유골이 같이 나온다고 한다. 아메리카 신대륙이 발견되어 영국의 퓨리탄이나 西유럽인들이 대거 아메리카로 식민 개척에 나선 것을 유추하면 일본사는 훨씬 쉽게 진실에 접근할지 모른다.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이 안 산 것이 아니다. 인디언 같은 존재로 죠몬인이 있지 않았겠는가. 舊대륙에서 건너왔던 이민들이 인디언들을 밀어내고 동부 연안 여기저기에 자립적 식민타운을 형성하면서 미국사는 시작된다. 고대의 열도에 반도로부터의 식민자들에 의해 여기저기 형성된 식민 타운, 즉 豪族집단의 연합 같은 형태로 일본의 고대 왕권이 존재하다가, 7세기 후반 백제가 패망하면서 몰려간 백제의 피란 관료들이 대거 일본 조정에 그대로 깔고 앉았었는데, 이들이 신라가 당나라까지 쫓아내고 반도 통일을 하는 세상이 바뀌는 驚天動地(경천동지)의 충격을 앞에 두고 열도 위에 반도와 무관한 별도의 살림을 차린 것이 일본의 고대국가 아니겠는가. 이리하여 日本이란 국호를 정하고, 天皇이란 호칭도 정하고 律令도 만들고, 역사서도 편찬하고 하는 일은 반도에 통일국가가 출현하는 충격을 정면에서 받은 지식인 집단인 백제 피란 관료라도 있어서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일본 최고의 正史라는 「日本書紀」에 날조 왜곡이 많다는 것은 상당히 규명되어있다. 날조·왜곡의 축 하나는 王統의 萬世一系(만세일계), 또 하나는 半島와의 무관 내지 對 半島 優位像의 확립이다. 나라를 잃고 식민 개척지에 반도와 무관한 새나라 건설을 작심한 백제 피란 관료들의 심정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들이 지금 일본 사람들이다. 日本, 「해뜨는 데」라는 참 좋은 말이다. 월간지 「歷史雜誌」 1900년 1월호에는 당시 일본의 거장급 사학자들이 「日本」이란 말은 원래 반도 사람들이 쓰던 말인데, 말이 좋아서 國號로 했다는 지적이 있다. 그 무렵이 한창 일본이 반도를 깔고 앉는 이데올로기로 활용한 日鮮同祖論이란 것이 유행하던 때라 이런 얘기도 나온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반도 쪽에서 봐야 일본이 「해뜨는 데」이지, 日本에서 日本(해뜨는 데)은 태평양 속이거나 하와이쯤이다. 中國을 日沒地라 볼 수 있는 데도 한반도이다. 日本이란 호칭의 주체의 座定点은 한반도였던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 대학의 국사학과 학생들에게 舊세대와는 달리 韓日고대사를 좀 파보라고 권하고 싶다. 韓日 고대사는 우리 고난의 역사가 남긴 정신의 저금을 찾아 쓸 패션을 불어넣는 저수지일 것 같아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