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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성산면 연당리의 물 맛이 좋다는 약수터를 찾아 갔다가 위쪽의 마령치를 둘러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옛날 촌로들이 청도군 풍각 5일장에 오가는 장길 정도로만 알았는데 급반성 한다.
지명이 범상치 않다 싶어서 그 이후 창녕군지와 창녕군지명사, 그리고 각종 자료들을 검색해 본 결과
굉장히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지명임을 알았다.
연당리와 대산리 일대는 신라시대 낙동강 서부의 합천과 진주방면에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로 가는
인마의 대로 중 요충지 였다는 것이다.
창녕군지명사에 의하면 길도 넓게 닦여져 인마의 왕래가 많았다고 한다.
이 산은 말의 형국인 말산이며 이곳은 마치 말안장을 얹는 말등 부분이므로 말재, 마령이라 불리었다 하는데
북쪽 봉우리가 611.6m 남쪽은 487m의 두 봉우리 사이에 고개가 있으며 이 역시 399m의 높은 고개이다.
아마 신라때 백제와의 싸움이나 교역을 위해 서쪽으로 가는 주요한 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말재, 마령의 <馬>는 곧 고어(古語)의 음차로 마리재이니 마리재는 <頭嶺>의 뜻이다.
아침에 해가 뜨면 가장 먼저 해가 비치는 산마루이니 높고 으뜸되는 산이라 하여 마리재로 불리어 졌을 것으로도 생각된다.
『문헌비고』에 나오는 마현(馬峴)이 바로 이 고개이다.
마령재를 넘으면 경북 청도군 풍각면 금곡리에 닿는다.
이곳이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것을 뒷받침 해 주는 것은 성산면의 북부이며 창녕군의 최북단인 대산리는
신라시대 경주와 낙동강 서부지역을 이어주는 대로의 한 요지로 역(驛)이 있었던 마을로 알려져 있다.
신라때부터 역촌이었다는 것은 마을이 오래 되었다는 증거로 역촌의 입구임을 알리는 돌장승이 최근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도난 되었지만 나이드신 분들은 다 알고 있어서 구전만이 아닌 사실로 느껴지게 한다.
역촌은 군사도 많았고 말을 많이 부렸다는데 인근에 말을 키운 목장도 있었다고 한다.
신라 때 역촌이 될 만한 조건으로는 동과 서를 잇는 육상교통로가 마령치를 넘어 청도를 거쳐 경주로 가는 한길(大路)이었는데
낙동강을 건너 여기에 이르면 높은 고개를 넘기 직전이므로 우마와 사람이 일단 쉬어야 될 만한 거리 이기도 하였다.
역마를 기르던 목장도 있어 <마리등>(말등)이라는 지명과 입구임을 알리는 장군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군대가 이 요로를 지키고 있어 서쪽(백제)에서 부터의 어떤 위협을 마령치 앞에서 가로막기 위해
역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마령치에 올라서 보면 느끼겠지만 달창저수지 저 너머의 낙동강 서안까지 관망되는 곳이니
아마도 서쪽 즉 백제로 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고 또 신라가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교두보를 삼은 곳이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 해 진다.
그래서 아마 기록에는 찾아 볼 수가 없지만 비화가야가 다른 주변의 가야 보다도 일찍 멸망한 이유도
이곳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까지 든다.
시계를 6.25한국전쟁 이전으로 돌려 본다.
다음의 자료는 <운문서 화악까지>라는 대구매일신문의 기사를 인용한 것이다.
어르신들에 따르면 그러나 일대서 통행량이 가장 많던 건 마령재였다.
남·북간으로는 난두산과 수복산의 중간에 있고, 동·서간으로는 창녕 연당리와 청도 금곡리 사이에 나 있다.
마치(馬峙) 말치 마령(馬嶺) 마령치 마랑재 등등 여러 이름으로 통한다.
거기서 금곡리로 내려서는 골짜기 이름도 ‘말치골’인 걸 보면 말과 무슨 인연이 있는가 싶다.
풍각서 비티재로 향할 때 전면으로 올려다 보이는 잘록이가 그 고갯길이다.
마령재의 많은 통행량은 그 양편에 매우 넓은 생활권역이 펼쳐져 있는데 기인했다.
서쪽엔 대합면·성산면 등 창녕 북부권과 유가면·구지면·현풍면 등 달성 남부권이 분포하고,
동편에는 풍각을 시작으로 청도의 넓은 땅이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장날이면 서쪽 아주머니들은 동쪽에서 나는 고추 등등과 바꿔 가려고 땅콩 같은 그쪽 산물을 챙겨 줄을 이었고,
소들 또한 규모 큰 풍각 우시장을 드나드느라 숱하게 마령재를 넘었다.
금곡리 쪽에는 덩달아 저들을 대상으로 한 주막이 성업했으며,
소장수들은 거기 여러 개 박아둔 말뚝에 소를 매어놓고는 눈을 붙이고 가곤 했다.
그러다 보니 돼지새끼 팔고 돌아가다가 강도당한 이야기 등등 숱한 희비가 묻힌 곳 또한 마령재라는 것이다.
저런 교통상의 요충성 때문인지 풍각 쪽의 근래 큰 관심거리 중 하나는 마령재에 터널을 뚫는 일이었다.
청도군청에서 중앙정부에 공식 건의한 바도 있다는 그 터널이 뚫리고 연결로가 생긴다면
대구의 신산업 심장부로 성장 중인 현풍권과 청도가 동일생활권으로 급속히 묶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쪽 산줄기와 관련해 청도읍지인 ‘오산지’(鰲山志·1673)는 “비파산(琵琶山·비슬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가서
마치협(馬峙峽)을 지난 뒤 굽이쳐 갑을령(甲乙嶺)이 됐다가는 동쪽으로 굽는다”고 적어뒀다.
‘마치협’과 ‘갑을령’을 특히 주목한 것이다.
‘마치협’은 바로 마령재고, ‘갑을령’은 ‘서쪽(갑을방향) 창녕 경계에 있는 것’이라고 각주된 걸로 봐
수복산 정도를 가리킨 것 아닌가 싶다.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9월엔 창녕·달성 쪽의 수많은 피란민들 또한 저 마령재를 넘었다.
남·북 방향 낙동강 물길을 지키던 미군방어선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피란민들은 저 재를 걸어 넘어서는 청도 풍각천과 청도천 등등 하천바닥에 움막을 치고는 인천상륙작전 때까지 버텼다.
패배한 미군부대는 자동차로 비티재를 넘어 후퇴한 뒤 비슬기맥에 다시 방어선을 구축했다.
마령재 초입의 금곡리 입구 마을 숲에 진을 치고는 수복산 위로 탱크를 올려 보내 비슬기맥을 오르내리며
새로 구축한 전선을 지킨 것이다.
그럴 때 비슬기맥 서편의 창녕 쪽 기슭은 모두 불태워졌고 동쪽 청도의 금곡마을 숲 거목들은
미군들이 놀이삼아 쏘아댄 권총에 맞아 모두 썩었다고 했다.
어려서 전쟁을 목격한 현지 어르신들은 줄줄이 재를 넘어오던 미군의 자동차 행렬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시기엔 한국군이 지키던 동·서 방향의 팔공기맥 전선도 동부에서 상당 구간 붕괴됐다.
영천·포항 등등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비슬기맥을 넘어 청도의 산동지방 하천으로 피란했다.
당시 청도에는 무려 40만 명이나 되는 난민이 몰려들어 전국 각 도청 단위로 임시 행정소를 차릴 정도였으며,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피란민을 위로하러 금천면 지역을 찾아야 하기도 했었다.
아군이 한국전쟁 마지노선으로 설정했던 전선은 남북으로 이어진 낙동강 물길과 동서로 연결된 팔공기맥 산줄기를
왜관 지점에서 연결한 역기역자(ㄱ) 선이었다.
하지만 그것마저 적의 8월 공세와 9월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몇몇 곳에서 무너졌을 때,
정말 최후의 생명선으로서 나라를 지키고 피란민을 품어 안았던 것이 비슬기맥이고 그 화악분맥이었던 것이다.
시계를 현대로 돌려 보자.
2009년 8월 26일 당시 한승수 국무총리가 경상북도 청도군을 방문했을때 이중근 청도군수로부터 군정현황을 보고 받고
현안사업인 마령재 터널 조기 건설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고 한다.
한총리와 동행했던 김관용 경북지사는 “마령재 터널은 풍각농공단지와 새롭게 신설되는 대구국가산업단지의
원활한 물동량 수송을 위해 개설이 시급하다”고 강조하면서 한총리를 설득했다고 한다.
마령재 터널은 청도 풍각과 창녕 성산을 잇는 10km(터널2km, 연결도로8km) 구간으로 청도군의 숙원사업 중 하나다.
청도군수는 2010년 7월 9일에도 행정안전부, 국토해양부 등 중앙부처를 방문하여 국비 지원을 적극 요청한 바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우리 창녕군은 가만히 바라만 보아서 될 것인가?
특히 성산면민의 입장에서는 적극적인 관심으로 신라시대 인마가 통행하던 한길, 마령재의 밑으로
마령재 터널이 조기에 건설 되었으면 한다.
신라때 말을 키웠다는 말등에서 바라본 마령치 - 저 멀리 잘록한 고개가 바로 마령치 일명 마령재이다.
200mm 망원렌즈로 당기니 마령치가 마치 요새처럼 보인다.
마령치 아랫마을이 성산면 연당리이다.
달창저수저수지 방면에서 바라 본 마령치 - 저 멀리 숲 너머 아득히 보이는 곳이 마령치다.
마령치에는 산악회원들이 붙여 놓은 리본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다.
비슬지맥이 뻗어 내려 온 곳이기 때문에 등산객들이 많다고 한다.
마령치에서 바라 본 경북 청도군 풍각면 방면
풍각방면으로 오솔길이 나 있다.
마령치 정상부
마령치에서 성산방면 - 발 아래로는 이제 멧돼지의 길이 되었다.
마령치에서 바라 본 합천방면 - 멀리 달창저수지가 보이고 그 너머가 바로 낙동강이다.
청도군 풍각면 방면에서 바라 본 마령치
경북 청도군 풍각면에서 창녕과 합천을 거쳐 진주로 가는 도로가 국도 20호선이다.
신라때의 인마길이 이젠 차량이 통행하는 길이 된 것이다.
첫댓글 이게 뭐죠?
성산하면 그냥 창녕군의 한개면으로 산이 가로놓여 있으니 그저 경북 지역이 아니고 창녕군에 속해 있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 글을 세세히 읽어 내리며 역시 창녕은 역사문화의 보고라는 생각을 합니다.
한마디로 길곡면이나 부곡면 산밖이 낙동강과 청도천으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창녕에 속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이참에 향토사학적자들 토론이나 한판 붙여 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낍니다.
또 어떤 싸움을 할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왜? 이런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직 묻혀 있을까요?
현대인들은, 아니 우린 그냥 주어진 자신의 눈과 귀만 믿으러 하는데서 이런 중대한 사실이나 아이디어가 상실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적으로 부곡온천 활성화에 대한 어떠한 환상을 가지고 간혹 손여사와 부곡쪽 산을 올라 보는데,
개인적으로 가진 작은 생각이 위대한 아이디어일지도 모르는데, 그런 분위기, 그런 의견을 개진할 마음을 갖지 못하지요.
또다른 좋은 생각들도 가끔씩 해보며 그냥 혼자 웃고 맙니다.
예컨대 제9구단 창원야구장이 북면이나 중리로 오면 우리 창녕은 어떤 영향이 있을까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생각들 말입니다.
얼마전 문화체육과에서 신라진흥왕 행차길을 복원한다기에
위의 자료를 담당계장과 담당자에게 전자편지로 보내 주었습니다.
혹시나 561년 신라진흥왕이 창녕에 진출하여 척경비를 세웠을 당시 진출한 길이
엉뚱한데로 정리될까 봐서 였습니다.
그쪽에서도 청도방면으로 들어 온것으로는 알고는 잇었는데 다소 차이가 있었던것은
지금의 국도 20호방면으로 알고 있는듯 하였지요.
위의 사료들로 추정해 볼때는 청도 - 마령치 - 연당 - 원동 - 간상 방면이라고 전언 한바 있습니다.
역사학적 사료도 없이 어림짐작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인것 같습니다.
참고로 최근에 우리집안 족보 중 일부를 아버지와 컴퓨터로 정리하면서 모르는 글자가 나와서
향교와 구학을 하시는 함안 선생님께 여쭤 보아도 원형 글자를 찾지 못하여
아버지께서 제일 근사한 글자로 대체 하시는것을 이것이 선대에 기록한 것과 다르다면 후손들에게 누가 되는 것이므로 모르는 그 글자는 그냥 비워 두었다가 인쇄후 복사본을 오려 붙여 두기로 결정했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잘 하신다고 그 글자를 대체했다면 그것이 10년, 20년, ....... 100년후에는 사실이 되어버리니 엄청난 사실이지요.
한집안의 작은 일도 이러할진대 특정 규모의 향토사에 편리성만 따지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수고 많습니다.
흔히들 역사는 뒤안길에서 평가 받는다고 하지요.
돌쇠의 자그마한 노력들이 우리 창녕의 역사를 바로잡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폐교된 성곡초등학교였던 현재의 성곡정보화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던
장군석이 도난되어 그 옛날 신라의 역참이었다는 표시가 사라져 안타깝다는 점입니다.
아마 일찍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적시하여 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면 이런 낭패한 일이 없었을 것인데...
이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감사드림
보낸날짜 2011.08.02
보낸사람 윤상곤
받는사람 손흥태
수고 많으십니다
제가 어릴적(군에가기 전) 넘나들던 고개 입니다.
재 너머 조상 산소(안국)에, 그리고 할매하고 자주넘던 고개 입니다.
그후 수봉산 측량기준점 관계로 두세번 간것 외에 요즘에 가본적은 없었는데.,,
옛날 할매하고 말안재 정상에 있던(성황당, 돌배나무)가 생각 납니다.
지금은 임도로 많이 변한 모슴이네예
그 옛날 누구보다 제가 그 고개를 많이 넘어 다녔던 소중한 기억을 나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세요...
맞아요 지난 봄에 마령재에 갔을때 발아래 연당방면에 큰 돌배나무꽃이 피어 있던걸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사진과 소개글의 제목이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로 붙였던 기억이 납니다.
관심이 고향을 지킵니다. 두 분...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