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통일 이야기
비무장지대(DMZ)를 다시 본다
비무장지대의 설정
비무장지대의 활용방안 - 평화협정의 체결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통일로 가는 길
(7)전곡리 선사유적지
구석기의 보물창고
(8)회암사터
영화와 퇴락을 겪은 회암사(檜巖寺)
- 경기도 연천 (연천을 아십니까? - 연천의 특산물과 명물)
연천의 지형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인 분지로 산마다 나무가 빼곡히 들어차 재목과 땔감 뿐만 아니라 도토리며 각종 산나물에서부터 심지어 꿩에 이르기까지 산에 온갖 자원이 널려 있다.
봄에는 주로 아낙네들이 직업적으로 더덕 등 산나물을 채취하여 서울로 내다팔아 수월치 않은 수입을 올리고 가을이면 산마다 흔한 도토리를 주워 도토리묵을 쒀서 역시 서울 등지로 나가는데 도시 사람들의 각광을 받고있다. 특히 도토리묵은 연천읍 차탄3리 지역 10여 가구에서 년중 무휴제조하 며, 꿩고기를 넣어 만든 꿩만두는 겨울철에 특히 유명하나 근래에는 당국의 야수보호운동으로 그 재료를 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연천콩은 예로부터 알이 굵고 빛깔이 좋다고 알려져 다른 지방의 콩보다 값이 비싸다.
일제 식민지시대 때는 연천콩의 종자를 심은 종자포를 이곳에 만들어 두고 온나라에 연천콩 종자를 나누어 주기까지 했었으니 연천콩 이 얼마나 좋은 품질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할만 하다. 이곳 연천에서는 손님이 오면 그 자리에서 순두부를 갈아 대접한다고 할 정도로 연천콩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연천군내에 스무군데가 넘는 콩 재배단지가 있다. 콩과 관련해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연천의 또 다른 자랑은 돌절구와 멧 돌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현무암이 풍부한 인접한 연천읍 고문리와 전 곡면 신답리, 은대리 지역 등은 전통 생활 도구중의 하나인 돌절구와 맷돌 의 섬세한 세공으로 더욱 유명하다. 오늘날 과학문명의 발달로 맷돌보다는 전기믹서가, 돌절구 보다는 방앗 간의 분쇄기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지만 돌로 콩을 갈아 두부를 만들고 돌절구로 각종 조미료를 빻아 먹던 옛맛과 그 정취는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재인폭포 (슬픈 전설은 한이 되어 한탄강으로 흘러들고)
재인폭포(才人瀑布)는 연천읍 고문리에서 2k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괴암 절벽의 폭포로, 높이는 약 18m에 달하며 재인(광대)의 한과 부인의 절개에 관한 전설을 간직한 연천군의 명승지이다.
재인폭포로 들어가는 길 중의 하나인 연천댐을 지나는 길은 군사지역인 것을 잊게 할만큼 큰 아름다움을 전해준다.재인폭포는 연천군이 자랑하는 명승지임에는 틀림 없지만 안타깝게도 평일날은 공개가 되지 않는다.
이 지역 자체가 소위 전방지역이기 때문에 군사작전상 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며 따라서 재인폭포를 찾기위해서는 시간제 약과 함께 토.일요일 또는 공휴일만을 방문일로 선택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평일날 재인폭포 아래서 쏘가리와 눈치 매운탕에 소주한잔을 걸치고자 하는 아름다운 생각으로 이곳을 찾는 다면 더 큰 낭패감만 느끼게 될 것이다.
재인폭포 이전의 명칭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오랜 옛날 연천 고을의 고문리 마을에 줄타기에 뛰어난 광대 재인이 살고 있었다. 재인은 줄타기에 능하여 그 명성이 높았고 더우기 그의 부인은 절세의 미인으로 그 소문이 온 고을에 자자 하였다.
어느해에 이 고을에 부임해 온 원님은 재인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그녀의 미모를 한 번 보리라 마음을 먹고, 은근히 재인을 불러다 줄을 타게 하여 그의 부인의 모습을 엿보게 되었다. 재인의 부인을 보게된 원님은 그 미모에 반하여 남몰래 그 부인을 흠모하게 되었다. 당시 재인은 상민에 속하였으므로 원님은 자신의 권력만 믿고 강압적으로 수청을 들라 하였으나, 재인의 부인은 워낙 절개가 강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 하였다. 이리하여 원님은 자나깨나 재인의 부인을 빼앗으려는 욕심으로 꽉차 있었고, 마침내는 음흉한 흉계로 그 부인을 차지하려 하였다.
어느날 원님은 관아의 관리들과 함께 지금의 재인폭포에서 큰 잔치를 열었고, 잔치의 흥이 무르익을 무렵 재인에게 줄을 타는 재주를 보이게 하였다. 떨어지는 폭포의 양쪽 계곡에 밧줄을 건너 매어 놓고, 풍악을 울리는 가운데 재인은 밧줄에 올랐다. 수많은 구경꾼들은 숨을 죽이며, 재인의 줄타기 묘기를 지켜보고 있었으며, 까마득한 폭포위로 매어진 줄을 한발한발 사뿐사뿐 타던 재인이 폭포의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밧줄이 뚝 끊어져 재인은 외마디 긴 비명을 남긴채 60척의 깊은 계곡으로 떨어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재인을 죽임으로써 그의 부인을 차지하려고 원님이 일부러 밧줄을 끊어지게 만든 것 이었다. 눈앞에서 남편의 죽움을 보게된 재인의 부인은 하늘이 무너질 듯한 슬픔으로 통곡하여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남편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장사를 지낸 후 조용히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몇 날이 지난후 원님은 재인의 부인을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은근히 뜻을 묻는 전갈을 전해 왔다. 부인은 이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때라 원님의 뜻에 따르겠노라 하니, 원님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서둘러 동헌으로 재인의 부인을 불렀다.
원님의 수청을 들기전에 마지막으로 재인의 무덤을 찾아, "서방님, 서방님의 원통한 죽음을 오늘 소첩이 그 원수를 갚으려 하옵니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죽어 저승에서 다하려 하니 부디 기다려 주십시요" 하고 슬피 울며 절을 올렸다.
동헌으로 들어간 날 밤, 밤은 깊어 쥐죽은듯 고요하고 깜박이던 등불마저 꺼 지자 갑자기 원님의 방에서는 "으악"하는 비명이 들려 왔다. 깜짝놀란 하인들 이 방에 들어가 보니, 원님은 재인의 부인에게 코를 물리어 코가 떨어져 나간 채 피가 낭자하여 방에 나뒹굴고 있었고, 부인은 혀를 깨물어 자결하여 시체가 되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뒤 사람들은 재인의 한이 서린 이 폭포를 재인폭포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마을을 코문이(재인의 부인이 원님의 코를 물은 일)가 살았다 하 여 "코문리"로 부르게 되었고, 후일 음운의 변화로 "고문리"라 부르게 되었다.
이같은 전설을 지닌 재인폭포는 주위의 경관이 아름답고 물이 맑고 깊으며 한탄강 상류와 인접하여 여름철에는 피서지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 연천역의 급수탑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세월, 역(驛))
북으로 향하는 걸음이 마냥 즐거워지는 요즘이다. 서울의 답답함을 피해 3번 국도에 몸을 내맡기고 1시간 반 가량 각양각색의 입간판을 밀어 제치면 연천읍에 다다른다. 이태준의 자전적 소설 {해방전후}의 무대인 안협면이 바라보이는 구철원 지역, 노동당사·철의 삼각지 전망대·철새도래지·월정리역 등 철원지역과 함께 민통선내 분단의 현장을 돌아볼 수 있는 또 다른 입구 연천.
시인 이동순이 갈대숲 가득한 연천평야 너머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철조망을 가르켜 '찔레꽃 울타리'라는 고운 이름을 붙인 연유가 이 때문이라고 답변해주듯이, 읍 한가운데는 건너편에 위치한 풍덩한 산자락을 한 귀퉁이 라도 가릴세라 연천역사가 자그마하게 자리잡고 있고, 그 오른쪽 한편에는 20m가 족히 되는 급수탑이 내려 앉을 곳 없어 서성이는 푸른 하늘 한자락 을 힘들게 떠받치고 서 있는 모습이다 .
일제가 식민지 지배를 활성화하고 대륙침략을 강화하기 위해 1914년 8월 16일 개통한 경원선의 중간지점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금도 의정부에서 종 단역인 신탄리역까지 매시간 한 차례씩 운행되고 있는 비둘기 열차가 꼭 쉬었다 갈길을 개촉하는 연천역사. 하지만 일제시대 당시 연천역사의 시설 물들은 모두 한국전쟁 기간중에 미군의 폭격에 의해 모두 사라지고 증기기 관차에 물을 공급해주던 급수탑만이 탄흔 가득한 모습으로 을씨년스럽게 남아있다.
세월은 그렇게 더디게가는 것만은 아닐 터, 말 많던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있는 세상에 일제의 또 다른 유물은 청산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홍보용 기념물'이 되어 서 있는 것인가? 그렇게 군화발 소리에 만신창이가 되던 조국의 애절한 소리들을 바람에 묻고 세월에 묻고 있는 연천역 급수 탑인 셈이다. 차라리 긴 세월 설운 한숨으로 울고 서있는 철마 대신에 서 울에서 원산까지 휘적휘적 날아가서 분단없는 하늘, 헤어짐 없는 하늘, 통 일되고 해방된 하늘을 노래하는 철새들의 등대지기라도 되었더라면 좋으려 만, 우리는 결코 가볍지않은 세월 동안, 연천역을 그리고 그 급수탑을 무심 히 잊고 지나친다.
시인 이시영(李時英)이 [지금은 갈 수 없는 땅]에서, "…너울파도로도 가슴파도로도 건널 수 없는 바다 / 꿈 아니고선 / 죽어 한줌의 재로도 짙푸른 연기로도 / 돌아갈 수 없는 곳 / 산이 막혀 철산이 막혀 갈 수 없는 곳 / … 그러나 어머니 갑니다 / 지금은 갈 수 없는 땅 / 동해바다 모든 파도 날뛰는 파도 삼켜 / 내 파도 큰 파도 만들어 솟구치며 갑니다 / 우리 땅 모든 철산 무너뜨려 / 푸른 바람 솔바람소리 내며 갑니다 / 내일이면 갑니다"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통일을 노래한지도 벌써 16 년, 우린 또 어떤 절실한 마음으로 통일을 이야기하고 또 어떤 기대로 연 천역사에 이르고 급수탑을 지나치는 것일까.
혹시 통일을 노래하며 연천을 바라보는 오늘의 우리 마음이 이런건 또 아닌지.
끊어진 철길이 동네 앞을 지나고
'금강산 가는 길'이라고 푯말이 붙은
민통선 안 양지리에 사는 농사꾼 이철웅씨는
틈틈이 남방한계선 근처까지 가서
나무에서 자연꿀 따는 것이 사는 재미다
사이다병이나 맥주병에 넣어두었다가
네댓 병 모이면 서울로 가지고 올라간다
그는 친지들에게 꿀을 나누어주며 말한다
"이게 남쪽벌 북쪽벌 함께 만든 꿀일세
벌한테서 배우세 벌한테서 본뜨세"
세밑 사흘 늦어 배달되는 신문을 보면서
농사꾼 이철웅씨는 남방한계선 근처 자연꿀따기는
올해부터는 그만두어야겠다 생각한다
'금강산 가는 길'이라고 푯말이 붙은 인근
버렸던 땅값 오르리라며 자식들 신바람 났지만
통일도 돈 가지고 하는 놀음인 것이 그는 슬프다
그에게서는 금강산 가는 철길뿐만이 아니라
서울 가는 버스길도 이제 끊겼다
(신경림, "끊어진 철길", {길}, 창작과 비평사, 1990. 에서)
- 신탄리역 (경원선을 아시나요)
서울에서 연천·철원·안변을 거쳐 원산에 이르는 철도. 1914년 9월 6일 개통되었고, 총연장은 222.7km이다. 그러나 지금은 국토의 분단으로 서울 용산역에서 신탄리(薪炭里)까지의 88.8km만 운행되고 있다. 경의선과 함께 국토를 가로질러 수도 서울과 동·서해를 잇는 간선 철도로, 함경선과 이어져 두만강 연안에 이르고, 국경을 지나면 대륙철도에 접속되어 산업·군사상 막중한 위치를 점한다.
서울과 당시 동해안 제일의 항구였던 원산을 연결하는 경원선의 중요성은 경의선이나 경목선(京木線 : 지금의 호남선)에 비겨 결코 작지 않았다. 따라서 그 부설권을 획득하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의 외교전 역시 매우 치열 하였다. 1896년 9월 30일, 프랑스의 피브릴르회사가 주한프랑스대사를 통하여 경원선과 경목선 철도부설권을 청구하였으나, 우리 조정은 이를 거절하였다. 1898년 8월 1일에는 독일 총영사 크린이 한국 외무대신에게 경원선 철도부설권을 그들이 세운 회사 세창양행(世昌洋行)에 허가하도록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되었다. 독일측은 경인선과 경의선의 부설권이 이미 미국 과 프랑스에 허가된 사실을 들어 같은 요구를 몇 차례 거듭하다가 마지막에는 철도부설자금의 공급권이라도 얻어내려 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미 경인선과 경부선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여 공사에 들어간 일본도 경원선 부설권을 놓치지 않으려 들었다. 경원선 부설권이 일단 다른 경쟁국에 넘어갔을 경우, 그것이 그들의 대한정책(對韓政策)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일본은 기회를 엿보다가 1899년 6월 17일 대리공사 하야시(林權助)로 하여금 한국정부에 경원선 부설권을 요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즉각 거부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줄기찬 외교적 압력에 대하여 우리나라 정부가 일관하여 내세운 원칙은 "철도와 광산경영은 일체 이를 외국인에게 불허한다."는 것이었다. 1899년 6월 17일 정부는 경원선의 부설을 박기종 (朴琪淙) 등의 국내 철도회사에 허가하고, 그달 24일 이를 관보로 공포하였다. 9월 13일 궁내부 내장원(宮內部內藏院)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하여 경의선과 경원선의 건설을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철도직영방침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국내철도회사는 1899년 7월 21일 동소문(東小門) 밖 삼선동(三仙洞)을 기점으로 하여 원산가도를 따라 의정부를 거쳐 양주군 비우점(碑隅鮎)에 이르는 약 40km 구간에 대하여 선로측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금사정 으로 얼마 되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던 중 일본은 경의 철도자금대 부약관의 부수약관에 들어 있던 "경원철도 부설을 위하여 기채(起債)할 경 우, 일본과 먼저 협의한다."는 의무조항을 교묘히 악용, 경원선에 대한 출자권리를 내세우고, 한편으로 경원군용철도론을 내세웠다. 1904년 6월 25일 부터 시작하여 서울∼원산간 철도부설 노선답사를 조선 왕실의 제지없이 마친 일본은 그해 8월 27일 경원선을 군용철도로 부설하기로 결정하여 발표하고, 주한공사를 통하여 '일본의 경원선 부설과 경쟁 또는 병행하여 다른 철도를 부설하지 말것'과 '토지수용 등 필요한 편의를 제공할 것'을 강요하였다. 이리하여 경원선부설은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일본 국군주의의 마수에 식민지경영수단으로 빼앗기고만 것이다.
1910년 4월 용산쪽에서부터 선로측량이 시작되어 그해 10월 15일 용산에서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다시 원산쪽에서 측량을 시작, 10월에 기공하였다. 1911년 10월 15일에는 용산∼의정부 구간 31.2km가 처음 개통되었고, 1914년 8월 14일 세포∼고산(高山) 구간 26.1km가 개통됨 으로써 222.7km의 전노선이 완공되었다. 1904, 1905년 러일전쟁 무렵에 건설하게 된 용산방면 약 6.4km와 원산방면 약 12.9km의 노선을 제외하면 모두 새로 건설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4년 9월 16일 원산에서 경원선 전통식(全通式)이 거행되었다.
경원선은 추가령구조곡의 지구대(地溝帶)를 따라 건설되어 고산협곡의 험준한 지형적 장애를 상당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철령산지를 비껴 넘어야 하였고 기존 도로가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정 전반이 쉽지는 않았다. 특히, 경술국치 직후라 민간인과 의병들의 저항과 습격이 잦았다고 한다. 일본인 측량대가 헌병대의 비호 아래에서 한복으로 위장해서 야측량을 마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 단적인 예이다.
운행 초기에는 운송실적이 저조하였으나, 연변에 금강산·석왕사(釋王 寺)·원산해수욕장 등의 관광명소가 있어, 철에 따라 객차를 늘리거나 임시열차를 운행하기도 하였다. 1928년 9월 1일 원산과 상삼봉(上三峯)을 잇는 함경선이 개통되어 경원선과 연결되자, 3∼7일씩 걸리던 서울∼회령간이 약 26시간, 서울∼청진간이 약 22시간으로 단축되었고 그만큼 경원선의 구실도 커졌다.
또 1931년 7월 1일 철원에서 내금강을 잇는 금강선이 개통되자 경원선 승객이 늘어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래 군사목적으로 건설되었고 연변의 산업이 부진한데다 그 개발이 철저히 도외시되었기 때문에 운송실적은 대체로 저조하였다.
광복 후 동북지방의 개발이 활발해지자 큰 몫을 할 수 있었던 경원선은 국토분단으로 원산까지의 운행은 중단되었다. 1967년 9월에는 한달 동안에 세번씩이나 무장간첩에 의하여 폭파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985년 현재 경원선은 용산∼신탄리간 88.8km를 하루 15회 왕복운행하고 있으며 이 구간에 성북·의정부·동두천·연천 등 25개의 역이 있다. 1982년 3월 18일 경원선 복선전철화사업이 시작되어 1986년 9월 2일 성북 ∼의정부간 13.1km가 완공됨으로써 수도권 전철구간을 포함, 용산∼의정부 간 31.2km가 복선전철화되었다.
경원선은 용산에서 경부선, 경의선과 갈라진 뒤,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성북역에서 경춘선과 각각 나누어지고, 다시 의정부에서는 서울 교외선과 연결된다. 서울의 통근구간인 용산∼의정부간에 여객이 압도적으로 많고 활기찬 데 비하여 그 이북은 개발이 제한된 군사지구의 분위기가 짙다. 일반에서는 흔히 성북∼신탄리간 70.6km를 경원선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성 북역이 서울지하철노선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성북역에서 신탄리까지는 1 시간 45분이 걸린다. 여객수송(총철도여객의 약1%)에 비해 화물수송(총철 도화물의 약 1.4%)의 비중이 다소 크다.
신탄리 역에 서면 철도 종단점이라는 입간판이 크게 서있다.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조국의 땅 끝에 선 느낌이다. 경기도 연천의 신탄리역에서 다음 역은 강원도 철원역으로 연결되는데 바로 민통선 구역이다. 철원역- 월정 리역- 평강역으로 이어지는 것이고, 철원역에서 또 다른 금강산선이 갈려 져 나간다.
통일이 가까이 와 있는 요즘이고 보면 우선적으로 철도가 연결될 것이고, 그 철길을 이용하여 우리는 원산의 명사십리나 금강산을 가는 꿈을 이루게 될 것이다.
더욱이 경의선과 경원선이 복원되면 섬 아닌 섬으로 고립된 남한 땅을 벗어나 대륙으로 내달릴 것이다. 그것이 우리 민족의 살 길이니, 하여 이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남쪽을 복원된 철길로 내려올 가능성이 크다.
- 한국전쟁과 관련된 연천의 지명유래
지명(地名)이란 설화와 전설 혹은 그 지역만의 자연환경적 특성으로 이름 지어져 왔다. 가령 통현리(通峴里)는 옛날에는 험준한 고개가 있었으며 특히 구리가 많이 났었기 때문에 "구리개"라 칭하였으며 이를 한자로 의역하여 "동현(銅峴)"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오랜세월 변화되어 통현리라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설화와 전설로 이름지어지는 아름다움이 우리 산천 곳곳에 너무나도 많이 있는데 전쟁으로 인하여 기존의 지명대신 새로 이름이 지어지게 되는곳이 생기게 된다. 이것도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연천지역은 특히나 전쟁의 흔적이 많은 곳이기에 곳곳의 마을에서 바뀐 이름을 찿아볼 수 있다. 이러한 지명을 찾아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고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아름다운 새 이름으로 바뀌었으면 정말 좋겠다.
◆ 연천읍 신망리(新望里)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지역으로 국군과 유엔군의 탈환과 더불어 1954년 5월 미군 제 7사단에서 이곳을 피난민의 안착지로 개발하여 한세대당 330평방미터의부지에 목조루핑가옥 100동을 건립하고 피난민에게 분양하여 줌에 따라 희망찬 마을이라 칭하여 신망리라 부르게 되었다.
◆ 다방(茶房)거리
1954년 신망리 지역이 수복됨과 동시에 신망리는 순수한 농촌마을이고 이곳은 상업인이 집중된 마을로 연천군 관내의 최초로 다방이 개업하였다 하여 다방거리라 하였다.
◆ 고포리
이 지역의 마을을 들어 가려면 조그만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의 산끝이 새의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곧 부리 동리라 불리웠다고 한다. 또한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 이 동리앞 벌판에서 곡사포 부대가 주둔하였다. 포부대에 서 피난민을 입주시켜 부대의 대장이 동리마을을 고포리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 양수마을
전쟁 직후 이 마을에 양수장이 설치되고 그 이후 주민이 주거하게되자 이곳을 양수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 구호주택
한국전쟁 직후 1954년도에 허허벌판이던 이곳에 피난민들이 이주해 왔다. 이들을 정부에서 집을 지어주고 배급을 주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마을을 구호주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두암동
이 산골에 두견(杜鵑)새가 많이 살고 있다고 하여 두암동이라 부르게 되 었으며 한국전쟁후 주한미군 포병사령부가 주둔하고 1957년 마을이 수복되자 월남한 피난민과 경향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흥청거리는 기지촌으로 확산 변모되어 황금시대를 방불케 하다가 1970년 11월 주한미군 의 철수로 기지촌은 폐쇄되고 미군기지가 국군기지로 변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신기동
옛날에 이곳에 터가 넓고 옛날 선비들이 백일장 및 무사들의 활쏘기 대 회를 하는 큰 장터가 있어 원산에서 말을 타고 이곳에서 시장을 보고 하룻 밤을 묵은 후 다시 한양으로 시장을 보러 다닐만큼 장터가 크고 고을이 상 당히 넓었는데,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군부대가 주둔하여 마을 전체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다가 수복 후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하여 신기동(新起洞)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 통일 이야기 (비무장지대(DMZ)를 다시 본다)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를 아십니까?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는 곧 무장지대를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무장지대를 제외한 곳이란 뜻이니, 무장지대 이외의 땅이다. 아니면 무장되지 않은 땅을 말한다.
엄밀한 의미에서 비무장지대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남북 또는 좌우로 어떤 완충지대를 설정하여 허가된 특정인 이외는 출입을 금지하고 모든 군 사력이나 보급, 장비 등을 철거시킨 지역을 말한다.
휴전선 600리길 비무장지대 하면 우리의 머리에는 휴전선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우리는 곧 바로 아주 유식하게 "음, 휴전선! 155마일"을 뇌인다. 아무런 의식없이 '휴전선 155마일' 어쩌구 저쩌구 하는 매스컴의 읊조림을 따라 휴전선이 '155마일'이 되는 줄 안다.
그러나 155마일이 얼마나 되는 거리인지 감각이 없다. 왜냐하면 마일이 라는 단위가 우리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는 때문이다. 따라서 그 길이가 얼마인지 우리는 모른다. 다만 매스컴에서 떠드는 대로 155마일을 되뇌일 뿐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고, 매스컴은 아주 훌륭히 그들이 제공한 자료를 아무런 분석없이 들려주는 지 금을 닮아있다.
155마일로 알려진 휴전선의 길이는 248km이니 우리 아버지 세대의 길이 로는 620리가 된다. 너무 길고 외우기 어려운 숫자라서 155마일을 쓴다면 차라리 알기 쉽게 250km나 600리 정도가 살아있는 느낌이 되지 않는가. 155보다 600이 어려운 것일까?
휴전선은 155마일이 아니라 600리 길이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물을 수 있다. 중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주인이 있고 중심이 있는 때문이다. 남이 준 그대로를 읊조린다면 무엇으로 그들을 이길 것인가?
우리는 지금 비무장지대를 갖고 있다. 20억 7백만평의 어마어마한 땅이 'DMZ'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우리의 발길을 막은 채 우리 국토의 허리를 칭칭감고 있는 것이다. 비무장지대가 우리 땅 어딘가에 있다면 역으로 우리는 무장지대를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무장지대를 갖고 있을 뿐더러 무장지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의 정확한 존재는 비무장지대가 있다는 사실에 의해 우리가 분단된 상태에서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이며 또한 무장지대라는 위험한 곳에서 웃고 떠들고 밥먹고 편안히 잠자고 있는 셈이다. 정녕 강심장을 지니고 살아가지 않으면 미쳐버릴 그러한 상태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전쟁이 끝나지 않고 다만 휴전이 된 상태인 전쟁지대에 우 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짐짓 그러한 사실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잊고있다. 이러한 것을 안보의식이 마비되었다고 매스컴에서는 질책을 하여도 우리는 여전히 나 몰라라 하고 살아갈 뿐이다.
정전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군사적 완충지역으로 설치된 이 비무장지대는 지금도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고 있는 금단의 땅이다. 비무장지대! 지금 그 금단의 땅을 우리는 찾아가고 있다.
분단이 주는 것들
1950년 6월부터 시작된 한국전쟁은 남북의 국지전이 아니라 미국을 중심 으로 한 자본주의 국가와 쏘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 국가 사이의 국제 전이었음을 안다. 힘없는 나라에서 국제적 대리전쟁을 치루었던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 8월 이후 북쪽에는 쏘련군이 남쪽에서 미군이 각각 진주하였고, 우리민족의 의사와 상관없이 38선을 경계로 분단된 것은 우리 힘으로 해방되지 못한 사실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결론일까.
문제는 강력한 외세의 규정력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민족 자체의 역량과 그에 바탕한 유연한 대응력의 부재에서 기인했던 분단! 해방공간으로 일컬어지는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우리는 남과 북을 원수처럼 대하지 않았다. 단지 외세에 의해서 잠시 남북으로 갈라져 있을 뿐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민족의 통일에 대한 민족적 열망이 산산이 부서져 나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고자 했던 내전으로서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새롭게 재편성했다. 민족상잔의 고통은 민족을 물리적인 경계로 갈라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골을 깊게 패이게 했다. '철천지 원쑤'와 '괴뢰도당'이 되어 서로를 대하는 남북은 이제 피와 언어로 이어지는 민족적 동질성보다 사상과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으로 버거운 존재가 되어있다.
각기 다른 체제에서 오는 경쟁과 더불어 서로의 정권 안정을 위해 외부 적 긴장이 필요했던 남북의 정권은 결국 분단체제를 공고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50년을 지내왔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길고 긴 세월인 셈이다.
비무장지대의 설정
한국전쟁의 초반은 이북의 전격적인 남하로 이남은 경상도 일부지역으로 밀렸고 이후 유엔군의 참전으로 반대의 현상이 이루어져 압록강에 육박하는 경우로 변했다.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이후 전쟁은 원점에서 대치되는 상황이 되었다. 1951년 중반 이후의 일이다. 미국과 쏘련은 서로 승자가 없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를 원했다.
유엔의 쏘련대사였던 '말리크'의 휴전제의에 의해 미군은 군사적 휴전으로 제한하 면서 휴전회담에 임했다. 1951년 7월 10일부터 개성에서 시작된 회담은 7월 26일 회담의 의제를 확정하여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갔다.
휴전회담의 의제는
①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문제
②휴전감시기구의 설치
③포로교환문제
④한반도문 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관계국 정부에 권하는 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첫번째 의제인 군사분계선 설정문제에서부터 서로의 입장은 팽팽히 대립하기 시작했다. 즉 휴전을 할 경우 무엇을 근거로 서로의 군사분계선을 정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유엔측은 현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삼을 것을 주장한 반면 북한측은 현 전선과 상관없이 38선을 중심으로, 남북 각각 10km씩 후퇴하여 폭 20km의 비무장지대 설치를 주장했다. 서로 양보하지 않는 의견의 대립때문에 회담은 8월 23일부터 두달이나 중단되었다.
다시 회담을 시작한 것은 개성이 아니라 판문점이었는데, 때는 가을 바람이 차가와지기 시작한 10월 25일이었다. 판문점에서 재개된 회담에서 북한측은 그동안의 의견을 바꾸어 유엔측의 주장에 접근하였다. 즉 현전선을 기준으로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는 것이었고 전선조정이 필요한 몇 군데를 빼고는 서로 2km씩 철수하여 폭 4km의 비무장지대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유엔측은 한국정부의 강력한 요청과 개성의 정치적, 상징적 중요성 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성을 확보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북한측 이 군사분계선 문제에 대하여 유엔측의 주장을 수용함에 따라 유엔측이 개성확보에 집착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결국 여러 차례의 협상 결과 개성(開城)의 확보 문제는 포기되고 11월 27일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설정 협정이 조인되기에 이르렀다.
그 요지는
㉠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 현 접촉선 을 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각각 2km씩 폭 4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한다㉢ 이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는 30일 이내에 휴 전협정이 조인될 경우에 한하여 유효하고 만일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군사분계선은 휴전협정이 조인될 당시의 접촉선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 합의로 전쟁은 더욱 치열한 양상을 띄었다. 즉 이후 협상에서 우위확 보를 위한 계속적인 고지점령과 군사압력 강화작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편에 의해 다른 편이 완전하게 제압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계속된 소모전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교착상태였던 것이다.
합의한 지 30일이 지나도록 휴전은 성립되지 않았고 협정은 효력이 상실 되었다. 그러나 이후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 약간의 수정을 거쳐 거의 그 내용이 포함되었다. 포로교환문제에 대한 협상이 예상보다 지연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 정이 최종적으로 조인되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지 못하고 '휴전이 되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휴전상태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전문 5조 63항으로 이루어진 휴전협정의 제1조에서는 군사분계선과 비무 장지대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군사분계선을 기점으로 남북 2km 지점의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에 표지를 세우고 이 지역에 대해서는 군사정전위원회의 감독을 받도록 한다." 이에 따라 일정한 규격의 표지판 1,292개(유엔측 696, 북한측 596)가 세워졌고 이 표지의 유지를 위한 책임구역도 양측에 의해 정해졌다. 또한 쌍 방이 모두 비무장지대 안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를 향해 어떠한 적대행위도 감행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비무장지대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지만 민간행정이나 구제사업을 위해 서는 군사정전위원회의 허가 아래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한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1,000명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없이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군사분계선 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이와 같이 비무장지대는 출입이 제한되었지만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있는 판문점 구역은 쌍방이 공동으로 경비하고 있는 비무장지대 안의 특수지역이 되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은 이 지점을 통과하는 군사분계선을 중심으로 반경 400m의 원형으로 설정되었다.
또한 비무장지대 안에는 대성동에 있는 한 국측의 자유의 마을과 북한측의 평화의 마을이 있어 민간인들이 살고 있다.
비무장지대의 활용방안 - 평화협정의 체결
휴전선 600리를 따라 설정된 비무장지대는 양측의 무력충돌을 방지하는 완충적 장치인 중립지대로 휴전협정의 가장 의미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양측의 휴전협정의 준수여부는 비무장지대의 존재 의의에 커다란 영향을 줄 것이다. 그러나 비무장지대 안에서 양측의 협정위반 행위는 휴전 직후부터 계속 되었으며 이를 감독하기 위해 조직된 군사정전위원회의 회의에서는 서로 상대방의 협정위반을 주장하고 있다. 양측은 비무장지대에 군사시설을 증축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비무장지대에는 요새진지, 방벽, 철책, 지뢰 등이 설치되고 심지어 군병력도 배치되었다. 그런 때문에 우리는 비무장지대 밖 무장지대에 살아가고 있음에도 비무장지대를 떠올리면서 전쟁의 냄새를 맡고 있는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다.
동.서독의 베를린 장벽과 더불어 냉전시대의 유물로 전세계에 알려진 남.북한 사이의 철책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제 세계의 시선은 한 눈에 받게되었다. 그러면서 1990년대 들어 냉전 종식의 분위기에 따라 비무장지대에 대한 평화적 이용방법에 대한 논의가 한국측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왜냐하면 역으로 사람들이 통제된 비무장지대는 또 다른의미에서 축복받은 땅이 되었다. 동물과 식물에게는 그 부자유가 애초부터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 넘나들면서 생태의 보물창고를 이루어 낸 것이다. 자연보호의 현장이 이루어졌던 것이니 세계에서도 이처럼 좋은 자연보호의 본보기를 만들어 낸 곳이 없다. 역사의 아픔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비무장지대의 활용에 대한 제안과 계획은 현 시점에서 별 의미가 없 어 보인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군사대결 구조를 평화구조로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게되면 비무장지대에 대한 평화적 이용에 대한 합의는 자연스레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단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적보다 더 깊은 증오심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루었던 사실에서 오는 극도의 적대감과 서로에 대한 불신이었다. 그러나 통일된 조국에 대한 열 망이 단순한 감상적 수준의 것이 아니라면 문제는 간단하게 풀릴 수 있다. 즉 서로간의 적대적 감정을 줄이는 일부터 할 일이다.
그렇다면 서로의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는 문제들을 풀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지금의 휴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전환할 일이다.
북한이 비무장지대에 한꺼번에 들어와 휴전협정을 의도적으로 까뭉개는 심사는 바로 이러한 휴전협정의 무효화를 노리고 행하는 고도의 전술이다. 물론 그것이 남한의 총선이나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 도움을 주는, 즉 김 영삼이나 클린턴의 선거참모들 100명의 역할을 한꺼번에 해 준 것이지만 동시에 전세계의 이목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주장하는 휴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 변경은 반드시 필요한 일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미국이나 남한 정부는 그것을 반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 미국과 남한의 정부가 4자회담(남.북한, 미.중국)을 제의했다. 이 가운데 중국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하게 담은 채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중국의 처지에서 한반도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함은 곧 동 아시아의 역학관계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시에 미국은 일본이나 쏘련을 포함한 2+4를 배제하고 중국을 격상시켜 냄으로써 현재 교착상태에 있는 미국과 중국관계를 개선하는 알먹고 꿩 먹는 재미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4자회담 제의는 북한이 주장하는 미국과의 1 대 1 단독협상 강조를 희석시키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단독협상은 지금 미국의 입장에서는 할 수도 있다.
미국의 처지에서 보면 북한과의 관계개선은 그리 힘든 것이 아 니다. 그들이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늘 북한의 호전적인 군사도발을 들먹이며 그러한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무시해왔다. 어쩌면 북한의 주장처럼 미국과 남한의 도발이 더욱 남북관계를 경색되게 해왔는지 모른다. 미국을 상대로 이길 수 있 는 나라는 지금 지구상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이 두려워하는 상대는 남한이 아니라 미국이다.
또한 북한은 휴전협정의 당사자가 북한과 미국이라고 보고 있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측은 곧 미군을 의미했던 점에서 그러하며 지금 유엔 군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군사정전위원회의 구성도 미군이 중심인 점에서 그것이 억지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남한은 철저히 배제되어왔다.
1951년 휴전회담 제의와 협상 타결에 이르기까지 남한은 항상 들러리 역할이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도 그리 달라진 점이 없어 보인다. 북한은 휴전협정 이래 유엔측과 단독으로 협상해왔다. 중국이나 쏘련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독자적 논리와 대응으로 회담에 임했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남한은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한국전쟁 당시 군사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이래 모든 군사적 회담과 협상에서 미군에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한미연합사'라는 기구가 있지만 실질적인 영향력과 기구구성에서 남한은 보조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을 뿐 이다. 그것은 지금도 북한이 주장하는 회담제의와 협상에서 명분과 협상력에서 밀릴 수 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런 때문에 지금까지 정권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친미적일 수 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것은 의연히 계속되는 확대재생산 구조일 수 밖에 없다. 이제 문제는 휴전협정 체제를 파기하고 평화협정 체제로 나가는 길이다.
말 그대로 단순히 전쟁을 멈추고 있는 상태인 휴전이 아니라, 평화로운 상태로 이행되는 평화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북한은 끊임없이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하는데 미국과 남한은 휴전협정 준수만을 강조하고 있다. 평화와 민주는 북한이 아니라 남한과 미국의 상표로 알고 있는데 말이다.
거기에는 한국현대사의 아픈 진실이 숨겨져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북한 은 줄곧 외세의 배격, 즉 미군철수를 모든 회담과 협상의 첫 머리에 들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미군이 철수하면 곧 북한의 침략이 들어닥칠 것이며 남한은 곧 공산화된다는 논리를 믿고 살아왔다. 그런 이유로 미군철수만 은 결단코 막아야 한다는 명제를 진리처럼 떠받들고 있는 셈이다.
21세기를 몇 년 앞 둔 시점에서 외국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나라는 지구상에 몇 나라 밖에 없다. 남한과 독일과 일본, 그리고 필립핀 정도 일거다. 독일이나 일본은 세계 2차 대전의 패전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전승국이었던 연합군이 주둔하였던 역사적 사실에서 오는 결과였다. 또한 필립핀은 미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었고, 필립핀 선거혁명 이후에는 당당하게 미군의 기지사용료 및 기타 부대시설에 대한 사용료를 받고있다.
그렇다면 남한은 그 무엇인가? 미국은 남한이라는 나라가 어여뻐서, 이 나라 백성이 너무 착해서 이 땅을 지켜주고 있는 것일까? 지금도 우리는 미국이 자유를 지키는 우방이며 피를 나눈 맹방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속삭임은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과 계산을 배제한 단순한 짝사랑일 뿐이다.
미국이 이 땅에 제너럴 셔먼호로 대동강에 나타났던 때, 신미양요로 강화도 광성보의 조선수비군 300여명을 몰살했던 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로 하고 미국은 필립핀을 식민지로 삼기로 했던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맺던 때, 1940년대 전쟁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상해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기로 정했던 때, 1945년 9월 인천에 처음 상륙하여 점령군으로서 포고문을 내리던 때,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미군들의 범죄를 우리의 법률로 다스리 지 못할 때, 그들의 이익을 위해 야비스러운 정도로 남한만을 상대로 슈퍼 301조를 내밀 때, 미국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되묻게 한다.
오늘날 미국의 무역적자를 확실하게 메꾸어 주는 '봉'같은 나라 남한은 미국에게 정녕 사랑스런 땅일지도 모른다. 미군이 처음 해외주둔군으로 배속될 때 "South Korea!"라고 지명되면 터져나오는 그 환호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군의 입장에서 남한은 천국,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개인화된 미군만의 일이 아니다. 국가로서 미국이 갖는 남한에 대한 태도에 다름 아니다. 지금도 활개치고 다니는 미군과 예전 통일된 신라에 주둔했던 당나라 군 대와 무엇이 다른가? 또는 고려의 몽고군과 무엇이 다른가? 원세개가 이끌고 들어왔던 청나라 군대와 무엇이 다른가? 외국군대는 아무리 아름다운 미사여구로 수식을 한다해도 외국군대이며 외세임에 분명하다. 그것은 자주적 독립국가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것을 우리는 세련된 말로 일러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우방 미국의 시혜쯤으로 안다.
미군이 철수하면 곧 망할 줄 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미군이 3만명 주둔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미국이 있기 때문에 북한의 침략을 막는 전쟁억지력이 있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북한이 남한을 침략해도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객관적 사실을 그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경제력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북한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북한의 도발을 정기적으로 일깨워준다.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이런 형편에서 우리는 자주적 국방태세를 갖출 수 없게된다는데 있다. 미군이 제공하는 정보와 미군이 만든 무기로 무장하고 그들의 작전명령에 따라 전쟁을 치를 수 밖에 없는 이 현실은 미군이 주둔해 있는 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이다. 우리는 미군의 눈치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미사일 하나 제대로 만들 수 없고, 독자적인 국방체제를 갖출 수 없다.
이라크 전쟁 때 효능을 의심받던 패트리엇 미사일을 고마와하며 사줘야하고 자동차 몇 천대를 팔아야 가능 한지 모를 전투기 한 대, 미사일 한 대를 사야한다. 미국은 영원한 우방일 수 없다. 우리는 일본이나 중국, 그리고 러시아를 사이에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효과적인 이용은 필수적이다. 그것은 '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자주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일본 국민학생을 집단 성폭행해서 불거져 나온 오끼나와의 미군 주둔 반 대는 곧 바로 한국에 그 부대의 일부를 배치한다는 미국측의 주장으로 이 어졌다. 왜냐하면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란다.
북한군이 비무장지대에서 행한 휴전협정 무시 행위는 그들의 전술일 뿐 이다. 그것은 또한 궁극적으로 휴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려 는 북한측의 해프닝이다. 휴전협상의 대상이 북한과 미군이라면 평화협정 의 중심은 남한과 북한이 되어야 한다. 휴전협정이 서로의 군비강화와 상호 비방과 적대적 관계의 상승적 구조 를 재생산해 냈다면 평화협정 체계는 외세의 개입이 아닌 민족내부 문제로 서 군비축소와 통일기반 조성을 위한 제반 업무를 담당해야 한다.
통일로 가는 길
비무장지대! 1951년 7월에 시작하여 2년을 끈 길고 긴 휴전협상의 기간동안 남북은 그 전보다 더 큰 희생을 치러야 했고 53년 7월 27일 밤 10시를 기해 남과 북의 군사행동이 중단되면서 만들어진 국토의 중간에 길게 가로 놓여진 땅, 그곳을 우리는 비무장지대라고 부른다. 그 광활한 땅을 우리는 46년간 들어가보지도 못한 채 살아왔다. 아니 일부러 잊어버리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금단의 땅은 그 나름으로 또 다른 생명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생태학의 보고로서 철새들의 안온한 휴식처로서. 이제 우리의 분단도 이러해야만 한다. 남이나 북의 어떤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의 획일적인 체제에서 오는 경직성이나 남한의 상대적인 빈부격차를 모두 줄이는 보다 세련된 민족국가를 꿈꾸어 본다.
통일된 조국은 결코 약하지 않은 나라일 수 있다. 세계적으로 20번째안에 드는 나라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강력한 군사적인 나라가 아니라 문화대 국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남북이 경험한 체제의 장점을 이 어받고 서로를 구속했던 굴레를 벗어남으로써 오는 상상력의 풍부함에서 기인한다. 이제 통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보인다.
남북의 처지에서 보면 북한을 자극하고 두렵게 하지 말아야한다. 그만큼 남한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의 가슴이다. 분단이 휴전선에만 있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 가장 두려운 우리의 가슴속에 있는 경쟁과 분단의식이 문제일 수 있다. 5천년의 역사에서 50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닐 수 있다. 다시금 시작할 일이다. 모든 문제는 우리의 시각에서 새롭게 시작해야한다.
72년 어느 날 남북의 사람들이 모여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것을 우리는 7.4 공동성명이라고 한다. 그것은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이라는 통일의 3원칙을 천명한 것이었다. 그것이면 모든 것은 족하다. 그 이외를 논하는 것은 통일을 원하지 않는 자들의 푸념일 다름이다.
우리민족은 늘 대륙으로 향하여 나갈 때만이 승리하는 역사를 일구어왔다. 우리는 한강을 건너고 대동강을 지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벌판을 달리고, 혹은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유럽 땅으로 가고 싶은 것이다. 남북이 가로 막혀 좁은 땅 덩어리에서 아둥바둥하며 그나마 영.호남이 아웅다웅거리며 살고 있는 이 속좁은 세상, 섬이 아닌 섬이 되어버려 대륙의 웅혼함을 잃어버린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옛 고구려 무사들이 말달리던 기상을 알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민족의 참모습일 것이다. 이 섬 아닌 섬을 벗어나 기차타면 평안도 아줌마의 시끄러운 사투리와 함경도 아저씨 의 옹곧은 표정을 싣고 대륙을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우리 손자 손목잡고 금강산 유람하는 것이 소원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또 다른 소원이 있다면 압록강이나 두만강 가에 아름답게 서 있는 국경수 비대에서 즐겁게 근무하고 있는 아들이나 손자의 자랑스런 눈빛을 바라다 보는 것이다. 적이 아닌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이 불행한 역사는 끝장내야만 하는 것이다.
반민족적인 역사는 끝내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될 것이기 때 문이다.
- 전곡리 선사유적지
전곡리 - 구석기의 보물창고
전곡리 유적이 발견된 것은 1978년이었다. 그 때는 바로 대통령 박정희의 길고 긴 17년 장기독재를 죽음으로 끝내기 1년 남짓 남겨놓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유신독재의 막바지를 더욱 숨막히게하는 것은 정부의 긴급조치 발동과 휴교령이었고, 민주화와 자유를 갈망하며 경찰에 쫒기던 젊은 대학생들의 한숨소리가 한반도를 가로지르던 때였다. 바로 이때 전곡리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되었다.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준 한반도 최대의 전기구석기시대 유적이었다. 특히 이 곳에서 발견된 구석기는 당시 억압적 사회분위기를 단번에 뚫고도 남을 통쾌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구석기로,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만 발견된다고 믿어지던 것이었다. 바로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에만 발견되었던, 그래서 아시아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발전이 느린 지대였다는 증거로 쓰였던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였다. 그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전곡리에서 출토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아무도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가 서구지역의 그것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세계 구석기 문화에 대한 서 구학자들의 오만한 전통적 시각은 달라질 수 밖에 없었으며 한국구석기 문화연구에서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동아시아 구석기문화에 대한 세계적 인식 변모시켜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는 타원형이거나 끝이 뽀죽하고 납작하게 생겼으며, 몸통의 많은 부분을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구석기 사람들이 처음 석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에는 석기의 한쪽만을 가공하여 만든 '찍개' 들만 나타나지만, 150만 년이 지난 이후에는 석기제작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비로소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나타났던 것이다.
미국의 유명한 구석기 고고학자인 모비우스(H. Movius)교수는 1940년대 에 동아시아의 구석기 공작(工作)을 연구하여 유럽과 아프리카의 구석기 문화와 비교한 후, 유럽과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아슐리안 석기문화가 나타 나며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지속적으로 단순한 찍개문화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동아시아 구석기문화가 서구의 그것에 비해 정체되었다는 주장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동아시아 구석기학자들의 반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동안 이를 증명할 만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모비우스 교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곡리에서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동아시아에서 단순한 찍개문화만 지속되었다는 주장을 할 수 없게되었던 것이다.
전곡리 유적의 발견으로 서구의 고고학자들은 세계 구석기문화의 지역적 분포에 대한 전통적 시각을 바꾸게 되었으며, 외국의 고고학 교과서에서도 전곡리 유적은 아슐리안유적으로 표기되었다. 이러한 전곡리 유적은 단순히 서구인들의 생각만을 바꾼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전곡리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구석기 연구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 지적과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산서(山西)지역에서 발견된 바 있는 전곡리 주먹도끼와 유사한 석기들을 대형첨상기(大型尖牀器)라는 중국 고유의 용어로 부르고 있 었는데, 이제는 구석기연구에 사용되는 분류용어를 서구의 것으로 전환하여 이들을 주먹도끼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전곡리의 아슐리안형 석기의 발견은 이렇듯 한국구석기연구 뿐아니라, 국제적적으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킨, 세계구석기 연구사에 일대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구석기인들의 삶의 터전- 석기를 만들던 현장 전곡리
유적지에 대한 발굴작업은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 교수의 주도로 1979년부터 1차 발굴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10차에 걸쳐 발굴작업 이 이루어졌다. 1차발굴당시 이 아슐리안 유적이 극적으로 발견되었다. 그 당시 국내 저 명한 구석기학자들이 모두 모여 합동으로 실시된 이 발굴작업에서 그들이 경험했던 그 흥분과 설레임을 어떻게 표현할까?
전곡리 유적지를 걸어다니면 발밑에 하얀 석영석기들이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발견될 때마다 "아, 여기도!"하며 터지는 들뜬 함성소리가 언덕을 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10차례의 발굴이 전곡리 일대에서 실시되었는데 약 5천 점 이상의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이들 석기중에는 주먹도끼 외에도 많은 양의 박편(剝片), 몸돌, 조각돌, 부스러기돌 등이 채집되었는데, 이러한 석기들 중에는 떨어져 나간 부분이 서로 맞아떨어지는 접합석기편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석기제작이 이루어진 현장이 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 동안의 발굴작업에서 전곡리 일대가 거의 모두 구석기 유적지임이 확인되었으며 또한 강을 따라 이와 유사한 퇴적층이 발견되는 많은 지점에서 수집된 유물 또한 구석기유물이었다.
발견된 유물을 통해볼 때 전곡리에 살았던 구석기사람들은, 현무암 분출로 크게 평탄해지고 넓어진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을 오르내리면서 다양한 식물자원을 채집하고 노루나 사슴같은 짐승을 사냥하고 살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전곡리 유적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며 한반도 구석기인들의 생활에 담긴 비밀을 푸는데 많은 열쇠들이 속에 담겨 있을 것이다. 실제로 발굴에서 수집된 자료들은 구석기 연구의 방법론을 개선하는데 엄청난 기여를 했다.
중국의 지아 란포매(賈蘭坡) 교수가 내세운 동아시아 구석기 발전 이원론의 문제점이 전곡리 구석기자료에 의해 구체적으로 지적되었으며, 또한 구석기유적이 퇴적된 다음에 땅속에서 얼마만큼 훼손되는가에 대한 판단기준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 연구를 위해 1986년의 발굴작업때에는 땅속에 있는 벌레구멍을 일일이 세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이것은 구석기연구의 방 법론적인 기초를 제공하는 것으로 평가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연구가 진행중이지만 석영재료나 규암제 석기의 박리구조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발굴에서 채집되었으며 석기의 기능 판단이 어려운 무가공(無加工)석기로 구성된 석기공작(工作)을 분류하는 기준이 앞으로의 분석에서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석기분석방법론은 아마도 앞으로 석기연구의 새로운 시도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세계적으로 '전곡리식(式)' 석기공작의 기능에 대한 연구방법으로 정착될 수 있을 것이다.
전곡리 유적을 보존할 유적관을 세워야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찾으려고 몇 번을 사람들이 알려준 길을 따라 갔다. 그 들머리를 못찾아 몇 번인가를 되돌아 오고 다시 사람들에게 묻고. 한탄강 유원지를 알리는 커다란 표지판에 비해 전곡리 유적을 알리는 표지는 그리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전곡리 유 적은 황량한 벌판 그 자체였다. 거기에는 정녕 동아시아 구석기 역사를 다 시 써야했던 아슐리안 주먹도끼도, 하다 못해 돌 조각 한편도 볼 수 없었다. 전곡리 유적지에는 찬 바람만 언덕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황량한 벌판이 유적지라니. 그 당혹감과 황당함은 저 아래녘 유원지의 번듯한 팻말과 요란한 놀이기구와 겹쳐져 우울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전곡리 유적은 약 23만 여 평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그 보호구역 서편 언덕에 전곡리 유적관이 하나 덜렁하니 서 있다. 그러나 실 상 그것이 유적관이라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조그만 팻말에 유적관이라고 씌여 있으니 믿을 수 밖에. 그나마 그 유적관은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거기에는 전화번호로 유적관 관리인의 연락처와 전화를 미리 하면 유적관을 열어 관람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실상 이 유적관은 발굴당시 발굴단의 숙소 겸 현장사무소였다고 한다.
당시 전곡리 유적의 발견과 그 1차발굴 경과보고가 TV에 나가고 각 신문 에 대문짝만하게 실리자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발굴을 적국적으로 도와주라고 지시하고 김계원 비서실장을 발굴현장에 내려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관심은 곧 정부의 고위관리와 지역 지방유지들이 발굴현장에 연이어 나타 나게 하고 발굴단에게 흥분 속에서 유물을 수습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분 위속에서 발굴단의 숙소 겸 현장사무실로 쓸 조립식 건물을 지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유적관이다.
이 건물 뒷 마당에는 허술하게 만들어진 선사주거지의 움집이 있는데 이것은 1993년 이래 매년 5월 5일 동아시아 고고학연구소가 개최하는 생활고 고학 강좌의 부설물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뒷쪽에는 고 삼불 김원룡 선생의 기념비가 서 있다. 김원룡 교수는 전곡리 유적 발굴의 1등공신이다. 사실 전곡리 선사유적 의 발굴의 동기는 한 미군의 제보에 의한 것이었다. 동두천 소재였으니 캠프 케이시라는 미군부대 소속인가 보다. 이름은 보웬(Bowen, G.)이라고. 이런 경우를 우리는 무어라 할까.
전곡리에는 선사시대 이후 사람이 살 지 않았을까. 이상하게 생긴 돌을 보고도 그냥 누가 장난치고 놀았던 돌멩 이 쯤으로 알았던 사람들이 우리들이 아니었을까. 하필이면 자랑스런 그런 역사적 유물을 처음 제보한 사람이 미군이라니! 한탄강의 숱한 사람들은 물놀이만 하다가 갔나보다.
한탄강을 모태로 한 훌륭한 문학작품이나 멋진 시(詩)가 아직 안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지 도 모르겠다. 여하튼 그 미군이 주워온 주먹도끼를 처음 본 김원룡 교수는 손수 여러 차례 이곳을 답사하며 유적을 확인하였고 1차발굴을 통해 아슐리안 주먹도 끼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기쁨과 열정에 차 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러나 그를 기념해 이곳에 세워진 기념비는 아직 쓸쓸해 보인다. 그것은 아직 도 이곳에 상설 전시관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 진행중인 전곡리 유적 종합 보고서가 나오면 정녕 이 땅의 자랑스런 역사를 간직한 이 곳에 아름다운 유물전시관을 볼 수 있겠거니, 한 여름 저 아래 한탄강 유원지의 물장구와 함께 즐거운 역사의 현장이 되리라 믿는다.
그날을 하루바삐 보고 싶다.
- 회암사터 (영화와 퇴락을 겪은 회암사(檜巖寺))
경원선 철도의 의정부에서 주내를 지난 20분 거리의 덕정(德亭)에서 내려, 버스로 15분거리인 동북쪽 6km 지점의 천보산 (天寶山424)남록에 회암사가 있다. 회암사 가는 길이 멀고 힘든 시절도 있었지만 요즈음에는 의정부에서 바로 檜巖寺행 버스를 타면, 州內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광사, 상삼을 지나 속정을 거쳐 회암3거리에서 꺾어 왼쪽(北) 내회암리 종점에 닿는, 25분 간격으로 35분 걸리는 노선이 있어 편리해졌다.
내회암의 북은 서북의 동두천에서 남동으로 길게 뻗어내린 천보산(天寶 山) 자락이 막고 있는데 그 주봉(主峰)은 서북의 칠봉산(506)이다. 내회암 마을 지나 동쪽으로 산뿌리를 타고 400m쯤 걸으면 군부대 뒤쪽의 골짜기가 된다. 골짜기 북쪽은 우뚝 솟은 암봉(岩峯)을 이루고 있다. 이 골짜기의 오른쪽 구릉 너머에는 넓디 넓은 옛 회암사터가 자리하고 있고, 골짜기를 따라 700m쯤 오르면 세 개의 산자락이 뻗어내려와 가로막게 되는데 가운데 자락의 왼쪽(向左) 계곡 비탈에 현재 회암사의 전각들이 있으며 그 등성이에는 북에서 남으로 나란히 나옹(懶翁), 지공(指空), 무학( 無學)의 세부도가 서 있다.
천보산 정상에서는 200m 아래쪽에 자리한 셈이 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모두 선,교(禪,敎) 양종중에 선종인 조계종(曹溪 宗)으로서, 고려의 공민왕(恭愍王)에서 조선의 성종(成宗)에 이르기까지 회 암사는 선교양종의 으뜸 사찰이 되었다.
특히 나옹왕사에 의해 262칸이라는 크나큰 가람(伽藍)으로 중건되어졌는데 특히나 인도에서 온 지공에 의하여 중인도의 나란다사와 닮은 곳이라는 인연때문에 중건될 때에 나란다사의 가람배치와도 어느정도 깊은 영향을 입었을 것으로 여겨져 국제적인 성격을 띤 사찰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선 시대에 와서는 태조가 무학왕사를 이곳에 머물게 하며, 스스로 7차례나 들르고 태상왕(太上王)이 되어서는 그의 은신처로 삼는 등 나라와 왕가의 원찰(願刹)로 존재하면서 항상 선교양종의 으뜸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청평사와 봉은사를 비롯한 조선시대 가람배치와 조형물에 영향을 미치는 본보기가 되었으나 19세기 전후의 어느사이부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으로 폐사(廢寺)가 되어 한 채의 전각도 없이 절터만 남아오고 있다. 현재는 본 절터에서 700m쯤 떨어진 북쪽 골짜기 비탈에 회암사의 이름으로 자리잡은 제법 큰 새절이 그 법통을 이어오고 있는 실정이다.
회암사터에는 뛰어난 석조 유물들이 몇 남아 있어 그나마 옛 영화를 알게 해주고 있는데 보물들로 지정된 [보제존자시선각탑명(普濟尊者諡禪覺塔 銘)]비(보물 387)와 [대선사사암존자탑(大禪師妙巖尊者塔)](보물 388) 그리 고 사암존자탑앞에 서있는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보물 389) 등과 보우(普 雨)스님의 묘탑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浮屠)(약 6.0m), 대형의 석조(石槽)와 맷돌 그리고 당간지주(幢竿支柱)등이, 8단으로 이루어진 절터의 건축기법과 더불어 옛절의 품격을 추측하게 하고 있다.
산 중턱에 있는 현재의 회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인 봉선사(奉 先寺)의 말사로 되어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회암사는 보제존자 선각왕사 나옹(普濟尊者 禪覺王師 懶翁)(1320∼1376) 스님이 머물게 됨으로써 그 이름이 높아졌으며, 1376년 4월15일에 262칸이나 되는 대가람의 규모로 중건 낙성하였다. 그리하여 고 려 최고의 사찰이 되어 국가와 왕실의 원찰(願刹)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회암사가 언제부터 시작이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가장 오랜 회암사에 대한 기록으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서, 1174년 (고려 명종4)에 금나라의의 사신이 회암사에 왔다갔다라고 적혀 있어 1174 년 이전에 이미 제대로 된 사원이 갖춰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뒤로 보우(普愚)(1301∼1382)가 1313년에 회암사에서 13세의 나이로 출가했음이 그의 묘탑비문에 나와있어 절의 존재를 알려주며,{고려사}와 김수온의 {회암사중창기}에는 지공(?∼1363)이 천력년간(天曆年間)(1328∼ 1329)에 회암사를 보았다(1328년에 지공이 원나라에 갔으니까 이 해에 회암사로 들린 것이 된다)하고 있다. 보우는 원나라에서 지공 밑에 있다가 1358년에 귀국하는 나옹에게 회암사에 머무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1363년(공민왕12)에 열반한 지공의 두골 (頭骨) 사리가 1370년 1월에 궁궐로 왔던 것을 이해 봄에 회암사로 옮겼는 데 나옹도 와서 친교례 (親見禮)를 올리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회암사는 1174년 이전부터 벌써 크게 이름이 나 있었으며, 1370년에 이르기까지, 보우가 출가하고 나옹이 깨달은 곳이자 지공까지 이곳에 와 둘러보고 그 유명한 중인도의 나란다사(阿蘭陀 寺)(N landa)와 꼭 닮은 곳이라 하여, 인연이 깊은 절로서 존재해 오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나옹이 여기에 머물게 됨으로써 절 이름은 더욱 높아지고 가람은 중흥되어 웅장하게 되었다. 처음 나옹은 회암사에 와서 절을 중건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53세 되던해에 스승 지공의 가르침을 깨달아 회암사에 중 흥불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2년만인 1376년 4월에 중건 기념으로 미리 성대한 문수회(文殊會)를 열었고 이어서 4월 15일에 완료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옹은 완공을 보지 못하고 머나먼 경남 밀양의 형원사로 옮기 도록 명을 받아 병중의 몸으로, 5월 2일에 한강에 닿아 배를 타고 신륵사 (神勒寺)에 5월 15일에 와서 그만 열반하고 만다.
한편, 나옹의 제자 각전등에 의하여 마침내 회암사는 완공이 되니 무려 262간이나 되는 중국에서도 보기드문 굉장하고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게 되었다. 이때의 가람규모와 배치는 이색의 {목은집}에 자세하게 나와 있어 그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의하면 남향을 한 5칸짜리 보광전 (普光殿)을 중심으로 그뒤에 설법전(說法殿) 5칸, 사리전(舍利殿) 1칸 또 그뒤에 정청(正廳) 3칸이 북으로 나란히 자리잡고 이들 앞뒤 좌우로 수많 은 종류의 건물이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몇가지 특징적인 것을 살펴보면, 절의 입구쪽에 [양로방(養老房)]과 [연 실(沿室)]이 눈에 들어와 주목된다. 양로방은 절의 노승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세간의 노인들을 봉양하는 곳인지 알 수 없으나 연실과 더불어 매 우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광전 동쪽의 약간 남쪽에 향나무숲이 있다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경내에 조경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꾸몄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회암사에는 15척이나 되는 불상과 10척 크기의 관음상 (觀音像)이 7구나 모셔져 있다는 기록도 주목되는 것이다. 나옹에 의한 이러한 대가람의 중창구조는 이미 지공이 회암사의 자리잡 은 위치가 인도 아란다사와 같다고 하였으므로 여기에 배치된 건물들도 아란타사와 결코 무관하게 세워지지 않았을 것으로 여길 수 있다는 것도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이다. 곧 1687년 봄으로 훨씬 뒤의 기록이지만 동계(東 溪)가 적은 [대국사사적기(大國寺事蹟記)]에 인도 영향을 입었음이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회암사의 이같은 가람배치는 조선시대의 청평사와 봉은사에도 본보기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391년 2월에는 공양왕이 회암사에 와 친히 향로를 받들고 왕비, 세자와 더불어 철야예불을 올렸으며, 이에 대하여 새로운 사대부들은 마구 비난하 면서 불교가 부도덕한 것이라 하고 있어 시대적인 상황 변화에 따른 흐름을 맞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암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거센 사대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원찰(願刹)로 계속 지켜져 나아가고 있다. 태조는 왕에 오르기전부터 다닌 회암사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으며 왕에 오르고 그 다음해에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하여 놓고 많은 불사법회의 참석으로 무려 7번이나 다녀갔을 정도로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하였다.
후에 태상왕이 된 태조는 나옹 이후의 중건을 주지 무학과 함께 머물면서 하였고, 무학에게 계(戒)를 받아 스스로 육식을 금하였다. 그리고 무학의 묘탑(墓塔)을 미리 만들어 놓았으며 무학이 열반에 들자 그 탑에 안치 하고 탑비를 세워 주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상왕의 신분으로 회암사에 많은 논과 밭을 600결 가까이를 내 리는 등 1408년(태종 8)에 태조가 돌아갈 때까지 회암사의 그 세력은 대단하였다. 세종 6년인 1424년 4월 선,교 양종으로 모두 폐합할 때에 선종에 속한 회암사는 선교를 통틀어 다른 절의 2, 3배가 되는 500결의 논과 2배가 넘 는 250명의 승려가 머물고 있는 조선 최대사찰이었으며 나라의 원찰로서 큰 역할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434년 4월 10일(세종16)에 회암사의 중수를 위해 연 [경찬대회 (慶讚大會)]를 빌미로 유신(儒臣)들이 들고 일어나자 이에 사헌부의 압력 으로 부녀자의 사찰숙박 및 불사를 금하는 조치를 강구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세종임금은 여전히 회암사에 관심을 가지고 힘이 되어주고 있으며, 1435년 3월에서 9월(世宗17)에는 태종의 둘째이자 세종의 형인 효령대 군(孝寧大君1396∼1486)이 불법을 가까이 하여 회암사의 중수불사를 이루 도록 도와 주고 있다.
세조때에도(1457) 회암사는 얼마간의 중수를 했으며 성종때 와서, 중창 한 나옹 이래의 큰 불사인 세번 째 중창을 하게 되었다. 곧 1472년 2월 5 일(성종3)에 세조비인 정희대비가 정현조와 정양사 주지 처안(正陽寺 住持 處安)으로 하여금 폐사가 되다시피한 회암사를 다시 크게 중창을 하고 있 다. 이에 대한 유신(儒臣)들의 반대도 대단하여 심지어 1490년 5월 15일(성 종21)에 박은손이 회암사의 금불(金佛)을 훔쳐갈 정도에 이르렀다. 연산군에 들어와서, 서울의 사찰을 무너뜨리고 불상을 성밖으로 내보낼 때 선종본사(禪宗本寺)인 흥천사(輿天寺)의 불상을 1504년 8월 15일(연산군 10) 회암사에 옮겨가게 하였다.
명종때에 와서는 왕의 어머니이자 중종비였던 문정왕후 윤씨가 선교양종 을 다시 설치하고 승과(僧科)를 행하는 등 보우(普雨?∼1565)를 내세워 불교중흥을 꾀하였다. 이에 회암사는 [태종대왕 능침사(陵寢寺)]로서 미리 보우와 함께 큰 불사를 계획하여 1565년 4월 5일(명종20)에 큰 법회를 열었으나 왕후는 애석하게도 사흘간에 걸친 4월 8일의 해제일을 보지 못하고 4월 7일에 그만 죽고 말았다. 문정왕후는 이 무차대회를 맞아 석가, 미타, 약사, 미륵등의 400점에 달하는 불화(佛畵)를 그려 모시는 대불사를 했다. 문정왕후가 죽자 보우는 바로 4월 25일에 청평사로 이주 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같은 해에 피살되고 말았다.
회암사는 퇴락의 길로 빠지게 되었다. 1603년 3월 9일(선조36)에 양녕군 과 효령군이 사냥차 이곳에 왔다는 기록이 보이고, 1605년 6월 5일에 [선 왕어실 조성(先王御室 造成)]의 내용이 {선조실록}에 보일뿐 그렇게 잦던 왕실쪽 기록은 없어지고 어느 사이엔가 모르게 영화롭던 200년간의 회암사 는 폐사가 되어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전각은 하나도 없고 축대 및 석물만 다수 남아 있을 뿐이다. 더우기, 1378년 5월(우왕4)에 세워졌던 [서천제납부미존자부도명(西天提 納薄陀尊者浮屠銘)]의 지공비와 1410(태종10)에 마련했던 [대선사사암존자 탑명(大禪師妙巖尊者塔銘)]의 무학비를 1821년(순조21) 7월에 사람들에 의 해 그 두 묘탑을 헐고 이 비들을 부수어 내고서 그 자리에 친묘를 쓰는 처 지가 되고 말았다.
나중에 이것이 알려져 1828년(순조28) 가을에 다시 만 들어 세우는 꼴이 일어나는 수난을 겪고 있던 회암사였다. 사적128호인 회암사터는 북에서 남으로 퍼진 부채꼴의 지세 8,206평을 정리하여 8단의 계단식으로 평지를 만들어 건물들을 배치하였음을 보여준 다. 이러한 구조는 그 당시 송도의 궁궐인 만월대와도 관련이 깊다고 전해 지며 아울러 지공이 중인도의 아란다사와 같은 곳으로로 점지한 곳이기도 하므로 나옹왕사에 의해 중건이 될때에 아란타사의 가람배치도 영향을 얼마쯤은 입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을 보다 확실하 게 밝혀줄 자료는 아직 갖지 못하고 있다.
이제 사지를 살펴보면 먼저 절터의 남북 중심선은 정 중앙이 아니고 지세에 의하여 서쪽 1/3지점 가까이쪽 회암사의 중심 남북 일직선상이 가람 배치의 중심선이 되고 있다. 남쪽에서 살펴 올라가보면, 첫째단의 석축(石築)은 1.5m 높이에 동서로 약 105m 길이나 되며 3열로 된 큰 석층(폭 2.28m) 밑쪽에는 배수구(排水 口)가 마련되어 있다.
석축위의 평지는 폭 21m에 639.3평이나 되는 좁은 형태로, 서쪽 모서리의 입구쪽에는 높직한 한쌍의 당간지주와 한짝뿐인 당 간지주가 나란히 서 있으며 동쪽 중간쯤에는 평면이 ㄷ꼴로 생긴 하나의 낮은 당간(?)지주가 또 서 있어 회암사의 입구 쪽임을 알려 주고 있다.
둘째단 또한 1.5m 높이의 석축에 동서의 길이는 100m로 역시 3열의 큰 석층이 마련되어 있다. 석축 윗면의 평지는 폭 44m에 1,185.6평이나 되며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 나타난 가람배치의 건물들이 이제 자리잡기 시작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곧, 여기에는 양로방, 연실, 관음 전, 종루 둥의 사우가 들어선 자리가 되는 것이다.
세째단의 석축은 109m 길이에 50m 폭의 1,402.5평 넓이가 되는 터로 미 타전, 동서의 객실, 열중요, 고루 등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석축 위쪽 가장자리에 2열의 주춧돌이 보이고 있어 회랑이 돌아갔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동쪽(向右)가의 안쪽 약간 비탈진 자리에는 두개의 네모 난 큰 석조와 큰 맷돌 밑짝이 둘이나 같이 놓여있어 바로 고루터 였음이 앞의 기록과 일치되고 있다. 계단은 이제 1열로 작아졌다.
네째단 석축위의 터도 길이 159m, 폭 40m나 되며 주춧돌이 즐비하여 회 랑를 비롯한 동서의 파침과 안쪽에 같은 동서 운집의 이름을 가진 건물이 있었으며 뿐만 아니라, 동운집과 동파침의 북쪽에는 향나무숲이 있어서 사 원 정원조경의 좋은 예이자 보광전을 비롯한 사찰 중심[聖域]부분의 운치 를 더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다섯째단은 회암사의 중심지역으로 길이 89m에 폭 40m이다. 계단을 올 라서면 보광전터임을 알려주는, 장대석에 둘러싸인 주춧돌이 정연하게 남 아 있다. 주춧돌은 7×7칸으로, 5칸이라는 기록보다 더 많아서 후대에 증축 된 것이거나 아니면 퇴간으로 칠 수도 있겠다. 칸과 칸 사이[柱間]는 2.7m(3尺)인데 이 너비는 모든 회암사 건물의 주간에 적용되고 있는 표준 치이어서 주목거리이다.
여섯째단은 길이 145m, 폭 37m로 동쪽으로 갈수록 그 폭이 좁아지고 있 다. 보광전 바로 뒤쪽이 되는 가운데에는 설법전이, 그 좌우 조사전과 영당 을 비롯한 사우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몇개의 주춧돌이 노출되어 있 다.
일곱째단은 150m 길이에 16m 폭이 되는 좁은 터로 사리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시자료와 입실요가 자리한 곳으로 보여지나 그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여덟째의 마지막 단은 길이 150m, 폭 17m쯤되는 크기로 계단은 남아 있질 못하며 터의 북쪽은 뒷산 언덕에서 내려 덮힌 토사로 인하여 불분명하게 되었다. 가운데의 정청을 중심으로 좌우(向)에 대장전과 나한전 및 방장 실이 있었으며 실제로 건물의 죽담이 남아오고 있다. 그리고 이 8단의 동쪽 끝 곧, 나한전의 뒤쪽(北)으로 따로 마련된 낮은 단위에 8각의 높은 기단이 갖춰진 우리나라 최고의 부도가 하나 서 있는 곳까지가 옛 회암사지가 되며, 이 8,200 여평의 절터 전체를 감싸는 동, 북, 서쪽의 산기슭 면을 따라 거석으로 쌓은 석축담장이 축대삼아 돌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재는 서울 중앙여고의 소유로 된 산림에 속해있다.
옛 회암사지 넘어 왼쪽 골짜기를 따라 들어가면 막아서는 700m지점의 산등성 자락 왼쪽 골짝의 오른쪽 내리받이터에 현재의 회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 산등성위에는 지공, 나옹, 무학의 사리탑이 서 있으며 맞은쪽 인 왼쪽 산등성의 북에는 [보제존자시선각탑명(普濟尊者諡禪覺塔銘)]인 나 옹, 무학의 사리탑이 서 있으며 맞은쪽인 왼쪽 산등성의 북에는 [보제존자 시선각탑명(普濟尊者諡禪覺塔銘)]인 나옹스님의 비가 서 있는 그런 곳이다. 0 {순조실록}에 "지공과 무학의 탑과 비를 다시 세울때에 이를 지키는 암자를 새로 마련하여 향화가 끈히질 않게 하였다. [其人重整浮圖 改梵碑護以 後舊觀 又新建小庵 于右房以爲守 護奉香之備]"한것에서회암사 건립이
1828년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삼성각과 대웅전에 있는 [치성광여래삼존군정(熾聖光如來三尊群幀)]인 칠성정화와 독성정인 나반빈두노존자정화(那畔賓頭盧尊者幀畵) 및 [제석범 천군정(帝釋梵天群幀)]의 신중정영정(神衆幀影幀)도 같은 19세기때에 그려 진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이렇듯 19세기부터 다시 법통이 이어져 왔으며 1976년에는 대웅전을 중건하여 아미타여래후불정화(布本紅地金泥)와 석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1986년에는 7×3칸의 요사채 겸 설법전으로 된 2층 콘크리트 와가를 크게 짓는 둥 중창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