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집을 읽고서^_^
전남대학 병원장이신 김신곤 족질님의 에세이집2권을 한 장도 빼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
지난 9월 학남회 모임에서 퇴직을 축하하는 공로패를 전달하는 자리에서 책을 받아놓고 등산을 다니느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12월8일 내가 다니는 광주아버지합창단 정기연주회를 광주문예회관 대극장에서 마치고나니 12월6일 마을에서 지내는 합동시제 준비하느라 걸린 감기까지 걸려서 세 가지 행사를 마감으로 1년이 다지나가는 기분으로 세모가 다가와 한결 차분한 마음에 저녁이면 읽기를 시작하여 며칠 만에 끝을 보았습니다.
처음에 일반에세이에서는 평소에 학교생활과 나의 취미로 운동과 노래 외에는 모든 정치 경제나 뉴스 등에 관심이 없는 나로서는 별로 흥미가 당기지 않아서 그저 박학다식함에 놀라는 기분으로 읽어가다가 단순한 소재인 손녀 이름 짓기에서는 내년 5월에 손녀를 갖게 되는 연고로 책장을 접어두었고, 의료칼럼에서는 화순병원에 대한이야기와 75%맹장염에서 그동안 몰랐던 외과병원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었습니다.
병원이 4d업종이라는 이야기에는 며느리감 선보는데 부인이 간호원은 너무나 고생을 하고 시간이 없는 고로 마땅치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이지만 그래도 의사들은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인데 하는 반론도 생각났으며, 백일잔치의 외과적 의미를 알고나니 재미가 있었으며 지원자가 줄어드는 외과의 고뇌에 대한 이야기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연기장을 읽을 때에는 1년을 함축적으로 거론하고 지나가는 것으로 평소에 생활을 함께하면서 연기장을 주고 받는 사람들에게는 공감이 많이 갈 것으로 사료되었으나 처음 읽는 저로서는 난해하고 어지러워서 어떻게 그 많은 사건들을 함축하여 나열하시는지 놀랍기만 했습니다.
영어는 어려워 에서는 미군부대에서 3년 동안 군대생활 하였던 시절이 생각나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동은 뒤쪽에 자전에세이와 주로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에서였습니다. 저자의 형님과 여동생들의 우애 섞인 글과 동료 제자들의 감사와 감동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도 몰래 눈물이 나기도 하였습니다.
정년이 몇 년 남지 않는 나로서 주위에 나에 대한 글을 부탁했을 때 과연 얼마나 또 누가 조금이라도 나를 위한 글을 써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과 그럴 수 있을 만큼 주위에 베풀며 살아왔는가에 대한 자성의 눈물이었다고나 할까요.
한편 그래 난 주위에 그들만큼 글을 쓸 수 있는 엘리트는 없었지만 그래도 알뜰히 가꿔온 나의 친족들과 친구들과 친척들과 벗들이 있지 뭐 하면서 위안을 삼기도 했지만요.
어릴적 생각하면 고흥형님(공성님8촌)댁은 선산형님댁과 더불어 문중에서 자녀들 교육의 모범이셨습니다. 교육에 대한 꾸중을 하실 때에는 늘 보지도 못한 그 댁 자제들의 공부 잘한다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듣고는 했지요. 또 초등학교 시절에 자자일촌(자작일촌이라는 말도 에세이에서 처음 알았고요^_^)인 문중에서 선산형님의 면장선거는 특히나 기억에 남는 신기한 일어있지요 저녁마다 우리 아버지도 다른 마을에 밤새워 선거운동원 내지는 금품살포 감시원으로 철야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였으나 기어코 당선되셨을 때의 문중 어른들의 고향에서의 자존심과 기쁨이 얼마나 컸었나하는 것은 문중을 중히 여기던 그 시절 시골의 분위기를 생각할 때 이제야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요즘 선거는 모두가 이해득실에만 얽매어서 문중도 정의도 없이 일당에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살지만요-그 당시는 일당도 받지 않고 순전히 문중의 명예만을 위하여 모두들 수고하셨으니 더욱 숭고하다고 할까요)
초등을 졸업할 63년 겨울인가 시골학교에서 3명이 서중학교 시험을 보러 처음 광주에 갔다가 공성님댁에 처음 들렀던 생각이 납니다. 목적은 순전히 아버님께서는 가난으로 못 배운 한을 나에게 대신하라고 그 집에 데려가서 자극을 받으라는 생각이셨겠지요. 아버님의 극진하신 교육열과 형님의 월남전 전사로 나온 돈으로 별로 큰 고생없이 대학까지 마치고 현재까지 살아온 것을 감사드리며 살고있고요!
불로동 적산가옥인가 시골 초가집에 고무신만 신고 살아온 나에게는 집도 좋아 보이고 연탄을 사용하는 것도 신기하고요. 서동형님(용록)네도 들르고 도청에 다니시던 용원형님네도 들르셨는데 모두가 부럽기만 했지요.
어려서는 문중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면서도 항렬이 높아서 나이 많은 조카, 손자들과의 말붙이기가 어려웠고 중고등학교 사춘기 시절에는 마을 앞으로 가면 나이 많은 어른들께서 항렬이 높다고 말씀을 높여서 하시니 뵙기가 민망하여 마을 뒤로 돌아서 간적도 많았지요.
40이 넘어서야 광주에 문중모임 학남회 총무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고 살다가 13년 전부터 과민성대장증후군으로 좋아하던 술과 육고기를 못 먹게 되자 사람들 만나는 것도 기피하게 되고 극도로 허약해지는 심신을 휴양차 고향으로 내려와 살게 되니 맘도 편해지고 몸도 건강해지는데 고향 문중일을 나몰라 할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봉사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문중일이며 족보문제에 부딪치고 있습니다.
교통이 빨라서 편리해지고 세계화 되어가는 것과는 역으로 서울에서는 형제간에도 광주에서는 4촌간 시골에서는 6촌간에도 연락도 잘 하지 않고 살아가는 시대가 되어버렸는데 고향 어른들 모시고 옛 풍습에 젖어서 느리게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고 건강에도 좋은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수년전 모 월간중앙인가 월간조선인가에 7남매가 모두 박사집안이라는 기사가 낳을 때에는 오려가지고 다니면서 주위에 자랑하였으며 지금도 시골에서는 처음 만날 때 어디 사느냐 어느 성씨냐를 제일 궁금해 하는 어른들 사회이고 보면 시골에서는 한 시대를 열심히 살다가신 우봉(김행곤)님과 객지에서 문중을 빛내주신 전대병원장(김신곤)님 원광대학장(김팔곤)님 등을 문중의 자랑으로 삼아왔던 것이며 앞으로도 잘되신 분들의 더욱 건강한 모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