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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면 영양리2구 양지마을 배 항 (운곡 초등학교 27회)
국사봉 나무뿌리에 스며들었던 빗물이 돌과 돌 사이를 비집고 나와서 상갑리 한가운데로 모여 들어 농소천을 따라온 물줄기가, 칠갑산에서 수많은 계곡을 타고 흘러내린 시냇물과 손잡고 우산성 그림자 감싸 안고 고리섬을 가로 질러서 구곡지천 굽이굽이 조화를 만들어 놓고 금강으로 흘러가는 곳,
봄이 되면 백마강 강바람이 청남벌을 타고 올라와서 도림 골짜기로 스며들어 노~란 개나리꽃 뭉게구름 피어오르고, 여름철이면 “친구야, 엄마 아빠랑 발가벗고 풍덩 뛰어 들어 삶의 고달픔도 뒷전으로 돌려 놓고 하하, 쉬쉬 즐거움에 빠져서 해가 지는 것도 지켜 볼 겨를 없는 까치내 맑은 물, 가을이면 36번 국도를 따라서 뱀처럼 구불 어진 냉천골에 접어들어 절벽에 펼쳐지는 그림 같은 단풍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오면 설악산과 내장산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겨울이면 하얗게 눈 덮인 국사봉 정상의 입 떨어진 활렵수 군락이 도인의 머리카락 같은 시선이 멈춰지는 절묘한 비경!
몸을 돌리며 삼시사방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누렇게 때 묻고 검게 그을린 곳 없이 끝없이 푸르고 푸르러 태양조차 푸르니 靑陽이라고 불리었나 봅니다.
구봉산, 국사봉은 금반위에 올려놓고 칠갑산, 문박산, 천태산. 사람들이 얼마나 후덕했으면 마을 이름이 후덕(厚德)이며 동생이 형에 대한 공경이 얼마나 지극 했으면 효제(孝悌)리가 되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하므로 일컬어 온직(溫直)이라고 하였을 것이니 우리들은 물론 후손에게 길이 귀감이 될 이름들이 지요.
‘중묵’, ‘광평’, ‘학당’, ‘금정’, ‘관련’, ‘왕진’, ‘덕성’, ‘안심’. 산이름, 마을이름 하나하나가 흔한 것 같으면서도 귀한 말이고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뜻이 담겨있는 낱말들이며 반도의 어느 구석에서도 같은 이름이 눈에 띠이지 않는 고상한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 청양이란 고을입니다.
무주 구천동 불영 계곡이 제 아무리 명승이라고 해도 먹거리가 귀하게 보이고 인적이 삭막하니. 맑은 물줄기 굽이쳐 흘러가며 군데군데 볼거리 만들어 놓고 가을이면 밤나무, 감나무들이 주홍색 얼굴에 호탕하게 웃으면서 어서오라고 손짓을 하며, 사람 속에서 내품는 인정이 아지랑이 속에 함께 있는‘지천구곡’에 비유할 바가 되지 않고 화엄사, 통도사, 송광사, 법주사, 월정사를 찾아서 명산대찰을 더듬어 보았어도 헝클어진 세속에서 그리 멀지도 않으면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수도정진하려고 일부러 조형을 만들어 놓은 것 같이 동그랗게 절벽의 울타리 안에 잠겨 있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손때 묻힐 틈도 주질 않으면서 천년만년을 간직할 것 같은 ‘장곡사’의 지형을 넘어설 곳은 눈에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반도의 스위스라고 환상으로 여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고도 싶고 살고도 싶어 하는 동해안의 고성, 양양, 명주 땅을 눈여겨 훑어보았으나 황량한 느낌이 들어서 머물고 싶은 생각이 가슴속에 와 닿지가 않았고, 백두대간 따라서 즐비하게 늘어선 국립공원들.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을 돌아보고 잘못 보았는가 싶어서 돌고 또 돌아보아도 볼거리는 있을지언정 사납고 차갑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으며 반도의 끝자락 바다의 절경이라고 하는 거제, 남해, 고흥, 완도, 진도를 헤집고 다녀 봤어도 한밤의 거센 파도소리는 밤잠을 설치게 하고 사색을 깨뜨리니 마음 수양할 곳이라고 여겨지지가 않습니다.
가을 그 푸르고 찬란한 태양아래서 가는 곳마다 식탁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청양고추와 육신을 지켜주는 파수꾼 구기자의 그 작은 몸통이 골짝 골짜기마다 빨갛게 물들여 가며 오묘하게 줄기를 이어가는 칠갑산! 천장호에 비쳐지는 황혼에 접어든 칠갑산 정상의 저녁노을과 장곡사에서 들려오는 종소리는 산줄기 따라서 계곡을 따라서 은은히 서해로 흘러가고, 구재 마을 앞 구부러진 강가의 절벽을 보면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단군의 유배지)를 옮겨 놓은 것 같으며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병풍바위의 강물에 비친 모습도 보기에 따라서는 예사가 아니지요!
오래오래 이름 높은 온양온천, 유성온천, 부곡온천을 찾아서 벌거벗은 몸뚱이를 서로 부딪혀가며 몸을 씻어 봤어도 조용한 칠갑산 골짜기 구기자 끓인 물에 육신을 담그고 나와서 새들의 음악소리 들으면서 산마루에 비친 태양을 바라보는 상쾌함을 따라 잡지는 못합니다.
청양 고을……금덩이도 묻혀있고 쇳덩이도 묻혀있고 오곡백과와 보양강장 열매도 있어서 볼거리, 먹거리, 약거리, 쓸거리 등 사람이 사는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있으니 지구를 수만 분의 하나로 줄여 놓은 것 같은 청양!! 제대로 알려 지지가 못해서 볼거리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 곳을 비껴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어느 글 높으신 선생님께서 ‘청양’을 더 깊게 더 넓게 더 자상하게 글로 나타내서 온 누리에 알리려고 힘써 주었으면 좋으련마는…… 고작 국사봉 골짜기 초등학교 문턱을 들락거린 펜 끝으로 청양을 이야기 하는 것이 쑥스럽습니다. 청양을 노래하려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반도의 한 복판에 자리 잡은 호서지방, 동쪽으로 대전, 공주, 대덕, 연기 서쪽으로는 홍성, 보령, 서산, 태안 남쪽으로는 서천, 부여, 논산, 금산 북쪽으로는 예산, 당진, 아산, 천안 동서남북 어느 곳에서도 내려볼 수가 없고 올려보고 와야 하는 그 한가운데에 좌정하고 있는 청양 고을! 악취에 코를 막고 호흡을 누르고 매연 때문에 혼미해진 머리 속이 청양 고을에 들어서면서 눈은 작아 한이 되고 가슴 속은 하늘을 날을 것 같은 푸르고 밝고 맑은 靑陽……
아직도 간교한 혀를 교정하지 못하고 독도를 냄새 맡고 군침을 삼키려는 왜놈들의 망동을 꾸짖는 ‘최익현' ‘안병찬' 선생의 준엄한 호령 소리가 동해바다를 건너서 메아리 치고 있으며 인구 4만이 채 안되는 작은 체구에도 지난 반세기 동안 이 나라 재상을 세분이나(이상철, 송요찬, 이해찬) 길러 낸 곳이 청양입니다. 세분 모두가 권력의 꼬리를 따라 다니면서 승승장구하여 지체 높은 출세를 이룬 것이 아니고 민중의 편에 서서 불의에 항거 하다가 많은 고통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이상철 선생은 이승만 자유당독재 권력의 그릇됨을 질타하는 함성을 질러서 이 나라 백성들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하여 민중의 힘으로 독재 권력을 몰아내는 선봉장으로서 단군 이래 처음으로 민중의 의사에 의해 만들어진 제2공화국정부의 내무부장관과 당시 집권 민주당 간사장(대표)을 지내셨습니다.
송요찬 장군은 4.19혁명을 무력으로라도 제압하려는 자유당 정부의 의도를 거부하고 계엄사령관으로서 “시의군중을 향하여 총을 쏘지 마라"고 명령하여 4.19의거를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5.16후에 내각수반까지 지냈으면서도 혁명이라고 하는 거울을 내걸고 권력의 수령으로 빠져드는 군을 향하여 “군인은 군인으로 돌아가라"는 질타를 서슴지 않은 탓에 대통령에 출마하자 위협을 느낀 박정희 그 집단에 의하여 쇠고랑 차고 감옥으로 끌려갔으니 역사에 길이 남을 장군중의 장군입니다.
이해찬 지금의 국무총리 역시 휴전선에서 북쪽을 향하여 겨누고 있어야 할 총구를 서울로 돌려서 군인의 사명인 지휘체계를 팽개치고 직속상관 정승화 참모총장을 뭉개 버렸으며 평양을 두들겨야할 우리 국군을 남쪽으로 끌고 가서 당시 전라남도 광주를 피바다로 만들어 놓고 국민의 권리를 강탈해버린 육군소장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그 무리들에게 저항하다가 그들에 의해 사형언도까지 받았었지만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오늘날 이 나라 재상에 이르는 청양고을 사람입니다.
광주의 망월동 5.18 묘역에 서서 25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지금까지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하여 누렇게 색깔이 변한 사진이 걸려있는 게시판을 보고 자식의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기~ㄴ 세월 그 부모들의 울분을 생각하니 청양이 낳은 이해찬 총리의 위대한 저항이 다시 떠올랐고 청양고을의 자부심이 새롭게 솟아났습니다.
더불어 한준수 선생은 초급 말석의 공직으로부터 스스로 일구어 3급 서기관직까지 도달하여 연기군수로 재직 중이었는데도 입신야영한 명예도 팽개치고 자신에게 돌아올 그 숫한 수모를 각오하고 민에게 봉사해야할 절대 절명의 책임을 짊어진 공무원들에게 민의를 도둑질 시켜서 권세를 이어가는 고약하게 비뚤어진 행태를 천하에 공개하여 전국 수십만 공직자들을 ‘공무원 선거개입’이라는 굴레를 벗겨버리고 제자리로 돌려놓는데 앞장섰기에 당시에 조선일보가 선정한 근세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인물100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니 역시 청양의 긍지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까 싶습니다.
전 국토의 9개 도와 7개 직할시 200여개의 시 군에서 유독 청양고을에서 나으신 분들만의 실천이 가능한 일이라면 청양. 청양은 이름이 높아야할 고을입니다. 이렇게 자랑스러운 청양고을에서 지금 칠갑산이 기울어 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솟아나고 있다고 합니다.
청양에 바랍니다. 이제 한 가지 남아있는 소망! 하나 된 이 나라 대한반도를 이끌어갈 훌륭한 지도자를 잉태하고 있노라고 말해 주시지요. 멀지 않은 날에 꼭 낳아서 길러줄 터이니 믿고 기다리라고 대답해 주시지요. 그리하여 얼마 남지 않은 당신의 가솔들의 쓸쓸한 가늠 구석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지펴 주고 삶에 용기를 북돋아 주어서 열심히 가꾸고 다듬으면서 청양을 노래하라고 말입니다.
지식의 알맹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고 미련한 투구를 벗어 던질 줄 몰라서 가솔들 이끌고 호구지책을 찾아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갑년을 넘긴 주제에 마음은 고향 청양고을…
발길 닿는 곳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당신이 간직한 고귀한 땅들이 버려진 곳들이 많이 있습니다. 푸르고 푸른 산과 계곡으로만 덮여있는 듯싶으면서도 가꿀 수 있는 터전인데 안타깝게도 이 몸이 함부로 괭이 들고 손댈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저 남쪽 섬진강을 끼고 길게 늘어선 전남 광양시의 다압이란 곳은 해발 1200m의 백운산 가파른 비탈에 매실나무 심어 가꾸어서 풍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른 봄 잔설을 뚫고 피어나는 매화꽃 축제를 열어놓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서 품바들이 두들기는 북소리가 남해 바다 파도위에 넘실거리고 강 건너 경상남도 화계의 쌍계사 골짜기는 바위틈새에 있는 한줌 흙도 갈치 모양으로 줄줄이 돌계단 쌓아 놓은 듯 다듬어 놓고 녹차나무 심어 가꾸어서 사시사철을 녹색 계단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집중시켜서 부를 쌓아가고 있으며 최참판댁이 있는 악양면 일대는 지리산 비탈에 감나무 가꾸어서 늦은 가을 큰길가에서 풍성한 감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또 대구시의 상수원인 가창땜 상류도 거슬러 올라가면 비슬산 골짜기 산 중턱까지 자갈위에 비닐 씌어 놓고 계곡에서 흐르는 물로 청정 미나리 가꾸어서 짭짤하게 살아가는 모습도 있으며 남해의 다랭이마을이란 곳은 깎아지른 바닷가 언덕을 차곡차곡 돌을 쌓아서 바닥보다도 높은 둑을 만들어 놓고 지금도 봄이면 모를 심고 가을이면 햅쌀을 거두는 것을 그곳 사람들의 그 부지런하고 고달품은 아랑곳 하지 않고 구경거리라고 멀리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합천에서 의령을 가로지르는 이름 없는 험한 산길을 넘어 가다가 보면 적막하고 으스 한 산 중턱에서 먹거리를 가꾸며 아직도 그곳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왜 이 사람들은 아직도 이런 곳을 떠나지 않고 머물고 있을까?" 궁금한 생각을 털어내지 못하고 멈추었던 발길을 다시 움직이면서 내가 살던 청양고을의 한줌 흙이 소중한 것을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봄을 시샘하는 매서운 바람이 살갗을 시리도록 파고드는 3월 중순! 경상북도 청도에서는 돈 들여서 만든 시설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강변의 자갈밭에 소 싸움판을 구경하겠다고 무여든 군중들이 호주머니에서 꺼내어든 세종대왕 그려진 시퍼런 지폐가 낙엽처럼 흩어지는 광경을 보고 넋을 잃을 뻔했습니다. 부러웠습니다.
에잇! 우리 청양고을에도 진작 참새 싸움판이라도 만들어서 사람들을 끌어 모았더라면…… 욕심도 생겼지만 한편 그곳 사람들이 오랜 세월 힘들여 가꾸어 온 오늘에 열매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웠습니다. 형세가 청양과 비슷한 전라남도 함평 사람들은 그 흔한 나비를 키워서 1년에 600억원을 벌어 드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라도 칠갑산 골자기에 미나리 가꾸어서 고추, 구기자와 함께 ‘칠갑산 청정 미나리’이름을 높이면 연기, 공주 행정도시 생긴 뒤엔 어렵게 서울까지 짊어지고 갈 까닭 없을 것이고.
‘구기자공원’ ‘고추공원’만들어 놓고 청양을 떠난 사람들 청양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함께 열심히 온 누리에 알리기만 한다면 진해로 벚꽃 구경, 섬진강변으로 매화꽃 구경 가는 사람들이 청양으로 가야만 배도 부르고 볼거리 많고 먹거리, 약거리 다 있다고 몰려오게 할 수도 있을 터인데…… 공상이 떠올랐습니다.
풍수지리 하시는 분들은 무엇을 하고 있기에 이 아름답고 귀중한 청양 땅을 널리 알려서 사람들 끌어 모아주지 않고 이곳에서 정이 든 사람들 끌어 모아주지 않고 이곳에서 정이 든 사람들마저 보침 걸머메고 칠갑산을 뒤돌아보면서 하나 둘 떠나게 두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건강하니까 서울, 부산, 대구, 인천, 대전, 광주, 울산 화려하고 떠들썩한 곳 찾아서 모여들 가고 있지마는 훗날 매연에 시들고 먼지 속에서 병이 들고나면 청양, 청양이 그리워 지겠지요. 당신이 감추어 두었던 황금 덩어리가 태양에 반뜩이면 그때 사람들 구름처럼 몰려오겠지요! 청양을 노래하겠지요!
오늘에 사는 사람들이 배가 고프지 않으니 겉으로만 보고 겉으로만 보니 속내를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겠지요. “너의 고향이니까 귀하게만 보인다고". 그러나 필자도 남의 것이 내 것보다 좋은 것은 좋은 것으로 분별은 한답니다.
무명보자기에 책이랑 필통이랑 둘둘 말아서 한쪽 어깨에 걸쳐 동여매고 자갈길 심리를 걸어서 압박과 설음해서…… 통일 행진곡을 불러가며 초등학교 문턱을 향해 달려가면서 구름 낀 날이면 ‘타다다닥 타다다닥' 고척산 넘어 홍주벌판을 달리는 기차의 네일 굴러가는 소리 바람결에 들을 때엔 기차 구경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운동장에서 염전을 튕기고 곱돌로 손바닥 원을 그려 가면서 땅뺏기 놀이 하다가 정오에 읍내에서 들려오는 사이렌소리를 듣노라면 저렇게 큰 소리를 내는 나팔은 우리 학교보다도 더 클 것만 같다는 꿈속 같은 그림을 머리 속에 그려도 보던 두메산골!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되어서 청양을 빛내 보겠다는 동심 속의 꿈을 키웠습니다. 먼지로 뒤범벅이던 자갈길은 거울같이 윤택 나는 아스팔트로 깔려있고 떨어진 고무신 신고 선배들 뒤를 따라서 두 팔을 흔들면서 통일 행진곡도 부르지 않고 마을 앞에서 자동차타고 학교를 오고 가는데 땅뺏기 하면서 왁자지껄하던 운동장은 텅 비어 있고 조용한 적막이 흐르고 있습니다.
입신양명도 못하고 돈벌어서 금의환향도 못한 세월 온직, 효제, 후덕을 말하기도 부끄럽게 어느덧 황혼에 접어든 일그러진 몸……
5월이면 먹을 것이 없어서 아카시아 꽃 입을 훑어다가 삶아서 허기진 배를 채워가면서도 명절 때면 이동 네 저 마을에서 막걸리. 떡국 자시러 오라고 서로 손짓을 하며 부르던 그 풍경은 저-멀리 남과 북으로 달리는 고속 열차에 실려서 사라지고 콩알하나도 반쪽씩 나누면서 함께 살자고 손잡아 주는 이 없어도. ‘청양' 당신만은 올 테면 오고 갈 테면 가라고 잡지도 않고 내치도 않으면서 예나 다름없는 푸르른 눈빛으로 중늙은이 이 몸을 너그럽게 지 켜 보는구려.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이야기 들리는 곳마다 시샘이 나서 찾아 다녀보았지만 청양 당신보다 아름다운 곳을 찾지를 못했습니다. 청양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고 청양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혼자서라도 청양을 이야기하렵니다. 청양을 노래하렵니다.
장곡사 종소리 새벽을 울리면
까치내 물고기 노니는 모습을 보고
국사봉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문박산에서 새들의 글 읽는 소리 들으면서
청양을 노래하리
구기자 청양고추 고운 빛깔은
내 영혼이 가는 길도 비춰주겠지
눈감고 깊은 잠에 들어 호흡이 멈춰진 뒤에도
꿈속에서 청양을 노래하리
청양을 노래하리……
과거를 돌아보면 용기가 솟아나고 보지 않으면 비교가 불가합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에 의미가 밝혀질 때 청양인 모두가 청양을 노래하는 날 오겠지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