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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글 모음 ◈ 스크랩 한국의 명문가? 6.정일권家
태공망 추천 0 조회 32 10.03.01 16:0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의 명문가문 제 6편 "정일권가"
     등록 : 쩜억개  조회 : 6795  점수 : 1305  날짜 : 2005년9월28일 18시47분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 
                                      유용선
내 나이 여섯살 적에
아버지와 함께 간 그 냄새나는 식당,
그 옆에 냄새나는 변소,
그 앞에 묶여 있던 양치기,
는 그렇게 묶인 채로 내 엉덩이를 물었다.

괜찮아, 괜찮아, 안 물어.
그 새끼 그 개만도 못한 주인새끼의
그 말만은 믿지 말았어야 했다.

짖는 개는 물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는 번번이 짖는 개에게 물렸다.

사랑을 부르짖는 개,
는 교회에서 나를 물어 뜯었다.
정의를 부르짖는 개,
는 내 등 뒤에서 나를 덮쳤다.
예술을 부르짖는 개,
는 백주대로에서 내 빵을 훔쳐 달아났다.

괜찮다, 괜찮다,
는 개소리는 지금도 내 엉덩이를 노린다.
괜찮아, 괜찮아, 물지 않을 거야.
저 새끼 저 개만도 못한 새끼의
싸늘한 속삭임을 나는 도시 믿을 수 없다.

사실 이 시의 제목은 "개한테 물린 적이 있다"가 아니라 "우리는 지금도 개떼들한
테 물리고 있다."라고 해야 맞다.

오늘은 한국의 명문가문 제 6편 "정일권가"에 대해 알아보자.

어릴 때부터 내 머리 속에는 정일권의 이름 석자가 뱅뱅 돌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린 시절 "多景峰"이라고 스스로 이름을 붙이고 놀던 산이 있었
다. 어두컴컴할 정도로 울창한 숲 속에 진달래가 활짝 핀 산길을 따라 가다보면
갑자기 전망좋고 양지바른 곳에 그야말로 호화찬란한 묘가 하나 나오는데 내가 세
상 태어나서 본 적이 없을만큼 삐까뻔쩍한 묘였다.
바로 그게 나의 어린시절 놀이터, 정일권가의 묘소였다.
넓직한 잔디밭이 있어서 참 좋았다.

1980년대 초반이었으니까 당시 대다수의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을 때였다.
내가 오죽 아름다웠으면 그 산을 다경봉이라고 불렀겠나? 
그 아름다운 산에 봉분을 만들어서 호석을 그야말로 휘황찬란하게 둘러 감아놓고
표석도 참 아름답게 해 놓았다.

그 주변에 수많은 무덤들이 있었지만 호석은 태어나서 처음봤고 그렇게 아름다운 고급석재로 된 상석이며, 표석 또한 그 처음 봤다. 해가 넘어갈 즈음 빽빽한 숲 사이로 햇살이 비치면 정일권 집안 무덤만 환하게 빛나는 경이로운 모습을 보고 감탄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대리석에 햇살이 반사되면 어두컴컴한 숲 속에 광채가 났다.
어린 마음에도 정일권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집 무덤을 보고 느꼈다.

정일권은 1917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지도를 보면 한반도의 최북단이다.
어쨌든 한반도의 최북단에서 태어난 정일권이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정일권은 이 일본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상으로 일본 군부대신의 군도를 선물로 받았다.
정일권 집에 놀러온 일본군 장교들조차 이 군도에 거수경례를 하고 깍듯이 예의를 차렸다고 한다.

그 후 번뜩이는 예복을 차려입고 자신의 모교 광명중학교로 가서 일본군에 입대할 것을 선동하고, 만주군관학교, 일본 육사 입교를 위한 진학지도를 했다.

정일권은 그야말로 그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다.
일본 육사 수석졸업에, 일본 관동군 사령관 전속부관으로서 화려한 견장을 하고,허리에는 일본도를 찬 채 백마를 타고 출근하는 모습이 왜 부럽지 않았겠나?
오로지 조선인 가운데 정일권만이 누리는 영광이었다.

이런 영광을 누리고 싶었던 조선의 젊은이들이 정일권의 언변에 혹하여 줄줄이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을 했다.
만주군관학교에 그 해(1938년)에 입학한 조선 젊은이들이 13명인데 그 가운데 11명이 정일권의 광명중학교 후배들이다.

이 자들이 해방 이후 정일권을 정점으로 대한민국의 군을 지배했는데 소위 말하는 관북파, 또는 "알래스카 부대"라는 군벌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모조리 대한민국 군내에서 장성급의 요직을 담당했다.

정일권은 어쨌든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로 근무하면서 제국주의의 압제에 시달리는 조국과 민족의 비참한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침략자의 주구로서 활동하며 일신의 안위만을 누렸다.

그러다가 미군과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정일권은 바빠졌
다. 소련군이 선전포고를 하고 곧 일본군이 미군에게 항복하자 정일권은 재빨리
변신을 꾀하기 시작했다.

만주지역의 한국 교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추종하는 일본 관동군 출신의 조선인 간부들을 모아 "만주교민보안대"라는 것을 만들어 스스로 사령관에 올랐다.

소련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정일권은
즉시 "만주교민보안대"를 잽싸게 독립
군의 모습으로 변
정일권
▲ 정일권 전총리
ⓒ엠파스 검색
신시키고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로 이름을 바꿨다.

심지어 독립군가까지 만들어 불렀다. 이 노래는 후에도 계속 애창되었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치는 애국의 깃발,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어쨌든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느닷없이 광복군 독립투사로 극적으로 둔갑하였으니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곧 정일권의 사기행각은 소련군 보안부대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다.
"동북지구 광복군 사령부"는 곧 무장해제되고 강제해산 명령을 받았다.
또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은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정일권은 소련군에 체포된 후 소련군 수사관으로부터 소련 유학을 권유받아 유학을 결심하였으나 불합격하였다.
그 이유는 소련군 보안부대에서 정일권을 떠보기 위해서 친구 최 모를 시켜 "소련군 보초를 죽이고 도망치자"는 제안을 하게 했는데 정일권이 덜컥 수락함으로써 반동분자로 몰리게 된 것이다. 즉 소련군 보안부대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반동분자로 몰린 정일권은 시베리아행 숙청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드라마틱하게도 시베리아행 포로열차에서 탈출, 죽기살기로 월남하였다.

월남에 성공한 정일권은 즉시 미군이 운영하는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우수한 일본군 장교에서 독립군으로 변신하고, 소련군에게 체포되자 소련 유학을 결심하고, 극적으로 월남을 하여 영어학교에 입학하는 과정을 한번 보라!!!!! 
변신의 대가 살아있는 꺼삐딴 리를 보는 듯하다.

정일권은 충실하게 미군정의 일제잔재 부활 정책에 편승하여 미군의 신임을 얻고, 지리산에 은거하는 좌파들을 소탕하는데 앞장서서 이승만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5일 뒤, 1950년 6월 30일 불과 32살의 나이에 정일권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이 된다.
사단과 군단을 지휘해 본 적도 없는 자가 느닷없이 육군참모총장이 된 거다.

전쟁 중 소위 국민방위군 사건이 일어나 정일권은 군복을 벗게 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이란 군 윗대가리 새끼들이 전쟁 중에 군인을 양성하라고 국민방위군에 배정된 예산과 물자, 보급을 빼돌리고 죽자살자 달리기만 시켜 부지기수로 굶어죽이고 병들어죽이게 한 사건이다.
무려 젊은이들 천 수백명이 죽었다.

정일권은 이 사건으로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 미국 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실로 다행이었다.
훗날 정일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만주의 숨통을 따라 30~50발의 원자탄을 줄줄이 던졌을 것이다.
그리고 50만명에 달하는 중국 국부군을 압록강에 투입하고 우리의 뒷편인 동해에서 황해까지에는 60년 내지 120년 동안 효력이 유지되는 방사성 코발트를 뿌렸을 것이다"

그 후 주불대사로 근무할 때 드골에게도 핵전쟁을 대찬성했다고 고백했다.

한마디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일권의 몰상식한 성품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민족의 고통, 국토의 황폐화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승리만을 꿈꾸는 승리지상주의의 전형이다.

어쨌든 정일권은 1957년 합참의장, 육군대장으로서 22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한다. 그 이후 이승만의 궁정외교의 앞잡이가 되어 터키대사, 주불대사, 주미대사를 맡게된다.

1965 한일협정에 서명하는 박정희
▲ 한일협정 서명장면. 왼쪽 끝이 정일권. 
ⓒ엠파스 검색
주미대사직에 있을 때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 나흘 뒤 정일권은 하버드대 연구실에서 혁명을 도와달라는 박정희의 전화를 받게 된다.
정일권은 동분서주하며 군사쿠데타를 합리화하기 위해 미국의 각계인사를 접촉한다.
물론 본국에서 김활란, 한경직 따위의 기독교인사들을 비롯한 각계인사들이 또 박정희를 선전하기위해 날아와서 정일권을 도왔다.

이 때 정일권은 박정희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제 3공화국이 시작되자마자 외무부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처음부터 국무총리를 시키려고 했으나 모두 군출신인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한일회담 반대집회가 거세지자 정일권이 국무총리로 올랐다.
이로부터 무려 6년 7개월 동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정일권은 운좋게 영국 처칠장례식장에서 기시와 가까이 앉아 대화할 수 있었다.
기시는 A급 전범으로서 사실상 만주국의 실권자였으며 한일 인맥의 정점에 있는 인물이다. 일본 관동군 헌병대 대위 정일권과 만주국 실력자 기시는 금방 친밀감을 느꼈다.
게다가 정일권은 만주 관동군 출신 장교들의 모임인 난성회 회원이었으므로 더욱 문제될 게 없었다.
이로써 순탄하게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정일권의 내각을 소위 불도저내각이라고 한다.
이것은 정일권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는 실상 박정희의 지시를 그대로 수행했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일권은 무색무취한 스타일로서 철저한 YES맨이었다.
청와대에서 국정보고를 할 때도 자신의 의견을 내세운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만년마담"이었다.
바로 이런 식의 처세술로 박정희를 신처럼 떠받들며 무려 6년 7개월간 최장수 총리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총리직을 6년 7개월간 수행한 후 물러나며 천하의 아부쟁이 정일권은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박 대통령 각하는 정말 진실한 분입니다. 그분의 영도력과 애국심은 언제나 나의 거울이 되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자애로운 인간성은 번번히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총리직은 물러나지만 그 분을 언제 어디서나 성심 성의껏 보좌해서 이 나라의 국력이 더욱 신장되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총리직을 마친 아부쟁이 정일권은 박정희에게는 유신헌법을 옹호할 국회의장으로서 적격의 인물이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를 "통법부", "행정부의 시녀" 노릇이나 하며 만족하게 할수 있는 적임자였다. 국회가 "어린 아기나 보는" 무위도식 국회의 표상이 된 것이 바로 정일권이 국회의장이 된 9대 국회부터였다.

정일권은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헌법기관을 비방, 모독하는 것을 처벌토록하는 형법개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질의도 없고, 찬반토론도 없고, 심지어 의원 수 조차 파악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통과시켰다. 김옥선 파동(주1, 2)이 일어났을 때도 낼름 처리했다.

그래서 국회의장 정일권의 일처리를 사람들은 "동사무소 직원이 사망신고서에 도장찍듯"이라고 표현했다.
심지어 정일권은 사초에 손을 대기도 했다.
심심하면 속기록을 삭제하는 일이 정일권 국회의장의 취미였다
.

이런 탁월한 능력 때문에 최장수 국무총리 기록과 더불어 최장수 국회의장의 기록도 보유하게 되었다.
자유와 인권은 엄청나게 손상시키면서도 외유나 세미나만은 매우 풍성하게 했던 국회의장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최장수 국회의장이면서도 가장 적은 회의일수를 기록한 국회의장으로도 역사에 남아있다.

정일권은 이외에도 숱한 의혹을 지닌 인물이다.
사생활도 상당히 문란했던 모양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정인숙사건이다.
그러나 나는 공적인 영역이 아닌 부분에 관해서는 별로 파헤치고 싶지 않다.
또 정일권 스스로 딱 한번 밖에 안 잤다고 하니 이 부분은 생략한다.
이 위대한 과업은 여성동지들에게 부여한다.

박동선 사건과도 연관이 있고, 통일교 문제도 정일권과 연관이 있으나 다 뻔한 얘기다.

자유총연맹 초대총재와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 고문을 역임하다가 임파선암에 걸려 지난 1994년 죽었다.
정일권이 죽을 때 유언은 이것이었다.
"전두환만큼은 정말 나쁜 놈이다."

어쨌든지간에 이 정일권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대한민국 주류로 행세하게 되었는데 정일권가의 후손들을 파악하는 것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일단 정일권의 후손이 누구인지 몇 명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문명자씨가 쓴 글을 보면 정일권은 70년대 중반에 현숙한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새장가를 들어 3남매를 또 두었다 한다.
70년대 중반이면 예순의 나이인데... 헐.

어쨌든 내가 거금을 투자하여 각 신문 인물정보까지 뒤져보았으나 도대체 정일권의 자식들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 순전히 정일권 책임이다.
정일권의 부인도, 며느리도 모르는 일을 내가 어떻게 아나?

파악되는 것은 정일권의 딸 정희경이 코오롱그룹 창업자 이원만의 동생인 이원천의 아들과 결혼하
이동찬명예회장
▲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엠파스 검색
였다는 사실이다.
이원천의 조카가 일본 와세다대를 나온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이다.

이원천의 형, 이원만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동찬, 이동보가 그 들이다. 물론 이동구라는 아들을 나이 일흔 세살 때 낳았다고 한다.
참 그 기구한 얘기를 들어보면 아기가 불쌍하다.
그러나 사생활에 해당되는 얘기이기 때문에 옮기지 않겠다.

이원만의 아들 이동보는 김종필의 딸 김예리와 결혼했다. 곧 파경에 이르고 말았다. 어쨌든 이원만은 상당히 정치지향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하는 증거다.

이원만의 둘째 딸 이미자는 포항의 대지주 박문학의 큰 아들 박성기와 결혼했다. 박성기는 한국 바이린 사장이다.
한국 바이린은 부직포산업의 선두주자인 다국적 기업이다.

막내딸인 이미향은 삼립식품 창업자 허창성 집안으로 출가했다.
태인샤니그룹 회장 허영인이 이미향의 남편이다.
베스킨라빈스니 던킨도너츠니 하는 것들이 다 이 집 거다.

코오롱 설립자 이원만의 큰 아들 코오롱 명예회장 이동찬의 장녀 이경숙은 국회의장을 지낸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와 결혼하였다.

이동찬의 사돈 이효상,
대구출신으로 동경대를 졸업한 이 자는 정말 악명높은 반민주 인사다.
신라왕조 부흥 운운하며 영남공화국을 부르짖던 자다.
선거 때 지역주의를 최초로 부추긴 자다.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국회에 똥물을 뿌린 김두한을 앞장서서 제명하라고 요구했던 인물이 바로 이효상이다.

이효상은 선거 유세 때마다 이런 개소리를 하고 돌아다녔다.
"경상도 대통령을 뽑지 않으면 우리 영남인은 개밥에 도토리 신세가 된다!!!"

이효상은 1963년부터 이런 말도 떠들고 다녔다.
"대구는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지만, 임금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 고장 출신의 박정희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아 임금님으로 모시자."

정말 이 나라를 위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물이다.
이효상은 이 따위 국민분열 획책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며 코오롱 재벌과 사돈까지 맺은 것이다.

이효상의 세째 아들 이문조는 현재 영남대 교수다.
이문조의 처가 코오롱그룹 현 회장 이웅렬의 큰 누나다.

나는 이효상의 또 다른 아들인 이문희를 눈여겨 보고 있다.
그는 신부로서 천주교 대구교구 대주교다.
현재 김수환의 바통을 이을 천주교 차기 추기경 물망에 올라있다.
말이 되냐??

코오롱 이동찬의 차녀인 이상희는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회장 집안으로 출가했다.
고홍명의 장남 고석진과 결혼한 것이다. 고석진은 코오롱제약(옛 삼영신약) 사장을 거쳐 에나멜동선 전문업체인 빠이롯드전자 회장을 지냈다.

코오롱 이동찬의 세째 딸 이혜숙은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자의 장남인 이동혁과 결혼했다.

코오롱 이동찬의 넷째 딸 이은주는 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 박정희 경제특보를 지내고, 한국은행장을 거쳐 전두환 신군부하에서 상공부 장관, 경제 부총리를 지낸 신병현의 며느리가 되었다. 남편 신영철의 의사다.

그런데 이 신병현이 봉명그룹 회장이자 문경학원 이사장인 이동녕과 사돈이다.
이동녕은 영남학원 이사장을 지낸 사람이다. 신병현의 딸 신수연이 이동녕의 아들 이승무와 결혼을 하였다. 이승무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서 국회의원을 하였다.

이동녕의 아들인 아세아시멘트 회장 이병무의 둘째 아들 이인범이 얼마전 삼양통상 허정구의 아들 그러니까 GS 칼텍스의 회장 허동수의 막내 딸 허지영과 결혼하였다. 허씨집안하고 맺어졌으면 만사 끝난 것이다. 

이동녕은 동양화학그룹 회장 이회림과도 사돈관계를 맺었다.
 
[fn 포커스] 이웅렬 코오롱 회장
▲ 이웅렬 코오롱 회장 
ⓒ엠파스 검색
현 코오롱그룹 회장 이웅렬은 그의 동선이나 그의 배경을 볼 때 민주개혁세력이 의심의 눈초리를 결코 거둘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은 여러번 강조해 왔다.

결혼은 비교적 평범하게 하였다.
한 때 대한민국 고급벽지시장을 좌지우지 하던 동남갈포공업의 서병식의 딸 서창희와 결혼하였다.
 

다시 원위치하여 정일권 쪽으로 되돌아가자.

정일권의 아들 정세훈은 영풍그룹 창업자 장병희의 딸 장현주와 결혼하였다.
그의 처남 장철진, 장형진 등이 요즘 영풍을 주무르고 있다.
요즘은 31살짜리 정형진의 아들 장세욱이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나보다도 어린데 재산이 몇 백억원이다.

영풍 장병희는 박정희정권 하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김세련과도 사돈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침략기에 화려한 견장을 하고, 일본도를 허리에 찬 채 백마를 타고 위세를 부리던 정일권,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그 못지 않은 금력과 권력을 자랑하며 얽키고 설켜서 일제시대와 다를 바 없이 행세하며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개떼들한테 물리고 있다.

예니아빠님께서 그려주신 정일권가 혼맥도

 
출처 : 피터의 대장간 |글쓴이 : 피터의 대장간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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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3.01 16:20

    첫댓글 ^^3월1일 삼일절 . 우리 선열들이 당한 잊지못할 일본인들의 만행과 일본인들 개가 되어 버린 추한 우리 자국민들의 한 모습입니다. 이 글을 읽다가 회원여러분들께서 다 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읽어보시라고 올려봅니다. 흘려간 역사를 연연하지는 말아야 겠지만 잘못된 역사는 두고두고 우리의 마음에 새기면서 사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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