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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산노씨 경평공대종회 만호공파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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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世 |
38世 |
39世 |
40世 |
一 龍 房 |
O九 |
炳O |
O均 |
鎭O |
O澤 |
東O |
O煥 |
埈O |
O錫 |
永O |
O植 |
炯O |
O在 |
鉉O |
O原 |
杜O |
O熙 |
二 龍 房 |
炳O |
O基 |
鍾O |
O河 |
權O |
O煥 |
炯O |
O鉉 |
原O |
O彩 |
熙O |
O載 |
錤O |
O淳 |
秉O |
O燮 |
珪O |
” |
炯O |
O圭 |
鎬O |
O徹 |
東O |
O焄 |
瑄O |
O鈺 |
溶O |
O檝 |
煦O |
O培 |
錡O |
O必 |
楨O |
O煌 |
綵O |
三 龍 房 |
炳O |
O其 |
鎬O |
O源 |
東O |
O煥 |
奎O |
O鉉 |
溶O |
O彩 |
炯O |
O載 |
錡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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四 龍 房 |
炳O |
在O |
O鉉 |
承O |
O采 |
然O |
O均 |
鍾O |
O浩 |
根O |
O煥 |
奎O |
O錫 |
源O |
O秀 |
烈O |
O培 |
五 龍 房 |
然O |
O均 |
鍾O |
O河 |
權O |
O焄 |
瑄O |
O鉉 |
源O |
O來 |
노 숭(盧 嵩)
1337∼1414(태조.정조. 태종) - 조선 초기의 문신
1. 생애
광산 노씨(光山盧氏)는 도시조(都始 祖) 노 수(盧 穗:한림공(翰林公))의 9형제 중 맏아들 노 해(盧 垓)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아버지와 함께 동래(東來)하여 신라(新羅)에서 광산백(光山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광산(光山)을 관향(貫鄕)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후의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광산백(光山伯) 해(垓)의 후손으로 고려(高麗) 때 정승(政丞)을 지내고 광주군(光州君)에 봉해진 만(蔓)을 일세조(一世祖)로 하는 계통(系統)과 대호군(大護軍) 서(恕)祖를 일세조로 계대(繼代)하는 계통으로 갈리어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대호군(大護軍) 서(恕)祖를 일세조로 하는 계대보(繼代譜)가 인조(仁祖)13년(1635년)을해년(乙亥年)에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 노수근(盧守謹)이 서문(序文)으로 발간(發刊)된 광산노씨(光山盧氏)의 가승보(家乘譜)에서 시조(始祖) 수(穗)祖로부터 현 족보상(現 族譜上)의 중시조(中始祖) 서(恕)祖로 이어지는 상계(上系:윗대)가 기록된 것이 1978년 강화도(江華島)의 전등사(傳燈寺) 사리탑(舍利塔:승려의 무덤) 보수중 발견되어 선대(先代)의 세계(世系)가 이어지고 있다.
노씨는 삼한(三韓)의 대성(大姓)으로 광산(光山)이 본관이다. 고려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 노서(盧恕)가 좌우위 대호군(左右衛大護軍)으로 치사(致仕)한 노단(盧亶)을 낳고, 노단은 감찰 지평(監察持平) 노준경(盧俊卿)을 낳고, 아버지 준경(俊卿) 어머니 임피군(臨陂郡) 부인 사이에서 노숭(盧嵩) 1337년 4월에 태어났다.
노숭(盧嵩)의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 시호는 경평(敬平) 이며, 선생은 일찍이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의 사사를 받았다.
공민왕 때 문과 급제(1365년)하여 사환(仕宦)에 나아가 고려말과 조선초기의 역사적인 격동기를 겪으면서 슬기와 결단으로 충군애민의 상을 몸소 실천한 사실이 양촌 권근이 지은 기문과 호정 하륜이 지은 비문에 열거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노씨로서는 처음으로 정승의 반열에 오르고 집협전 대제학으로서 사후(死後)에는 태종은 3일 동안 정사(政事)를 폐(廢)하고 조의(弔意)를 표하였으며, 많은 부의(賻儀)를 하사하여 치제(致祭 : 공신에게 내리는 제사)하고, 유사(有司)에 명(命)을 내려 그 해 10월에 부평부(富平府)에서 동(東)쪽으로 30리(里)쯤 떨어진 수탄면 천반리 경좌원(水呑面 天班里 庚座原 : 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에 예장(禮葬)하게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경평(敬平)으로 내렸다.(敬平은 '시풍야경계왈경 집사유제왈평'에서 연유하였다). 경평이란 시호를 받은 사람은 조선시대에서 상촌선생(桑村先生) 한 분 뿐이다.
후에 사림의 추앙으로 원사(玉淵祠)에 봉향되는 덕(德)을 끼친 분이다.
가. 고려말기
고려의 지평으로 충절을 지키려던 준경(俊卿 : 嵩의 아버지)은 충혜왕이 원나라 사신들의 속임수에 말려들어서 왕이 체포되어 곤경에 처한 것을 돕다가 애석하게 원나라 사신들에게 분사(憤死)당하였다.
고려말기는 원나라의 내정간섭이 극에 달하여 왕을 폐하고 세우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이 때 지평공(指平公)이 돌아가시고 문중도 피해를 입게 되자 상촌선생은 어린 몸으로 임피군 부인(臨陂郡 夫人)과 함께 전라도지방으로 피난하여 외가에서 성장하였다.
선생은 21세 되던 해인 1357년(고려 공민왕 6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29세 되던 1365년(공민왕 14년)에는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판예문검열(判藝文檢閱)에 임명되었다.
이후로 청요직(淸要職 : 중요한 직분을 갖는 지위)을 두루 역임하였다.
33세 되던 해인1369년(공민왕 18년)에 선덕랑 사헌규정(宣德郞 司憲糾正)에,
36세 되던 1372년(공민왕 21년)에는 승봉랑 우정언 지제교(承奉郞 右正言 知製敎)에,
39세 되던 1375년(고려 우왕 1년)에는 통직랑 사헌부지평(통직랑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자금어대를 받았다.
40세 되던 해인 1376년(우왕 2년)의 봄에 강원도 안렴부사(江原道 按廉副使)가 되었고,
9월에는 봉선대부 진현관 직제학(奉善大夫 進賢館 直提學)에 임명되었다.
45세 되던 해인 1381년(우왕 7년)에 봉익대부 예문관제학 지춘추관사상호군(奉翊大夫 藝文館提學 知春秋館事上護軍)에 임명되자 왕명을 출납하는 것이 오로지 타당하였고 임금께 충성스럽게 간하였으므로
47세가 되던 1383년(우왕 9년)에 순성보조공신(순성보조공신)에 녹훈되었다.
선생의 나이 52세 되던 해인 1389년(고려 공양왕 1년) 12월에는 봉익대부 전라도 도관찰출척사 겸 감창안집전수권농관학사제조 형옥병마공사(奉翊大夫 全羅道 都觀察黜陟使 兼 監倉按集轉輸勸農管學士提調 刑獄兵馬公事)에 임명되었는데, 이 때 전라지방의 세곡(稅穀)을 위한 조창(漕倉)이 선생의 발안(發案)으로 설치되었다.
나. 조선초기
태조 1년 임신(1392, 홍무 25) 11월 8일(을유)
임금이 수창궁에 거둥하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노숭(盧嵩)과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 조인옥(趙仁沃)을 보내어, 중국 남경에 가서 명년의 정조(正朝)를 하례하고, 황태손(皇太孫)을 봉한 일을 겸해 하례하게 하였다.
태조 2년 계유(1393, 홍무 26) 3월 20일(을축)
사은사(謝恩使) 정도전(鄭道傳)과 하정사(賀正使) 노숭(盧嵩)·조인옥(趙仁沃)이 중국 서울에서 돌아왔다.
태조 4년 을해(1395, 홍무 28) 6월 13일(을해)
개성부(開城府)를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로 고치고, 양광도(楊廣道)를 충청도(忠淸道)로, 서해도(西海道)를 풍해도(豐海道)로 고치고, 강릉도(江陵道)와 교주도(交州道)를 합하여 강원도(江原道)라 하고, 성석린(成石璘)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정신의(鄭臣義)를 한성부 윤, 우인열(禹仁烈)을 개성 유후사 유후(留後), 노숭(盧崇)과 정남진(鄭南晉)은 부유후를 삼았다
태종 2년 임오(1402, 건문 4) 3월 7일(경인)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 노숭(盧嵩)을 명나라 서울로 보내어 면복을 내려 준데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임금이 면복 차림으로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표문(表文)에 배례(拜禮)하였다
태종 2년 임오(1402, 건문 4) 4월 3일(을묘)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이빈(李彬)이 비보(飛報) 하기를,“노숭(盧嵩)이 개주참(開州站)에 이르렀다가 도적을 만나 돌아왔습니다. 노숭은 사은 방물(謝恩方物)과 마필(馬匹)을 가지고, 감생(監生) 유영(柳榮)은 바꾼 말 2백 필을 압령하여 모두 의주(義州)에 이르렀을 때, 손 소경(孫少卿)도 말을 독촉하기 위하여 또한 의주로 와서 마침내 함께 요동으로 향하여 떠났사온데, 3월 26일에 개주참에 이르자 난폭한 도적 2백여 명이 별안간 나타나서 협공하여 진헌(進獻)하려던 방물과 유영이 몰고 가던 말을 다 빼앗아 갔습니다. 다만 노숭이 바치려고 가지고 가던 별마(別馬) 20필만은 견마군(牽馬軍)이 타고 달아나서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손 소경은 탔던 말에 화살이 맞았으므로 노숭와 같이 모두 달아나서 숨었기 때문에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고 합니다.”하니, 임금이 사람을 시켜 단목지에게 알렸다. 단목지는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였다.
태종 2년 임오(1402, 건문 4) 4월 10일(임술)
사신 축맹헌이 왔으니 길이 막힌 까닭에 요동에 이르지 못하고 온 것이었다. 사은사(謝恩使) 노숭(盧嵩)도 돌아왔다.
태종 2년 임오(1402, 건문 4) 월 30일(임오)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 노숭(盧嵩)이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종 2년 임오(1402, 건문 4) 5월 20일(임인) 승추부 제학(承樞府提學) 박돈지(朴惇之)를 보내 명나라 서울로 가게 하였으니 노숭(盧崇)을 대신한 것이었다.
태종 4년 갑신(1404, 영락 2) 10월 21일(기축)
임금이 의정부에 명하여 참찬(參贊) 노숭(盧嵩)을 위관(委官)으로 삼고, 순금사(巡禁司) 만호(萬戶) 이빈(李彬)·윤저(尹柢)와 더불어 삼성(三省)의 장무(掌務)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는데, 이저가 직임을 풀어서 남재(南在)에게 주겠다는 일을 알아 내어, 대성원(臺省員)과 더불어 말한 자가 있다면 비록 종친과 수상(首相)이라 하더라도 다시 청(請)하지 말고 바로 수금(囚禁)하여 이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 등 20여 인이 모두 나아와서 아뢰었다.“신 등이 들으니, 삼성(三省)의 장무(掌務)가 모두 하옥되었다고 하므로, 황공하여 왔는데, 무슨 연고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임금이 말하기를,“내가 이거이 부자를 죽이지 않으려는 것은 계책이 이미 정해졌는데, 이것을 말하는 자도 또한 그 직책인 까닭으로 금지하지 아니하였다. 어제 들으니 분명하지도 못한 일을 가지고 대신을 탄핵하였다고 하므로 하옥하였다.”하니, 이화 등이 청하여 말하기를,“이 무리는 일찍이 큰 일을 청한 자들이니, 만약 모두 하옥하면 사람들의 큰 일을 사실이 아니라고 할 것이니, 이것이 크게 불가한 것입니다. 또 재상(宰相)이 많은데, 오로지 남재만을 탄핵한 것은 반드시 가히 말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청하건대, 모두 용서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경들의 말이 과연 그렇다. 대저 어찌 옳지 않은 것을 가지고 말하겠으며, 또 어찌 반드시 들어주지 않을 것을 가지고 말하겠는가?”하고, 명하여 삼성(三省)의 장무(掌務)를 석방하여 각기 그 집에 돌아가게 하였다. 이화 등이 다시 청하여 말하기를,“다만 집에 돌아가게 하는 것은 일에 보탬이 없으니, 원하건대, 일을 보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아직 서서히 이를 생각해 보겠다.”하였다. 순금사(巡禁司)에서 국문한 글장을 갖추어 아뢰었는데, 과연 유양이 이를 수창(首唱)하였을 뿐이나, 그가 자수(自首)하였던 까닭으로 다시 묻지 아니하였다. 유양과 조휴(趙休) 등 10여인이 즉시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남재와, 장무(掌務)가 하옥된 일을 논하여 상서(上書)하였으나, 박석명이 임금이 다시 노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계달(啓達)하지 못하였다.
태종 4년 갑신(1404, 영락 2) 6월 6일(을해)
하윤(河崙)·성석린(成石璘)·이저(李佇)·이직(李稷)을 파(罷)하고, 조준(趙浚)으로 좌정승을 삼고, 이서(李舒)로 우정승을, 오사충(吳思忠)으로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를, 남재(南在)로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이빈(李彬)으로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事)를, 노숭(盧嵩)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이지(李至)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유양(柳亮)으로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이행(李行)으로 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유용생(柳龍生)으로 충청도 도절제사(忠淸道都節制使)를, 김승주(金承霔)로 길주도 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察理使)를 삼았다. 하윤·성석린 등이 대궐에 나와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경들이 무슨 까닭으로 사면하기를 청하는지 모르겠다.”하였다. 하윤이 대답하기를,“천변(天變)·지괴(地怪)가 여러 번 나타났습니다. 신들이 재주 없는 사람으로서 재보(宰輔)에 있으니, 어진 사람을 위하여 길을 피하려고 청하는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경들이 자리를 피하면 나는 장차 어찌 하겠는가? 또 조정 신하 중에 누가 경들을 대신할 만한 사람인가?”하니 하윤이 대답하기를,“원수(元首)와 고굉(股肱)은 일체(一體)이니, 대신(大臣)이 자리를 피하면, 어찌 조금이라도 천심(天心)에 사죄(謝罪)되지 않겠습니까? 또 신들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신들이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니오니, 주상께서 스스로 선택하소서.”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태종 4년 갑신(1404, 영락 2) 10월 23일(신묘)
오사충(吳思忠)으로 영성군(寧城君)을, 유양(柳亮)으로 문성군(文城君)을, 이천우(李天祐)로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를, 남재(南在)로 의정부 찬성사 겸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를, 노숭(盧嵩)으로 참판사평부사(參判司平府事)를, 이숙번(李叔蕃)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이지(李至)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김희선(金希善)으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강사덕(姜思德)으로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를, 함부림(咸傅霖)으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겸 사헌부 대사헌을, 조박(趙璞)으로 개성 유후사(開城留後司) 유후(留後)를 삼고, 또 송인(宋因)·황희(黃喜)로 좌사간 대부(左司諫大夫)·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를, 오승(吳陞)으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유두명(柳斗明)으로 사헌 집의(司憲執義)를, 허지(許遲)로 사헌 장령(司憲掌令)을, 이명덕(李明德)으로 좌헌납(左獻納)을, 조사수(趙士秀)로 우헌납(右獻納)을, 이효인(李孝仁)·민심언(閔審言)으로 사헌 지평(司憲持平)을, 노인구(盧仁矩)로 좌정언(左正言)을 삼았다.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2월 23일(갑인)
노숭(盧崇)으로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이숙번(李叔蕃)으로 안성군(安城君) 겸 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권충(權衷)으로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를, 정역(鄭易)으로 중군 동지총제(中軍同知摠制)를, 오승(吳陞)으로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박습(朴習)으로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김만수(金萬壽)로 안주도 도절제사(安州道都節制使)를, 안노생(安魯生)으로 판광주부사(判廣州府事)를, 김소(金素)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이윤상(李允商)으로 사헌 지평(司憲持平)을 삼고, 지평(持平) 김최(金最)를 좌천(左遷)시켜 재령 현령(載寧縣令)을 삼았다. 사헌부에서 김최의 관향(貫鄕)이 불명(不明)하다 하여 고신(告身)에 서경(署經)하지 않을까 염려한 까닭에, 외방(外方)으로 임명한 것이다.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5월 22일(임오) 의정부(議政府)에서 참찬(參贊) 노숭(盧崇)으로 하여금 술을 올리게 하였더니, 이를 윤허(允許)하였다. 명하여 말하기를,“이제 이미 비가 내렸으니, 술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에게도 술 파는 것을 금하지 말고, 나이 많은 대신(大臣) 또한 술을 마시게 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정부(政府)에서 진언(進言)하여 말하기를,“천도(天道)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민간(民間)에 술을 금한 지 오래 되지 아니하였는데, 한 차례 비가 내렸다고 하여 즉시 술의 사용을 허락하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11월 6일(계해)
75세 되던 해인 1411년(太宗 11)에는 의정부 검교 우의정(議政府 檢校 右議政)에 임명되어 집에서 지낼 수 있게되자, 창녕부원군(昌寧附院君) 성석린(成石璘) 등 나이가 비슷하고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과 함께 기영회(耆英會 : 정2품이상의 관직을 가진 70세 이상의 원로들이 모여 만든 모임)을 조직하여 여생을 한가롭게 보냈다.
태종 14년 갑오(1414, 영락 12) 8월 4일(갑진) 검교 의정부 우의정(檢校議政府右議政) 노숭(盧嵩)이 졸(卒)하였다. 노숭은 광주(光州) 사람인데, 자(字)는 중보(中甫)이고 호(號)는 상촌(桑村)이었다. 감찰 지평(監察持平) 노준경(盧俊卿)의 아들로서 을사년 과거에 합격하여 청요(淸要)를 두루 역임하였다. 관(官)이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러 왕명(王命)을 출납하는 것이 오로지 윤당(允當)하였다. 그때 위주(僞主)가 반유(盤遊)하기를 절도가 없이 하였는데, 어느날 명하여 어가(御駕)가 들[野]로 갔다가 마침 큰 비가 와서 냇물이 창일(漲溢)하니, 노숭이 힘써 화복(禍福)을 진달(陳達)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諫)하였으므로 위주(僞主)가 이에 돌아왔다. 그때 사람들이 그 경직(勁直)한 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임술년에 동지밀직(同知密直) 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는데, 어느날 위주(僞主)가 말을 달려 노숭의 정원(庭園)에 들어갔다가 이것이 누구의 집이냐고 물으니, 종자(從者)가 사실대로 대답하자 말을 채찍질하여 빨리 달려서 나가버렸다. 노숭이 자주 반유(盤遊)하는 것을 간(諫)하였기 때문에 위주(僞主)가 마음으로 이를 꺼려하였던 것이다. 기사년에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가 되었는데, 그때 왜구(倭寇)가 끊이지 않아 바닷가의 주군(州郡)이 텅 비게 되니, 노숭이 허물어진 기강(紀綱)을 진작시켜서 위엄(威嚴)과 은혜(恩惠)를 아울러 행하고, 조정(朝廷)에 청하여 백성들의 조세를 3년 동안 면제하였다. 이 앞서 근해(近海)에 성(城)이 없어서 조세(租稅)를 수송할 때 조전(漕轉)하기를 기다리는 폐단을 백성들이 능히 견디지 못하였는데, 노숭이 알맞은 데를 상지(相地)하여 전주(全州)의 용안(龍安)과 나주(羅州)의 영산(榮山)에 성을 쌓아 조세를 운수(運輸)하여서 조전(漕轉)을 편하게 하였다. 또 여러 주(州)에는 옛날에 의창(義倉)이 없었는데, 또 조정에 청하여 비로소 이를 설치하였다. 을해년에 개성 유후(開城留後)가 되었을 때 태조(太祖)가 원종(元從)의 공(功)을 기록하고 토전(土田)과 장획(臧獲)을 하사하였다. 정축년에 경기좌도 도관찰사(京畿左道都觀察使)가 되었는데, 기내(畿內)의 땅이 달관(達官)의 별업(別業)이 많았으나 노숭이 그 차역(差役)을 고르게 하고 청탁(請托)을 행하지 않았다. 경진년에 우리 전하가 즉위하자, 정헌 대부(正憲大夫) 삼사 좌사(三司左使)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발탁하였으니, 대개 재주와 식량(識量)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노숭이 어미를 봉양함에 지극히 효도하여 아침저녁으로 봉양하는 데 어김이 없었고, 어미가 나이 93세로서 죽으니 훌쩍훌쩍 뛰며 울부짖다가 기운이 꺾여서 쓰러졌으나, 상장(喪葬)은 예절을 다하였다. 신사년에 참판승추부사(參判昇樞府事)로 기복(起復)되니, 전(箋)을 올려서 상제(喪制)를 마치도록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갑신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 천전(遷轉)되었다가 신묘년에 검교 의정부 우의정으로서 집에 거(居)하였는데,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 이하 나이와 덕이 함께 높은 수십여 노인과 더불어 기영회(耆英會)를 결성하여 한가롭게 노닐었고, 졸(卒)하던 해인 갑오년에 검교 우의정(檢校右議政)에 바꾸어 제수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였다.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사제(賜祭)하여 치부(致賻)하고, 시호(諡號)를 경평(敬平)이라 하였다. 노숭은 품성과 자질이 순후(純厚)하였는데 성품을 그대로 길러 겸손하였다. 관(官)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고,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기를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고, 붕우(朋友)와는 공경하고 신의가 있었고, 자손을 가르치는 데에는 엄하였으나 어질었다. 경사(經史)를 보기를 좋아하고 세속에서 서로 상대(相對)하는 문자(文字)를 짓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집안을 다스리는 데 검약(儉約)하는 것을 따르기에 힘쓰고 산업(産業)을 경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희유(嬉遊)를 좋아 하지 않고 신불(神佛)을 섬기지 않아, 졸(卒)함에 임하여 여러 아들을 경계하기를,“내가 일찍이 선유(先儒)의 의논(議論)을 보아서 죽음과 삶이 이치를 조금 안다. 내가 죽은 뒤에 불사(佛事)를 쓰지 말라.”하였다. 졸(卒)할 때 1414년(太宗 14) 음력 8월 4일에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다섯이니, 상인(尙仁)· 상의(尙義)· 상례(尙禮)· 상지(尙智)· 상신(尙信)이었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태종은 3일 동안 정사(政事)를 폐(廢)하고 조의(弔意)를 표하였으며, 많은 부의(賻儀)를 하사하여 치제(致祭 : 공신에게 내리는 제사)하고, 유사(有司)에 명(命)을 내려 그 해 10월에 부평부(富平府)에서 동(東)쪽으로 30리(里)쯤 떨어진 수탄면 천반리 경좌원(水呑面 天班里 庚座原 : 지금의 서울시 구로구 천왕동)에 예장(禮葬)하게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경평(敬平)으로 내렸다.(敬平은 ' 시풍야경계왈경 집사유제왈평'에서 연유하였다). 경평이란 시호를 받은 사람은 조선시대에서 상촌선생(桑村先生) 한 분 뿐이다.
선생의 묘소(墓所)는 현재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11번지에 위치해 있고, 제향(祭享)은 경상북도 상주군 화령의 옥연사(玉淵祠)에서 지내고 있다. 노숭(盧崇)을 검교 의정부 우정승(檢校議政府右政丞)으로, 김승주(金承霔)· 정탁(鄭擢)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삼았다.
노숭(盧嵩:敬平公) 묘소(墓所)는 영등포 구치소의 이전 관계로 2008년 6월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1리 산 11번지, (尙信 : 判官公 : 嵩의 五子)의 後孫山으로 이장(移葬).
경평공 제실은 동문리에 2011년 11월 07일 율수재 건립 기공식을 가짐,
제향(祭享)은 경상북도 상주군 화령의 옥연사(玉淵祠)에서 지내고 있다.
다. 가족과 후손
선생의 초취(初娶 : 첫번 혼인으로 맞아 들인 아내) 낙성군부인(洛城郡夫人) 김씨(金氏)는 찬화공신(贊化功臣)이었던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의 딸로 선생과의 사이에서 5형제를 두었다.
아들의 이름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의 의미를 갖게하여
장남(長男)은 휘(諱)가 상인(尙仁)으로 양근군사(楊根郡事)이었고,
차남(次男)인 휘(諱) 상의(尙義)는 공조참의(工曹參議),
3남(三男)인 휘(諱) 상례(尙禮)는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4남(四男)인 휘(諱) 상지(尙智)는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
5남(五男)인 휘(諱) 상신(尙信)은 광주목판관(廣州牧判官)이었다.
5형제의 이름은 '상(尙)"자 항렬에 유도(儒道)의 오상(五常)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붙인 것으로, 후손들은 일룡방(一龍房), 이룡방(二龍房), 삼룡방(三龍房), 사룡방(四龍房), 오룡방(五龍房)으로 불러오고 있다.
본관(本貫)이 광주인(光州人)인 '서(恕)'자 계파(系派)는 모두 상촌(桑村)선생의 후손들이다.
낙성군부인 김씨의 묘소는 풍덕군 중련역 외산(豊德郡 中連驛 猥山)에 북동향(北東向)으로 위치해 있었다하나 실전(失傳)되어 1980년 위판(位版 : 위폐)으로 경평공 산소에 합폄(合폄)하였다.
후취(後娶 : 후처)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 김씨(金氏)는 첨의평리(僉議評理) 상낙군(上洛君) 김후(金厚)의 딸로서 선생과의 사이에 1녀(一女)를 낳아 대사성(大司成) 동래정씨(東萊鄭氏) 곤(坤)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영가군부인 김씨의 묘소는 광주군 구천면 고덕리(廣州郡 九川面 古德里)에서 1980년에 지금의 경평공 묘(墓)에 합부(合附)하였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아니 마르고 바다에까지 흘러가며, 뿌리가 튼튼한 나무는 모진 비바람에도 아니 쓰러지고 꽃과 열매가 무성하듯 상촌(桑村) 선생이 돌아간 후에도 현신(賢臣), 대유(大儒), 도의(道義)와 절의(節義)로 이름이 높은 후손들이 줄을 이어 탄생하였다
3. 조상님들의 공적
노단 [盧旦 ?∼1091(선종 8)] - 고려 전기의 문신
1073년(문종 27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송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1077년 직문하성(直門下省), 이듬해 병부상서(兵部尙書)를 거쳐 1080년 예부상서(禮部尙書)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김상제(金尙磾) 등을 급제시켰다.
이듬해 우복야 한림학사승지(右僕射翰林學士承旨)를 역임하고, 1085년(선종 2년) 중추원사(中樞院使)로서 지공거가 되어 김준(金晙)등을 급제시켰다.
이듬해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參知政事)에 오른 뒤 그만두었다. 사학을 열어 후진교육에 힘썼던 바 이를 광헌공도(匡憲公徒)라 하였고, 이것은 최충(崔冲)의 문헌공도(文憲公徒)를 포함한 사학12도(私學十二徒)의 하나이다. 시호는 광헌(匡憲)이다.
노숭[盧嵩 : 1337∼1414(태조.정조. 태종)] - 조선 초기의 문신
중시조(中始祖) 서(恕;大護軍)祖의 증손(曾孫)이신 경평공(敬平公: 盧 嵩) 상촌(桑村)祖께서는 정축(丁丑)(1337년)에 태어나시었고 정유(丁酉)년(1357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을사(乙巳)년(136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랐으며, 경오(庚午)년(1390년)에 순성익찬공신(純誠翊贊功臣)에 승차하여 형조판서를 겸하였고 임신(壬申) 태조원년(太祖元年)에 호조판서로 옮겼다가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이 되었다. 갑술(甲戌)년(1394년) 양광도(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갑신(甲申)년(1404년)에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판예조사(判禮曺事), 보문관대제학(寶文館大堤學)이 되었다가 신묘(辛卯)년(1411년)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검교의정부 우정승 (檢校議政府 右政丞), 집현전 대제학(集賢殿 大提學)이 되었다.
갑오(甲午)년(1414년)에 관제 개혁에 따라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가 동년(同年) 팔월(八月)에 세상을 뜨시니 그때가 향년(享年) 칠십팔세(七十八世)였고, 경평(敬平)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경평공(敬平公: 盧 嵩) 상촌(桑村)祖는 양조(兩朝)(태조,정조,태종)에 걸친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치적(治績)과 효행(孝行)은 역사에 빛나고 있다.
경평공(敬平公: 盧 嵩) 상촌(桑村)祖의 장인이신 상산 김씨 휘(諱) 선치(先致)는 추충보절찬화공신(推忠保節贊化功臣) 낙성군(洛城君)인데 문무(文武)를 겸전한 상주(尙州)분으로 오남일녀(五男一女)중 따님이 경평공(敬平公: 盧 嵩) 상촌(桑村)祖의 배위(配位) 낙성군(洛城君)부인(夫人)인데 친정 부모처럼 오남일녀(五男一女)를 두셨다. 그 오형제의 이름(名)을 인․의․예․지․신(상인(尙仁)․상의(尙義)․상예(尙禮)․상지(尙智)․상신(尙臣)으로 지으셨으니, 이를 음미(吟味)해 보면, 경평공(敬平公: 盧 嵩) 상촌(桑村)祖께서 계시(啓示)한 합의(合意)가 제자손의 가슴에 절로 스며들리라 믿는다.
아들의 이름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의 의미를 갖게하여
장남(長男)은 휘(諱) 상인(尙仁)는 양근군사(楊根郡事), 일룡방(一龍房)
차남(次男)인 휘(諱) 상의(尙義)는 공조참의(工曹參議), 이룡방(二龍房)
3남(三男)인 휘(諱) 상례(尙禮)는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삼룡방(三龍房)
4남(四男)인 휘(諱) 상지(尙智)는 중추부경력(中樞府經歷), 사룡방(四龍房)
5남(五男)인 휘(諱) 상신(尙信)은 광주목판관(廣州牧判官) 오룡방(五龍房) 이었다.
5형제의 이름은 '상(尙)"자 항렬에 유도(儒道)의 오상(五常)인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붙인 것으로, 후손들은 일룡방(一龍房), 이룡방(二龍房), 삼룡방(三龍房), 사룡방(四龍房), 오룡방(五龍房)으로 불러오고 있다.
선생의 묘소(墓所)는 현재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산11번지에 위치해 있고, 제향(祭享)은 경상북도 상주군 화령의 옥연사(玉淵祠)에서 지내고 있다.
노선경 [盧善卿, 생존기간 미상] - 조선 세종때 문신
조선 전기의 문신. 활동분야 행정
본관 광산(광주.光州). 자 양필(良弼). 호 동악(東岳), 초명, 진경, 동악선생. 아버지는 도염서승(都染署丞) 갑생(甲生)이다. 1435년(세종 17년) 식년정시(式年庭試)에 병과로 급제, 서승(署丞)이 되었고, 이듬해 문과를 거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1464년(세조 10) 사간(司諫)에 임명되자 승(僧) 원각(圓覺)이 왕에게 아뢰어 도성 안에 절을 짓고, 또 왕을 청하여 황곡사(篁谷寺)에 가자 그 옳지 못함을 상소하여 원각을 참수시킨 일이 있었다. .세종은 그의 강직함을 높이 사서 본래의 진경(晉卿)이란 이름에 선(善)자를 내려 선경이라 하게 하였다. 권귀(權貴)의 미움을 사서 함양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고령현감이 되었다, 만년에는 향리로 내려가 풍류와 글로 여생을 마쳤으며, 고을 사람들이 동악선생이라 추앙하였다. 창녕(昌寧)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악고》가 《광주노씨세고 光州盧氏世稿》에 수록되어 있다.
노사신 [盧思愼, 1427~1498] - 조선 전기의 문신 (영의정)
본관 교하(交河). 호 : 보진재, 천은당 별칭 : 자 자반, 시호 문광
활동분야 : 행정
주요저서 :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문선,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1451년(문종 1년) 생원시, 1453년(단종 1년) 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及第)하여 집현전(集賢殿)박사에 임명(任命)되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어려서부터 검소하고 총명하여 주위의 촉망을 받으며 자랐다.
1451년 문종(文宗) 때 생원시에 급제한 이후, 1453년 단종(端宗) 때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집현전학사로 제수되었으며, 이어 집현전부수찬․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를 지내면서 국가사명(國家詞命)을 관장하였다.
1459년 세조(世祖) 때 세자우문학(世子右文學)에 이어 이듬해에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1462년에는 세자좌문학을 거쳐 승정원동부승지를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고, 1463년에는 국가의 기무를 총괄하는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이 무렵에 홍문관직제학을 겸하면서 세조가 주석한 <역학계몽(易學啓蒙)>의 주석서 <요해(要解)>를 증보하여 찬진(撰進)했고, 불경(佛經)을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1465년에는 호조판서와 충청도가관찰사(假觀察使)를 겸하면서 지방행정의 부정을 엄밀히 조사하였다. 같은 해에 최항(崔恒, 1409~1474)과 함께 <경국대전(經國大典)> 편찬을 총괄하였고, 조선 시대에 육전(六典) 가운데 호조의 소관 사항을 규정한 법전인 ‘호전(戶典)’을 직접 담당했으며, 이듬해에는 발영시(拔英試)와 등준시(登俊試)에 모두 합격한 후, 호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다.
1467년 말에는 명(明)나라의 군대와 함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한 공으로 군공2등(軍功二等)을 하사받았다.
1468년에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睿宗)이 즉위한 후, 유자광(柳子光, ?~1512)의 고발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진압함에 공을 세운 남이(南怡) ․강순(康純, 1390~1468) 등이 일으켰다고 한 반역 음모를 평정한 공으로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3등에 올라 선성군(宣城君)에 봉해졌다.
1469년에는 우참찬․좌참찬·우찬성을 지냈으며, 1470년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좌찬성으로서 이조판서를 겸했고,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1476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으며, 이 무렵부터 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동국통감(東國通鑑)>의 수찬에 참여하였고, 강희맹(姜希孟) 등과 함께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편찬하는 등 학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1482년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이 무렵에 이극돈(李克墩, 1435~1503)과 함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새로이 증보하고, 이듬해에는 서거정․어세겸(魚世謙) 등과 함께 <연주시격(聯珠詩格)>과 <황산곡시집(黃山谷詩集)>을 한글로 번역했다.
1485년에는 영중추부사로서 평안도와 경기도의 재해를 극복하기 위한 진휼사 겸 호조판서를 맡아 선정을 베풀었다.
1487년 말에 명나라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등극사(登極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이듬해에 우의정․영안도체찰사(永安道體察使)가 되었으며, 1492년부터는 좌의정을 지냈다.
1495년 연산군(燕山君) 때 영의정이 되었으나 과거시험에 처족(妻族)을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물러났으며, 1498년 연산군(燕山君) 때 이극돈(李克墩)․유자광 등과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주도하여 훈구파로서 세조를 비난한 김종직(金宗直) 등을 규탄하는 데 앞장섰으나 옥사가 커지지 않도록 노력했고, 옥사가 진행되는 중에 병으로 세상을 떴다.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백석리(京畿道 坡州市 坡州邑 白石里)에 자리한 노사신 묘역에 있는 노사신의 신도비이다. 묘소는 본래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에 있던 것을 1940년에 현 위치로 옮긴 것이며, 조부(祖父) 노한(盧閈)과 아들 노공필(盧公弼) 등 4대에 걸친 묘가 조성되어 있다. 1500년(연산군 6년)에 세워진 노사신 신도비는 홍귀달(洪貴達)이 글을 짓고, 임사홍(任士洪)이 글씨와 전액(篆額)을 쓴 것이다. 노사신(1427~1498년)은 1453년(단종 원년)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뒤, 바로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에 임명될 정도로 뛰어난 문재(文才)를 나타냈다. 이후 세자우문학(世子右文學),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와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등을 역임하였고, 『경국대전(經國大典)』,『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95년(연산군 원년)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는데, 평소 독서를 좋아하여 경서(經書), 사서(史書), 백가서(百家書) 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에 관련된 서적까지 널리 통하였다고 한다. 노사신은 첨지(僉知) 경유근(慶由謹)의 딸과 결혼하여 4남1녀를 두었다. |
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 원임(原任) 영의정(領議政)
신도비명(神道非命)
1515년∼1590년(중종 10 - 선조 23) - 조선 중기의 문신
원임(原任) 영의정(領議政) 소재(蘇齋) 노 선생(盧先生)의 휘(諱)는 수신(守愼)이요, 자(字)는 과회(寡悔). 호(號)는 소재(蘇齋), 이재(伊齋), 암실(暗室), 여봉노인(茹峰老人), 시호(詩號) 문의(文懿), 문간(文簡),이다.노씨는 삼한(三韓)의 대성(大姓)으로 광산(光山)이 본관이다. 고려 감문위 대호군(監門衛大護軍) 노서(盧恕)가 좌우위 대호군(左右衛大護軍)으로 치사(致仕)한 노단(盧亶)을 낳고, 노단은 감찰 지평(監察持平) 노준경(盧俊卿)을 낳고, 노준경은 노숭(盧嵩)을 낳았다. 노숭은 본조에 와서 우의정이 되었으며, 노숭의 2세(世)에 양근군수 노상인(盧尙仁)이 있고, 노상인의 3세에는 동지중추부사 노덕기(盧德基:세조와 동서간)가 있는데 혜장왕(惠莊王 세조의 시호(諡號)) 때에 출처 대절(出處大節)이 있었으니, 그 사실은 김 문간공(金文簡公 문간은 김종직(金宗直)의 시호)이 찬(撰)한 지석문(誌石文)에 기록되어 있으며, 바로 소재(蘇齋)선생의 5세조(世祖)가 된다.증조(曾祖) 노경장(盧敬長)은 돈녕부 참봉으로 이조 판서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조(祖) 노후(盧珝)는 풍저창수(豊儲倉守)로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부친 노홍(盧鴻)은 활인서 별제로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되었는데, 모두 선생이 귀(貴)하였기 때문에 3세를 추은(推恩)한 것이다. 모친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씨(李氏)는 성주(星州)가 본관이며, 예조 참판 자화(自華)의 따님이다.소재(蘇齋)선생은 총명하고 박학하였으며, 문장을 짓는 데는 경술(經術) 방면에 더욱 조예가 깊었다. 성동(成童 15세)이 되기 전에 문장과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명망이 있던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 자는 장길(長吉) 시호는 정효(貞孝)) 선생의 따님을 아내로 삼았고, 이로 인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20세에 박사 제자(博士弟子)에 뽑혔는데 태학의 선비들이 선생을 존경하는 자가 많았다. 모재(慕齋) 김 문경공(金文敬公 이름은 안국(安國), 자는 국경(國卿))이 지관사(知館事)로 있을 때, 시습잠(時習箴)으로 제생(諸生)을 시험하고 인재가 성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다가, 선생이 지은 글을 보고 다시 감탄하기를
“말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27세에 회재(晦齋) 이 문원공(李文元公 이름은 언적(彦迪), 자는 복고(復古))을 처음으로 뵙고 존심(存心 마음을 보존하는 것)하는 방법을 듣고자 하자 문원공이 손바닥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물건이 이 안에 있는데 꼭 쥐면 깨지고 놓아두면 잃는 것이다.”
하니, 선생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망조(忘助)의 이명(異名)입니다.”
하였다. 가정(嘉靖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22년(1543, 중종38) 갑과(甲科) 장원으로 뽑혀서 처음에는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고 다시 홍문관 수찬으로 옮겼다. 다음해(1544, 중종39)에 시강원 사서로 옮겨서 《서연강의(書筵講義)》를 지었다.퇴도(退陶) 이 문순공(李文純公 이름은 황(滉), 자는 경호(景浩))과 독서당(讀書堂 연소한 문관에게 사가독서를 시킨 곳으로 후에 호당(湖堂)이라 함)에 뽑혔으며, 도학(道學)으로 서로 추앙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해 공희왕(恭僖王 중종의 시호(諡號))이 승하(昇遐)하고 영정왕(榮靖王 인종의 시호)이 왕위에 올랐다. 다음해 을사년(1545, 인종 원년)에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어 이기(李芑 자는 문중(文仲), 호는 경재(敬齋), 시호는 문경(文敬))를 간사한 소인이라고 논핵(論劾)하였고, 이조 좌랑에 옮기게 되었다. 영정왕이 즉위한 지 8개월 만에 승하하고 공헌왕(恭憲王 명종의 시호)이 즉위하자, 윤임(尹任)의 사건으로 사화(士禍)가 일어났고, 선생은 직첩(職牒)이 거두어져 충주로 돌아왔다.명종 3년 정언각(鄭彦愨)이 벽서(壁書)를 올리자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자 대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소윤이 정권을 잡은 뒤, 윤임(尹任) 등의 대윤을 제거하기 위하여 1547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노수신(盧守愼)은 소윤계열인 윤춘년(尹春年)과의 친분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조좌랑 에서 파직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양재역 벽서 사건은 을사사화의 2년 뒤인 1547년에 일어난 것으로 윤원형 세력이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정적 숙청 사건이다. 1547년(명종 2)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丁熿),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권응정, 권응찬, 이천계, 등과 함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벽에는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세를 농락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는가'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진도로 옮겨 19년간 귀양을 살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관련된 사람에게 죄를 가하였는데, 선생은 처음에는 순천에 정배(定配)되고 그해 다, 19년 동안의 귀양살이 속에서도 이 황(李 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연구하여 휴정(休靜 서산대사), 선수(善修 스님) 등과의 깊은 교제로 불교학문(佛敎學問)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선생은 진도에서 19년을 있었다. 그곳은 해중(海中)이라 주민이 원래 우매하였는데, 선생이 그들에게 예속(禮俗)을 가르쳐 비로소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에 예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 집중설(執中說),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 등을 저술하였다. 이 문순공(이 황(滉))이 이 글을 보고 말하기를,
“사도(斯道)가 동방에서 끊어지지 않았다.”
하였다. 서로 왕복한 서한(書翰)이 있다.공헌왕(명종의 시호) 즉위 20년에 비로소 을사사화에 관련된 사람을 석방하여, 선생은 괴산(槐山)으로 양이(量移 죄를 감하여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것)되었다. 소경왕(昭敬王 선조의 시호)이 즉위하자 이 충정공(李忠正公 충정은 이준경(李浚慶)의 시호, 호는 동고(東皐), 자는 원길(原吉))이 상에게 아뢰어 드디어 수용(收用)하는 일이 있게 되었는데, 선생은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1569, 선조2)에는 직제학 겸 예문관응교에 승직되었고, 다시 부제학으로 올랐다.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기를 간청하니 상이 대신의 말을 받아들여 특별히 청주 목사를 제수하였으며, 곧 호서 관찰사가 되었다.
선생은 치본(治本 다스리는 근본)에 관한 수천 언(言)을 올리고 이어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바치니, 상이 교서관(校書館)에 내려 간행토록 하였다. 그 무렵 부친 의정공(議政公)이 별세하여 분상(奔喪 먼 곳에서 친상을 당하여 급히 집으로 돌아가는 일)하였는데 너무 슬퍼하여 상을 치르기 힘들 지경이었다. 일이 알려지자 상이 특별히 어의(御醫)를 보내어 문병하였다.선생은 상소하여 사례하고 군덕(君德)에 관한 여섯 가지 경계할 항목을 바쳤다.첫째, 훈고 해석만을 힘쓰고 실지 의리를 밝히는 데 힘쓰지 않는 것,둘째, 남의 결점만 살피고 치도(治道)를 바로 세우지 않는 것,셋째, 권세를 장악하는 것만 힘쓰고 인심을 수습하려 하지 않는 것,넷째, 전례(前例)만 따르고 고의(古義 선인(先人)들의 참뜻)를 시행하지 않는 것,다섯째, 아첨하는 말만 좋아하고 정직한 사람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여섯째, 재능과 기예(技藝)만을 즐기며 도량과 식견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이때에 이 문순공(李滉)과 더불어 상제례서(喪祭禮書)를 강론하였다. 삼년상을 마치고 대사간에 제수되자 사양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특히 대사헌을 제수하자 이것도 고사(固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모친이 병중이라 휴가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를 하루도 곁에서 떠나 보낼 수 없다. 노모(老母)를 서울로 모시도록 하라.”
하고, 현(縣)과 도(道)에 명하여 이 일을 돕도록 하였다. 서울에 들어와 선생이 민사(民事)에 대해 상소를 올리자, 상이 수고를 위로하고 다시 이르기를,
“현명하고 재주 있는 사람에게 직책을 맡기고 수령을 선택하여 우선 백성이 풍족히 된 뒤에야 조종(祖宗)의 치적(治績)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임신년(1572, 선조5)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고 곧 판서로 승급되었다. 당시에 현황제(顯皇帝 명 신종(明神宗))가 즉위하여 등극(登極)을 반포(頒布)하는 조사(詔使 조서를 받들어 온 사신)가 오게 되자, 선생이 상빈(上儐)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관반(館伴)이 되었다. 뒤이어 대제학에 제수되었고 《상관의(祥冠儀)》를 지어서 올렸다. 다음해인 계유년(1573, 선조6)에 우의정에 제수되었다.선생은 상이 즉위한 원년(元年)에 교리(校理)로 소환되어 1년에 세 번이나 옮겨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부친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다시 돌아온 지 3년 만에 지위가 삼공(三公)에 이르렀으니, 요직에 임용됨이 비할 데 없으며 모든 사람이 흠모하였다. 여름에 상이 삼공과 천관(天官 이조의 별칭)에게 학행(學行)이 있는 사람을 추천토록 명하니, 조목(趙穆), 이지함(李之菡), 김천일(金千鎰), 최영경(崔永慶) 등을 추천하고, 또한 선비 유몽학(柳夢鶴), 기대정(奇大鼎), 홍가신(洪可臣), 유몽정(柳夢井) 등 네 사람을 추천하니, 모두 6품(品)의 벼슬을 제수하였다.재이(災異)가 있자 병을 핑계 대어 물러날 것을 간청하니, 상은 이를 허락하였는데, 정원(政院)과 옥당(玉堂 홍문관의 별칭)에서 아뢰기를,
“나라의 원로(元老)를 떠나게 할 수 없습니다.”
하고, 대신들 또한 유임시킬 것을 상에게 아뢰어 다시 정승에 유임되었다. 정업원(淨業院)을 철폐하고 장오법(贓汙法)을 거듭 엄중히 할 것을 간청하였다. 을해년(1575, 선조8)에 인순대비(仁順大妃)가 승하하자 선생은 좌상(左相)인 박순(朴淳)과 함께 백모(白帽)에 백대(白帶)로 삼년상을 마치는 의견을 아뢰니 이를 따랐다.당시에 당의(黨議)가 크게 일어나 소란하자 선생은 상에게 아뢰어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을 다 함께 좌천시켜 보외(補外 고관(高官)을 징계하여 지방관으로 보임(補任)시키는 것)토록 아뢰었다. 곽월(郭越)이 상소하여 일을 말한 가운데,
“외인(外人)이 궁중과 내통하여 사림을 해친다.”
는 말이 있어 상이 노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이 말은 항간에 떠도는 말로 신도 들었습니다. 곽월이 경솔하게 길에서 떠도는 말을 믿고 그러한 것이니, 이는 그의 잘못이지만 그 말을 가지고 말한 사람까지 죄줄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정축년(1577, 선조10)에 인성대비(仁聖大妃)가 위독하자 대신에게 교서(敎書)를 내렸는데, 이유(李瑠 계림군(桂林君). 성종의 제3자인 계성군의 양자), 윤임(尹任), 유관(柳灌), 유인숙(柳仁淑) 등을 복관(復官)하는 일이었다. 상이 이 일에 대처할 방법을 하문(下問)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신은 을사년의 죄인입니다. 말을 하건 하지 않건 죄가 되는 것이나, 네 사람의 관작을 회복하여 대비를 위로해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고, 의정부에서도 이어 그때의 공신들의 훈작을 삭제하고 연좌(連坐)를 풀어 주고 적몰(籍沒)된 것을 환원토록 청하였다.무인년(1578, 선조11) 정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자 사직코자 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에 모친인 대부인(大夫人)이 나이 80세가 되자, 상이 미두(米豆) 30석(碩)과 주(酒), 수(脩 건육(乾肉)), 어석(魚腊 생선포) 등의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선생은 전문(箋文)을 올리고 끝내 사직코자 하였으나,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가 곧 다시 정승으로 복직되었으니, 이것은 대신이 상에게 아뢰었기 때문이다.간관(諫官)인 강서(姜緖)가 교만함을 경계하는 글을 올렸는데, 말이 매우 직설적이라 주위가 숙연(肅然)히 이를 꺼리고 두렵게 여겨 감히 발설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이 아뢰기를,
“강서의 말은 다른 사람이 말하기 힘든 것을 능히 말하였으며, 상께서도 듣기 싫어하시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옛말에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곧다.’ 하였는데, 상께서 간언을 이같이 너그럽게 받아들이시니, 이 같은 신하가 있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였다. 교리 김우옹(金宇顒)이 성운(成運)을 증작(贈爵)할 것을 제의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조식(曺植), 성운(成運), 이항(李恒)은 선왕(先王)께서 불러들인 세 사람입니다. 조식은 높은 지조가 있고, 성운은 겸손하여 두 분 모두 자수(自守)하는 선비라 할 수 있으며, 이항은 평온한 성품으로 실제로 후학을 깨우쳐 인도하여 학자에게 공이 많으니, 이제 포전(褒典)하려면 마땅히 이항을 우선하고 성운은 다음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이 당시 조식은 이미 대사간에 증직되었다. 그해 겨울에 상이 병환이 나자 선생을 침소로 불러들이셨는데, 모든 대신이 뒤를 따랐다. 상이 선생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사자(嗣子 세자)를 잘 보필하라.”
하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신은 목숨을 걸고 시행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의 병환이 회복되자 삼공을 인견(引見)하여 선비를 추천토록 하니, 선생은 민순(閔純)을 천거하였다.신사년(1581, 선조14) 봄에 재이가 일어나자 사직코자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철(鄭澈)이 이에 대한 비답문(批答文 상소에 대한 임금의 하답문)을 찬(撰)하였는데, 그 가운데 나무라고 모욕하는 말이 많았는데, 상이 이를 알면서도 개작(改作)하지 않았다. 선생이 사직을 고집했으나 상이 이르기를,
“하늘이 그대를 과인에게 주었으니 떠날 수 없다.”
하였다. 이해 9월에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별세하였다. 상이 각별한 조부(吊賻 치부(致賻)와 조제(吊祭))를 내리면서 이르기를,
“지나치게 몸을 손상시켜 모든 사람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
하고, 날이 춥고 길이 먼 것을 염려하여 입고 있던 초구(貂裘)를 벗어 주고 아울러 약물(藥物)을 하사하고 수총(守塜)하지 말고 집에 돌아와 곡(哭)하도록 했으며, 열읍(列邑)이 모두 상사(喪事)를 돕도록 하였다. 장사 전에 상께서 선생이 초상(初喪)에 절차 있음을 듣고 예유(禮諭)를 극진히 했으며, 장사를 마치자 다시 반곡(返哭)하라는 명이 있었다. 반곡을 마치자 선생은 의려(倚廬 중문 밖 한 구석에 세운 여막(廬幕))에 거처하고 거적자리와 풀베개로 잠을 자고 거친 밥으로 끼니를 이으니, 선생의 나이 67세였다. 상이 이를 염려하여 임시방편을 따르도록 간곡히 권면하고 미두(米豆)를 하사하고, 겨울이 되자 또 하사하였다. 선생은 이에 사례하고 상소하기를,
“벼슬하여서는 녹(祿)을 받아서 부모를 봉양하고 상(喪)을 당하여서는 사물(賜物)로 제사를 받들게 되니, 신의 모친은 살아 있을 때나 돌아간 뒤 모두 신의 공 없는 녹을 드셨습니다.”
하였다. 대상(大祥)에 이르자 돌아가 가묘(家廟 집안의 사당(祠堂))에 부사(祔祀) 지내기를 빌었다. 이때에 좌상(左相)이 없었으며 붕당이 한창 서로 공격을 일삼으니 조정이 크게 어지러웠다. 상이 자리를 비워 두었다가 선생이 복(服)을 마치기를 기다려 드디어 좌의정을 제수하였다. 선생은 소를 올려 면직을 간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특별히 승지를 보내어 부르고 한편 사관을 보내어 중도에서 위문케 했으며, 한강 가에서 선온(宣醞 신하에게 술을 하사함)하는 등 예우가 각별하였다.을유년(1585, 선조18)에 늙은 것을 칭탁하고 면직을 빌었으나 허락받지 못했으며, 궤장(几杖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하고 영의정을 제수하였다. 명을 받고 상에게 사의(辭意)를 올리고 박근원(朴謹元), 송응개(宋應漑), 허봉(許篈) 등을 전리(田里)로 돌려보낼 것을 아뢰었는데, 이때 박근원은 이미 죽은 뒤였다. 이들 세 사람은 계미년(1583, 선조16)에 쟁론하다가 죄를 얻어 귀양 갔는데, 이들은 삼찬(三竄)이라고 불리었다.병술년(1586, 선조19) 4월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자 상소하여 면직을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해 겨울에 십청정(十靑亭)을 짓고, 편액(扁額)을 달고 자명(自銘)을 지었다.정해년(1587, 선조20)에 또다시 연로한 것을 구실로 소를 올려 면직을 비니, 상은 이를 허락했으나 대신들이 아뢰기를,
“이제 중외(中外)가 소란하여 근심이 많은 판국에 모(某)의 덕망이 아니면 이것은 진정(鎭靜)할 수가 없을 것이니, 물러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드디어 명을 취소하였다. 다음해(1588, 선조21) 여름에 사직을 고집하여 윤허받았으나, 곧 특명으로 다시 제수하고 분부하기를,
“사관을 보내면 모(某)가 연로하여 행례(行禮)할 수 없을 것이니, 본부(本府)의 낭사(郞舍)로 하여금 선유(宣諭)토록 하라.”
하였다. 선생은 오히려 굳이 사양하여 마지않았으나 판중추부사의 직책에 옮겨졌다. 기축년(1589, 선조22) 봄에 봉조하(奉朝賀)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으며, 치사하려 했으나 이것도 윤허하지 않았다.일본의 왜인이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자, 이 일을 대신에게 회부하여 의논케 하였는데, 선생이 말하기를,
“천하에 악은 똑같은 것이다. 수길(秀吉)은 임금을 시해하였으니, 의리상 사귈 수가 없다.”
하였다. 그해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아뢴 사건으로 옥사(獄事)가 크게 일어났다. 선생은 전에 명을 받아 김우옹(金宇顒) 등을 추천한 일이 있었는데, 정여립이 한창 이름을 날리던 때라 그도 또한 추천 명단 가운데 들어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모(某)를 융숭(隆崇)하게 우대하였는데 죄인을 끌어들였으니, 이는 나라의 위망(危亡)이 관련된 것이다.”
하니, 그 뜻이 준엄하였다. 선생은 곧 국문(國門) 밖에 나가 죄인으로 자처하였다. 상이 대신의 말을 듣고 판중추부사를 파직하였다. 이때 정철(鄭澈)이 좌상이 되어 실제로 옥사를 다스렸는데, 옥사가 점차 만연되어 진신(搢紳)들이 크게 화를 입었으며 인심이 흉흉하였다. 누군가가 전례를 들어 스스로 해명토록 하니, 선생은 말하기를,
“이미 잘못 천거하였으니 법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어찌 스스로 변명하여 면책(免責)을 바라겠는가?” 하였다.다음해(1590, 선조23) 4월 7일에 별세하였다. 선생은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10년(1515, 중종10)에 태어나서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18년(1590, 선조23)에 졸(卒)하니, 76세였다. 화령(化寧)에다 장사했으며, 자신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묘지명(墓誌銘)
1590년에 노수신은 죽는다. 그는 '암실선생자명'(暗室先生自銘)이라는 묘비명을 스스로 짓는다. 그는 진도에서의 귀양살이를 ‘절조를 지키며 돌아와 보니 귀양살이도 비로소 편하구나’라고 비명에 적고 있다.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은 광릉 이씨(廣陵李氏)로, 선생과 동년생(同年生)이다. 선생이 별세한 그해 3월 12일에 별세했으며, 선생과 같이 부장(祔葬 한 무덤 안에 함께 장사 지냄)하였다.
상주 고을 대표적 성씨는 노(盧), 황(黃), 조(趙), 이(李)씨인데 노(盧)씨를 첫번으로 꼽는 것은 상주 입향조인 상인(尙仁)의 7대손(代孫)에 문간공(文簡公)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있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어 조카 노대해(盧大海)를 후사(後嗣)로 삼았으니, 관직은 영천 군수(榮川郡守)이다. 소재(蘇齋)의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로는 노계래(盧戒來), 노계난(盧戒難), 노계후(盧戒後) 셋이 있고, 사위는 파주 목사(坡州牧使) 허징(許澂:허준의 아우) 한 사람이 있다. 노대해(盧大海)는 예천 군수(醴泉郡守)인 노도형(盧道亨)을 낳았으며, 노도형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생원(生員) 노석명(盧碩命), 안변 도호부사 노준명(盧峻命), 봉화 현감(奉化縣監) 노경명(盧景命)이다. 사위는 응교(應敎) 심대부(沈大孚), 진사(進士) 유덕구(柳德耇), 도사(都事) 이항(李沆), 진사 이홍석(李弘奭) 등이 있다.
蘇齋선생의 학문은 사람이 지켜야 할 평상의 도리에 독실하고, 천덕(天德)과 천도 (天道)에 통달하여 만사 만물에까지 미쳤다. 부모를 섬기고 형제간에 잘 지내고 붕우 간에 교제하는 데로부터 임금을 섬기고 풍속을 바르게 교화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그 차례가 자신에게 근본하고 가정에서 시작하여 나라에까지 미루어 나간 것이다.
임금의 마음을 바르게 인도하여 대의를 바르게 하고 현재(賢才)를 천거하고 구장(舊章 예부터 내려오는 전장(典章))을 준수하여 정치의 체통을 밝혔으니, 이러한 내용은 그의 강의서(講義書)인 《구색(懼塞)》, 《양정(養正)》 등의 저술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데, 모두 임금에게 학문을 권하는 글이다. 蘇齋선생이 외딴 바다 섬에서 죄수가 되어 깊은 시름과 곤궁 속에서도 재주와 학식을 함양하여 마침내 크게 쓰이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이다.
문장이 매우 높아 용주(龍洲) 학사 조경(趙絅)이 평하기를, “그의 성률(聲律)의 고기(古氣)는 은 나라 유(卣 울창주를 담는 그릇)와 주 나라 이(彛 종묘의 제기)에 비길 수 있다.” 하였다.
蘇齋선생은 옛 성인이나 현인들의 글을 탐독하고 이를 깊이 체득하였으며 이것이 쌓여 문장이 되어 나왔으므로 ‘《역경(易經)》의 문체는 기(奇)하면서 일정한 법칙이 있고, 《시경(詩經)》은 바르면서 화려하고, 《춘추(春秋)》는 필법이 근엄하다.’ 는 말은 선생에게 장대의 먹줄이나 대패처럼 꼭 맞는 말이다.어떤 사람은 선생의 문장이 송유(宋儒)와 같지 않다고 의심하나, 왕봉주(王鳳洲 명(明) 나라 사람으로 봉주는 호, 이름은 세정(世貞))도 말하기를, “이(理)를 말한 것에도 품별(品別)이 있으니, 무숙(茂叔 송(宋)의 주돈이(周敦頤)의 자, 호는 염계(濂溪))의 간결하면서도 준엄함과 이정(二程 송(宋)의 대유(大儒)의 정호(程顥)와 정이(程頤))의 분명하고 합당함과 자후(子厚 송(宋)의 장재(張載)의 자, 호는 횡거(橫渠))의 깊이 있음이 다 함께 도(道)를 지키는 데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하였다.
蘇齋선생의 운문은 해도(海道)에서 지낸 19년 동안의 택반음(澤畔吟 관직에서 쫓겨나 실의에 빠져 지은 시)으로, 바로 초(楚) 나라 굴원(屈原)이 우울한 심정을 읊은 것과 같은 것이다. 장계곡(張谿谷 계곡은 장유(張維)의 호, 자는 지국(持國))이 말하기를,“소재(穌齋)의 기격(氣格)은 웅발(雄拔)하다.” 하였으며, 최간이(崔簡易 간이는 최립(崔岦)의 호, 자는 입지(立之)), 차창주(車滄洲 창주는 차운로(車雲輅)의 호, 자는 만리(萬理)임)는, “본조(本朝) 3백 년 간에 문필에 종사한 사람으로 이에 미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고까지 하였으니, 어찌 후세의 자운(子雲)을 기다리겠는가? 蘇齋선생의 별호(別號)는 소재(蘇齋) 또는 이재(伊齋) 혹은 암실(暗室)이다. 최후에 좌상 정탁(鄭琢 호는 약포(藥圃), 자는 자정(子精))이 왕을 모시고 조용히 말하기를, “모(某)와 같은 어진 사람을 상이 신임하고 중책을 맡겼는데, 하루아침에 잘못 추천한 일에 연좌되어 배척을 받으니, 애석한 일입니다.”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광해군 2년에 정의(廷議)에서 선생을 소경왕(昭敬王 선조의 시호)의 묘정(廟庭)에 배향하기를 청하니, 광해군은 ‘종시(終始)를 보존하지 못하였다.’ 하여 파(罷)하도록 하였다.
소재 노수신(蘇齋 盧守愼)선생이 돌아가시자, 옥주(沃州) 사람들이 그를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하였다. 상주(尙州)의 도남(道南), 충주(忠州)의 계상(溪上)에 사당이 있으나 모두 합향(合享)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道德博文 / 도덕이 있고 박문하니
仁也 / 인이요
爲國以禮 / 나라 위해 예를 다했으니
敬也 / 경이로다
盡言無隱 / 할 말을 다하여 숨김이 없었으니
忠也 / 충이요
守經直義 / 바른 것을 지켜 의리를 곧게 하였으니
정야 / 정이로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기둥
曉月空將一影行 黃花赤葉正含情(효월공장일영행 황화적엽정함정
雲沙目斷無人問 倚遍津樓八九楹(운사목단무인문 의편진루팔구영)
새벽 달빛에 공연히 그림자를 데리고 걷노니 누런 꽃 붉은 잎이 정녕 정을 머금은 듯.아득히 구름 낀 모랫벌, 물을 길도 없느니 누에서 이 기둥 저 기둥에 계속 기대기만 하여라.
벽파정 시
二公天上在(이공천상재) / 두 공은 천상에 있고
孤客海中浮(고객해중부) / 나그네 홀로 바다 가운데 떠 있네.
幸緩今朝死 (행완금조사) / 이 아침까지 목숨이 붙어 있으니
前導尙自悠(전도상자유) / 앞길이 오히려 절로 멀고 유유하네.
벽정대인(碧亭待人)
효월공장일영행(曉月空將一影行) / 새벽달에 허전히 그림자 끌고 가니
황화적엽정함정(黃花赤葉正含情) / 누런 꽃 붉은 잎은 정을 담뿍 머금었네
운사목단무인문(雲沙目斷無人問) / 구름 모래 아마득해 물어 볼 사람 없어
의편진루팔구영(倚遍津樓八九楹) / 나루 누각 기둥 돌며 여다홉 번 기대었소
구름 아득한 하늘 끝자락, 파도 너머 백사장을 눈이 아프게 바라보지만 건너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아침부터 기둥을 옮겨가며 바라보던 기다림은 어느새 벽파정(碧波亭) 기둥 돌기를 8~9번이나 훌쩍 넘겼다는 서러운 마음을 담은 노래다.
愼氏亭懷無悔甫弟 / 신 씨의 정자에서 아우 무회를 그리워하며
路盡平丘驛 / 로진평구역
江深判事亭 / 강심판사정
柳暗靑坡晩 / 유암청파만
天晴白嶽春 / 천청백악춘
광주노씨 가훈
첫째,「부모를 봉양하는 데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면, 극진히 하지 않는 일이 없어라」
둘째,「반혼(返魂)하는 것이 고예(古禮)가 아니고, 거여(居廬)· 대묘(待墓)하는 것은 좋은 풍속 이니, 반혼하면 처자와 더불어 혼동하여 거처해서 슬픔을 잊을 때가 많으니 크게 불가 한 일이다」
한편 광주노씨(光州盧氏)는 광산노씨(光山盧氏)와 이름만 다를 뿐 본관이 같다. 광산은 광주의 옛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후손들은 지금도 광산노씨로 쓰고 있다.
2000년 현재 ▲광주노씨는 48,574명이고, 광산노씨는 28,355명에 이른다. 따라서 광주노씨와 광산노씨를 합하면 76,929명으로 ▲교하노씨 53,203명보다 오히려 많다.
광주노씨의 시조 노해盧垓)의 선대는 중국 당나라 사람이다. 그는 신라 효성왕 14년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건너와 정착했다. 그리하여 9형제 가운데 ▲垓(해)광산.광주(光山.光州), ▲塢(오)교하(交河), ▲址(지)풍천(豊川) ▲坵(구)장연(長淵), ▲滿(만)안동(安東), ▲坤(곤)안강(安康), ▲增(증)연일(延日), ▲ 坂(판)평양(平壤), ▲垣(원)곡산(谷山), 등으로 본관이 갈라진다.
광주노씨의 후손 중에서 노만이 광주군에 봉해져 그를 1세조로 하는 계통, 노서를 1세조로 하는 계통, 노전을 1세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성리학에 밝았던 노극홍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창녕의 하왕산성을 끝까지 지켰다. 노무현 현 대통령도 광주노씨 후손이다.
주요파는 ▲경평공파 ▲규정공파 ▲헌납공파 ▲정평공파 등이다. 광주광역시 오치동, 전남
함평군. 화순군을 비롯 경남 창녕군. 하동군 청암면. 합천군 적중면 등이 집성촌이다.
노 필 [盧필, 1464~1532]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광산(광주光州). 호 묵재 별칭 자 공서, 초명 조동 자 공서(公瑞). 호 묵재(墨齋). 초명(初名) 조동(祖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학행(學行)이 뛰어나면서도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김굉필(金宏弼)과 더불어 학문에 전념하였다. 1518년(중종 13년)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의 천거로 6품관으로 발탁되어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 ·공조정랑(公曹正郞) 주부(主簿) 등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김안국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었다. 풀려나오자 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여생을 독서로 보냈다.
고성(固城)의 갈천서원(葛川書院), 초계(草溪)의 송원서원(松原書院)에 배향되었다.
노 항용(盧亢龍 : 1545~ 武科 萬戶公 朝散大夫 定略將軍)
본관 광산(광주光州). 호는 이재(伊齋), 만호(萬戶 朝散大夫 定略將軍)이시며. 노수신(諱:盧守愼.文簡公,號:蘇齋)의 이복형제(異腹兄弟)이신 항룡祖(亢龍. 萬戶. 朝散大夫 定略將軍).(홍.鴻:活人暑別提의 칠곱번째 아드님)는. 홍(鴻)의 후실(後室)에서 태어나 서출(庶出)의 서러움을 삼키면서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눈물나는 노력과 백형이신 노수신(盧守愼)의 조언으로 조선 중기의 무관(文武)이되어, 만호(萬戶 朝散大夫 定略將軍)를 지내시고, 소재(蘇齋) 노수신(諱:盧守愼.文簡公,號:蘇齋)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노수신(諱:盧守愼.文簡公,號:蘇齋)이 귀향 살이를 할적에도 어러운 난간을 이겨 내면서 문무를 겸비하는데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아니하셨다, 말년에는 상주 화령에서 여생을 보내시고 후진양성에 많은 업적을 남겨셨다, 조선조(朝鮮朝)에는 서출(庶出)도 입신(立身)을 할 수 있었으며, 직위에 따라 품계가 주어 젔다,
배위로는 淑夫人 居昌 潘氏로 1남2녀 두시었다,
墓所는 忠淸北道 報恩郡 北面 金鶴洞 子坐 (合祔) 지금은 실전되었다.
노 사휴(盧 思休 : 1684-1775) - 조선시대 문신
본관 광산(광주光州).경평공(諱:嵩:敬平公:桑村)祖의 8代孫이시며, 수신祖(諱:守愼.文簡公,號:蘇齋)의 이복형제(異腹兄弟) 이신 항룡祖(亢龍. 武科.萬戶).(홍.鴻:活人暑 別提의 칠곱번째 아드님)로. 이어지는 가계도(家系)는 항룡(武科.萬戶), 오생(午生, 從士郞), 후인(後仁), 유명(有命), 사휴(思休)祖이며. 장사촌(長沙村) 입향조 思休(諱:學初,號:休齋 1684-1775)祖께서 1721년老論과 少論의 黨派싸움<朝鮮:景宗(장희빈의아들)때 辛丑 壬寅 연이은 士禍>으로 老論은 연인군<英祖>,少論은 景宗.(장희빈의아들)을 王位에 오르기 위하여. 黨派싸움을 하다. 少論이 勝利하고 老論(宋時烈 추종세력)이 패하여 少論이 政局을 장악하여 少論의 강경론자들이 老論의 과다한 처분을 요구하고 있을때 南人의서열출신인 묵호룡.은 老論측에서 景宗을 시해하고자 모의를 했다는 이른바 삼급수설 (대급수:칼로 살해, 소급수:약으로 살해, 평지수:모함하여 패출함)을들어 고변 하였다. 이 고변에 따르면 음모 관련자는 정인중. 김용택. 이기지. 이희지. 심상길. 홍의인. 김민택. 백망. 김성행. 등이였는데 이들은 모두 老論의 4大臣의 아들 또는조카 이거나 아니면 추종자 들이였다 .
이고변은 숙종의 사망전후에 당시 世子였든 景宗을 해치려고 모의 하였다는 것인데 이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묵호룡.은 남인서열로서 風水를 공부하여 지관이 된사람이다. 政治的 야심을 품고 있던 그는 風水說을 이용하여 老論에 접근하여, 처음에는 王世子(英祖)편에 셨으나 政局이 少論의 優勢로 돌아서자 배반하여 이같은 음모사실을 고변하였다.
이 사건은 노론에 엄청난 타격을 주였다, 묵호룡.의 고변이 있자 국청이 설치되어 역모관련자들을 잡와서 처단하였고, 老論의 4大臣도 다시 漢城으로 압송되여 사사 되었다. 국청에서 처단된 사람중에 법에 의하여 사형된 사람이 20여명. 맞아서 죽은이가 30여명. 그밖에 가족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명. 유배자가 114명.(이중 思休祖 께서도 포함됨)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사람이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少論파 에서는 윤선거.와 윤중.을 복관 시키고 묵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의 훈작이 수여 되었다.
思休(諱:學初 號:休齋)祖께서는 朝鮮(20代王) 景宗 元年 辛丑. 壬寅. 사화(1721년)에 연루되어 忠淸道 槐山(화양동)으로 유배 되었다가 연인군(英祖 21代王)이 王位에 오르자 유배형이 면재 되였으나 先妣로서 모욕감을 감추지 못하여 政治에 뜻을 버리고 이곳 尙州 長沙村에 定着 하시였다. 배위로는 光山 金氏로 1남1녀를 두시었다,
墓所 : 尙州市 支坪里(長沙洞) 冠登山 白虎墱 酉坐 合墳
노 하남(盧 夏南 : 中棬府使 1709-1778) - 조선시대 문신
본관 광산(광주光州). 사휴祖(諱:學初 號:休齋)의 아드님이신 夏南祖(諱:致道 中棬府使 1709-1778)는 思休祖(諱:學初. 號:休齋)께서 辛丑,壬寅,士禍의 형이 면제되어 夏南祖(諱:致道 中棬府使)께서는 官職에 나갈수 있는 기회가 주어저. 關西地方의 수령으로 있을때(1761년 英祖37年) 사도세자가 英祖(21代王)임금 모르게 關西地方을 3개월가량 유람한일이 있었다. 이 일과관련 하여 世子(사도세자)를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老論측의 나경언.윤재겸.등이 世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는 주장을 담은 상소를 올리자 英祖(朝鮮 21代王)는 世子의 關西地方 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中棬府使 하남(諱:夏南.致道1709-1778)祖 께서는 思悼世子의 변으로 祖孫의 信義를 버리는 英祖(1763년英祖39년)를 보고 늙어신 부모님<思休(諱:學初. 號:休齋)祖>이 생각나 尙州 長沙村으로 돌아와 老父母에 대하여 효성을 다하며 後孫들을 위하여 百歲의 터전을 닦아 놓으셨다.
思休祖(諱:學初 號:休齊)의 辛丑.壬寅.士禍 와 夏南祖(諱:致道 中棬府使)의 關西地方의 思悼世子 연루사건등을 숨기고 사회와 등을 돌리고 살아오신 先祖님들의 무지를 탓하면서도 後孫들에게 돌아갈 危險을 생각한 先祖님의 호위에 感謝들일 뿐입니다
노 국형(盧 國衡 : 1898-1952) - 대한 광복군
본관 광산(光山.광주光州). 思休(諱:學初,號:休齊)祖의 8대孫이신 국형(諱:國衡.鳳九,號:藘明 1898-1952)祖 께서는 1920년경에 尙州.聞慶지방의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동학:천도교)에서 활동하시면서 조국(祖國)의 광복(光復)에 헌신(獻身)하셨다.
국형(諱:國衡.鳳九,號:藘明)祖께서는 경북 상주 공검 지평(長沙村)에서부(父)노재석(盧載錫) 모(母)순흥안(順興安)씨 사이에서 삼형제(원형, 순형, 국형,三兄弟)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본관은 광산(光山.光州)노(盧)이고 휘(諱:國衡. 鳳九, 號:藘明)이시다.
국형(諱:國衡.鳳九,號:藘明)祖께서는 근대적인 교육을받지 못했지만 한학(漢學)실력이 출중하였고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을 중시하였다.
국형(諱:國衡.鳳九,號:藘明)祖 께서는 恭儉 面事務所에 근무(勤務)하셨으며, 1919년 3월1일 독립운동(獨立運動)以後 조국 광복을 위하여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 동학 : 천도교)에 입단하여 채기중, 유장열, 한훈, 김상옥등 동지와 협력하여 대한광복군의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군자금 마련이 여이치 않자 전답(120여 마지기: 논. 밭을 40리. 80리 밖의 친인척에게 사주었음)중 100여 마지기를 팔아 조국(祖國) 광복(光復)을 위하여 선듯내놓으셨다
(당시 전답현황: 은척개경지-30, 농암 사리실-32, 예주 소금재넘어-28, 본동-45, 황령-12.)
일본의 강압이 갈수록 심해지자 외서면에 있는 양조장을 사들여 양조장의 수익금으로 자금을 마련하였으며, 큰형님 옥형(諱:玉衡.宗九, 號:元明 1890-1952)祖와 둘째 형님 순형(諱:順衡.龍九,號:順明 1895-1964)祖도 동학(천도교)에 입당시켜 형제의 우의를 돈돈히 하며, 형제가 함께 조국광복(祖國光復)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셨다.
재석(在奭), 재학(在學) 백부(伯父)님의 증언에 의하면, 자금 운반을 위하여 일본인들의 감시를 피해 한밤중에 120여리가 넘는 문경, 농암의 동학(천도교)에 밤을 낮삼아 다니시고, 동학(천도교)의 제사를 핑계로 음식을 가져가 모의(謀議) 제사를 모시고, 자금을 전달하였다고 한다.
국형(諱:國衡.鳳九,號:藘明)祖께서는 조국(祖國)의 광복(光復)에 헌신(獻身) 하시고 후손들에게 조국(祖國)의 소중함을 일께워 주시고 충효사상(忠孝思想)을 몸소 실천 하시여 후손(後孫)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국형(諱:國衡.鳳九,號:藘明)祖께서는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뜨셨으며, 업적(業績)을 기릴만한 많은 자료들이 지금은 소실되어 구전으로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그 후손(後孫)들은 아직도 상주(尙州) 공검(恭儉) 지평(支坪)의 터를 지키며 감추어질 수 없는 조상(祖上)의 빛나는 유지(遺志)를 이어받아 화합(和合)과 단결(團結)로 결속(結束)하여 타(他) 문중(門中)의 모범(模範)이 되게 살아가고 있다.
노병대 [盧炳大 1856~1913.4] - 구한말의 의병장
노병대는 후재 극신(厚齋 克愼)의 후손으로서 경북 상주 화령면 관제리(尙州 化寧面 官堤里)에서 출생하였다. 성장하여 성재 허전(省齋 許傳)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889년에 창릉 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었다.
1895년 향교가 폐하여 짐에 상경하여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국왕의 비답(批答)을 받지 못하자 중국 곡부(曲阜)로 가서 공자의 사손(嗣孫)을 만나고자 하였다.
귀국하여 조종과 태학(太學)에 그 문제에 대하여 다시 충고하였으나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호남지방에서 향교 부근에 묘를 쓴 곳이 열여덟 군데나 있었다. 그는 곧 사림(士林)에 통고하고, 관리를 책망하여 모두 파하게 하기도 하였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었음을 듣고 북향통곡(北向痛哭)하고 서울로 올라가 판서 이용원(判書李容元)을 통하여, "전 참봉 창의 신 노병대를 선조 계사년의 예에 따라서 분충정난 2등(奮忠靖亂二等)을 내리고, 특차 비서원 비서승(特差秘書院秘書丞)을 특별히 제수한다."는 밀조(密詔)를 받았다. 이에 그는 환향하여(그의 거주지는 충청도인 듯 하다) 동지 약간 명과 함께 거사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1907년 8월 경기도 광주군에 사는 전 주사 임용헌(林容憲)·충남 연산(連山)군에 사는 김운로(金雲老)·송창헌(宋昌憲)과 함께 속리산에 들어가 거의(擧義)하니 응모하는 사람이 2백명에 이르렀고 군대해산으로 경병(京兵) 수백명이 내부(來附)하였다.
김운로를 맹주로 추대하고, 보은군을 공격하여 일인 2명을 사로잡고, 상주 청계사(尙州 淸溪寺)로 진을 옮겼다. 그때 적병이 급습하여 청주 미원(淸州 米院)으로 패주하였으나 다시 적병 5명을 사로잡았다.
미원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래 머물 만한 곳이 못 되었다.
군대를 나누어 노병대는 호남을 거쳐 성주(星州)에 이르러 적 십여 명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거창에서 또 다시 적의 습격을 받아 피해가 컸다.
이렇듯 노병대의 의병부대는 충북 보은·청주, 경북 상주, 경남 거창, 안의, 전북 무주 등지에서 계속 활약하였다.
다시 우두령(牛頭嶺)에 이르러 크게 패하고 속리산에 돌아오니 군사 겨우 오십여 명이었다.
1908년 6월 15일(음력)보은의 관주점(冠酒店)에서 일군에게 붙잡혔는데 그 당시의 문답은 다음과 같았다.
"너는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느냐?"
"너희는 우리 원수다. 너의 종족을 다 없애려 한 것이다."
"함께 일을 꾀한 사람이 몇 명인가?"
"내가 주모자이니, 다른 사람은 알 것 없다."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거사할 때 죽을 사(死) 자를 이마 위에 붙여 놓았다. 속히 죽여라."
이처럼 그는 거사할 때부터 죽음을 각오한 터이었다.
그 후 공주 재판소로 송치되고 그가 끝내 굴하지 않자, 적은 그의 한 눈을 제거하였다. 단식하여 자진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국권침탈조약 늑결시 특사로 풀렸으나 "너의 경사인데 왜 나를 석방하느냐"며 버티다가 강제로 출옥 당하였다.
다시 재거를 획책하다가 1913년 3월 12일(음력) 체포되어 대구재판소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단식 28일만에 피를 토하고 순국하였다.
그때 일인은, "강도 노병직(그의 초명)은 월여 동안 복종치 않다가 단식·토혈(斷食吐血)하고 죽었는데, 병명은 뇌일혈이다." 라고 발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기려수필 129·130·131면
·독립운동략전 1권 84면
·명치백년사총서 1권 34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618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535면
노태준 [盧泰俊 1911.2.17~1970.2.26] - 애국지사
○ 주요공적
- 1932년 중국중앙군관학교 졸업
- 1936년 한국독립당 청년단 조직, 중앙군 13군에 파견되어 항일전 참여
- 1940년 임정 군사특파단에 참가, 병사 모집 및 첩보활동 전개
- 1944년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장 및 O.S.S 훈련반 수료
○ 서 훈 : 건국훈장 독립장(’68년)
○ 공적내용 :
황해 송화 사람으로 임정 군무총장을 지낸 노백린(盧伯麟)의 2남이다.
1932년 4월 중국중앙군관학교(中國中央軍官學校)를 졸업하고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1936년 4월 한국독립당 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에 피선되었으며, 중앙군13군에 파견되어 항일전에 참여하였다.
1938년 청년단원을 모집하여 훈련시켰으며 정보, 선전공작을 하였다.
1940년 6월에는 임정 군사특파단이 산서(山西) 지역에 파견되자 서안(西安)에서 이에 참가하여 산서성(山西省) 일대에서 병사를 모집하고 대적선전을 하는 둥의 첩보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같은 해 11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가 섬서성 서안(陝西省西安)으로 이전됨에 따라 제1지대에 편입되어 안춘생(安椿生), 노복선(盧福善), 조인제(趙仁濟)등과 함께 1지대 간부로서 산서성 대동(山西省 大同)에 근거지를 두고 산서성(山西省), 하남성 (河南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사병을 모집, 훈련시키며, 초모선전활동, 적에 대한 정보수집, 항일유격전 수행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44년 그는 광복군 제2지대 제2구대장이 되었으며,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훈련에 참전하였다. 이 훈련은 광복군의 정예대원에게 3개월간 특수작전에 필요한 정보, 파괴, 무전공작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훈련이 끝나면 훈련생은 국내로 파견되어 적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지하군을 조직하며 정보활동을 전개하다가 미군 상륙부대와 연합하여 본토 수복작전을 성공리에 완수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광복군의 목표는 OSS훈련이 끝나는 즉시 연합군과 공동작전하여 잠수함 또는 비행기로 국내에 침투하여 일본군의 군사시설을 탐지 연합군 항공기 의 공격을 유도하는 한편, 현지의 주민을 포섭하여 거점을 구축하며 애국청년을 규합, 왜적의 주요시설을 파괴하면서 미군의 상륙과 때를 맞춰 국내에서 궐기하여 우리 힘으로 일본군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광복군 편성을 살펴보면, 광복군 안에 따로 국내정진군총지휘부(國內挺進軍總指揮部)를 두고 총지휘관에 제2지대장인 이범석(李範奭)을 임명 하였다. 그리고 국내 8개도를 제1, 제2, 제3의 3개 구역으로 나누어 평안, 황해, 경기를 제1지구로, 충청, 전라도를 제2지구로, 함경, 강원, 경상도를 제3지구로 나누었다. 이때 그는 제2지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사상정세시찰보고집(기2) 244·446면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57·378·379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8면
·무장독립운동비사 206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97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2권 480·558면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94·267·832면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776·781·826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5권 85면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자료 1권 47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944·946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25·613면
始 祖 53代祖孫
中始祖 25代祖孫
入鄕祖 10代祖孫 盧 捧 均
翰林公 及 九伯 設壇通文 (丙寅1926)
우리 盧氏에게는 丙寅年 翰林公 諱수(穗)祖 及 九伯 設壇通文이 있다.
三陵壇 大祭時(음력 삼월보름날) 위 통문을 낭독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본 통문에 나오는 先祖님을 말씀드리자면 翰林公 諱 穗 盧氏 都始祖는 中國 范陽人 (지금의북경)으로 唐나라의 大護軍 翰林學士이며 祖父 諱 鴻表 徐州勅使(서주칙사) 이고 父 諱 震順(진순)은 兌州勅使(태주칙사)였다.
范陽(중국 하북성 탁주시)의 先祖에는 佛敎의 慧能禪師 (혜능선사. 六祖大師 또는 염불스님)와 儒敎의 4대 정승 諱 植(식).毓(육).欽(흠),志(지)尙書와 道敎(도교)의 휘 循(순). 仝(동). 仙槎(선사)께서 儒(유) 佛(불) 仙(선)의 대가였으므로 盧氏(노씨)는 范陽茂族(범양무족)으로 唐 37代 德宗(780년)은 禁不通婚嫁(금불통혼가)라 하여 혼인을 경계하였다. 九伯, 九寬始祖(구관시조) 有壤斥之功(유양척지공)으로 分封九邑(분봉구읍) 後裔襲封(후예습봉) 설단시 祔(부: 합장할부)로 하자는 말도 있었으나 只以(지이: 말로만 그침)로 합의 하고 以後 말하지 않기로 決意 하였다.
後裔(후예) 一君八公(일군팔공)이 나오시는바, 光州君(광주군) 諱 蔓(만)祖를 光州 盧氏의 欺世祖(기세조)로 高麗 5代 景宗2년(977) 3월 開國功臣(개국공신) 및 向義歸順 城主 (향의귀순 성주) 등에게 勳田(훈전)을 줄 때 光州君(광주군)으로 封君 되셨고 안팎 50리의 훈전도 받으셨다. 4代 光宗 때 양척지공이 다대하던중 중국에 宋(송) 나라가 둘어서자 王命(왕명)으로 光州(광주)에 진을 치고 해상 활동을 장악하고 貿易(무역)을 증진하고 國交(국교)를 돈독히 하여 벼슬이 內史侍郞平章事(내사시랑평장사/正2品 1명뿐임)에 오르셨다.
光州君 휘 蔓(만)祖 께서는 光州伯을 襲封하셨고 盧氏의 현존하는墓 중에 가장 오래된 墓이다. 이로 인하여 광주는 翰林府君 家子之 采邑 (한림부군 가자지 채읍)이요 家孫(가손)의 襲封地(습봉지)이므로 墓(묘)의 오른편에 三陵壇(삼릉단)을 設壇(설단)하여 都始祖 와 九寬始祖의 聖域地(성역지)가 되었다.
後裔(후예) 中 大統領 2名(13代 대통령 노태우, 16代 대통령 노무현) 國務總理 2名(18代 국무총리 노신영, 21代 국무총리 노재봉), 長官(노재현 국방부 장관,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 국회부의장(노승환 부의장), 국회의원 多數(다수)가 있으며, 여러분야 에서 他(타) 가문의 模範(모범)되게 살아가고 있다.
翰林公(한림공) 諱(휘) 穗(수)祖 께서는 中國 范陽의 大姓 後裔(후예)로 都始祖(도시조)이시며, 一君八公(일군팔공)은 後裔(후예)로 크게 德(덕)을 나타내셨는데 祭祀(제사)를 모른다 해서야 되겠느냐 萬物(만물)의 이치를 따져 嶺湖南(영호남) 일가(一家)들의 상의로 設壇(설단)과 祭祀(제사)를 모시기로 함으로 儒林(유림)들의 合意(합의)로 草案(초안)을 만들어 通告(통고)하니 後孫(후손)들은 協調(협조) 하여設壇(설단)에 香火(향화)를 올렸으면 千萬多幸(천만다행)이라 生覺(생각)된다.
三陵壇 設壇 由來 (丙寅1926)
우리 노씨(盧氏)의 도시조(都始祖)인 한림공(翰林公) 휘(諱) 수(穗) 노씨(盧氏) 도시조 (都始祖)는 중국(中國) 범양인(范陽 :지금의북경)으로 당(唐)나라의 대호군(大護軍) 한림학사(翰林學士)이며. 조부(祖父) 휘(諱) 홍표(鴻表), 서주칙사(徐州勅使)이고, 부(父) 휘(諱)진순(震順)은 태주칙사(兌州勅使)였다.
범양(范陽)(중국 하북성 탁주시)의 선조(先祖)에는 불교(佛敎)의 혜능선사(慧能禪師 .六祖大師 또는 염불스님)와 유교(儒敎)의 4대 정승 諱 식(植).육(毓).흠(欽),지(志)상서(尙書)와 도교(道敎)의 휘 순(循). 동(仝). 선사(仙槎)께서 유(儒) 불(佛) 선(仙)의 대가(大家)였으므로 노씨(盧氏)는 범양무족(范陽茂族)으로 당(唐) 37代 덕종(德宗780년)은 금불통혼가(禁不通婚嫁)라 하여. 노씨(盧氏)와의 혼인(婚姻)을 경계하였다. 그런 연유로 우리 노씨(盧氏)의 도시조(都始祖)인 수(穗) 할아버지는 당(唐)나라 말엽(末葉)(9世紀 中葉)에 아들 9兄弟를 거느리고 멀리 중국(中國)에서 한반도(韓半島)의 평안북도(平安北道) 정주(定州)의 능리(菱里)에 기착(寄着)하였다. 통일신라(877년) 헌강왕(憲康王 49代)3년 때였다. 그후 평안남도(平安南道) 용강(龍崗)의 쌍리촌(雙里村)으로 옮겨 살았다.
다시 신라 진성여왕(眞聖女王 51대 887~897)때 계림군(鷄林郡- 지금의 경주)에 정착(定着)하였다.
신라는 효공왕(孝恭王, 52대 897~912)이 즉위하고 있을 때, 남쪽에서 후백제가 북쪽에서는 태봉(泰封)이 또 만주지역에서는 발해(渤海)가 침공(侵攻)하여 어지러운 시국이였다. 이때 휘(諱) 수(穗)祖께서는 아들 9형제와 함께 신라의 정치, 경제 및 사회 안정에 기여하고 후백제와 발해의 침공을 물리치는데 큰 공(功)을 세우게 되었으며, 효공왕(孝恭王 52代)은 동경(東京-지금의 경주)에서 수(穗)祖를 국빈(國賓)으로 예우(禮遇)하였다
이에 신라의 왕실(王室)에서는 이들의 공적(功績)과 수(穗)祖가 원래 당(唐)의 명문갑족(名門甲族)임을 예우(禮遇)하여, 9형제에게 9관 (九貫)을 봉백(封伯)하여 해(垓)는 광산백(光山伯), 오(塢)는 교하백(交河伯), 지(址)는 풍천백(豊川伯), 구(坵)는 장연백(長淵伯), 만(滿)은 안동백(安東伯), 곤(坤)은 안강백(安康伯), 증(增)은 연일백(延日伯), 판(坂)은 평양백(平壤伯), 원(垣)은 곡산백(谷山伯))으로 봉백(封伯) 되었으나, 오랜 역사(歷史)와 잇따른 외침(外侵), 그리고 병화(兵火)로 선조(先祖)들이 남긴 문적(文籍)과 유물(遺物) 등의 소실(消失)은 물론 수(穗) 할아버지를 비롯한 구백(九伯) 할아버지의 묘소(墓所)마저 실전(失傳)되었다,
후예(後裔) 일군팔공(一君八公)이 나오시는바, 광주군(光州君) 諱 만(蔓)祖를 光州 盧氏의 기세조(欺世祖)로 高麗 5代 景宗2년(977) 3월 개국공신(開國功臣) 및 향의귀순 성주(向義歸順 城主)등에게 훈전(勳田)을 줄 때 광주군(光州君)으로 봉군(封君) 되셨고 안팎 50리의 훈전도 받으셨다. 4代 光宗 때 양척지공이 다대하던중 중국에 宋(송) 나라가 둘어서자 王命(왕명)으로 光州(광주)에 진을 치고 해상 활동을 장악하고 무역(貿易)을 증진하고 국교(國交)를 돈독히 하여 벼슬이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正2品 1명뿐임)에 오르셨다.
光州君 휘 蔓(만)祖 께서는 光州伯을 습봉(襲封)하셨고 盧氏의 현존하는 묘(墓) 중에 가장 오래된 묘(墓)이다. 이로 인하여 광주(光州)는 한림부군 가자지 채읍(翰林府君 家子之 采邑)이요 가손(家孫)의 습봉지(襲封地)이므로 묘(墓)의 오른편에 삼릉단(三陵壇)을 설단(設壇)하여 도시조(都始祖) 와 구관시조(九寬始祖)의 聖域地(성역지)가 되었다.
후손(後孫)들로서는 참으로 죄만(罪萬)스러움과 통한(痛恨)을 금(禁) 할 길이 없다. 이에 만시지감(晩時之感)은 있으나 일제치하(日帝治下)의 어러운 시기(時期)에도 불구(不拘)하고 조상(祖上)을 숭모(崇慕)하고 은혜(恩惠)에 보담(報答)하는 뜻에서 9派의 문중(門中) 어른들이 뜻을 모아 상론(相論)하고 합의(合議)하여 단소(壇所)의 설단(設壇)에 이르게 된것이가.
특히, 이를 아타깝게 생각한 송해공. 문규(松海公,汶奎), 소해공,종용(蘇海公,種龍), 죽계공,만식(竹溪公,萬植)이 주최(主催)가 되어 각파(各派)로부터 모금(募金)과 노씨대동종안(盧氏大同宗案) 및 노씨원류보(盧氏原流譜)의 발간(發刊)으로 설단(設壇)에 따르는 소요 자금(所要 資金)을 마련하였으며, 본 설단사업(設壇事業)을 추진(推進)하는 실무진(實務陳)으로는 춘강공.문영(春崗公.文永)이 총무직(總務職)을 맏고 (곡당공.진영(穀堂公.珍永)이 재무(財務)를 맏았다.
1926년(丙寅年)에 수(穗) 할아버지를 비롯한 九伯 할아버지의 단소 설단(壇所 設壇)과 함께 위토(位土)를 장만하고 7間의 구원재(九源齋)를 건립(建立)하였다.
그후, 수(穗) 할아버지 단소(壇所) 앞에 문관석(文官石). 석등(石燈). 양마석(羊馬石). 석태(石台). 등의 개수(改修) 비용(費用)은 광주(光州) 구원회(九源會)에서 부담(負擔)하였으며, 단소(壇所) 앞 상석(床石)과 동도기념비(東渡記念碑)는 영한(榮漢) 전 전국노씨 화수회장(前 全國盧氏 花樹會長)의 단독 부담(單獨 負擔)으로 건립(建立)되었고, 또 삼릉단비(三陵壇碑)는 범수(範洙) 전 전국노씨 청년회장 (前 全國盧氏 靑年會長)의 헌금(獻金)으로 건립(建立)되었다.
위와 같이 삼릉단 건립(三陵壇 設立)이후 매년(每年) 음(陰)(3월 15일)에 (세 일사歲 一祀)(1年 中 한차례의 제사)로 향사(享祀)를 드리며, 이곳에 단소(壇所)를 설단(設壇)하게 된 동기(動機)는 산세(山勢)가 좋아 옛날부터 명당(明堂)으로 이름이 나 있었고 부근 경내(境內)의 임야(林野)가 광주군(光州君) 만(蔓)派)의 종산(宗山)이기 때문에 이에 연유(緣由)하게 된 것이다.
또한 단소(壇所)의 명칭(名稱)을 삼릉단(三陵壇)으로 부르게 됨은 단소(壇所) 뒤를 병풍(屛風)처럼 받히고 있는 산(山)이 삼각산(三角山)이며 이곳 옛 지명(地名)이 삼릉(三陵) 또는 릉안동(陵案洞)이라 불리어 왔으므로 삼릉단(三陵壇)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山名三角而洞稱陵案故曰三陵)
後裔(후예) 大統領 2名(13代 대통령 노태우, 16代 대통령 노무현) 國務總理 2名(18代 국무총리 노신영, 21代 국무총리 노재봉), 長官(노재현 국방부 장관, 노무현 해양수산부장관), 국회부의장(노승환 부의장), 국회의원 多數(다수)가 있으며, 여러분야 에서 他(타) 가문의 模範(모범)되게 살아가고 있다.
翰林公(한림공) 諱(휘) 穗(수)祖 께서는 中國 范陽의 大姓 後裔(후예)로 都始祖(도시조)이시며, 一君八公(일군팔공)은 後裔(후예)로 크게 德(덕)을 나타내셨는데 祭祀(제사)를 모른다 해서야 되겠느냐 萬物(만물)의 이치를 따져 嶺湖南(영호남) 일가(一家)들의 상의로 設壇(설단)과 祭祀(제사)를 모시기로 함으로 儒林(유림)들의 合意(합의)로 草案(초안)을 만들어 通告(통고)하니 後孫(후손)들은 協調(협조) 하여設壇(설단)에 香火(향화)를 올렸으면 千萬多幸(천만다행)이라 生覺(생각)된다.
始 祖 53代祖孫
中始祖 25代祖孫
入鄕祖 10代祖孫 盧 捧 均
光山盧氏 敬平公派 大宗會
宗派(1龍房) 萬戶公派 宗親會
翰林公 및 九伯設壇 通文
위 삼가 고하나이다.
무릇 충효와 절의가 있으면 언제나 나라에서 포상하는 법이 있었고 도덕과 문장을 유림들이 밝게 들어내 실천하는 법이 더욱 돈독하였다.
오직 간절히 생각하건데 노씨도시조되시는 수할아버지가 중국 범양땅 명문거족의 후예로서 한림학사의 벼슬에 있었으며, 그 덕행과 학문 및 문장은 자랑하고 본받을 만 하였다.
또한 충의와 절의의 행실은 같은 벼슬에 있던 동료들도 칭송하였다. 그리고 수할아버지께서는 중국의 여러 나라들이 장차 크게 난리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강을 건너 왔으니 조선땅에 노씨성의 분관이 이로부터 이어졌다. 그러니 어찌 공경하고 사모하지 않으며 또한 이 아름다운 일에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있으리오!
광주백, 교하백, 풍천백, 장연백, 안동백, 안강백, 연일백, 평양백, 곡산백이 그 아들이고 광산군, 정평공, 경평공, 절효공, 광헌공, 문광공, 문효공, 문경공은 모두가 수할아버지의 후예로 뒤를 이어 크게 덕을 나타냈으니 사당을 짓고 묘를 만들어 영원히 제사를 모심이 마땅한 일이고 선조의뜻을 이어받는 아름다운 법도는 빛이 나는 일이며 사우를 지어 모셔야 옳을 일이나 불행히 세상이 여러번 바뀌고 여러 자손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일이 있었다.
만일 영령이 이를 안다면 어찌 후손이 있다이르겠는가. 후손들의 눈으로는 보기가 어렵고 선조를 잃어버리는 슬픔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서리와 눈이 내리는 때에 이르러 바라보는 정성이 없음을 슬퍼하며 비와 이슬에 젖는 때는 어찌 두렵고 근심스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어쩌다 다행이도 영남과 호남의 여러 일가들의 상의가 이루어져 정성과 힘을 같이하여 설단과 제사를 모시기로 하는 조그마한 방법을 취하고 비를 세우며 길을 닦아 보본의 뜻은 있으나 아직은 제답도 장만하지 못하고 있으니, 옛날 고소(즉, 중국 춘추시대 오나라 사람)의 의로운 일이 부럽기만 하다.
또한 재실도 새로 짓지도 못하고 있으나 누가 재산을 내놓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번에 일제히 유림들의 공의가 있어 이에 초안을 만들어 여러 어른께 고하니 같은 성을 가진 분관된 후손들은 마음과 힘을 함께 하여주기 바라며 외손들 중에 현달한 집에서는 이 뜻을 헤아려 서로 상의하여 화수는 백세의 지친이라는 것과 이것이 돈목의 뜻임을 깨달아 협조하여 주면 외손들의 천추대의가 이러하니 어찌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없겠는가.
엎드려 바라건대 모든 군자는 강과 바다의 물이 크게 흐르고 작게 흐르는 것을 가리지 않아 깊어지고
큰 산은 작은 흙덩이를 사양하지 않는 법을 아는지라
위토를 장만하여 제사를 풍족하게 지내는 것은 오직 의연금을 걷는 여러분의 정성에 있으니 분양하고 술을 올리는 것이 어찌 후손들의 유족함에만 방책이겠는가.
단을 만들어 오래오래 향화를 올렸으면 천만다행이겠다.
족말 종룡 삼가 고합니다
盧氏九派 宗案編刊 三陵檀案洞 宗會所 發文
좌의 글로 일을 통고함에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 시조 한림부군 휘 수께서는 범양의 대성으로서 아홉아드님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오신 이후 조선에 노씨가 있게 되고 아홉형제가 모두 벼슬을 받음으로 인하여 마침내 아홉 관향으로 나뉘어 팔역에 흩어져 사니, 그 수효는 만억으로 관은 휘황하고 풍류는 혁혁할 뿐 아니라
공휴거경이 대대로 역사에 끊이지 아니함은 부군께서 넉넉히 후세에 끼치신 덕이라.
이같이 융성하였으되 전각이 도끼날에 찍혀 전해지지 못하여 먼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함의 정성을 가히 펼칠 곳이 없는고로 지난 병인(단기 4259년)년 봄 여럿이 의논하여 도모함으로 인하여 전남 광산군 서방면 삼각산 밑 능안동의 총손(큰 손자) 광주군 묘의 우측터에 단을 함께 설치하고 해마다 한차례 전을 드리기 이미 연이 잇는 바이라.
다만 재실을 세우지 못하고, 제전을 갖추지 못함뿐만 아니라 기타범절을 영세토록 유지하려는 뜻의 방편으로 비둘기가 막대기로 만든 둥지같은 공사이라도 하고자 한 즉 일은 크고 힘은 실날같은 뿐만 아니라 이는 수백년동안 겨를이 없던 크나 큰 시작이라.
우리 노로 성을 한자 누구인들 조선에 공경함을 바치기를 꾀함에 소로 응하기를 생각치 아니 하리오!
그러한 즉 만억의 노씨는 단으로부터 본다면 한 조상이요, 형제이며, 똑같은 자손이니, 어찌 가깝고 멀음이 있으리오.
고로 대동종안을 편집하여 세상에 전하나니, 책을 열어 서로 보면 화목한 정 어찌 처음으로 형제가 된 날과 같지 아니하리오!
오직 원컨대 여러 종인께서 특별히 의롭고 너그러움를 내리사 대사를 마칠 수 있기를
천만번 간절히 바라나이다.
병인(단기 4259) 8월
盧氏 始祖 韓林公 及其子 九州 伯位
設壇 陵案洞 宗會所 發文
숙계시하에 복리완지하시고 문란이 균경하심을 정수앙축하오며 진자아 시조 한림학사 휘 수가 중국 범양 현벌로 유당 선종 기묘에 구자를 솔하시고 출강도동하사 당조에 융우를 향하셨으니 고려구백이 시시라 오씨계출이 소소유원하야 천유여년간에 파류가 번연하야 기려가 누만으로 가계할 것이며 여선이대에 현유경상이 조야의 중망을 지한 인품이 굴지난수할지라 연이 벽해쌍전의 변천을 수하야 분묘갈석의 실전됨은 하문을 물론하고 불유한 자 기희라 차하다.
아 시조 한림공 묘소가 무징하야 제파종족의 유감을 재한 세월이 기겁인지 창천이 강충하사 왕재 병인 삼월 십오일은 즉 광주군 묘향일이라 영호제종이 화합하야 순모천동하와 한림공단향을 창설키로 결의되어 전남 광산군 서방면 오치리 능안동 광주군묘 좌상에 4척의 단을 봉축하고 이래9년의 향사를 봉행하였으나 의식이 미비하여 숙야우탄하봅더니 갑술 춘향에 지하야 제종이 화합함에 일체효사가 증진됨을 수하야 구백위차를 한림공단에 하설하고 동일동향하야 부자형제동도하시던 의용을 추모하는 의로 공의가 제발된 바 절염광주백 휘 해와 광주군 휘 만은 즉 한림공의 총자총손이신즉 차지 설단이 사체에 당연하고 형제동향이 정리에 단합하다는 결의가 일치함으로 당연위시하야 의식을 거행하였는 바 영년향화무체함을 도하야 제전을 증치하고 재각을 영건하며 우난 수호유지방침을 강구한 즉 필히 거액의 준비가 무치 못 할지니 일부종의 의 성력으로는 판세치 못할 뿐만 아니라 한림공도동하신 유택을 수하야 동토 천년에 근저를 탁한 지엽의 익무를 수하는 우리 노씨는 하모를 무론하고 쟁선노력할지어다.
오호라, 산시수달도 보본의 의를 지하야 유능제지커든 신호인의 후된 자 어찌 조종을 망홀하리요.복유고명하신 제종씨는 하필 우리의 경고를 대하리요 마는 불문부지의 탄이 유하실까
공하와 종회결의로 자에 통고하오니 조량하신 후 극력탄성하시와 대사이완케 하심을 경요.
병자 정월
전남 서방면 오치리 삼릉설단 은안동 종회소
우경통우 각도군 첨존좌하
삼릉단(三陵壇) 재발문(再發文)
일가의 무리는 같은나라에 같은 조상의 친척이라.
오로지 문벌이 화려하고 덕이 후햇다는 소리는 귀로 익히 들었으되,일찍 천륜의 직그히 즐거운 일을 펼치지 못하였나니,하나는 발자취을 두루 사피지 못함이요. 하나는 사람의 섬김이 거칠고 졸렬하여 남들이 듣고 알면 어찌 할까 스스로 심히 두려움이라. 삼가 봄은 무르익어 가는 때에 여러 일가께 하늘의 경복을 받으시고, 형안하시기를 멀리 밖에서 머리를 들고 우러러 비나이다. 일가의 이사람이 궁색한 거처에 웅크려 엎드린 모습의 궁부 칩목지상이라. 청아하고 모범된 인품를 직접 우러러 살필 수 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생각컨대 우리 시조 한림학사 겸 대호군부군 휘 수께서는 당의 범양의 큰 성씨로 아홉아드님를 거느리고 동으로 오신 이후 조선에 비로소 로씨가 있게 되니, 아홉 형제가 다 봉을 받음으로 인하여 전 조선에 흩어져 살게 됨이라. 그 수는 헤아릴 수 없고, 문무 공경이 세상에 끊이지 아니 함이라. 그러한 즉 부군께서 후세에 끼치신 덕의 넉넉함을 어찌 산과 바다로써 측량하리요!
시(詩)에 가로대 ' 그대 조상을 생각치 아니하리오.'하며 서(書)에 가로대 ' 그 덕을 크게 이음이여! '하니 이는 지극한 가르침 이로되, 사당은 도끼날에 버혀지고 흔적은 찾을 수 없음이라.
옛 근원을 좇아 영원토록 사모하는 정성 펼칠 곳이 없는 고로 지난 병인(단기 4259년) 봄 영남과 호남의 일가들이 의론하여 도모함으로 인하여 전남 광주 삼각산 아래 능안동의 맏손자 광주군의 묘 오른쪽 터에 함께 단을 설치하고 해마다 한차례 제사를 올려 오늘에 십이성상이나 의식의 미비함을 아침저녁으로 근심하고 탄식하더니 지난 병자(단기 4269년) 정월 29일에 삼가 대동회를 열고 위토, 재각 기타 유지의 방도를 난상토론으로 강구한 즉 거액의 준비를 요한 바이다. 그로써 각파의 개인이 출현함이 '옳고, 지당하다." 하고 공의로 결정하고, 또한 우리 로씨 9관파가 하나로 합보치 못함이 천년이 지나도 오히려 남은 한인지라, 고로 대동종안을 아울러 수찬로 하니, 온 나라를 통하여 성로가 함께있게 될 것인 즉 이 또한 일거양득의 방책이라. 고로 유사를 파견하니, 적극 호응하여 출연하고, 단자 문서가 구름 같이 모이게 하여 바야흐로 오늘의 사무를 긴히 베풀게 할지로다. 이는 여러 백년 동안 겨를이 없었다가 크게 시작하는 것인 즉 우리 로씨가 된 자 누구인들 같은 조상 , 형제로 비롯된 , 똑같은 자손의 뜻을 생각하고, 통문에 응하여 도웁기 정성으로 아니하리요!
여러 종인께 엎드려 바라옵나니, 1차 왕림하사 한편으로는 시조부군의 단을 참배하고, 한편으로는 대동종안의 일에 채찍을 들어 앞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천만번 삼가 요하나이다.
끝으로 회답을 기다리며 삼가 불비하와 너그럽게 살피시기를 엎드려 고하나이다.
병자(단기 4269년) 3월
盧氏 穗祖 長子 光山 盧氏 得貫祖 垓祖 後孫 敬平公 宗派 代譜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1) 수(穗) 唐 翰林學士 韓國의 盧氏 都始祖 |
(2) 해(垓) 仕於 唐學士 新羅朝 光山伯 |
숙(塾) 兵馬元師 配 王氏 |
오(塢) 新羅朝 交河伯 |
간(墾) 兵馬元師 配 李氏 | |
지(址) 新羅朝 豊川伯 |
(3) 보(堡) 兵馬元師 配 金氏 | |
구(坵) 新羅朝 長淵伯 |
후(垕) 兵馬元師 配 金氏 金鍮 女 | |
만(滿) 新羅朝 安東伯 |
||
곤(坤)(慶州派) 新羅朝 安康伯 |
||
증(增) 新羅朝 延日伯 |
||
|
판(坂)(萬頃派) 新羅朝 平壤伯 |
|
원(垣) 新羅朝 谷山伯 |
| |
(4) 안락(安樂) 字 忘憂 司農鄕 配 李氏 副元師 李暻 女 |
(5) 흠(欽) 字仰望 號雙溪司從中書令 配 金氏 厘玾 金洙麗 女 |
(6) 척(拓) 阿干 配 鄭氏 兵馬元師 鄭湖 女 |
익(釴) 阿干 配 金氏 |
||
협(鋏) (副元師) 配 朴氏 阿干 朴胃 女 |
||
(7) 헌(憲) 招討使(소토사) 配 金氏 角于 金堅 女 |
(8) 오륜(五倫) 字 眞有 副元師 配 張氏 杞察使 張鵬翼 女 |
(9) 천뢰(天賴) 號雲谷 字佑余行軍副使 配 趙氏 指揮使 趙淸宣 女 |
원(愿) 阿干 配 |
||
여(女) 安士 (副元師) |
||
(10) 가록(家祿)都指揮使(도지휘사) 配 吳氏 副元帥 吳秉之 女 |
(11) 만(滿) 號 雲松 副元師 配 李氏 指揮使 李檄 女 |
(12) 온(馧) 號 白川 字 取香 樞密使 配 吳氏 副元帥 呂帛晝 女 |
윤(潤) 都元師 配 金氏 角干 金 |
||
(13) 선풍(仙風) 號鹿岩字飄羽 都元師 配 李氏 阿干 李常竹 女 |
(14) 취(翠) 號 覺軒 字 盖影 副元師 配 金氏 阿干 金訥 女 |
(15) 여(輿) 字乃乘 高麗朝 龍虎軍校尉 配 李氏 同正孝 李春鋡 女 |
선학(仙鶴) 配 |
盧氏 穗祖 長子 光山 盧氏 得貫祖 垓祖 後孫 敬平公 宗派 代譜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16) 탁(鐸) 字 聖祚 別將同正 配 韓氏 令同正 韓餘璜 女 |
(17) 빈(賓) 字 期待 直長同正 配 朴氏 別將同正 朴桂英 女 |
(18) 달항(達恒)而貴檢校神虎行儀仗 副別將 配 申氏 申孤松 女 |
달존(達尊) 配 | ||
(19) 절간(節諫) 字 慾悟 文科參知政事 配 宋氏 平章事 宋祐 女 |
(20) 검(儉) 字 素心 號 草菴 文科 配 金氏 東宮內侍 講學士 金固 女 |
(21) 완(完) 字 兮我 文科監察御使 配 崔氏 兵部侍郞 崔夢熊 女 |
(22) 억(億) 字載己 號老泉堂 國子進士 配 許氏 使部典書 許給 女 |
(23) 억생(億生)字十萬 尙書省左僕射 文科 配 金氏 尙書省左僕射 金囿鏡 女 |
(24) 육(堉) 匡靖大夫都僉議文殿太學士 配 李氏 吏部尙書 李薄 女 |
조(兆) 文科 參知政事 配 兵部中 |
연생(傑生) 文科 配 韓氏 |
곤(坤) 進士 配 金氏 |
조생(兆生) 配 |
집(集) 配 | |
(25) 질(質) 字 不凡 號 遯菴國子進士 配 任氏 左僕射 任恩 女 |
(26) 시규(是規) 字 仁川 配 蔡氏 侍中 蔡身修 女 |
(27) 훈몽(訓蒙) 有孝行道廳夫仕科業 配 順興安氏 成公 嗨幹裕 曾孫女 |
시거(是矩) 入元 元仕而奶居 配 |
||
(28) 엄(嚴) 隱而不仕 配 達成徐氏 戶長正朝 徐間言 女 |
(29) 中始祖 서(恕) 監門衛 大護軍 配 昌寧 成氏 吏部侍郞 成彩雲 女 |
(30) 단(亶) 左右衛 上護君 配 延日 鄭氏 鄭夢周 祖故母 |
련(戀) 司儀卿 配 河氏 進士 河魚遊 女 |
||
인(忍) 進士 配 具氏 同正 具儀 女 |
||
(31) 준경(俊卿)字當任 號傀亭 持平公 配 臨陂君 李氏 別將 李天老 女 |
(32) 숭(嵩) 敬平公 右議政 大提學 配 洛城郡夫人 商山 金氏 金先致 女 配 永嘉郡夫人 安東 金氏 金厚 女 |
(33) 상인(尙仁) 中訓大夫 楊根郡 配 淑夫人 化寧 高氏 判書 高遠 女 |
윤경(允卿) 大護軍 (三司公派) 配 崔氏 崔福生 女 |
상의(尙義) 通政大夫工曹參議 配 淑夫人 化寧 高氏 判書 高君用 | |
상예(尙禮) 通政戶曹參議 配 淑夫人 安東權氏漢城府尹權定柱 | ||
|
상지(尙智) 通訓大夫 配 淑夫人 安東權氏三司右使 權和 | |
상신(尙信) 奉正大夫 配 淑夫人 光山金氏中摳院事金積善 | ||
(34) 처화(處和) 嘉善大夫 兵曹參判 配 貞夫人咸昌金氏 漢城府尹金瑄 女 |
(35)덕기(德基)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配 貞夫人 坡平尹氏 鈴平府院君 貞靜公 尹璠 |
(36) 희선(熙善)通訓大夫 陜川郡守 配 淑夫人 仁川李氏 直長 李琦卿 女 |
희숙(熙叔) 嘉善大夫 金山郡守 配 貞敬夫人 麗興 閔氏 | ||
(37) 경장(敬長) 判書 敦寧府參奉 配 貞夫人 東來鄭氏 鄭蘭孫 女 |
盧氏 穗祖 長子 光山 盧氏 得貫祖 垓祖 後孫 敬平公 宗派 代譜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복장(福長) 判事 配 |
||
명장(命長) 通仕郞 配 仁川 蔡氏 蔡國著 女 |
||
언장(彦長) 初諱 壽長 配 密陽 朴氏 朴元溫 女 |
|
|
(38) 후(珝) 字 公棪 議政府 左贊成 配 貞夫人 完山李氏 都正賢童 李玉溪 女 |
(39) 홍(鴻) 活人暑別提 奉正大夫 配 貞敬夫人 星山李氏 大司憲 李自華 女 | |
(40) 수신(守愼) 崇祿大夫 領議政 配 貞敬夫人 光陵李氏 校理 李延慶 女 配 貞敬夫人 丹陽禹氏 禹定畧 將軍 女 |
||
극신(克愼) 號 厚齋 承政院 左承旨 配 淑夫人 德山李氏 牧使 李增榮 女 |
||
원용(原龍) 配 |
||
종용(終龍) 配 |
||
복용(復用) 司僕寺 判官 配 居昌 潘氏 |
||
응용(應龍) 參奉 配 |
||
(40) 항용(亢龍)(萬戶 朝散大夫 定略將軍) 配 淑夫人 居昌 潘氏 |
(41) 오생(午生.戒亨) 從仕郞 配 淑夫人 慶州 金氏 |
(42) 후인(後仁.道遠) 配 密陽 朴氏 |
언용(彦龍) 守門將 配 |
||
(43) 유명 (有命 通仕郞) 配 榮川 李氏 |
(44) 사휴(思休.學初)1684-1775 配 光山 金氏 1686-1765 |
(45) 하남(夏南.致道)1709-1778 配 淑夫人 密陽 朴氏 1707-1771 |
(46) 경원(慶元.景濂)1758-1826 配 咸陽 呂氏 1757-1821 |
(47) 상문(常文.榮魯 進士)1785-1851 配 麗興 閔氏 1784-1853 |
(48) 광수(光洙.光汝)1806-1871 配 平山 申氏 1805-1858 |
극문(極文,星魯)1788-1842 配 商山 金氏 1791-1843 |
||
수문(壽文.君一)1791-1856 配 慶州 甘氏 1794-1830 |
||
복문(福文.君五)1804-1850 配 慶州 李氏 1806-1870 |
||
진문(進文.君進)1808-1865 配 義城 金氏 1813-1877 |
||
(49) 규경(奎敬.明瑞)1833-1900 配 商山 金氏 1835-1886 |
(50)성학(性鶴.鶴善)1852-1900,12/11 配 麗興 閔氏 1857-1922,7/20 |
(51)재석(載錫.周汝)1867-1942,11/25 配 順興 安氏 1865-1923,12/6 |
재경(載景.周顯) 1871-1910,2/11 配 原州 邊氏 1868-1930,1/15 |
盧氏 穗祖 長子 光山 盧氏 得貫祖 垓祖 後孫 敬平公 宗派 代譜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옥형(玉衡.宗九)1890-1952,2/21 配 密陽 朴氏 1887-1958,10/7 |
||
(52)용구(龍九.順衡) 1895-1964 配 密陽 朴夏村 1893-1981 |
(53)제학(在學.炳學) 1925-2005,12/20 配 慶州 金癸玉 1923-2005,4/18 |
(54) 대균(大均) 1950,3/8- 配 全州 李貞子1953,2/10- |
국형(國衡.鳳九)1898-1952,1/28 配 順興 安氏 1900-1955,9/10 |
석균(碩均) 1955,8/21- 配 慶州 崔順姬1959,6/9- | |
종균(宗均) 1959,4/12- 配 密陽 朴鍾愛1960,12/26- | ||
시균(始均) 1965,12/4- 配 陽川 許英美1969,2/22 | ||
(出) 송절(松節) 1945- 夫 慶州 金正五 | ||
53) 재목(在穆.炳穆)1928,10/18- 配 丹陽 禹熙順 1930,5/3- |
(54) 봉균(捧均) 1948,5/30- 配 全州 李福順1949,5/8-2004,2/18 | |
(55) 형주(亨柱.鎭柱)1973,10/27- 配 全州 李效泌 1980.4/1- |
(56) 유빈(庾彬)2006,5/6(양6/1)- |
|
형우(亨禹.鎭禹)1980,3/19- 配 慶州 金孝眞 1980,8/1- |
가현(佳炫)2011,11.28(양1/2) |
|
애란(愛蘭) 1971,11/11- |
||
(54) 동균(東均) 1970,2/12- 配 忠州 池예나 1973,7/27- | ||
(55) 형진(亨珍) 2002- |
(出) 봉순(鳳順) 1951- 夫 密陽 朴炳玉 1946- | |
형민(亨旻) 2008- |
(出) 금순(今順) 1955- 夫 寧越 嚴基範- | |
(出) 태순(泰順) 1958- 夫 慶州 李聖基- | ||
(出) 정순(貞順) 1961- 夫 韓山 李英濬- | ||
(出) 현숙(賢淑) 1964- 夫 坡平 尹在坤- | ||
(出) 옥란(玉蘭) 1967- 夫 延日 鄭求亨- | ||
盧氏 穗祖 長子 光山 盧氏 得貫祖 垓祖 後孫 敬平公 宗派 代譜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祖 名 (年 代) |
옥형(玉衡.宗九)1890-1952,2/21 配 密陽 朴氏 1887-1958,10/7 |
||
(52) 용구(龍九.順衡) 1895-1964,12/18 配 密陽 朴夏村 1893-1981,11/5 |
(53) 재목(在穆.炳穆)1928,10/18- 配 丹陽 禹熙順 1930,5/3- |
(54) 봉균(捧均) 1948,5/30- 配 全州 李福順1949,5/8-2004,2/18 |
국형(國衡.鳳九)1898-1952,1/28 配 順興 安氏 1900-1955,9/10 |
||
(55) 형주(亨柱.鎭柱)1973,10/27- 配 全州 李效泌 1980.4/1- |
(56) 유빈(庾彬)2006,5/6(양6/1)- |
|
형우(亨禹.鎭禹)1980,3/19- 配 慶州 金孝眞 1980,8/1- |
가현(佳炫)2011,11.28(양1/2) |
|
애란(愛蘭) 1971,11/11- |
||
(54) 동균(東均) 1970,2/12- 配 忠州 池예나 1973,7/27- | ||
(55) 형진(亨珍) 2002- |
||
형민(亨旻) 2008- |
||
(出) 봉순(鳳順) 1951- 夫 密陽 朴炳玉 1946- |
--相雨(상우) --連淑(연숙) | |
(出) 금순(今順) 1955- 夫 寧越 嚴基範- |
--龍秀(용수) | |
(出) 태순(泰順) 1958- 夫 慶州 李聖基- |
--美連(미연), 在旻(재민) --正連(정연), 多連(다연) | |
(出) 정순(貞順) 1961- 夫 韓山 李英濬- |
--英愛(영애) --正愛(정애) | |
(出) 현숙(賢淑) 1964- 夫 坡平 尹在坤- |
--錫鎭(석진) --玄珍(현진) | |
(出) 옥란(玉蘭) 1967- 夫 延日 鄭求亨- |
--錫永(석영) --예린 | |
穗祖 53代孫 |
||
恕祖 25代孫 |
||
武科 萬戶祖 14代孫 |
||
思休祖 10代孫 盧捧均 |
光山 盧氏 敬平公 宗派 萬戶公(亢龍)·休齋公(思休) 宗家 忌日表
관계 |
성 명 |
세 수 |
간 지 |
음력 생일/기일 |
산소 위치 |
비 고 |
1 |
숭(嵩) |
78세 |
丁丑-甲午 |
1337년 4/5-1414년 8/4 |
坡州市 法源邑 東文1里 先山 上 坐 |
右議政 |
洛城郡 商山 金氏 永嘉郡 安東 金氏 |
忌 9월 24일 忌 4월 21일 | |||||
2 |
상인(尙仁) |
忌 1월 26일 |
化南 丹谷 后乫山 辛坐 祔 右 |
楊根郡守 | ||
淑夫人 化寧 高氏 |
忌 3월 14일 | |||||
3 |
처화(處和) |
61세 |
-己巳 |
忌 5월 26일 |
化南 乫山 先兆 酉坐 |
兵曹參判 |
貞夫人 咸昌 金氏 |
84세 |
-甲申 |
忌 6월 7일 | |||
4 |
덕기(德基) |
66세 |
-乙亥 |
1414년 -1479년 6/16 |
尙州 中牟 倉主山 乙坐 祔 上 |
工曹參議 |
貞夫人 坡平 尹氏 |
忌 10월 9일 | |||||
5 |
희선(熙善) |
忌 8월 14일 |
化南 遠川 內寺洞 乾坐 化南 遠川 木果洞 丑坐 |
陜川郡守 | ||
淑夫人 仁川 李氏 |
忌 5월 8일 | |||||
6 |
경장(敬長) |
忌 9월 22일 |
尙州 化東面 복素院墳 上洞 子坐 (雙墳) |
參奉 | ||
貞夫人 東來 鄭氏 |
忌 7월 2일 | |||||
7 |
후(珝) |
70세 |
乙未-丙午 |
1475년 -1573년 2/24 |
化南 遠川 亥坐 (雙墳) |
左贊成 |
貞夫人 完山 李氏 |
甲午-癸巳 |
忌 1월 14일 | ||||
8 |
홍(鴻) |
73세 |
-戊辰 |
忌 11월 8일 |
遠川 先兆 下 亥坐 (雙墳) |
活人署別提 |
貞敬夫人 星山 李氏 |
86세 |
丙午-辛巳 |
忌 9월 2일 | |||
9 |
항용(亢龍) |
忌 10월 14일 |
報恩 北面 金鶴洞 子坐 (合祔) |
萬戶 朝散大夫 定略將軍 | ||
淑夫人 居昌 潘氏 |
忌 9월 21일 | |||||
10 |
오생(午生) |
忌 9월 27일 |
化北 任谷洞 壬坐 (雙墳) |
從仕郞 | ||
淑夫人 慶州 金氏 |
忌 12월 7일 | |||||
11 |
후인(後仁) |
忌 11월 10일 |
化北 任谷洞 鷹峰 巽坐 (同原) |
|||
密陽 朴氏 |
忌 10월 25일 |
光山 盧氏 敬平公 宗派 萬戶公(亢龍)·休齋公(思休) 宗家 忌日表
관계 |
성 명 |
세 수 |
간 지 |
음력 생일/기일 |
산소 위치 |
비 고 |
12 |
유명(有命) |
忌 12월 6일 |
介峴村 案山 丑坐 (合祔) |
|||
榮川 李氏 |
忌 4월 22일 | |||||
13 |
사휴(思休.學初) |
92세 |
甲子-乙未 |
1684년3/7-1775년6/18 |
백호등 酉坐 合墳 |
|
光山 金氏 |
80세 |
丙寅-乙酉 |
1686년5/10-1765년8/26 | |||
14 |
하남(夏南.致道) |
70세 |
己丑-戊戌 |
1709년7/15-1778년11/14 |
기숙골上.下 壬坐 |
嘉善大夫 中卷府使 |
淑夫人 密陽 朴氏 |
64세 |
丁亥-辛酉 |
1707년7/13-1771년2/5 | |||
15 |
경원(慶元.慶濂) |
69세 |
戊寅-丙戌 |
1758년3/30-1826년9/5 |
기숙골右艮坐 안방골上壬坐 |
|
咸陽 呂氏 |
65세 |
丁丑-辛巳 |
1757년7/26-1821년11/9 | |||
16 |
상문(常文.榮魯) |
66세 |
乙巳-庚戌 |
1785년1/17-1850년9/21 |
기숙골中辛坐 백호등下酉坐 |
進士 |
麗興 閔氏 |
70세 |
甲辰-癸丑 |
1784년10/19-1853년12/28 | |||
극문(極文.星魯) |
55세 |
戊申-壬寅 |
1788년4/11-1842년11/14 |
안방골壬坐 |
||
商山 金氏 |
53세 |
辛亥-癸卯 |
1791년3/18-1843년10/26 | |||
수문(壽文.君一) |
66세 |
辛亥-丙辰 |
1791년7/19-1856년3/8 |
안방골壬坐 |
||
慶州 甘氏 |
38세 |
甲寅-庚寅 |
1794년5/6-1830년7/5 | |||
복문(福文.君五) |
47세 |
甲子-庚戌 |
1804년11/17-1850년12/10 |
안방골壬坐 |
||
慶州 李氏 |
65세 |
丙寅-庚午 |
1806년12/10-1870년5/29 | |||
진문(進文.君進) |
58세 |
戊辰-乙丑 |
1806년8/6-1865년12/7 |
안방골壬坐 |
||
義城 金氏 |
65세 |
癸酉-丁丑 |
1813년12/8-1877년7/3 | |||
17 |
광수(光洙.光汝) |
66세 |
丙寅-辛未 |
1806년5/16-1871년6/13 |
안방골 下 亥坐 合墳 |
|
平山 申氏 |
54세 |
乙丑-戊午 |
1805년2/29-1858년11/29 | |||
18 |
규경(奎敬.明瑞) |
68세 |
癸巳-庚子 |
1833년10/7-1900년11/7 |
범덕골 上 庚坐 合墳 |
參奉 |
商山 金氏 |
52세 |
乙未-丙戌 |
1835년4/17-1886년4/14 |
光山 盧氏 敬平公 宗派 萬戶公(亢龍)·休齋公(思休) 宗家 忌日表
관계 |
성 명 |
세 수 |
간 지 |
음력 생일/기일 |
산소 위치 |
비 고 |
19 |
성학(性鶴.鶴善) |
57세 |
壬子-戊申 |
1852년5/5-1908년12/11 |
범덕골 辛坐 관등산 庚坐 |
|
麗興 閔氏 |
66세 |
丁巳-壬戌 |
1857년2/6-1922년7/20 | |||
20 |
재석(載錫.周汝) |
76세 |
丁酉-壬午 |
1867년11/30-1942년11/25 |
관등산 上 上 庚坐 雙墳 |
|
順興 安氏 |
58세 |
乙丑-癸亥 |
1865년8/14-1923년12/6 | |||
재경(載景.周顯) |
40세 |
辛未-庚戌 |
1871년6/14-1910년2/11 |
기숙골 右 下 艮坐 雙墳 |
||
原州 邊氏 |
63세 |
戊辰-庚午 |
1868년3/6-1930년1/15 | |||
21 |
옥형(玉衡,宗九) |
63세 |
庚寅-壬辰 |
1890년2/21-1952년2/21 |
범덕골 中 上 乾坐 合墳 |
|
密陽 朴氏 |
72세 |
丁亥-戊戌 |
1887년9/23-1958년10/7 | |||
순형(順衡,龍九) |
70세 |
乙未-甲辰 |
1895년10/27-1964년12/18 |
범덛골 右 下 庚坐 雙墳 |
||
密陽 朴花寸 |
89세 |
癸巳-辛酉 |
1893년10/17-1981년11/5 | |||
국형(國衡,鳳九) |
55세 |
戊戌-壬辰 |
1898년1/23-1952년1/28 |
작은기숙골 左上 艮坐 雙墳 |
||
順興 安氏 |
56세 |
庚子-乙未 |
1900년11/10-1955년9/10 | |||
22 |
재석(在奭,炳奭) |
64세 |
己酉-癸丑 |
1909년2/6-1973년10/16 |
범덕골 左 上 坤坐 雙墳 |
|
慶州 李氏 |
75세 |
乙巳-庚申 |
1905년6/13-1980년4/7 | |||
재철(在喆,炳喆) |
77세 |
丙辰-壬申 |
1916년5/25-1992년1/23 |
범덕골 中 上 乾坐 合墳 |
||
玄風 郭氏 |
76세 |
辛亥-丙寅 |
1911년11/18-1986년9/21 | |||
재학(在學,炳學) |
81세 |
乙丑-乙酉 |
1925년11/7-2005년12/20 |
범덕골 中 中 申坐 合墳 |
||
慶州 金癸玉 |
82세 |
癸亥-乙酉 |
1923년8/20-2005년4/18 | |||
재목(在穆,炳穆) |
戊辰-○○ |
1928년10/18-○○○○○ |
||||
丹陽 禹熙順 |
庚午-○○ |
1930년5/3-○○○○○ | ||||
재수(在樹,炳樹) |
51세 |
壬申-辛酉 |
1932년3/7-1982년6/28 |
범덕골 右 上 戊坐 |
||
達成 徐錫任 |
庚午-○○ |
1930년2/10-○○○○○ | ||||
재욱(在彧,炳彧) |
45세 |
丙子-庚申 |
1936년7/19-1980년8/6 |
범덕골 右 上 酉坐 |
||
密陽 朴尙分 |
丙子-○○ |
1936년3/25-○○○○○ |
光山 盧氏 敬平公 宗派 萬戶公(亢龍)·休齋公(思休) 宗家 忌日表
관 계 |
성 명 |
세 수 |
간 지 |
음력 생일/기일 |
산소 위치 |
비 고 |
23 |
세진(世鎭,世均) |
69세 |
丙寅-甲戌 |
1926년10/12-1994년1/20 |
범덕골 左 中 酉坐 合墳 |
|
晋州 姜氏 |
48세 |
戊辰-乙酉 |
1928년5/28-1975년11/25 | |||
덕진(德鎭,德均) |
65세 |
庚午-甲戌 |
1930년1/22-1994년3/2 |
기숙골 入 下 |
||
密陽 朴氏 |
庚午-○○ |
1930년9/20-○○○○○ | ||||
명균(明均) |
丙戌-○○ |
1946년3/28-○○○○○ |
||||
坡平 尹容姬 |
戊子-○○ |
1948년2/14-○○○○○ | ||||
석진(碩鎭,碩均) |
72세 |
乙亥-丙戌 |
1935년2/28-2006년8/14 |
범덕골 中 中 申坐 雙墳 |
||
順興 安牧丹 |
68세 |
丙子-癸未 |
1936년4/15-2003년6/30 | |||
범진(範鎭,範均) |
己酉-○○ |
1939년7/3-○○○○○ |
||||
咸寧 金熙子 |
己酉-○○ |
1939년7/23-○○○○○ | ||||
해균(海均) |
丁亥-○○ |
1947년5/4-○○○○○ |
||||
陜川 李順男 |
庚寅-○○ |
1950년1/23-○○○○○ | ||||
대균(大均) |
庚寅-○○ |
1950년3/8-○○○○○ |
||||
全州 李貞子 |
癸巳-○○ |
1953년2/10-○○○○○ | ||||
석균(碩均) |
乙未-○○ |
1955년8/21-○○○○○ |
||||
慶州 崔順姬 |
己亥-○○ |
1959년6/9-○○○○○ | ||||
종균(宗均) |
己亥-○○ |
1959년4/12-○○○○○ |
||||
密陽 朴種愛 |
庚子-○○ |
1960년12/26-○○○○○ | ||||
시균(始均) |
乙巳-○○ |
1965년12/4-○○○○○ |
||||
陽川 許英美 |
己酉-○○ |
1969년2/22-○○○○○ | ||||
봉균(捧均) |
戊子-○○ |
1948년5/30-○○○○○ |
범덕골 中 下 辛坐 坤坐 |
|||
全州 李福順 |
56세 |
己丑-甲申 |
1949년5/8-2004년2/18 | |||
동균(東均) |
庚戌-○○ |
1970년2/12-○○○○○ |
||||
忠州 池예나 |
癸丑-○○ |
1973년7/27-○○○○○ |
光山 盧氏 敬平公 宗派 萬戶公(亢龍)·休齋公(思休) 宗家 忌日表
관계 |
성 명 |
세 수 |
간 지 |
음력 생일/기일 |
산소 위치 |
비 고 |
23 |
용균(龍均) |
壬辰-○○ |
1952년5/10-○○○○○ |
|||
務安 朴淑姬 |
己亥-○○ |
1959년2/5-○○○○○ | ||||
철균(喆均) |
乙未-○○ |
1955년3/2-○○○○○ |
||||
密陽 朴賢順 |
己亥-○○ |
1959년11/16-○○○○○ | ||||
양균(楊均)) |
戊戌-○○ |
1958년4/25-○○○○○ |
||||
金海 金玉姬 |
甲辰-○○ |
1964년8/27-○○○○○ | ||||
정균(正均) |
壬子-○○ |
1972년4/8-○○○○○ |
||||
태균(泰均) |
甲辰-○○ |
1964년2/1-○○○○○ |
||||
安東 權藝淑 |
戊申-○○ |
1968년11/13-○○○○○ | ||||
병균(炳均) |
庚戌-○○ |
1970년1/28-○○○○○ |
||||
경균(景均) |
癸丑-○○ |
1973년1/5-○○○○○ |
||||
光山 盧氏 入鄕祖는 都始祖 諱 穗祖로부터 44世 이시다. 穗祖의 9子중 長子이신 光山伯 垓祖께서 신라 孝恭王(52대 897년)때 왜구를 물리치는데 公을 세워 광산군을 襲封받아 光山이라는 貫鄕을 쓰고 있다. 得貫祖 垓로부터 朝鮮時代에 이르기까지 相臣(6名), 大提學(2名), 淸白吏(3名)을 배출하였으며, 現世에 와서는 노무현 大統領 16대, 노신영 前國務總理 18대를 배출한 名文家門으로 國家와 社會에 公憲하며 훌륭한 家系를 이어왔음이 證明되고, 中始祖 (大護軍: 恕)의 曾孫子이신 敬平公(嵩 : 桑村)祖께서는 朝鮮 太宗(1414年) 右議政이 되시고 曾孫子이신 中樞公(德基 : 세조와 동서간)께서 尙州에 百歲의 터전을 닦아 놓으셨다. 中樞公의 5代孫 文簡公(盧守愼: 蘇齋)께서는 官職이 領議政이시며, 節義와 道德, 學文으로 世人의 推仰을 받으셨다. 始祖의 44代孫이시며 敬平公의 8代孫이신 文簡公(盧守愼:蘇齋)의 異腹兄弟(亢龍公)의 後孫이신 入鄕祖 思休(諱:學初.號:休齊)祖께서는(38세)때 1721년 朝鮮景宗 辛丑 壬寅의 연이은 士禍로 政國이 어수선하여 尙州로 落鄕하여 이곳(長沙村)에 定着하셨고, 思休(諱:學初.號:休齊)祖의 아드님 이신 嘉善大夫 中棬府使(諱:夏南.致道)祖 께서는 長沙村에 백세의 터전을 닦아 놓으셨다. 思休(諱:學初,休齊)祖의 8代孫 이신 國衡(藘明)祖께서는1920년경 尙州.聞慶지방 大韓光復團.(동학:천도교)에서 활동하시면서 祖國의 光復에 獻身하셨다. 國衡(藘明)祖께서는 父 盧載錫: 母 順興安씨 사이에서 三兄弟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國衡(藘明)祖께서는 근대적인 교육을받지 못했지만 漢學실력이 출중하셨고 義理와 命分을 中侍하시였다. 光山盧氏 敬平公派 大宗會 萬戶公派 宗親會長 盧捧均 |
光山 盧氏 敬平公 宗派 諱 萬戶公(亢龍祖)·休齋公(思休祖)家 年代 對照表
代數 |
諱(휘) |
歲 壽 |
干 支 |
음력 생일/기일 |
年 革 |
備 考 |
代 |
사휴(思休.學初) |
92세 |
甲子-乙未 |
1684년 3/7-1775년 6/18 |
숙종10-영조51 |
백호등 酉坐 合墳 |
光山 金氏 |
80세 |
丙寅-乙酉 |
1686년 5/10-1765년 8/26 |
休齋公 處士府君 | ||
1 代 |
하남(夏南.致道) |
70세 |
己丑-戊戌 |
1709년 7/15-1778년 11/14 |
숙종48-정조2 |
기숙골 上下 壬坐 |
淑夫人 密陽 朴氏 |
64세 |
丁亥-辛酉 |
1707년 7/13-1771년 2/5 |
嘉善大夫 中棬府使 | ||
2 代 |
경원(慶元.慶濂) |
69세 |
戊寅-丙戌 |
1758년 3/30-1826년 9/5 |
영조34-순조26 |
기숙골右艮坐 안방골上壬坐 |
咸陽 呂氏 |
65세 |
丁丑-辛巳 |
1757년 7/26-1821년 11/9 |
|||
3 代 |
상문(常文.榮魯) |
66세 |
乙巳-庚戌 |
1785년 1/17-1850년 9/21 |
정조9-철종元 |
기숙골中辛坐 백호등下酉坐 |
麗興 閔氏 |
70세 |
甲辰-癸丑 |
1784년 10/19-1853년 12/28 |
|||
극문(極文.星魯) |
55세 |
戊申-壬寅 |
1788년 4/11-1842년11/14 |
정조12-현종8 |
안방골中壬坐 관등산 酉坐 | |
商山 金氏 |
53세 |
辛亥-癸卯 |
1791년 3/18-1843년 10/26 |
|||
수문(壽文.君一) |
66세 |
辛亥-丙辰 |
1791년 7/19-1856년 3/8 |
정조15-철종7 |
안방골 中 壬坐 合墳 | |
慶州 甘氏 |
38세 |
甲寅-庚寅 |
1794년 5/6-1830년 7/5 |
|||
복문(福文.君五) |
47세 |
甲子-庚戌 |
1804년 11/17-1850년 12/10 |
순조4-철종원 |
안방골 中 壬坐 合墳 | |
慶州 李氏 |
65세 |
丙寅-庚午 |
1806년12/10-1870년 5/29 |
|||
진문(進文.君進) |
58세 |
戊辰-乙丑 |
1808년 8/6-1865년 12/7 |
순조8-고종2 |
안방골中壬坐 범덕골 酉坐 | |
義城 金氏 |
65세 |
癸酉-丁丑 |
1813년 12/8-1877년 7/3 |
|||
4 代 |
광수(光洙.光汝) |
66세 |
丙寅-辛未 |
1806년 5/16-1871년 6/13 |
순조6-고종8 |
안방골下 亥坐 合墳 |
平山 申氏 |
54세 |
乙丑-戊午 |
1805년2/29-1858년 11/29 |
|||
5 代 |
규경(奎敬.明瑞) |
68세 |
癸巳-庚子 |
1833년 10/7-1900년 11/7 |
순조33-광무4 |
범덕골 上 庚坐 合墳 |
商山 金氏 |
52세 |
乙未-丙戌 |
1835년 4/17-1886년 4/14 |
|||
6 代 |
성학(性學.鶴善) |
57세 |
壬子-戊申 |
1852년 5/5-1908년 12/11 |
철종3-순종2 |
범덕골 中右 辛坐 관등산下庚坐 |
麗興 閔氏 |
66세 |
丁巳-壬戌 |
1857년 2/6-1922년 7/20 |
|||
7 代 |
재석(載錫.周汝) |
76세 |
丁卯=壬午 |
1867년 11/30-1942년11/25 |
고종4-일제33 |
관등산 上 庚坐 雙墳 |
順興 安氏 |
58세 |
乙丑-癸亥 |
1865년 8/14-1923년12/16 |
|||
재경(載景.周顯) |
40세 |
辛未-庚戌 |
1871년 6/14-1910년 2/11 |
고종8-순종4 |
기숙골 右下 艮坐 雙墳 | |
原州 邊氏 |
63세 |
戊辰-庚午 |
1868년 3/6-1930년 1/15 |
光山 盧氏 敬平公 宗派 諱 萬戶公(亢龍祖)·休齋公(思休祖)家 年代 對照表
代 |
諱(휘) |
歲 壽 |
干 支 |
음력 생일/기일 |
年 革 |
備 考 |
8 代 |
옥형(玉衡.宗九) |
63세 |
庚寅-壬辰 |
1890년 2/21-1952년 2/21 |
고종27-대한5 |
범덕골 左上 乾坐 雙墳 |
密陽 朴氏 |
72세 |
丁亥-戊戌 |
1887년 9/23-1958년 10/7 |
|||
순형(順衡.龍九) |
70세 |
乙未-甲辰 |
1895년 10/27-1964년12/18 |
고종32-대한17 |
범덕골 下 庚坐 雙墳 | |
密陽 朴氏 |
89세 |
癸巳-辛酉 |
1893년10/17-1981년 11/5 |
|||
국형(國衡.鳳九) |
55세 |
戊戌-壬辰 |
1898년 1/23-1952년 1/28 |
광무2-대한5 |
작은기숙골中 艮坐 雙墳 | |
順興 安氏 |
56세 |
庚子-乙未 |
1900년 11/10-1955년 9/10 |
|||
9 代 |
在學(재학.炳學) |
81세 |
乙丑-乙酉 |
1925년 11/7-2005년 12/20 |
양2006년1월19일 |
범덕골 中上 申坐 合墳 |
慶州 金癸玉 |
83세 |
癸亥-乙酉 |
1923년 8/20-2005년 4/18 |
양2005년5월25일 | ||
在穆(재목.炳穆) |
戊辰-OO |
1928년 10/18-OOOOO |
일제19- |
|||
丹陽 禹熙順 |
庚午-OO |
1930년 5/3-OOOOO |
||||
10 代 |
봉균(捧均) |
戊子-OO |
1948년 5/30-OOOOO |
범덕골 中下 申坐 | ||
全州 李福順 |
56세 |
己丑-甲申 |
1949년 5/8-2004년 2/18 |
양4월7일04시25분 음 윤2월18일 | ||
동균(東均) |
庚戌-OO |
1970년 2/12-OOOOO |
||||
忠州 池예나 |
癸丑-OO |
1973년 7/27-OOOOO |
||||
11 代 |
형주(亨柱.鎭柱) |
癸丑-OO |
1973년 10/27-OOOOO |
|||
全州 李效泌 |
庚申-OO |
1980년 4/1-OOOOO |
||||
형우(亨禹.鎭禹) |
庚申-OO |
1980년 3/19-OOOOO |
||||
慶州 金孝珍 |
庚申-OO |
1980년 8/1-OOOOO |
||||
12 代 |
유빈(庾彬) |
丙戌-OO |
2006년 5월6일-OOOOO |
양6월1일 |
||
가현(佳炫) |
辛卯-OO |
2011년11월28일-OOOOO |
양1월2일 | |||
전 답 현 황 |
경북 상주시 공검면 지평2리 887-2 1.112.9 m2 (337평) |
지급논 |
봉 균 | |||
경북 상주시 공검면 지평2리 887-3 1.790.5 m2 (542평) |
지급논 |
봉 균 | ||||
경북 상주시 공검면 지평2리 897-8 2.048.9 m2 (620평) |
집앞 큰논 |
봉 균 | ||||
경북 상주시 공검면 지평2리 897-5 1.188.5 m2 (360평) |
집앞 작은논 |
동 균 | ||||
경북 상주시 공검면 지평2리 867-5 2.362.1 m2 (715평) |
건네 보들논 |
동 균 | ||||
경북 상주시 공검면 지평2리 골마밭 |
재 목 |
光山 盧氏 敬平公 宗派 萬戶公(亢龍祖) · 休齋公(思休祖)派 各派別 宗孫
光山盧氏 敬平公派 大宗會 |
祖 順 |
大 宗孫 |
2 派宗孫 |
3 派宗孫 |
4 派宗孫 |
5 派宗孫 |
代 |
사휴(思休)1684-1775 休齊公(處士府君) 光山 金氏 1686-1765 |
朝鮮 景宗元年1721年 尙州 長沙村 入鄕祖 |
|||
1 代孫 |
하남(夏南)1709-1778 嘉善大夫 中棬府使 淑夫人 密陽朴氏1707 |
-1771 |
|||
2 代孫 |
경원(慶元)1758-1826 咸陽 呂氏 1757-1821 |
||||
3 代孫 |
상문(常文)1785-1850 麗興 閔氏 1784-1853 |
극문(極文)1788-1842 商山 金氏 1791-1843 |
수문(壽文)1791-1856 慶州 甘氏 1794-1830 |
복문(福文)1804-1850 慶州 李氏 1806-1870 |
진문(進文)1808-1865 義城 金氏 1813-1877 |
4 代孫 |
광수(光洙)1806-1871 平山 申氏 1805-1858 |
광찬(光澯)辛丑-乙巳 淸風 金氏 戊申-庚子 |
광형(光炯)乙卯-癸卯 丹陽 禹氏 辛亥-癸丑 |
광습(光熠)辛未-丙寅 密陽 朴氏 甲戌-丁丑 |
광돈(光燉)丙寅-壬申 密陽 朴氏 壬戌-0 0 |
5 代孫 |
규경(奎敬)1833-1900 商山 金氏 1835-1886 |
익경(益敬)壬申-甲午 蔚珍 林氏 乙亥-己酉 |
창경(暢敬)癸酉-壬申 慶州 金氏 甲戌-乙亥 |
장경(章敬)丙寅-戊午 慶州 崔氏 丁丑-庚子 |
춘경(春敬)庚寅-甲寅 光山 金氏 壬辰-0 0 |
6 代孫 |
성학(性鶴)1852-1908 咸寧 金氏 1855-1878 麗興 閔氏 1857-1922 |
성범(性範)庚子-甲午 陽川 許氏 甲辰-癸卯 |
성윤(性潤)己亥-乙亥 益城 金氏 乙丑-0 0 |
성덕(性德)戊辰-己酉 慶州 李氏 乙丑-庚午 |
성인(性仁)丙寅- 0 0 丹陽 禹氏 辛酉-0 0 |
7 代孫 |
재석(載錫)1867-1942 順興 安氏 1865-1923 |
재홍(載洪)丙寅-己丑 順興 安氏 癸亥-丙辰 |
재욱(載旭)癸未-0 0 密陽 朴氏 壬午-0 0 |
재연(載淵)壬辰-1984 密陽 朴氏 甲午-1983 |
재탁(載鐸)乙酉- 0 0 密陽 朴氏 壬午-0 0 |
8 代孫 |
종구(宗九)1890-1952 密陽 朴氏 1887-1958 |
형구(亨九)丙戌-甲辰 安東 權氏 癸巳-戊戌 |
@0 0(0 0) 0 0-0 0 |
정구(正九)1919-1946 安東 金氏 1921-2004 |
윤구(潤九)乙巳- 0 0 淸風 金氏 庚戌-0 0 |
9 代孫 |
병석(炳奭)1909-1973 慶州 李氏 1905-1980 |
병화(炳華)1914- 金海 金氏 1926- |
병규(炳圭)1953- 順興 安氏 1955- |
병욱(炳彧)1947- 淸風 金氏 1948- |
병원(炳元)1927- 海州 吳氏 1937-1970 |
10代孫 |
세균(世均)1926-1994 晋州 姜氏 1928-1975 |
성균(聖均)1959- 慶州 李氏 1962- |
석균(錫均)1977- |
성균(成均)1970- |
영균(寧均)1958- |
11代孫 |
진한(鎭漢)1960- 金海 金氏 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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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代孫 |
경현(俓見)19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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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代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