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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부터 지도 선생님의 강의자료를 올립니다.
7월 원고[주부독서회 7월 15일]
르네상스 미술
[ Renaissance Art ]
강사: 박 윤 배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6세기 유럽 전역을 풍미하며 정점에 이르렀던 미술 경향. 본래 프랑스어로 ‘재탄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문학 및 예술운동에서 특정한 시대를 의미하는 것 이외에도 중세기의 마감과 근대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전환기를 포괄하고 있다.
미술사가인 바자리Giorgio Vasari(1511~1574)는 《미술가 열전Le vite de’piu eccelenti architetti, Picttoroi et scultori Italiani》(1550)에서 13세기 후반 이후의 이탈리아, 특히 토스카나의 미술가들에게 로마제국의 몰락과 함께 잊혀진 미술의 부활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바자리가 표현한 이탈리아어로 ‘부활(rinascimento)’이라는 단어를 1840년경 프랑스의 미슐레Jules Michelet가 번역하는 과정에서 르네상스라는 용어가 유래되었다. ‘르네상스야말로 세계와 인간에 대한 발견이었다’는 유명한 문구를 남긴 미슐레는 르네상스를 단순한 문화적 부흥 이상의 것, 즉 근대 세계의 출발이었다고 주장한 최초의 역사가였다. 이어서 스위스의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도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근대 정신이 탄생한 시기라고 해석하였다.
르네상스는 우선 기본적으로 문화적, 미술적 재흥을 의미했으며, 특히 르네상스는 그리스 로마 문화를 회생시키려는 의식적인 운동이었다. 이는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와 도나텔로Donatello(1382~1466)가 로마에서 고대 로마식 건축과 조각에 관한 연구에 몰두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자신들의 고전 지식을 이용한 작품활동을 시작함에 따라 고대 세계의 미술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고전주의의 부활, 인본주의(humanism), 자연의 재발견, 개인의 창조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 정신이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은 무엇보다 미술 분야였다. 당시 미술은 과학의 차원으로까지 간주되었으며, 자연을 탐구하는 수단인 동시에 발견의 기록이었다. 따라서 미술은 가시적인 세계에 대한 관찰에 바탕을 두고 원근법 등의 수학적 원칙에 따라 실행되었다. 르네상스 회화의 창시자인 마사치오Masaccio(1401~1428)는 인체해부학을 연구하였고, 원근법에 의한 객관적 사실주의를 추구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1415~1492),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c.1435~1488) 등은 선과 공간을 이용한 원근법과 해부학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한편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인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초기 르네상스(proto-renaissance)’ 시기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지오토Giotto(1266~1337)가 있다. 명료하고 단순한 구조와 심리적 통찰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피렌체의 치마부에Giovani Cimabue(c.1240~1302)와 같은 동시대 작가들이 선을 사용한 단조로운 장식과 종교적 위계 질서를 연상시키는 구성 방식에 의존했던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15세기에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보티첼리Botticelli(1445~1510), 만테냐Mantegna(1430~1506)가 활약했고, 16세기에는 로마, 밀라노, 베네치아 등지에서 미켈란젤로Michelangelo(1475~1564), 라파엘로Raffaello(1483~1520),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 같은 거장들이 나와 1490년대 초반부터 1527년까지 대략 35년간 지속되었던 전성기 르네상스(high-renaissance) 회화 양식을 완성하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인간을 우주의 중심으로 규정하고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했으며, 인간은 모든 지식을 포용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해야 했다. 한편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여겼던 미켈란젤로는 그의 그림조차도 조각적으로 표현하였다. 미켈란젤로 최고의 역작은 1508년에서 1512년까지 4년에 걸쳐 제작한 바티칸의 시스틴 성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대규모 천장 프레스코화이다. 다음으로 라파엘로는 고전적인 정신, 즉 조화와 미 등을 완벽하게 표현하여 고유의 우아한 화풍을 확립하였다.
한편 르네상스 건축은 중세 고딕 건축처럼 추상적인 선의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 건축을 모델로 한 인본적이고 구성적인 형태미를 특징으로 한다. 당시 피렌체에는 부유한 상인 권력 가문들에 의해 많은 궁전과 교회, 수도원 등의 건축물이 제작되었고 그 내부는 미술 작품으로 장식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가문이었던 메디치 가는 예술 활동에 호의적이었고 미술가들에 대한 지지와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독특한 피렌체의 상황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이 발전하기 위한 토대를 제공하였다.
전성기 르네상스 건축에서 그 창시자는 브라만테Donato Bramante(1444~1514)라고 할 수 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그를 교황청 건축가로 임명하고 4세기에 세워진 성베드로 대성당의 대대적인 개축안을 구상하게 했는데, 이 때 브라만테가 설계한 성베드로 대성당의 쿠폴라는 브루넬레스키의 피렌체 대성당 돔, 만토바에 있는 알베르티Leone Battista Alberti(1404~1472)의 산토 안드레아 성당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르네상스 건축으로 손꼽힌다. 이 밖의 건축가로는 팔라디오Andrea Palladio(1508~1580) 등이 있고, 조각에서는 도나텔로Donatello(1382~1466), 베로키오Verrocchio(c.1435~1488), 기베르티Lorenzo Ghiberti(c.1378~1455)가 대표적이다.
번성을 거듭하던 르네상스는 1527년 로마의 몰락과 함께 막을 내리고 16세기에는 매너리즘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정신에 근거한 예술 작품들은 이탈리아 북부와 북유럽에서 계속 탄생하였다. 티치아노Tiziano(c.1485~1576), 지오르지오네Giorgione(1476~1510), 틴토레토Tintoretto(1518~1594), 베로네제Paolo Veronese(1528~1588) 등이 활약한 베네치아파도 그중 하나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의 지적인 분위기에 가장 근접한 16세기 화가는 독일의 뒤러Albrecht Durer(1471~1528)였다. 그는 시각적인 실험과 자연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구하였으며 동판화와 목판화를 이용하여 르네상스와 북구의 고딕 양식을 융합시켜 서구 세계에 확산시켰다.
한편 북알프스에서는 플랑드르의 반 아이크 형제Hubert & Jan van Eyck와 보슈Hieronymus Bosch(c.1450~1516), 네덜란드의 브뤼겔Pieter Bruegel(c.1525~1569), 독일의 크라나흐Lucas Cranach(1472~1553), 홀바인Hans Holbein(1497~1543), 프랑스의 퐁텐블로파 등이 활약하며 르네상스 미술을 발전시켜 나갔다.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기 초: 독일과 네덜란드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위대한 업적과 창안들은 알프스 북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들의 위대한 업적은 과학적 원근법의 발견과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품위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 시대의 건축형식에 관한 지식이었다.
독일 뉘른베르크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et Durer: 1471~1528)는 유명한 금세공가의 아들이었다. 일찍이 소년시절부터 소묘에 놀라운 재능을 보였으며, 제단화와 목판화를 생산하는 거장 미하엘 볼게무트의 공방에서 수습기간을 보냈다. 수습을 마친 뒤에 그는 중세의 모든 젊은 장인들의 관례에 따라 장인으로서의 시야를 넓히고 정착할 곳을 찾아 여행길에 올랐다. 콜마르와 스위스 바젤을 거쳐 이탈리아를 여행했다. 결혼을 하고 공방을 열기 위해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북유럽의 미술가가 남유럽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기법적인 성과들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초기 걸작가운데 하나는 성 요한의 계시록을 묘사한 일련의 대형 목판화였다. 이것은 즉각 성공을 거두었다. 최후의 심판날 공포와 그 앞에선 여러 가지 징후와 불길한 조짐들의 무시무시한 광경이 이처럼 힘차고 강력하게 시각화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뒤러의 상상력과 대중들의 관심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폭발한, 교회제도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과 불만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뒤러와 그의 작품을 보는 당시 대중들은 이 요한 계시록의 무시무시한 환영이 대단한 화젯거리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언들이 그들 생전에 현실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용과 싸우는 성 미가엘> 1498년, 목판화
이 위대한 한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뒤러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적과 싸우는 영웅을 종래와 같이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다. 두 손에 든 큰 창으로 용의 목을 찌르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고, 그 힘찬 몸짓이 화면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의 주위에 있는 한 무리의 천사들이 검사나 궁사로서 악귀와 같은 괴물과 싸우고 있는데 이 괴물의 끔찍스런 모습은 말로 형언할 수가 없다. 이 천상의 싸움터 아래는 뒤러의 유명한 서명과 함께 고요하고 평온한 풍경이 전개되어 있다.
뒤러는 지금까지 어떤 예술가가 했던 것보다 더 끈기있고 충실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자연을 묘사하였다. 습작이나 스케치를 보면 그는 자연을 묘사하는 완전한 기술을 얻으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것은 유화와 동판화와 목판화의 삽화를 그려야 했던 성경의 이야기를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알브레히트 뒤러 <풀밭> 1503년
1504년 완성된 <예수탄생>은 낡은 건물의 묘사에 비해 인물들은 작고 중요치 않아 보인다. 낡은 헛간 안에는 마리아가 아기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며 요셉은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물통에 붓느라고 분주하다. 배경에서 경배를 올리는 사람을 찾으려면 대단히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하늘에서 기쁨의 소식을 전하러 온 천사를 찾으려면 확대경이 있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이 초라한 농가의 앞마당은 대단히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전달해주므로 성탄전야의 기적을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 같은 동판화에서 뒤러는 고딕미술의 발전을 총합하고 완성시킨것 같이 보인다.
알브레히트 뒤러 <예수탄생>, 1504년
뒤러는 인체 비율에 관한 고전세대의 저술을 통해서 이상적인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법칙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인체를 과도하게 길거나 넓게 그림으로써 왜곡시켰다. 이러한 연구의 첫번째 결과 가운데 아담과 이브를 그린 동판화가 있다. 그의 아담과 이브는 이탈리아 고전 작품만큼 신빙성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다. 또한 그들의 형태와 자세 뿐만 아니라 대칭적인 구도에 있어서도 다소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그러나 에덴 동산 안에는 생쥐와 고양기, 사슴, 토끼, 앵무새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음을 볼 수 있으며 숲 속에는 지식의 나무와 뱀이 있다. 또한 뒤러가 숲은 어두운 배경으로 하고 희고 섬세하게 모델링한 인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남유럽 미술의 이상을 북유럽 토양에 이식시킨 최초의 진지한 시도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뒤러는 쉽게 만족할 수 없었으며 견문을 넓히고 남유럽 미술의 비밀에 관해 더 많이 배우기 위해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알브레히트 뒤러 <아담과 이브> 1504년
뒤러도 처음에는 다른 장인들과 마찬가지로 뉘른베르크와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시민들과 흥정도 하고 시비도 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가게 되었으며 자신을 영광되게 하는 수단으로서 미술의 중요성을 인실하고 있었던 막시밀리앵 황제는 여러 계획에 뒤러를 고용했다. 그의 나이 50에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 그는 실로 제왕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북유럽의 나라들에서도 위대한 미술가들은 마침내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던 근성을 타파하게 된 것이다,
위대함과 예술적 기량에서 뒤러와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의 화가는 그 이름까지도 확실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17세기의 저술가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라는 화가에 대해 언급하며 그의 작품들 중 몇 점을 대단히 칭찬하였는데, 그로부터 이 작품들과 동일한 화가가 그렸다고 확신되는 다른 작품들은 통상 ‘그뤼네발트’라는 라벨이 붙게 되었다.
그에게 있어 미술은 중세의 모든 종교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제공해 주고 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패널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서 다른 문제들을 희생시켰음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구세주의 뻣뻣하고 참혹한 모습에는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생각하는 그런 아름다움은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다. 과부의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는 복음서의 저자 성 요한에게 안겨 쓰러지고 있고, 작게 그려진 막달라 마리아는 슬픔을 못이긴 채 두 손을 꼭 맞잡고 있다. 십자가의 다른 쪽에는 구세주를 상징하는 양이 십자가를 메고 피를 성찬배 속에 쏟고 있으며, 성 요한이 옆에 서 있다. 그는 준엄하고 당당한 몸짓으로 구세주를 가리키고 있으며 그의 머리 옆에는 그가 한 말이 써 있다. “그분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복음 3장 30절)”
그뤼네발트는 제단을 바라보는 신도들이 이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세례 요한이 손을 들어 가리키게 하여 강조하였다. 이 그림은 무섭고 소름 끼치는 장면을 하나도 완화하지 않고 그대로 묘사한 것 같으면서도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인물상의 크기가 상당히 다른데, 이는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 되어온 근대미술의 법칙들을 거부하고 인물의 중요성에 따라 그 크기를 변화시켰던 중세와 원시시대의 원칙들로 돌아간 것이 분명하다. 제단의 영적 의미를 위해서 미적 표현을 희생시켰듯이 정확한 비례에 관한 새로운 요구를 도외시해 버렸다. 그러나 이것이 그로 하여금 성 요한의 말씀에 담긴 신비로운 진리를 더 잘 표현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통칭 그뤼네발트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1515년
그뤼네발트의 작품은 예술가가 ‘진보적’이 아니더라도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진정한 위대성은 새로운 발견에 있지 않다. 그뤼네발트는 자기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할 때는 언제나 이 새로운 발견들을 채용해서 그가 새로운 기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예수가 부활하여 하늘의 빛을 가진 초 자연적인 형상으로 변용하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장면에서는 위로 날라가는 부활한 예수와 갑작스런 빛의 환영에 압도되어 땅에 쓰러져 있는 군인들의 무기력한 몸짓 사이에 날카로운 대조가 있다.
통칭 그뤼네발트 <그리스도의 부활> 1515년
독일의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1472~1553)는 1504년에 이집트로 도피하는 성(聖) 가족을 그렸다. 성 가족은 숲이 우거진 산악지대의 한 샘물 근처에서 쉬고 있다. 성모 주위에는 작은 천사들이 있는데 한 천사는 아기 예수에게 딸기를 주고 있고, 다른 천사는 플루트와 피리를 물며 피로에 지친 피난민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있다. 이 시적인 새로운 구상은 로흐너의 서정적인 미술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루카스 크라나흐 <이집트로 피난 중의 휴식> 1504년
레겐스부르크의 화가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 1480?~1538)는 숲과 산 속을 누비고 다니며 풍우에 시달린 나무와 바위의 형태를 연구했다. 그가 남긴 많은 수채화와 동판화, 유화에는 아무런 이야기도 담겨있지 않으며 인물이 하나도 없다. 자연을 그렇게 사랑했던 그리스인들 조차 목가적인 장면을 위한 배경으로서만 풍경화를 그렸다. 중세에는 종교적인 테마이든 세속적인 테마이든 분명한 이야기 거리를 다루지 않은 그림은 거의 상상할 수가 없었다. 화가의 묘사력으로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을 때 비로서 화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이 없는 그림을 팔 수가 있었다.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 <풍경> 1526~8년경
16세기 초엽의 네덜란드에서는 15세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던 얀 반 에이크,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 등과 같은 거장들을 배출하지는 못했다.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고 노력했던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옛날 방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화가 얀 호사르트(Jan Gossaert), 흔히 마뷰즈(Mabuse: 1478?~1532)라고 불리우는 작가의 작품은 그러한 갈등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이다. 성 루가는 성모와 아기 예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데, 인물을 그리는 방식은 얀 반 에이크나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전통과 흡사하나 배경을 그리는 방식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원급법과 명암법 등을 과시한 것 같이 보이는데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모델들이 가지고있는 단순한 조화미는 결여되어 있다. 왜 성 루가가 성모상을 그리는데 겉기에는 호화롭지만 텅 빈 궁정에 자리 잡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되기도 한다.
통친 마뷰즈 <성모를 그리고 있는 성 루가> 1515년경 목판에 유채
네델란드의 다른 도시에는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가 있었다. 그에 관해서는 거이 알려진 바가 없다. 그뤼네발트와 마찬가지로 보스는 현실을 가장 신빙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 발전되어온 회화의 전통과 새로운 수법 등이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를 그럴듯하게 표현하는 수단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스는 지옥의 광경을 소름 끼치게 묘사하는 화가로 유명하다. 그의 그림에선 하느님에게 반란을 일으킨 천사들은 역겨운 곤충의 모습으로 내던져 지고, 지옥의 그림에선 소름 끼치는 공포와 화염과 고문을 보게 된다.
중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이고 실감나는 형상으로 표현하는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보스 한 사람 뿐일 것이다. 이러한 업적은 아마도 새로운 시대 정신이 미술가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재현하는 방법을 마련해주었고 반면에 구 시대의 이념이 의연히 살아남아 있었던 바로 그 순간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을 것이다.
히에로니무스 보스 <천국과 지옥> 1510년, 목판에 유채
미술의 위기
16세기 후반: 유럽
1520년경 이탈리아 도시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등은 그 전 세대가 이룩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실제로 해냈다. 그들에게 소묘에 있어서 어려운 문제는 하나도 없었으며, 또 주제상 어떠한 문제도 그들이 감당하기 벅찰 만큼 복잡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아름다움과 조화를 올바르게 결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고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작품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가장 유명한 조각 작품들까지도 능가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술 지망생들은 미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미 다 이룩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어떤 미술가들은 이러한 생각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미켈란젤로를 열심히 배우고 모방하였다. 그들은 미켈란젤로의 나체상들을 그대로 베껴서 그림에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상관없이 그속에 집어 넣었다.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은 미켈란젤로 작품의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의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 모두가 어려운 포즈를 취한 나체들만 모아놓으면 그림이 된다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었던 것은 아니었다. 터무니없는 기발한 착상으로 그들을 이겨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전 세대의 거장들 작품보다 자연스럽지 못하고 애매하고 조화롭지 못하게 작품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전 시대가 했던 것보다 더 흥미 있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 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은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1503~40)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성모상에는 라파엘로가 이 테마를 다루었을 때 보여준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이 전혀 없다. 이 작품은 일명 <긴 목의 마돈나> 라고 불리는데, 그 까닭은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 백조처럼 길쭉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파르미자니노 <긴 목의 마돈나>, 1534~40년, 화가의 죽음으로 미완성, 목판에 유채
그러나 이 미술가가 무지하거나 무관심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길게 늘여진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그림의 배경에 인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비례를 가진 괴상한 모양의 원주를 세워 놓았다. 그림의 구도도 종래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조화를 기피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붐비는 천사들을 비좁은 왼쪽에 몰아넣고, 오른쪽에는 넓게 터놓아 키가 큰 예언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거리 때문에 상대적으로 너무 작아졌다. 이 화가는 정통적인 수법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 해결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사실 선배 거장들이 이룩해 놓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엇인가 새롭고 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것을 창조하고자 모색했던 그를 비롯한 당시의 모든 미술가들은 아마도 최초의 현대적인 미술가들이었을 것이다. 소위 현대 미술이라고 하는 오늘날의 미술도 이들처럼 분명한 것을 피하고 인습적인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는 다른 어떤 효과를 이룩하고자 하는 욕망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베네치아 출신 야코보 로부스티(Jacopo Robusti: 1518~94, 통칭 틴토레토(Tintoretto) 역시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형태와 색채에 있어서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진력이 나 있었다. 그는 성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어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자 하였다. <성 마르코 유해의 발견>은 얼핏보면 혼란스럽고 번잡하다. 화면위가 질서있게 배치된 것이 아나라 궁륭은 뚫려있으며 양탄자 위의 시체는 괴이한 단축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성 마르코(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인 복음서의 저자)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왔던 이야기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베네치아 사람이 성 마르코의 유해를 찾는 부름을 받고 지하 묘굴에 들어가보니 어떤 묘석에 귀중한 유해가 묻혀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이 우연히 한 유해를 꺼내 놓았을 때 갑자기 성 마르코가 나타나서 그의 유해를 알려주었고 성인은 더 이상 묘굴을 뒤지지 말라고 명령한다. 틴토레토는 바로 이 순간을 선택했다. 성인의 유해 앞에서 무릎 꿇고 경배하는 귀족은 이 그림을 주문했던 헌납자이다.
틴토레토 <성 마르코의 유해발견> 1562년경, 캔버스에 유채
그의 그림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는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어떻게 긴장감과 흥분된 감정을 고무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공주는 마치 그림 속에서 밖으로 달려나올 것 같아 보이며, 주인공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일반적인 규칙과는 정반대로 주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배경 속으로 멀리 들어가 있다.
틴토레토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1555~8년경, 캔버스에 유채
당시 피렌체의 위대한 비평가 바사리(Vasari)는 그의 용의주도하지 못한 제작방법과 괴상한 취향이 그의 작품을 망쳐 놓았다고 생각했다. 바사리는 틴토레토가 그의 작품에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데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틴토레토는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으며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림이 전설적인 장면에서 그가 상상한 바를 전달하기만 하면 완성되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매끈하고 세심한 마무리 손질은 보는 사람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 버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었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 놓았던 것이다.
16세기 화가들 중에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은 그리스의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로 보통 간략하게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엘 크레코(El Greco: 1541?~1614)가 있었다. 한동안 베네치아에 머물렀던 그는 유럽의 외진 곳 스페인의 톨레도에 정착했다.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중세의 이념들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정확한 묘사를 요구하는 비평가들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것이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극적인 환상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그가 틴토레토를 능가하게 만든 이유였다.
요한 계시록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한구석에서 성 요한이 환상적인 황홀경에 빠져서 하늘을 쳐다보며 예언자의 몸짓으로 두 팔을 올리고 있다. 흥분된 몸짓을 하고 있는 나체의 인물들은 하늘에서 내린 선물인 흰 두루마리를 받기 위해 무덤에서 일어난 순교자들이다.
엘 그레코 <요한 묵시록의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1608~14년경, 캔버스에 유채
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도 성인들이 세상을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무서운 광경을 이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가 틴토레토의 한쪽으로 치우친 비정통적인 구성 방법과, 파르미자니노의 마돈나에서 인물을 길죽하게 그리는 매너리즘을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 그레코의 미술이 재발견되고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미술가들이 모든 미술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말라고 가르쳐준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북쪽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와 씨름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 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인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칼빈 교도 중 강경파들은 심지어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반대했다. 그리하여 화가들은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이러한 위기의 영향은 독일의 위대한 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 아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이탈리아와 긴밀한 교역관계에 있었던 부유한 상업도시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나 새로운 학문의 중심지인 바젤로 갔다. 그는 뒤러가 평생 동안 정열적으로 추구했던 지식을 좀 더 쉽게 습득했다. 그는 화가 집안 출신인데다가 매우 재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얼나 안가서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업적을 모두 다 섭렵할 수 가 있었다.
그는 이미 서른 살쯤 되었을 때 바젤 시장 이름으로 봉헌된 제단화 <성모상>을 그렸다. 이 그림은 이러한 종류의 그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전적 형태의 감실에 둘러 쌓인 고요하고 품위 있는 성모 양쪽에 헌납자의 가족을 별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배치해 놓은 방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조화로운 구성을 상기시켜 준다. 세부 묘사에 세심한 주위를 기울이는 한편 인습적인 아름다움을 다소 무시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북유럽에서 화가 수업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소(小) 한스 홀바인 <성모와 마이어 시장의 일가> 1528년경, 목판에 유채
독일어 사용권 나라에서 정상을 향한 길을 다지던 그는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부딪쳐 이러한 모든 희망을 잃게 되었다. 그는 1526년 스위스를 떠나 영국으로 갔다. 영국에 도착한 후 처음 한 작업은 위대한 학자 토마스 모어 경의 집안 식구들을 담은 대형 초상화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영국에 정착하기로 했고 헨리 8세로부터 궁정 화가라는 공식 직함을 받게 되고, 드디어 자기가 몸담고 일할 수 있는 활동의 범위를 찾게 되었다. 그의 주된 임무는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홀바인의 초상화들에는 드라마틱한 것은 하나도 없고 사람의 눈을 끌만한 것도 없으나 그림들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다.
소(小) 한스 홀바인 <리처드 사우스웰 경> 1536년, 목판에 유채
그는 인물을 본대로 충실하게 그렸고, 전체 구성이 아주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아주 알기 쉽게 보인다. 그는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서 주인공의 특징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세부를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과시하려고 하였다.
소(小) 한스 홀바인 <런던의 한 독일상인 게오르크 기체> 1532년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기법이 완숙해감에 따라 그러한 트릭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또 초상 인물로부터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게 의도하지도 않았다. 그의 그림을 높이 사는 이유는 이러한 거장다운 절제 때문이다. 홀바인이 떠나자 독일어권 회화는 놀라울 정도로 쇠퇴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가 죽자 영국의 미술도 그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위기를 무사히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에서 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회화가 번창했으며 미술가들은 그들이 처해있는 곤경에서 빠져나갈 길을 발견했다. 그들은 중세 필사본의 여백에 그려진 희화의 시대, 그리고 15세기 미술에 묘사된 일상생활의 장면들로 거슬러 올라가는 북유럽 미술의 전통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북유럽화가들이 주제를 어떤 종목 또는 부분으로 한정해서 의도적으로 개발한 그림, 특히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묘사한 그림들은 뒤에 가서 풍속화(genre painting)라고 부르게 되었다.
16세기 플랑드르 최대의 풍속화가는 피터 브뢰헬(Pieter Bruegel: 1525?~69, 아버지)였다.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종류는 농민들의 생활 장면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치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소박한 시골 생활은 덜 위장되어 있고 인간 본성의 자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며 인위적이고 인습적인 허식에 가려지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 극작가나 화가들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보이려 할 때는 하층민의 생활에서 그 주제를 구했다.
시골의 결혼을 그린 그림에서 신부는 푸른 휘장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조금 모자란 듯이 보이는 얼굴에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앉아있다. 더 뒤쪽에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고 있는 남자가 아마 신랑일 것이다. 왼쪽에는 맥주를 따르고 있는 남자가 보이며 흰 앞치마를 한 남자가 음식을 나르고 있다. 그의 넘치는 기지와 뛰어난 관찰력으로 묘사된 많은 일화들보다 더 감탄스러운 것은 비좁거나 번잡스러운 인상이 전혀 들지 않게 그림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유쾌한 그림들에서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새로운 왕국을 발견했다. 그 이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개척해 나갔다.
피터 브뢰헬 <시골의 결혼 잔치> 1568년경, 목판에 유채
2015년 8월 고령주독 강의안
자연의 거울
17세기: 네덜란드 미술
강사: 박 윤 배
유럽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 진영으로 나눠서 대립하게 되자 네덜란드와 같은 조그만 나라의 미술에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오늘날 벨기에라 부르는 네덜란드 남부지역은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고, 네덜란드 북쪽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부유한 상업 도시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신교를 믿었던 것이다. 이들은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했다. 도시가 안정되고 부가 축적됨에 따라 그들의 세계관도 성숙해 갔지만, 당시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을 휩쓴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콥 반 캄펜 설계 <암스테르담 궁전> 1648년, 17세기 네덜란드 시청
신교 사회에서 계속 될 수 있었던 회화 영역은 초상화 그리기였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어했으며 시장이나 시의원으로 선출된 명사들은 직위가 들어있는 초상화를 원했다. 더욱이 지방 위원회 및 자치단체의 임원들은 회의실이나 모임장소에 그들의 집단 초상화를 자랑 삼아 걸어놓는 관습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0?~1666)의 부모는 신교도였으므로 네덜란드의 남부지역을 떠나 부유한 도시 하를렘에 정착했다. 그의 <성조지 시민군단 장교들의 연회>는 초창기의 그림으로 이런 종류의 주문 그림을 그릴 때 구사한 빼어난 솜씨와 독창력을 보여준다.
독립한 네덜란드 시민들은 군복무를 해야 했고 각 부대의 장교들을 위해 호사스러운 연회를 베푸는 것이 당시 하를렘 시의 관습이었으며 이 순간을 그림으로 남겨 기념하는 것도 전통이 되었다. 할스는 이 의례적인 모임에 생기를 불어넣어 유쾌한 분위기를 전달하며 구성원 개개인을 너무나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프란스 할스 <성조지 시민군단 장교들의 연회>, 1616년, 캔버스에 유채
할스의 개인 초상화는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해 보면 거의 스냅사진 같아 보이며, 실제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주문한 사람의 어떤 특정한 순간을 포착해서 화폭에 영원히 고정 시켰다는 인상을 주는데, 할스의 물감과 붓을 다루는 방법을 보면 그가 순간적인 인상을 재빨리 포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상화 주인공이 그들다운 동작과 분위기 속에서 우연히 취하는 듯한 이러한 순간적인 인상의 포착은 치밀하게 계산된 노력이 없이는 결코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프란스 할스 <피터 반 덴 브루케 초상> 1633년경, 캔버스에 유채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의 화가들 중 초상화를 그리는 소질이나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주문을 받아 그림을 제작하겠다는 생각을 포기해야 했다. 그들은 그림을 먼저 그려놓고 나서 구매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오늘날에는 대부분의 화가가 이런 식이다. 어떤 면에서 예술가들은 그들의 작업을 간섭하고 때때로 못살게 굴었던 후원자들을 제거한 것을 기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미술가들은 한 사람의 후원자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횡포한 주인인 작품을 구매하는 대중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시장이나 장날 작품을 직접 팔거나 이익을 남기려고 될 수 있는 한 싸게 사들이려는 중간 상인 즉 화상들에게 의뢰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화가들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 졌다. 그래서 별로 이름이 나지 않는 화가들이 명성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화의 특수한 분야 즉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만일 어떤 화가가 전쟁화를 잘 그려 명성을 얻으면 그는 전쟁화만을 손쉽게 팔 수 있었다. 16세기 북유럽의 나라들에서 시작된 전문화 경향은 17세기에와서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바다를 전문으로 그린 화가들 중 지몬 데 블리헤르의 그림은 당시 네덜란드 화가들이 바다의 분위기를 얼마나 놀랄 만큼 단순하고 솔직한 방법으로 했는지 보여준다. 이들은 미술사상 최초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세계 한 부분을 그렸을 뿐이며 그것만으로도 영웅적인 이야기나 희극적인 테마를 다룬 그림만큼 만족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몬 데 블리헤르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 1640~45년경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1596~1656)은 헤이그 출신으로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과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회고적인 정경을 보여주는 클로드의 풍경과 달리 반 호이엔의 그림은 간결하고 솔직하다. 그는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베어있는 정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얀 반 호이엔 <강변의 풍차> 1642년, 목판에 유채
당시 영국인들은 클로드의 작품 세계를 연상하게 해주는 풍경이나 정원을 한 폭의 그림 같다는 뜻으로 ‘픽처레스크(picturesque)’라고 불렀다. 이후 이 단어는 허물어진 성이나 석양 뿐만 아니라 돛단배나 풍차 같은 소박한 사물에도 적용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단순한 사물에 픽쳐레스크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클로드의 그림이 아니라 데 블리헤르나 반 호이엔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생각나게 한다.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in: 1606~69)을 들 수 있다. 그는 성공적이고 인기 있는 화가였던 젊은 시절부터 파산의 비애와 불굴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외로운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자화상을 남겨 놓았다.
렘브란트는 1606년 대학도시 레이덴에서 부유한 제분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레이던 대학에 입학했으나 곧 화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포기했다. 그 당시 학자들은 그의 초기 작품을 크게 칭찬했다. 그는 스물 다섯에 암스테르담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는 초상화가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부유한 집의 딸과 결혼을 하고 작업을 계속하였다. 1642년 그의 부인이 사망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남겨주지만 렘브란트의 인기는 계속 떨어져서 곧 빚더미에 올라 앉게 되었다. 14년 후엔 두번째 아내와 아들의 도움으로 완전한 몰락의 지경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아내와 아들은 미술품을 거래하는 회사를 설립해서 형식적으로 그를 고용인으로 만드는 협정을 만들었다. 그 덕택으로 그는 만년에 위대한 걸작을 그려낼 수 있었다. 그들은 그보다 먼저 죽었고 그가 죽었을 때 그에게는 헌 옷 몇 벌과 그림 그리는 화구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만년에 그린 렘브란트의 자화상에서 그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감추려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성실히 관찰하였다. 포즈를 취한 흔적도 없고 허영의 그림자도 없으며 다만 화가의 꿰뚫어보는 응시가 있을 뿐이다.
렘브란트 반 레인 <자화상> 1655~8년경
렘브란트의 후원자이자 친구이며 후에 암스테르담의 시장된 얀 지크스의 초상을 보면 인물의 전 생애를 다 보여주는 것 같다. 그는 금실로 짠 끈의 광택이나 주름깃에 아롱거리는 광선들을 표현하는 기술을 마음껏 과시했다. 그는 그림의 완성은 화가가 그 목적을 달성할 때라 하며 얀 지크스의 장갑 낀 왼쪽 손을 스케치 형태로 남겨둔 채 완성해 버렸다. 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인물상의 생명감을 고양시켜 주고 있다. 렘브란트의 초상화들에서는 실제 인물과 직접 대면하여 그 사람의 체온을 느끼고 공감을 구하는 그의 절박함과 외로움, 고통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다.
렘브란트 반 레인 <얀 지크스> 1654년, 캔버스에 유채
렘브란트가 그린 다윗 왕이 그의 사악한 아들 압살롬을 용서해주는 장면은 이전에 다루어진 적이 없는 그림이다. 그는 오리엔트 의상에 달린 보석의 번쩍이는 질감의 효과를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렘브란트는 배경을 어둡게 함으로써 인물들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이 명암의 효과는 한 장면의 극적인 효과를 고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으리으리한 옷차림을 한 왕자가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용서를 비는 자세나 그것을 조용하고 슬픈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다윗 왕의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다. 압살롬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
렘브란트 반 레인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 1642, 목판에 유채
렘브란트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판화가로서도 위대한 거장이었다. 그가 사용한 기술은 동판화 보다 훨씬 자유롭고 신속하게 작업할 수 있는 에칭(etching: 부식 동판화)이었다. 에칭의 원리는 간단하다. 동판 표면에 밀랍(wax)을 덮고 그 위에 바늘로 그림을 그린다. 바늘로 긁은 부분은 밀랍이 제거되어 동판의 표면이 드러나게 되고, 이 동판을 산성 용약에 넣으면 벗겨진 부분만 부식이 된다. 그런 다음에 인쇄잉크를 칠하고 찍어내면 된다.
<설교하는 그리스도>는 자신이 상고 있는 주변에서 모델을 택했다. 그는 유태인들의 용모와 의상을 연구했다. 이탈리아의 미술에 익숙한 사람들은 렘브란트의 작품을 처음 볼 때 충격을 받는다. 그것은 그가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으며 심지어 노골적으로 추한 것 까지도 피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카라바조와 마찬가지로 조화와 아름다움 보다는 진실과 성실성을 더 중요시 했다. 그러나 그는 인물배치에 많은 예술적 지혜와 기술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이탈리아 미술 전통에서 배웠다.
렘브란트 <설교하는 그리스도> 1652년경
네덜란드 화가들은 유쾌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묘사하는 북유럽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는데 이 흐름을 완성시킨 화가는 얀 반 호이엔의 사위인 얀 스텐(Jan Steen: 1626~79)이다. 그 당시 다른 미술가들처럼 스텐도 그림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 여관을 경영하여 돈을 벌었다. 그는 여관에서 많은 사람들을 관찰하였고 그가 그린 세례를 축하하는 그림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한 화면에 혼합시킨 그의 매우 뛰어난 솜씨를 볼 수 있다.
얀 스텐 <세례 잔치> 1664년, 캔버스에 유채
풍경화가 야콥 반 로이스달(Jacob van Ruisdael: 1628?~82)은 생애의 전반기를 하를렘이라는 아름다운 도시에서 보냈고, ‘한폭의 그림 같은 숲의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렸다. 그는 북유럽 풍경의 시정을 발견해낸 화가이며 이전의 어떤 미술가도 자연속에 반영되는 자신의 정서와 기분을 로이스달 만큼 솔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사람은 없었다.
야콥 반 로이스탈 <나무로 둘러싸인 늪이 있는 풍경> 1669년, 캔버스에 유채
미술에 반영된 자연은 언제나 미술가 자신의 마음 즉 취향이나 기분을 반영한다. 네덜란드 회화 중에서 가장 전문화된 분야인 정물화가 그처럼 흥미있는 것으로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그러한 점에 있다. 이런 정물화들은 보통 포도주와 과일이 들어가있었고 대개 식당에 걸리기 마련이어서 꾸준히 구매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식탁의 즐거움을 상기시켜주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화가들은 정물을 자유롭게 선택해서 배치할 수 있었고 이런 정물화는 미술가들이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좋은 실험장이 되었다.
웰렘 칼프(Willem Kalf: 1619~93)는 빛이 색유리에서 어떻게 반사되고 흩어지는지를 연구했다. 그는 또 색채와 질감의 대조와 조화를 연구하고 화려한 페르시아 양탄자와 번쩍이는 도자기, 다채로운 색깔의 과일, 윤이 나는 금속 장식물들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전문 분야를 파들어가는 이러한 화가들은 스스로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림의 주제란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기 시작했다.
웰렘 칼프 <성 세바스티아누스 사수들 조합의 뿔로만든 술잔과 바다가재 및 유리잔이 있는 정물> 1653년경
베르메르 반 델프트(Jan Vermeer van Delft)는 매우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일을 하는 화가 였던 것 같다. 그는 평생 동안 수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으며, 작품 중에 의미심장하고 거창한 주제를 다룬것이 거이 없다. 대부분의 작품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가옥의 실내에 서 있는 순박한 인물을 보여준다. 베르메르와 함께 유머러스한 요소는 풍경화 속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의 그림은 사실 인물이 들어있는 정물화이다.
그는 질감, 색채 및 형태들을 치밀하고 완벽하게 묘사하였다. 그 밝고 정확한 화면 속에는 고심하거나 힘들어한 흔적이 전혀 없다. 형태를 흐릿하게 만들지 않고도 윤곽선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입체감과 견고함의 인상을 주었다. 그는 이러한 부드러움과 정확성울 불가사의하고 독특한 방법으로 결합시켰다.
베르메르의 작품은 단순한 정경의 조용한 아름다움을 참신한 눈으로 보게 만들었으며 천의 색깔을 고조시키는 창문을 통해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보았을 때 그가 느꼈을 감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베르메르 반 델프트 <부엌의 하녀> 1660년, 캔버스에 유채
권력과 영광의 예술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이탈리아
16세기 후반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예수회 교단의 교회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의 시작이었다. 그는 보다 많은 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 소위 고전적인 건축의 규칙이라는 것을 무시해버렸다. 이후 예술은 계속해서 인상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더 복잡한 장식과 아이디어를 고안해 냈다. 17세기 중엽에는 바로크 양식이 완전히 발전하게 된다.
프란체스코 보르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가 조수와 건립한 산타 아그네스 성당은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교회이다. 델라 포르타처럼 중앙 입구를 고대신전의 정면 형태로 만들고 양쪽으로 벽 기둥의 수를 배로 늘렸다. 그는 거대한 지붕을 만들고 양쪽에 두 개의 탑과 정면을 세웠다. 두 개의 탑 아래층은 사각형이고 윗층은 원형인데 두 개의 층은 이상하게 파괴된 엔타블레이처로 연결되어있다.
바로크 양식의 소용돌이 장식과 곡선은 건물의 전반적인 설계와 세부까지 지배하고 있다. 이것은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극장의 무대와 같이 과장 되어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교회의 내부 또한 더 호화스러운 장관을 연출했는데, 신교가 교회의 외면적인 치장에 반대하는 설교를 하면 할수록 로마 교회는 더욱 열렬하게 미술가들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프란체스코 보르미니와 카를로 라이날디 <산타 아그네스 성당> 1653년
이러한 무대 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은 주로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베르니니는 최고의 초상화가였다. 한 젊은 여자의 흉상은 참신하고도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베르니니의 최고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이 가장 여인의 가장 특징적인 순간의 표정을 포착하였다. 얼굴 표정을 묘사하는데 그를 능가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베르니니는 이런 얼굴 표정의 묘사를 활용하여 그의 종교적인 체험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콘스탄차 부오나렐리 상> 1635년경
로마의 작은 교회의 부속 예배실을 장식하기 위해 만든 제단은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헌된 것이다. 성 테레사는 16세기 수녀로 그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글로 쓴 유명한 책을 남겼다. 그녀는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된 화살로 자기의 심장을 꿰뚫자 아픔과 함께 이루 말로할 수 없는 희열로 충만됨을 느꼈다고 하였는데, 베르니니는 이 광경을 표현하였다. 조각상에서 그녀는 구름을 타고 황금빛 햇살의 빛줄기를 향해서 하늘로 올라간다.
이 인물의 배치된 방법은 대단히 교묘해서 받침이 없이 떠 보이는 것처럼 보이며 위쪽의 보이지 않는 창으로부터 광선을 받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열렬한 환희와 신비스러운 황홀경의 느낌을 표현하였고 감정의 극점으로 데리고 갔다. 그의 작품에선 지금껏 한번도 시도된 적 없는 얼굴표정의 격렬함이 표현되었다. 옷 주름 방식 또한 새로웠는데 흘러내리게 하지 않고 흥분과 움직임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몸부림 치듯 펄펄 날리게 표현했다. 베르니니의 이런 강렬한 효과들은 얼마 안가서 유럽 전역에 퍼져 모방되었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성 테레사의 환희> 1645~52년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와 같은 조각 작품은 그것이 놓여진 장소까지 포함해서 고려해야만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크 교회의 회화 장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베르니니를 추종했던 화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Giovanni Battista Gaulli: 1639~1709)의 천장화에서 그는 교회의 궁륭형 천장이 열려있으며 보는 사람에게 천국의 영광을 보고 있다는 환상을 주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이전의 코레조 보다 훨씬 무대 효과에 가깝다.
이 그림의 주제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하는 것으로 예수의 이름은 교회 중앙에 금빛 찬란한 글자로 새겨져 있다. 그 주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천사, 천사, 성인들이 황홀경 속에서 빛을 바라보고 있는데 악마와 타락한 천사들은 천국에서 내쫓기고 있다. 이 혼잡한 장면은 천장의 틀을 깨고 부수고 튀어 나올 듯이 보인다. 그는 보는 사람을 혼란시키고 압도해서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환상인지를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림은 이러한 장소를 떠나면 의미를 상실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효과를 달성하는데 모든 예술가들이 협력했던 바로크 양식이 완벽하게 발전된 뒤에는 이탈리아와 유럽의 가톨릭 세계에서 회화와 조각이 각각 독립적인 예술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예수의 성스러운 이름을 찬미함> 1670~83년
18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대부분 뛰어난 실내 장식가들이었으며 치장 회반죽 세공과 대형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기술에 있어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이었다. 그의 <클레오파트라의 연회>는 화려한 색채와 호화스러운 의상의 묘사를 과시할 모든 기회를 준 주제였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에게 향연을 베푸는 장면인데 그녀는 그의 값비싼 산해진미에 감명 받지 않았다. 그녀는 안토니우스에게 어떤 음식보다도 더 값비싼 음식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고는 귀걸이의 진주를 빼내어 식초에 녹여 마셨다. 이 이야기를 티에폴로는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진주를 보여주고 흑인 하인이 유리잔을 내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클레오파트라의 연회> 1750년경
이탈리아 미술은 18세기 초 특수한 한 분야에서 새로운 이념을 창조해 냈는데 그것은 풍경을 묘사한 유화와 동판화였다. 과거 이탈리아의 위대한 영광을 감탄하기 위해서 유럽전역에서 모여든 여행객들 돌아갈 때 갖고 갈 기념품을 원했다. 특히 경치가 아름다운 베네치아에서 이러한 수요를 만족하는 유파가 생겨났다.
프란체스코 구아르디(Francesco Guardi: 1712~93)의 풍경은 티에폴로의 프레스코처럼 특유의 화려함과 빛의 색채의 감각을 잃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움직임과 대담한 효과를 좋아하는 바로크 정신이 드러남을 볼 수 있다. 그는 한 장면의 일방적인 인상만 제공해주면 나머지 사소한 세부는 보는 사람의 상상을 통해 메꾸고 보충하려는 사실을 터득하고 있다. 작품속의 곤돌라 사골들을 자세히 보면 몇 점의 색채들로 단순하게 이루어져 있다.
프란체스코 구아르디 <베네치아의 산 조르조 마조레 정경> 1775~80년
권력과 영광의 예술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17세기 유럽의 왕과 영주들은 그들의 권력을 과시해서 민중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고심했다. 그들은 또한 자신이 신권에 의해 받들어진 평범한 인간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다. 이것은 특히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의 베르사이유 궁전은 절대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사진으로는 그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바로크 양식인데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건축가들은 이 건물의 거대한 덩어리를 좌우 날개 부분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각 익부에는 고상하고 장엄한 외관을 부여하는데 주력했다. 주요층의 중심부를 이오니아식 열주로 악센트를 주고 그 열주들이 떠받치고있는 엔타블레이처 위에는 일렬로 조각상들을 놓았다.
루이 르 보와 쥘아르두앵 망사르 <베르사유 궁> 1655~82년
바로크 양식의 로마교회와 프랑스의 성들은 이 시대의 상상력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1700년을 전후로 한 시대가 건축에 있어서는 가장 위대한 시대였는데 그것은 비단 건축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예술은 환상적이고 인위적인 세계의 효과를 높이는데 기여해야만 했다. 소도시 전체가 마치 무대 장치처럼 이용되었으며 미술가들은 마음에 맞게 자유자재로 설계하였다. 이 엄청난 창작활동의 결과 가톨릭이 지배하는 유럽의 많은 소도시들의 경관은 완전히 변형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dt: 1668~1745)가 사부아 가의 외젠 공을 위해 세운성 은 언덕 위에 세워졌는데 분수대와 깎아 다듬은 생울타리가 있는 테라스 정원 위에 가볍게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성을 일곱개로 구분했으며 정원 속의 누각을 연상시키도록 만들었다. 건물 전체는 복잡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그 윤곽은 아주 분명하고 명료하다.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 <빈의 벨베데레 궁> 1720~24년 사이
교회의 건물도 이와 유사한 인상적인 효과를 이용했다. 오스트리아의 멜크 수도원은 다뉴브 강 옆 언덕에 세워졌다. 이 수도원은 야콥 프란타우어라는 지방의 건축가가 지은것이며 장식은 이탈리아 장인들이 맡았다. 그들은 단조롭지 않으면서도 당당한 외관을 표현하였고, 장식에 차등을 두어서 눈에 띄는 부분은 더욱 화려하게 장식하여 효과적으로 부각되도록 애썼다.
야콥 프란타우어 <다뉴크 강변의 멜크 수도원> 1702년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알프스 북쪽에서도 미술의 각 분야가 이러한 장식의 북새통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으며 각 분야의 독자적인 중요성을 많이 상실했다.
앙투완 바토(Antoine Watteau: 1684~1721) 역시 왕과 귀족들 성의 실내 장식을 디자인 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자질구레한 일에서 동떨어진 자기 자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상의 공원에서 즐거운 야유회를 즐기는 꿈과 같은 생활로 거기에는 모두다 아름다운 삶이 있는 세상이었다.
바토의 예술은 너무나 존귀하고 인위적일 거라는 인상을 받을 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로코코(Rococo)라고 알려져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유행의 대변자가 아니었으며 유행을 만들어 내는데 일조를 한 위대한 예술가였다.
<공원의 연회>는 공원에서 소풍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장면에서 얀 스텐의 떠들썩한 쾌활함이 없다. 오히려 달콤하고 우수에 젖은 그런 고요함이 지배적이다. 이들 남녀는 조용히 않아서 꿈을 꾸며 꽃을 만지작거리거나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빛이 그들을 비추고 있어서 잡목 숲의 덤불은 지상의 낙원과 같다.
바토는 섬세한 필법과 세련된 색조로 조화롭게 표현하였다. 또한 바토는 그가 찬양했던 루벤스처럼 슬쩍 한번 그은 붓 자국 만으로 살아 숨쉬는 듯한 육체의 인상을 표현하였다. 그의 그림은 아름다운 환상 속에 어딘지 슬픈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예술을 단순한 기교와 예쁘장한 아름다움의 영역을 초월하게 만든다. 바토는 병자였으며 폐병으로 37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마도 그를 찬미하고 모방했던 많은 사람들이 도저히 흉내낼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앙투완 바토 <공원의 연회>, 1719년
이성의 시대
18세기: 영국과 프랑스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해있었다. 신교 국가들은 이 유행에 무관심할 수는 없었으나 그것을 실제로 채용하지는 않았다.
영국의 크린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1632~1723)이 지은 세인트 폴 대성당의 경우 바로크 건축가들의 건물배치 방법과 장식적인 효과에 큰 영향을 받았음에 분명하다. 렌의 성당은 로마 바로크 양식의 보로미니의 교회당 보다 규모가 훨씬 크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중앙의 둥근 지붕과 양쪽의 탑들과 고대 신전을 연상시키는 정면 현관으로 구성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전반적인 인상은 대단히 다르다. 세인트 폴 대성당은 곡선적인 곳이 없어서 운동감을 암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강인함과 안정감을 준다. 건물에 당당함과 고귀함을 주기 위하여 사용된 쌍으로 된 원주들은 오히려 베르사유 궁전의 정면을 연상시킨다. 그의 모든 형태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최고 모델들을 엄격히 따르고 있으며, 은근하고 침착한 인상을 준다.
크린스토퍼 렌 경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 1675~1710년
교외의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들도 보통 바로크 양식의 지나친 호화스러움을 배격했다. 그들은 고전 건축의 엄격한 규칙을 어기지 않았다. 당당한 현관은 코린트식 기둥 양식을 지닌 신전의 정면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건물의 벽은 단순하고 평범하여 곡선이나 나선형이 없고 지붕위를 장식하는 조각상도 없으며 글로테스크한 장식도 없다.
벌링턴 경과 윌리엄 켄트 <런던 치직 저택> 1725년경
이러한 이유는 벌링턴 경과 알렉산더 포프 시대의 영국에서는 취향의 척도가 또한 이성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전반적인 기질은 바로크식 장식에 나타난 공상의 비약에 반대했고 또 감정을 압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예술에도 반대했다. 베르사유 궁의 정원 양식 같이 끝없이 펼쳐지는 잘 다듬어진 생울타리와 작은 길까지 건축가의 설계에 포함되어 실제 건물 이외의 주변 지역까지 확장된 형식적인 느낌을 주는 정원은 불합리하고 인공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영국인들이 생각하는 정원이나 공원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반영해야 하며 화가의 눈을 매혹시키는 그런 아름다운 풍경을 모아 놓아야 한는 것이었다. 자연이 어떤 모습으로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월트셔 주 스타우어헤드의 정원> 1741년부터 조성됨
취향과 이성의 척도에 의거한 영국의 화가나 조각가들의 입장이 반드시 부러운 만한 것은 아니었다. 신교의 승리와 성상이나 사치에 대한 청교도들의 적대 의식이 영국의 미술 전통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회화에서 유일하게 수요가 여전한 영역은 초상화 부문이었는데, 이러한 기능마저도 주로 홀바인이나 반 다이크 같은 외국 화가들이 충족시켰다.
빌링턴 시대의 상류 사회 신사들은 청교도적인 이유를 내세워 그림이나 조각을 반대하지는 않았으나 그들은 외부세계에서 아직 명성을 얻지 못한 본국의 미술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당대의 화가들을 외면한 채, 스스로를 미술품 감식가로 자처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책의 삽화를 그려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던 한 젊은 판화가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는 해외에서 수백 파운드를 들여서 사오는 그림들을 그린 화가들처럼 자심도 훌륭한 화가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영국에서는 그 시대의 새로운 미술을 이해해주는 대중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끌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림의 효용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싶어한다는 것을 깨닫고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예술이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그는 사람들에게 착한 일의 보상과 악한 일의 대가를 가르칠 교훈적인 내용을 그릴것을 착수했다.
그는 방탕과 나태로부터 범죄와 죽음에 이르는 <탕아의 편력>이나 소년이 고양이를 놀리는 일에서부터 어른들의 잔인한 살인에까지 이르는 <잔혹의 네 단계>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가 이러한 교화적인 이야기와 경고의 사례들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모두 다 그림이 의미하는 모든 사건들과 교훈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베들럼의 탕아>은 ‘탕아의 편력’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빈털터리가 된 탕아가 베들럼 정신병원에서 광란하는 미치광이로 인생을 끝맺는다는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갖가지 종류의 미치광이들이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장면이다. 호가스는 주제에 집착하고 있으면서도 붓을 사용하고 빛과 색을 배합하는 수법 뿐만 아니라 인물들을 배치하는 데에도 대단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둘러싸고 있는 인물들은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고전 주의 전통을 가진 이탈리아 그림만큼 신중하게 구성되어있다.
그의 일련의 연속 그림들이 그에게 명성과 상당한 돈을 안겨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원화보다는 열성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보급된 판화로 만든 복제품 때문이었다. 당시 감식가들은 화가로서의 그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평생을 통해서 유행적인 취향에 반대하는 끈질긴 운동을 전개했다.
윌리엄 호가스 <베들럼의 탕아> ‘탕아의 편력’ 중 한 장면, 1735년
그로부터 한 세대가 지나서야 18세기 영국의 상류사회를 만족시킬 수 있는 그림을 그린 영국의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 경(Sir Joshua Reynolds: 1732~92)이 탄생했다. 그는 호가스와 달리 이탈리아 여행을 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거장들이 필적할 수 없는 진정한 미술의 모범이라는 점에서 그 당시의 감식가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그는 미술가들의 유일한 희망은 과거 거장들의 장점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세심하게 연구하고 모방하는 것이라는 카라치의 교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레이놀즈는 지식인이었고 권력있고 돈 많은 사람들과 동등하게 환영받았다. 그는 역사화의 우월성을 진지하게 믿었으며 또 영국에서 역사화를 부활시키길 희망했으나 상류사회가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는 종류의 미술은 초상화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레이놀즈는 반 다이크 이후의 초상화들 누구 못지않게 모델을 돋보이게 미화할 수 있었으나 그는 모델의 성격과 사회적인 지위를 드러내기 위해서 그의 초상화에 무엇인가 특별히 흥미가 있 는것을 덧붙이기를 좋아했다.
어린이의 초상을 그릴 때도 그는 배경을 신중히 선택함으로써 단순한 초상 이상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는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에서 소녀가 강아지에게 기울이고 있는 애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는 이 귀여운 아이의 성격을 표현하고 그 성격의 우아함과 매력을 보는 사람에게 생생하게 전달해 주려고 하였다.
조슈아 레이놀즈 경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 1775년
토머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1727~88)는 <하버필드 양의 초상>에서 작은 숙녀가 망토의 끈을 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녀의 행동에는 감동적이거나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단지 산책을 가기 위해 막 옷을 입는 중인 것 같다. 게인즈버러는 레이놀드처럼 단순한 행동을 매우 온화하고 예쁘게 민들었다. 그렇지만 그는 ‘창안’에 훨신 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지성적인' 체 할 의향이 전혀 없었으며 단지 그의 뛰어난 붓놀림과 날카로운 관찰력을 과시할 수 있는 솔직하고 틀에 박히지 않은 초상화를 그리길 원했다.
토머스 게인즈버러 <하버필드 양의 초상> 1780년경
18세기에 영국의 취향과 영국인의 취향은 이성의 법칙을 갈망했던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찬미하는 모델이었다. 왜냐하면 영국에서는 미술이 신처럼 군림한 통치자들의 권력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이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가스에게 만족했던 대중이나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에게 초상화를 그려받기 위해 포즈를 취했던 사람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이었다. 이제 귀족품의 몽상적인 세계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화가들은 당대의 보통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이야기로 엮어낼 수 있는 감동적이거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ean-Baptiste Simeon Chardin: 1699~1779)는 <감사 기도>에서 한 여인이 식탁위에 저녁을 차리면서 두 아이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라고 말하는 소박한 장면을 보여준다. 샤르댕은 이러한 서민생활의 평온한 광경을 좋아했다. 눈에 띄는 효과나 날카로운 비유를 추구하지 않고 가정적인 정경의 시정을 느껴 화폭에 담은 면에서 그는 베르메르와 유사하다. 그의 색채는 고요하고 은근한데, 그 속에는 신중하게 구사된 색조의 미묘한 농담의 변화와 꾸밈없어 보이는 화면 구성의 솜씨를 발견하게 된다.
장 밥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감사 기도> 1740년
영국에서처럼 프랑스에서도 권력의 겉치레 보다는 서민들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초상 미술에도 도움을 주었다. 조각가 장 앙투안 우동(Jean-Antoine Houdon: 1741~1828)의 <볼테르 상>에서는 볼테르의 날카로운 기지와 통찰력 있는 지성, 깊은 동정심을 느낄 수 있다.
장 앙투안 우동 <볼테르 상> 178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