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여유를 갖고자 하는 자리
하남공단의 끝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장성군의 경계다.
경계점에서 마감하고 무뚝뚝하나 자상한 버스 기사의 안내 덕에
찜질방에 일찍 들 수 있었다.
실외에 넉넉한 휴식공간(하늘공원)까지 갖춘 널다랗고 깔끔하고
편리하게 꾸민 찜질방이 운 좋게도 여름 할인 마지막 날이라나.
전무했으며 아마 후무할 금액(잘 된 시설에 비해) 4천원이란다.
이처럼 하루의 일정을 어렵잖을 뿐더러 기분좋게 마감할 수 있은
것은 전적으로 평동공단 장년과 박복림, 그리고 그 과묵한 기사
덕이었지만 아침에는 헛다리품을 또 팔아야 했다.
산에서 늘 체험하는 것처럼 길 또한 반대 방향이 되면 헛갈리기
일쑤인데 초행에 아직 새벽이라 더욱 분간되지 않아서 그랬다.
한 번에 500m도 못가는 주제에 2km 이상을 되돌아 걸어 어제의
그 경계점에 도달했을 때는 기분이 푹 가라앉아버린 듯 했다.
그러나 포장은 되어 있지만 전형적인 옛길인 과수원과 전답 새로
난 길 따라 얼마 가지 않아서 늙은 길손의 기분은 다시 밝아졌다.
장성군 남면 행정리 44-7, 행인원(行人院)이 있었다는 승가마을
고광순, 정영순(문패)의 집 덕이다.
고광순. 정영순의 집
집(건물)은 허름하나 마치 조각품처럼 다듬어 놓은 정원이다.
아무나 볼 수 있을 만큼 길가 낮은 담장 위에 선 간판의 설명은
"마음에 여유를 갖고자 하는 자리"
주인의 성품과 바람이 함축되어 있으리라.
정녕 이 집이 내 마음도 여유를 되찾게 했나 보다.
옛날에도 행인들이 쉬어가던 지역이 아니던가.
나그네가 휴식을 취할 뿐 아니라 마음에 여유까지 담고 떠난다면
걸음걸음이 더욱 경쾌하고 상쾌하지 않겠는가.
인간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한 가족의 보금자리일 뿐 아니라 길손으로 하여금 마음에 여유를
갖게 하는 집이라면 외양이 다소 옹색하고 허름하다 해도 철옹성
담장 속의 호사스런 고대광실이 이에 미칠 수 있겠는가.
나 또한 이미 여러 해 전에 집 담장을 없는 것 처럼 낮추고 나름
대로 앞마당을 가꿔 놓았다.
오가는 이들이 관심있게 들여다 보고 말을 걸어오기도 한다.
더러는 인형의 집 같다 하고 앙증스럽다며 부러워하기도 한다.
처음 한 동안은 바깥사람들을 의식하게 되어 불편한 듯 했으나
성벽처럼 높이 쌓아올려 외부와 차단된 것 같은 생활보다 한결
인정이 오가는 듯한 느낌이어서 좋다.
집 주인 고광순을 만나보고 싶었다.
승가정(升加亭) 정자에서 잠시 쉬는 사이에 궁리를 해보았으나
너무 이른 아침이라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마을 누군가를 만나면 간접으로 라도 그 분의 인품에 접해볼 수
있겠는데 거동하는 이 아무도 없으니 마음뿐이었다.
역시 숫기 없는 늙은 이는 그 집 주변만 서성이다가 돌아섰다.
언제나 꿀맛인 飯場의 아침식사
아무튼 미니 조각공원 같은 그 집이 나의 삼남대로 옛길 걸음을
비가 오락가락 하는 중에도, 비록 주저앉기는 자주 했을 지라도
못재 한하고 가볍게 했다.
아래의 호남고속국도 위로 가로놓인 못재교 길은 삼남대로에서
처음 밟아보는 목포발 1번 국도다.
못재육교 / 다리 아래로는 호남고속국도가 지나간다. 국도상의
차량 통행용 다리인데도 육교라 한 것은 아마 물을 건느지 않기
때문인 듯.
그런데 잘 꾸민 시설(찜질방)에 비해 부실한 식당 냉면을 먹다
만(간밤에) 탓인지 못재를 넘어섰을 때는 허기가 심했다.
마침 내리막 꼬부랑 길 우측의 한 토건회사 공사장이 띄었다.
야외 공사장에는 으레 한바(飯場:日語로 공사장에서 소통되는
단어)라고 불리는 임시 구내식당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옆으로 통과하는 호남고속국도와 일반국도의 개보수 전담
토건회사 진성(陳誠)의 식당 여인은 밥값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원거리 산을 탈 때 가다 오다 부러 들어가 종종 먹은 적이 있다.
시장이 반찬이라 하듯 공복때였으니까 그랬겠지만 언제나 꿀맛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이 한바의 밥힘으로 나는 이후에 억수같은 비에도 장성사거리
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진성토건과 구내식당(중앙의 파란 지붕)
대규모 공사장의 한바는 작은 금융창구 구실도 한다.
어음할인하듯 노동전표(일하고 받았다가 정한 날에 경리부에서
현금과 교환하는)를 할인해 주고 고리의 금전대부도 한다.
현금 유통이 활발하여 노동자뿐 아니라 직원들과의 유착관계로
말썽나기도 한다.
벌어지는 사건이야 어떠하든, 열악한 위생적 분위기와는 달리
한바는 언제나 식욕을 돋구어 준다.
억지쓰듯 3천원(아예 받지 않으려 하는데 잔돈은 그것 뿐이었
으니까)을 놓고 나와서 그래도 좀 편했다.
장성읍 버스터미널에 들러 버스의 운행시간을 대강 확인하고
군청 앞에서 찜질방도 점찍어 두었다.
독재와 3S정책
성산리, 즐비한 비석들의 장성향교 앞에서 잠시 쉬며 심상찮은
날씨에 대비하려 준비중이었다.
그러나 돌연 쏟아지는 왕방울 소나기에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공사중인 고창~장성 고공 고속도 밑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소 진정되는 듯 해서 야은삼거리 ~ 지하통로를 통해 장성읍
백계리(白鷄) 정자로 갔다.
홀로인 초로의 남자에게 뭘 물어보려고 했으나 TV 화면에 팔린
그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베이징올림픽의 이미 지난 한일야구경기인 듯 한데 그게 그 늙은
이의 혼을 이렇게도 사로잡고 있단 말인가.
쏟아붓듯 하는 비가 시냇물처럼 흘러가는 도로를 무료히 걷는데
스포츠에 관련된 지난 날들이 스쳐갔다.
86 아시언게임, 88 올림픽, 02 월드컵축구대회 등 이 땅에서 열린
경기들을 나는 현장에서는 커녕 TV로도 보지 못했다.
아마, 산의 인력(引力)이 더 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특히 월드컵축구대회가 열리는 동안에는 백두대간을 종주중이었
는데 히치 - 하이크(hitch-hike)가 잘 되면 우리나라 팀이 이겼나
보다 생각되는 정도였다.
내가 애초부터 스포츠에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1952년부터 20년간 국제올림픽(IOC) 위원장이었던 브런디지 옹
(Avery Brundage1887-1975)은 '프로'는 스포츠가 아니고 단지
비지네스일 뿐이라며 스포츠의 '아마추어리즘'(amateurism)을
지켜내기 위해 프로를 철저히 경계(警戒)했다.
나는 그의 아마추어리즘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래서, 아마와 프로의 경계(境界)가 사라져 버린 이후 관심이
시든 것 뿐이다.
프로가 비지네스인 것처럼 프로 선수는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은
유감스러운 표현이지만 노예에 불과하다.
예전의 노예와 다른 점이라면 그것은 상호관계적 계약에 노동의
대가를 충분히 받으며 때로는 거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비지네스이기 때문에 승부의 조작이 횡행되고 방출, 이적이라는
이름으로 선수의 매매가 다반사로 이뤄진다.
돈을 벌기 위해서 팔고 사고, 몸값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뛰고) 특별한 묘기를 보여줘야 하는 것이 프로의 세계다.
구경꾼은 맥없는 아마추어 경기보다 이런 묘기에 도취되어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한다.
열광하는 제삼자(관객)의 절박함을 내 어찌 모르랴.
다만 가소성(可塑性) 또는 부지불식간의 중독현상을 염려해서 일
뿐인데 하물며 독재자가 프로 스포츠의 이런 기막힌 효과를 간과
할 리 있는가.
1981년의 일이다.
대학가를 비롯한 젊은 저항세력의 관심을 돌려보려고 '국풍(國風)
81'이라는 해괴한 행사를 만들고 총력전을 폈다.
당시, 각 대학의 책임자들은 당국의 독려에 많이 시달려야 했다.
그랬음에도 실패로 막을 내린 후 소위 3S정책(Sports, Screen,
Sex)을 들고 나왔으니까.
태생적 원죄가 워낙 큰 독재정권의 지탱을 위해 반대세력의 힘을
프로스포츠, 칼라TV, 섹스산업에로 유인, 분산, 약화시키려 한 것.
우민화(愚民化) 정책이라고 비판받으면서도 경기력 향상을 표방
하고 야구, 축구, 배구, 기타 이런 저런 프로들이 속속 등장했다.
불가사의(不可思議)다
장성읍 용강리(龍岡) 일대가 장성호 땜의 수몰지역이 돼버렸다.
백계에서 용강리 ~ 북이면(北二) 수성리(水城)를 거쳐 사거리로
이어지는 옛길도, 청암역(靑巖驛:단암역)도 다 수장되어 버렸다.
그래서 898번 지방도 따라 북일면(北一)에 들어선 후 816번으로
옮겨 북이면소재지에 도착했다.
빗물을 가르며 질주하는 호남고속국도의 차량들 외에는 사람은
고사하고 자동차 구경마저 어려운 빗길인데다 사방이 분간되지
않아 차도(車道) 외에는 모험할 엄두도 낼 수 없었으니까.
샌들(sandal)이라 신을 벗는 부담은 없겠으나 아래 위 옷은 물론
몸속까지 흠씬 젖은 상태라 식당에 들어가기도 거북했다.
지방의 식당들 거의가 의자 식탁이 없기 때문이다.
친정이 전북 순창군 복흥면이라는 복흥식당 여주인이 늙은 이의
이런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물이 좔좔 흐르는 상태대로 앉아 식사하며(점심겸 저녁) 수중전
하루를 돌이켜 보다가 퍼뜩 생각이 났다.
불가사의한 일이다.
아침나절에도 가다쉬기를 뻔질나게 반복했는데 오후 내내 걸은
우중 행군(?)에서는 그게 없었지 않은가.
이런 일이 어찌 가능했단 말인가.
말짱하던 몸도 궂은 날에는 이상 징후가 있기 일쑤라잖은가.
이 억수에 주저앉을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꾸 앉아야 했다면 이거야 말로 끔찍한 일이 아닌가.
불가사의할 뿐 아니라 참으로 신비스런 몸이다.
달리 설명할 길 없어 '신비'라는 단어로 정리하며 이 신비가
계속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점찍어 두었던 장성읍의 찜질방에서 가진 염원이다.
그러나 꿈을 꾸고 나니 다시 각박한 현실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