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여름, 중국을 넘어
<북경에서 허락을 받고 찍은 아버지와 아들>
상해
2005년 8월 8일 10시 김해국제공항. 서쪽 하늘이 잔뜩 어둡다. 곧 폭우라도 쏟아질 기세다. 우리 진주고등학교 중국문화체험연수단 23 명은 먼저 각자의 짐을 화물로 부친다. 그리고 출국신고서를 작성한 다음, 여권과 비행기표를 나눠 받아 검색대를 통과하여 출국장에서 상해행 MU5044 비행기를 기다린다. 대기실에 설치된 TV에서는 아나운서가 우리나라 서부경남에 게릴라성 집중호우가 쏟아져 많은 피해가 있음을 긴급한 목소리로 전한다. 우리가 떠나온 진주는 아직 무사한 지 다른 지역만 화면에 비친다.
12시 35분경, 이윽고 비행기 이륙. 구름낀 하늘을 향해 비행기는 힘찬 비상을 한다. 불안한 기층을 통과할 때 흔들리던 기체는 곧 안정을 되찾아 구름 위를 난다. 얼마 뒤 기내음식이 나온다. 음료수와 밥과 빵이다. 금강산도 식후경! 일단 배를 채운다.
13시 25분경, 상해 푸동국제공항 도착. 한국 시간보다 1시간 더 빠르다. 아까 보낸 1시간이 다시 찾아왔으니 1시간을 보너스로 얻은 기분이다. 중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여 각자 화물을 챙긴다. 인원을 확인한 다음 우리를 기다리던 연변 조선족 출신인 김철수씨의 안내를 받는다. 버스를 타고 상해 시내로 향한다. 한참을 달려도 끝없이 펼쳐진 상해의 모습, 버스는 이곳 공중도로(우리나라의 ‘고가도로’를 이렇게 부른다.)를 속시원히 달리다 시내밀집지역에선 섰다가다를 반복한다. 도시의 빌딩들은 높고 빽빽하다. 낡은 건물도 눈에 띄지만 엄청나게 이어진 건물 건물들.
<상해의 거리>
차는 다시 상해에 있는 중국 옛날식 건물이 즐비한 지역으로 들어선다. 좁은 거리에 자전거가 달리고, 남자들은 더위에 웃옷을 벗은 사람들이 많다. 이곳은 식민지시대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청사가 있었던 곳, 다시 예전처럼 복원된 임시정부청사 건물을 둘러본다. 김구 선생의 집무실과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의열단 투쟁으로 먼 이역 땅에서 한 줌의 재로 산화한 그 시절의 그 사람들의 사진을 본다. 사진 속에 담겨 있는 그들의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저물 무렵, 홍구 공원. 공원 이곳저곳에선 중국 사람들이 모여 카드놀이를 하거나 기공체조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또 공원호수에는 낚시대를 담그고 세월을 낚는 강태공도 보인다. 공원 안쪽 윤봉길 의사 기념탑과 기념정자인 매정(梅亭)을 방문한다. 실제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진 장소는 중국현대문학과 정신사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루쉰’을 추모하는 기념비와 그의 묘가 있다. 개인적으로 ‘루쉰’의 산문집과 소설 등을 인상 깊게 읽은 독자로서 그곳 감회가 또한 남다름은 숨길 수 없지만 몇 장의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루쉰의 묘>
저녁, 중국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식사시간, 중국요리가 나온다. 온통 기름범벅의 음식이다. 기본으로 제공되는 맥주와 차, 그리고 불면 날아가 버리는 밥, 그래도 어쩌랴. 6박 7일의 장거리 이동여행을 버티려면 억지라도 먹어둘 수밖에 없다. 함께 동행한 진주롯데관광여행사 강병묵 이사님이 음식에 많은 신경을 쓴다. 이왕 중국에 왔으니 중국요리 실컷 맛이나 보자. 모든 요리를 조금씩 맛보지만 맵싸한 고추장에 시원한 물김치가 그리운 건 나만이 아니리라. 연수단 학생들은 편식이 심하다. 입맛에 조금이라도 맞으면 그것만 집중공격을 한다. 다른 요리는 고스란히 남기고 한 가지 요리 요금만 자꾸 추가된다.
포만감에 취할 사이도 없이 상해의 발전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동방명주(東方明珠) 전망대에 오른다. 상해의 가장 번화한 금융가에 위치하고 있는 이 탑은 방송수신탑으로 총 높이가 486m로 아시에서 첫 번째,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다고 한다. 높고 낮음이 무슨 소용이랴.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겉도 보아야 하겠지만 오히려 중국의 속이 아니던가. 어쨌거나 우리 일행은 고속엘리베이터를 안내하는 중국 아가씨의 “니 하우” 인사말과 상큼한 미소를 받으며 전망대에 오른다. 동방명주 탑에서 바라본 중국 상해, 어쩌면 미래엔 이곳이 세계의 중심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일까. 상해 금융가의 웅장한 건물과 광활하게 펼쳐진 상해 시내의 밤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어서 동방명주 탑 아래에 있는 외탄 밤경치로 장소를 옮긴다. 황포강을 가운데 두고 맞은편 강둑은 동방명주 탑과 금융가 건물들이, 이쪽 강둑엔 유럽의 다양한 건축양식들이 즐비하게 있어 마치 유럽의 한 도시에 온 느낌이 들게 한다. 황포강을 오르내리는 밤유람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몇 장 찍고 늦은 밤 서둘러 소주로 향한다. 소주 호텔 도착시각은 막 8월 8일을 넘기는 밤 12시, 방을 배정받자 모두들 서둘러 자기가 묵을 방으로 떠난다.
김해국제공항에서 상해푸동국제공항, 상해시의 이곳저곳을 꿈결인 것처럼 지나 피곤함을 그대로 안고 소주 가까이 있는 호텔에서 일박 - 중국에서의 첫날밤.
소주
8월 9일 아침 7시 30분, 피곤이 묻어있는 눈꼽을 털고 중국요리가 대부분인 호텔 뷔페에서 식사하고 출발이다. 중국의 시간은 요량이 없다. 정확하게 시각을 말할 수 없다. 땅이 넓다보니 15분이 한 시간이 될 수 있고, 한 시간 후 온다던 비행기는 한 두 시간 더 늦어지기 일쑤다.
한 시간인지 두 시간인지 끝없는 들판을 차는 달린다. 들판에 벼가 자라는 중국의 농촌마을은 평화롭다. 양자강 하구 부근이라서 그런지 곳곳에 넓은 수로(水路)가 이어져 있다. 들판의 삼분의 일쯤은 물이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은 그 물에 새우나 민물고기, 민물진주조개를 양식한다고 한다. 차창의 경치를 뒤로 밀어내며 한산사 도착.
이 절은 한산자(寒山子)라는 고승이 머물면서 ‘한산사’라는 이름이 붙은 곳으로 당나라 시인 장계(張繼)의 ‘풍교야박(楓橋夜泊)’이라는 시로 더 유명한 곳이다. 이 시에 얽힌 이야기로는 장계가 장안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갔다가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시험부정등 당나라의 부패로 번번히 과거시험에 낙방을 하고 낙향을 한다. 세 번째 고배를 마시고 고향으로 돌아오던 중 이곳 풍교라는 작은 운하의 다리에서 아래를 바라보았을 때, 작은 배 안에서 한 홀아비가 웃옷을 벗은 채 저녁밥 짓는 모습이 너무나 시름겨울 때 때마침 한산사 저녁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 느낌을 표현했다고 한다. 한산사 경내 여러 빗돌엔 다양한 글씨체의 이 시가 새겨져 있다.
月落烏啼霜滿天 달은 지고 까마귀는 우는데 하늘 가득 서리가 내리네
江楓漁火對愁眠 풍교에는 고깃배 등불을 마주하여 시름 속에 자고
姑蘇城外寒山寺 고소성 밖 한산사에는
夜半鐘聲到客船 한밤중에 종소리가 객선에 이르네.
<한산사 앞 작은 운하>
우리 일행은 간단한 기념 촬영을 한 다음 호구산으로 향한다. 중국의 여름 날씨는 습도가 매우 높다. 몸은 금세 땀범벅이 되기 일쑤다. 소주는 대부분 평지이다. 호구산은 오중제일산(吳中第一山)이라는 안내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서는 가장 높은 산인 모양인데 높이가 36미터를 조금 넘을 뿐이라고 한다. 이 산은 오나라의 왕 합려가 묻혀 있다고 한다. 이 산에 합려의 아들인 부차(夫差)가 만들었다고 하는데 와신(臥薪)하면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절치부심한 효자라고 한다. 이 산이 호구산이라고 불리게 된 유래는 호랑이가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호구산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합려를 묘지로 장례를 지낸 지 3일째 되던 날 백호 한 마리가 나타나 능을 지켰다는 전설에서 호구산이라는 이름이 유래한다고도 한다. 합려의 무덤을 만들 때 관 속에 검 3000개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혼란했던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이 검들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도굴을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도굴은 중단되었다고 한다. 도굴하면서 파헤쳐진 곳에 물이 들어차서 연못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 연못을 검지(劍池)라고 부른다. 호구산에는 실제 깊게 파인 물이 있다. 이 호구산 정상에는 비스듬히 기운 탑이 하나 서 있는데 호구탑이다. 탑이 기운 이유는 이 합려의 무덤 위에 이 탑을 세웠기에 무덤이 내려앉으면서 기울어진 것이 아닌가한다고 한다. 아무튼 우리는 이 호구산을 가로 넘는다. 평지에 솟은 36미터의 오나라 제일산을 정복한 것이다.
<소주의 거리>
졸정원.
명나라 때 낙향한 벼슬아치가 산수구경을 하며 편안하게 살 수 없을까 궁리하다가 어느 화가가 그린 산수화의 모습 그대로 많은 돈을 들여 꾸민 인공정원이다. 졸정원(拙政園)이라는 이 이름은 졸(拙)한 사람이 정치(政)를 한다는 뜻이다. 즉 자신은 이렇게 정원에서 유유자적하면서 호사(豪奢)를 누리며 사는데 견주어 정치는 졸자들이나 하는 짓거리라는 뜻이 담겨 있다. 아무튼 이 정원의 아름다움은 이루 형용할 수 없다. 정원의 60% 정도는 연못으로 되어 있으며, 연못에는 연꽃이 만발했다. 또 연못 주위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을 상징하는 네 개의 정자가 운치있게 꾸며져 있고 손님을 접대하며 차를 마시는 곳, 연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기 위해 만들어 놓은 정자 등을 둘러본다.
시절좋은 날 술과 함께 벗들이 달빛처럼 이 정원에 스며와 술잔에 서로의 우정을 섞어 나눠마신다면 그 어떤 부귀영화도 부럽지 않으리.
항주.
다시 버스는 넓은 들판을 끝없이 달려 항주로 향한다. 버스 안은 여독 탓인지 모두들 눈감은 채 말이 없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내려 중국과일을 사서 맛본다. 관광객인 줄 알고 좀 비싸게 파는 것 같은 데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소주에서 출발한 지 4시간 정도 걸려 중국 절강성의 성도(省都)인 항주도착. 곧바로 저녁 식사다. 오늘은 좀 여유가 있다. 둥글게 해서 돌리는 테이블에 중국요리가 가득 오른다. 음료수는 학생들이 가져가고 대신 맥주병이 우리에게로 넘어온다. 요리를 다 먹어치우는 것은 역시 역부족이다. 연수 중 우리가 들른 중국의 요릿집은 대개 3천 명 정도의 손님을 한꺼번에 받을 수 있는 음식점이었다. 대륙답게 음식점 크기 또한 대륙적이다. 식사 후 우리는 주점(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고 일찌감치 하루를 정리한다.
8월 10일 서호.
아침, 항주의 도시는 깨끗하다. 인구가 약 2천만(공식적으론 이보다 못하지만 최근 경제수준의 차이로 농촌의 인구의 유입이 급증했기 때문에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한다.) 정도가 되는 도시란다. 우리가 하룻밤 묵은 주점은 신도시에 위치하고 있어서 주위 건물과 길들이 반듯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오늘의 주요 일정은 오전엔 서호를 둘러보고 오후엔 영은사 탐방과 황산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항주를 극찬하는 말도 예부터 많았다는데 일찍이 마르코 폴로가 13세기에 이곳을 보고 나서 '세상에서 가장 곱고 멋있는 도시'라고 경탄했으며 '상유천당(上有天堂), 하유소항(下有蘇抗) 즉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라는 말도 생겨났으며, 어떤 시인은 "아침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비오는 날에는 더 좋다"는 말을 남겼다.
항주에 서호(西湖)가 없다면 항주에 갈 이유가 없을 것이라 할 정도로 서호는 항주를 대표하는 곳이다. 주점에서 약 한 시간을 더 달려 도착한 곳, 이곳이 바다가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로 넓었다. 서호라는 이름은 서쪽의 호수라는 뜻도 있지만, 서시(西施)만큼 아름다운 호수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었을 때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서시(西施)는 침어(浸魚)라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고,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고 한다. 서호는 면적 5.6㎢, 둘레 15㎞의 타원형 호수로 평균 수심은 1.8m이며, 깊은 곳은 2.8m정도 된다. 그다지 큰편은 아니지만 절색의 구릉과 계절을 장식하는 나무, 아침과 저녁으로 비오는 날과 개인 날, 그리고 춘하추동 각각 나름대로의 다른 아름다움이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곳이란다. 서호는 호수면을 가르는 백제(白堤)와 시인 소동파가 이곳에서 벼슬살이 할 때 쌓았다는 소제(蘇堤)라는 두 제방으로 나뉘어져 외호(外湖), 내서호(內西湖), 악호(岳湖), 서리호(西里湖), 소남호(小南湖)로 나뉜다.
<서호와 유람선>
아무렇거나, 우리 일행은 나무로 만든 아주 멋진 유람선에 오른다. 모든 호수를 다 보려면 하루쯤 머물면서 자전거를 타거나 작은 배로 이곳저곳 둘러보는 것도 좋으련만 우리의 일정에 어쩔 수 없이 유람선으로 한 호수만 약 30분 정도 배 위에서 구경한다. 저 멀리 항주의 건물들이 아스라이 보이고, 호수 주변엔 연인들이 데이트하기에 좋은 산책로, 만남의 다리, 까페 등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기슭엔 중국 국민당 당수였던 장개석의 별장 건물도 보인다. 장개석은 그 별장에서 하룻밤도 자지 못했고 다만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에게 쫓겨 대만으로 건너가기 전날 밤 대륙에서의 마지막 연회를 열고 떠났다고 한다. 일행은 습한 여름의 햇빛을 피해가며 연방 사진을 찍는다.
서호를 떠난 우리는 용정차 농원에 들러 선물을 준비하고 다시 점심, 그리고 영은사로 향한다. 중국의 절은 시끄럽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기 때문이다.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는 사람, 사람들 틈에서 자칫하면 일행을 놓친다. 두 명이 보이지 않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다. 우리를 안내하던 김철수씨가 두 사람의 일행을 찾고 우리는 계속 절 구경을 한다. 절은 역시 한국의 절이다. 조용하고 그윽하며 깊은 맛이 나는 한국의 절을 보다가 중국 절을 보니, 마치 시장에 들어선 느낌이라서 그런지 씁쓸하다.
항산.
절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을 다시 만난 우리 일행이 항산으로 출발한 것은 오후 두 세 시쯤이다. 우리를 실은 차는 시원한 4차선 도로를 잘 달리다가도 다시 좁은 중국 마을길로 접어들기를 서너 차례 반복한다. 곳곳에 도로공사가 한창이고 또 기존의 도로도 정비공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항산이 가까울수록 시골냄새가 난다. 차창으로 보는 시골 농촌의 풍경은 대체로 깨끗하다. 상해, 소주, 항주에서 보았던 넓은 벌판은 차츰 산의 협곡으로 바뀐다. 날씨의 변화도 심하다. 비가 쏟아진다.
항산시에서 한참을 달려 도착한 항산. 다시 우리를 안내할 연변조선족 출신 아가씨 김향연씨가 우리를 맞는다. 동행한 박지훈 선생이 그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한다. 향기로운 연변 아가씨 향연씨라고. 중국은 너무 넓은 대륙이다 보니 안내원이 모든 지역을 안내할 수 없다고 한다. 오늘까지 우리를 자상하게 안내하던 김철수씨는 상해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항산 시내의 한 주점에서 짐을 풀고 난 저녁시간, 짧지만 정들었던 사람 김철수씨와 이별의 술잔을 조선족 출신이 운영하는 한 식당에서 양고기와 쇠고기 꼬치구이를 안주하여 기울인다.
중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개 순박하고 진솔하다. 식당에서 일하는 젊은 총각이나 아가씨들, 버스기사, 우리를 안내하던 연변출신 동포들, 그들은 아무 꾸밈없이 우리에게 다가온다. 자본화되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회일수록, 소득수준이 높은 사람들일수록 비인간적이라는 것이 나의 경험이다. 그들은 이웃이나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계산적이거나 이기적이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간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덜 자본주의화된 사회나 가난한 지역의 사람들일수록 인간적이다. 그들은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서로 기대며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이다. 짧은 기간 중국을 여행하면서 사회주의가 남아 있는 중국, 그들에게서 인간의 냄새를 맡은 것은 나뿐이었을까. 인간적인 사람 김철수씨와 김향연씨 그들과 함께 항산의 밤은 깊어갔다.
<빼어난 항산의 바위들>
8월 11일 이른 아침, 항산으로 가는 길. 시골마을을 지나칠 때, 문 밖에서 밥을 먹고 있는 중국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름날 집 문 앞에서 밥을 먹게 된 까닭은 이곳 사람들은 예부터 장사 수완이 뛰어났기에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열 두 세살 정도에 결혼을 하고서는 어린 아내를 남겨 두고 장삿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면 남은 아내는 집 문 밖에서 남편이 오는가하고 내다보면서 밥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 오래된 습관 때문이기도 하고, 집 안의 더위도 피하고, 오가는 차 구경도 할 겸, 집 밖에서 밥을 먹는다고 한다. 산골마을을 지날 때, 한 여인이 홀로 문 밖에서 밥그릇 하나에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모습이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다.
어쨌거나 우리들은 케이블카를 타고 항산으로 오른다. 항산을 오르면 중국의 다른 산들은 보이지도 않는다고 한다. 모택동도 등정을 하고, 강택민 주석도 다녀갔다는 항산, 빼어난 산수 그림책이 눈앞에 펼쳐진다. 구름과 바위와 나무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신령스런 정기를 내뿜는다. 신선의 세상이 따로 없다. 한 며칠 쯤 이곳에 깃든다면 세속의 잡다한 묵은 때는 말끔히 씻겨지리라. 신선이 되어 저 산봉우리 위 구만리 창공에 훨훨 날리라. 아무튼 이런 가당찮은 생각이 들게 하는 항산. 금강산을 가본 적이 없기에 우리의 금강산과 항산을 견줄 수가 없지만, 그림으로 TV로 본 금강산도 이보다 못하지 않으리라고 자부한다. 확실한 건 우리의 지리산만큼 웅장한 맛은 없다는 것이다. 아름다운 중국산수화를 맘껏 맛본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항산을 내려온다. 항산의 일출과 일몰을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겨둔 채. 저녁 10시 항산 비행장에서 우릴 태운 중국민항기는 북경으로 날았다. 밤 열 두 시 북경공항 도착. 북경의 여름밤은 뜨겁다. 전라도말?로 ‘겁나게’ 무덥다. 공항청사 밖으로 나오자마자 들이쉬는 들숨에 훅-하고 우리 몸속을 점령하는 북경의 무더위에 잠시 기가 죽는다. 중국 남방지역도 무덥지만 북경이 더위에서는 한 수 위다. 일행은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을 달려 우리가 묵을 주점(호텔)에 도착한다. 8월 12일 새벽이다.
<항산에서 잠시>
북경.
8월 12일 아침 7시 30분, 전화벨이 울린다. 깨어나라는 신호다. 새벽에 잠자리에 들어 잠시 눈을 붙인 우리학교 일행들이 하나 둘 식당에 모습을 드러낸다. 북경체험 첫날이다. 북경의 더위를 이기려면 잘 먹어야 한다. 억지로 아침을 챙겨 먹는다.
먼저 명나라 13릉 탐방이다. 명 나라 황제 16명 중 3대 영락제부터 마지막 숭정제까지 13명의 묘가 있는 곳이다. 이 중에서 우리가 들른 곳은 영락제의 묘로 가장 크고 화려하다. 지하 궁전이 훌륭한 정릉의 안뜰 좌우에는 출토된 유품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이 있다. 지하궁전은 지하 20미터 깊이에 있고 가로 47미터, 세로 87미터의 내부는 현실과 좌우, 중앙 크게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통로를 따라 나가면 중앙전이 나오는 데 가장 넓은 곳으로 황제와 황후가 사용했던 의자가 있다. 의자에는 봉황 무늬가 새겨져 있고 앞의 단지에는 기름을 넣어 방을 밝혔다고 한다. 이 정릉의 주인인 주익균은 22살부터 28살까지 지하궁전을 만들었으며 건설하는데 나라 백성들이 10년 먹을 수 있는 식량에 해당하는 경비를 소모했다고 한다. 죽어서까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인간의 헛된 욕망을 고스란히 목격한 우리는 다음 일정으로 향한다.
만리장성. 그 얼마나 보고 싶어 가슴 설레던 곳이던가? 우리 일행이 목적으로 삼고 온 것은 이 만리장성을 넘어 더 큰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장성은 우리에게 제 모습을 내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던 북경의 날씨가 원인이 되어 장성은 온통 구름안개로 뒤덮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며 광활하게 이어진 장성을 조망할 것이라던 기대는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쩌랴. 걸어서라도 올라가 장성을 밟고 서야 하지 않는가. 팔달령 고개에 있는 만리장성을 올라 구름 속 장성을 배경으로 아쉬운 대로 몇 장의 사진을 찍는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점심을 먹은 다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전봉고급학교’. ‘고급학교’는 우리나라 고등학교와 같은 곳으로 중국도 방학 중이라서 학생을 만날 수 없을 것이고 학교 시설만 둘러보고 오리라던 우리의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학교 입구에서부터 우릴 마중 나온 중국의 남녀 학생들과 교장선생님, 열렬한 환대로 잠시 머쓱했던 우리를 그들은 2층 회의실로 안내하였다. 거기서 학교의 개략적 현황 설명을 들었고 서로의 관심과 궁금한 것들을 질문하였다. 기회가 되어 한국을 방문한다면 우리 진주고등학교에도 들러주면 좋겠다는 말에 그들도 그럴 기회가 꼭 왔으면 좋겠다고 대답한다. 이어서 중국 학생들은 그들이 마련한 소박한 선물을 우리에게 건넨다. 아무 준비 없이 방문했던 우리들은 잠시 당황했지만 그들의 성의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들의 순수함과 맑은 마음을 받아서 기쁘다. 학교 시설을 둘러본다. 우리의 교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책상과 의자와 칠판이 있는 모습. 다시 작별의 시간,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두 줄로 서서 이별의 악수를 한다.
청화대학(淸華大學)을 방문한다. 청화대학은 중국 최고의 명문종합대학으로서 북경대학과 더불어 중국대학 문화를 주도하고 하고 있다고 한다. 청화대학의 전신은 1911년 건립된 청화학당(淸華學堂)으로 1928년에 국립청화대학으로 개명하였다. 현재 청화대학은 그 산하에 이과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경제관리학대학, 법과대학, 건축학대학, 정보과학기술대학, 기계공학대학의 7개 단과대학을 설치하고 있고, 46개의 연구소와 23개 연구센터, 167개의 각종 실험실(그 중 15개가 국가중점실험실)을 보유하고 있어 전국 국가중점실험실의 10분이 1을 청화대학이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두터운 자원들이 청화대학의 인재양성의 바탕이 되고 있으며, 중국의 과학기술연구와 문화를 주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청화대학은 잘 꾸며진 캠퍼스와 양질의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학교로도 유명하다. 캠퍼스 곳곳에는 설립시의 옛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그 역사와 전통을 짐작케 하고, 내국인들이 ‘청화원(淸華園)’이라 부를 정도로 캠퍼스안의 푸른숲 가꾸기가 잘되어 있어 마치 공원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이다. 우리를 안내하는 사람은 청화대학교 학생이란다. 유창한 영어로 학교 소개를 하는데 알아듣는 사람은 교감선생님과 몇몇 학생들,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충은 알아듣는 눈치다. 방학 중이라 구체적인 실험실이라든가 연구실은 방문을 할 수 없기에 중심 건물과 잘 꾸며진 캠퍼스를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방문 일정을 끝낸다.
8월 13일 북경의 더위를 실감한다. 천안문(天安門) 광장에서부터 북경 더위를 정면대결을 한다. 정면 대결을 피하고서는 건물들로 겹겹이 둘러싸인 자금성을 뚫고 우리나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다. 물 파는 가게만 보이면 달려가 물을 산다. 습도 높은 더위에 맹물을 사 마시는 사람은 한국 사람들뿐이다.
천안문 광장, 이 곳은 1989년 6월 벌어진 정치참극으로 처음 알게 된 곳이다. 북경대학생이 중심이 된 정치적 집회가 그곳에서 열렸고, 중국공산당은 그 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신문사진엔 광장을 질주하는 장갑차와 함께 엄청난 대학생과 시민들이 운집해 있는 모습이었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오늘, 광장을 찌고 있는 더위에 맞서 그 자리에 섰다. 그 때 집회를 진압했던 군인들은 지금까지 격리 수용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물론 그 집회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투옥되거나, 망명의 길에 올라 아직도 정치적 감시를 받고 있다고 한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권력자의 횡포가 있었고, 거기에 맞서 죽음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류역사의 큰 물줄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의 역사라고 생각한다. 광장 한 복판에서 그 때 죽은 사람들을 잠시 추모한다. 천안문 광장에서 북으로 길게 이어진 황금색 지붕이 하늘을 나는 듯 펼쳐져 있다. 자금성이다. 거대한 궁궐 나무 한 그루 없다. 자객들이 나무 그늘에 깃들 것을 염려해서 성 안엔 나무를 없애버렸단다. 궁궐의 여러 문을 지나 한없이 안으로 들어간다. 자금성의 방의 개수는 무려 9999개라고 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나자마자 각 방에 하룻밤씩 묵어간다고 해도 무려 27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다하니 이로 미루어 자금성의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이 궁은 1406년에 건설되기 시작하여 1911년까지 명?청 대 왕의 거주지로 사용되어 왔다. 전체 24명의 왕들이 이 궁에서 옥쇄를 쥐었다고 한다.
<경산공원에서 바라본 자금성>
한 시간을 넘게 더위 속에 걷는다. 온몸은 벌써 땀으로 서너 차례 목욕을 한다.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자금성 끝에 솟아오른 경산공원을 오른다. 황실의 정원으로 인공으로 흙을 퍼 날라 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공원 누각에 오르니 한눈에 자금성이 광활한 모습으로 눈에 잡힌다. 경산공원을 내려와 북경의 옛 거리 모습이 남아 있는 곳 탐방으로 오전 일정을 끝낸다.
차만 타면 거의 모든 학생들은 쓰러지듯 눈을 감는다. 계속되는 강행군에도 그동안 잘 참아온 모습들이 대견하다. 차는 유리창 거리 가까이 주차한다.
유리창(琉璃窓), 이곳에 유리 가마 공장이 있었던 곳으로 예전에는 아주 외지고 쓸쓸한 곳이었는데, 점차 번성하여 고서적, 골동품, 문방사우 등을 파는 거리로 변모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의 인사동 옛 거리 쯤 되는 곳이다. 상점들도 깨끗하며 가게마다 옛 물것들이 가득 들어차 있어, 우리 같은 낯선 이방인에게는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길거리 좌판에서 부채를 산다. 처음엔 중국돈 60원이라더니 고개를 가로 저으니 40원이란다. 그래도 살 뜻이 없다고 하자 얼마면 되겠냐며 전자계산기를 내밀며 금액을 쳐 보란다. 20원을 입력하자 안 된다며 30원으로 하자고 한다. 부채를 산다. 짧은 시간 유리창 거리의 풍경과 이별을 한다.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한 나절 쯤 구경하리라.
이화원. 북경 제일의 정원이자 인공호수다. 거대한 호수 위로 유람선이 떠다니고 호수주변은 긴 회랑이 이어져 비 오는 날은 비를 맞지 않고, 맑은 날은 햇볕을 쬐지 않고 호수를 감상하며 주변을 거닐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이화원은 북경 시의 서북부 교외에 있으며 청(?)대에는 여름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란다. 중국 최대의 황실 정원으로 한 바퀴 돌려면 거의 한나절 걸린다. 면적이 자금성의 4배, 천안문 광장의 6배가 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공원이다. 공명호라는 인공 못은 이곳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이 정원은 1860년 애로호 사건으로 파괴된 후 1888년 서태후는 국정 대신에게 중국 해군을 훈련할 인공 호수를 만들자고 제안함으로써 만들어졌다고 한다. 결국 중국 해군의 예산으로 호수를 완성하자 훈련장 대신 개인의 유락지로 변했다. 이화원 안의 인수전에서 서태후가 정사를 보았는데 이쪽저쪽에 목숨 수(壽)가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은 서태후가 장수하기를 매우 간절히 원했던 흔적이라고 한다.
긴 회랑을 따라 호수주변을 한참 걸어간 다음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우리가 들어온 곳으로 되돌아간다. 다리도 아프고 목도 마르다.
<이화원의 긴 회랑을 뒤로 하고>
다시 저녁 시간, 우리를 안내하던 여행사 직원이 예정에도 없던 북한식당으로 가잔다. 우리가 마다할 리가 있겠는가. 사실 그 분은 우리학교 졸업생으로 학생들에겐 선배가 되는 분이었는데 여행기간 내내 우리를 너무나 잘 챙겨주셨다. 처음으로 가 본 북한 식당 ‘옥류관’, 안내하는 아가씨들이 너무 예쁘다(나만 그런가?). 음식들이 나온다. 북조선 접대원 동무들이 날렵한 한복으로 먹음직한 우리의 음식을 내온다. ‘북한’이라는 호칭에 핀잔을 준다. ‘북한’이 뭐야요. ‘북조선’이지. 쳇 북한이면 어떻고 북조선이면 어떤가. 그냥 한 민족 한 핏줄이면 될 것을. 그녀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자 또 핀잔이다. 동무는 허락도 없이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요. 다시 허락을 맡는다. 대답 대신 웃음이다. 평양냉면이 나오고, 노래방 기계로 그녀들이 노래를 부른다. 남한 노래, 북한 노래 섞어서 몇 곡 신나게 부른다. 우리가 언제 남과 북으로 갈려 있었던가. 아무 스스럼없이 만나서 함께 둘러 앉아 만난 것 먹고 즐겁게 노래 부를 그날이 더욱 간절해진다.
<노래방 기기로 노래부르는 옥류관의 북조선 접대원 동지>
다시 일행은 북경 비행장으로 향한다. 밤 비행기로 상해로 가야한다. 밤 12시가 넘어서 상해공항에 도착.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든다. 다시 내일 새벽 푸동공항에서 김해공항으로 날아야 한다.
그리고 몇 시간의 단잠. 김해공항 활주로에서 사뿐히 중국 여행의 날개를 접는다. 어느덧 여름이 성큼 저만큼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