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영국의 BBC 방송이 예수의 얼굴을 담은 사진 하나를 공개하면서 예수의 본래 얼굴에 가장 가깝게 복원된 것이라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이 사진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자기가 늘 보아왔고 생각해 왔던 예수의 얼굴이 아니라 베드로의 얼굴에 더 가깝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BBC 방송이 복원한 예수의 얼굴은 아랍 사람의 모습이었다. 이 예수의 얼굴과 지금까지 우리가 성화를 통해 보아온 예수의 얼굴이 다른 것은 그 그림들 대부분이 서양 기독교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이다.
서양의 역사 속에서 발전해 온 기독교가 고백해 온 예수 상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지고 호리호리한 유럽의 가장 이상적인 남성 상이었다. 흑인 신학자 제임스 콘은 '백인 예수'를 거부하고 예수의 얼굴을 흑인으로 그려 놓았다. 한국화가 중에 김학수 화백이 그린 예수 상은 '백인 예수'도 '흑인 예수'도 아닌 '황인 예수'의 모습이다. 연세대학교 루스 채플에는 예수의 생애에 관한 24개의 그림이 연대기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아기 예수가 탄생한 곳은 말구유가 아니라 외양간에 있는 여물통이고, 예수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썼으며, 전도여행을 다닐 때면 논두렁을 걷고 마차를 타고 다니시는 모습을 그려놓았다.
이렇게 예수라는 하나의 진리는 한 가지 모양과 색깔로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각 민족의 문화 전통 속에서 담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형상은 곧 한국적인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느님께서는 처음에 하늘과 땅을 나누어 창조하시고 빛과 어둠, 낮과 밤, 바다와 뭍, 남자와 여자를 나누어 창조하신 후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스스로 감탄하셨다. 마치 여러 모양의 색깔과 향기를 담고 있는 가지가지 들꽃이 모여 아름다운 것처럼, 하느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은 같음에 있지 않고 다름에 있다.
그러기에 나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성, 개성, 곧 자기스러움, 이것이 하느님의 형상이 아닐까. 한국인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형상은 미국적인 것과 다른, 유럽적인 것과 다른, 일본적인 것과 다른, 아프리카적인 것과 다른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한국적인 것'이 아닐까. 우리가 '한국 예수'의 얼굴을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잘 그분의 형상을 드러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에는 '백인 예수'의 그림만이 걸려 있고, 교회 건축도 미국식이며, 찬송가도 서양찬송이다. 목사들은 앞다투어 미국식 목회를 답습하기에 바쁘다. 하느님은 우리를 한국 사람으로 창조하셨는데, 신앙방식은 서구식으로 한다.
2. 음악의 신비, 하느님을 만나는 또 다른 길
음악은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예술보다 우리의 영혼을 그분께로 인도하게 하는 힘이 있다. 한국교회의 영적 큰 스승인 시무언(是無言) 이용도 목사(1901∼33)는 그의 일기장에 "나는 그 소리를 타고 주의 품에까지 날아갈 수 있다. 오-음악의 신비여! 나는 그 속에서 나의 하느님을 찾는다."라고 적어 놓았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서양의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는 "내가 이 다음에 천국에 가면 제일 먼저 모짜르트의 안부를 묻고 싶다. 그 다음에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마르틴 루터, 칼뱅의 안부를 묻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기의 신학적 스승보다도 한 음악가의 안부를 먼저 묻고 싶다는 바르트의 말은 그가 얼마나 음악을 통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가 그의 주옥 같은 책『로마서주석』을 쓸 때에는 언제나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현대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새롭게 보고, 교회를 말씀 위에 세우는 데 커다란 신학적 공헌을 남긴 바르트가 모짜르트의 음악을 통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용도 목사가 하느님을 찾았던 음악은 무엇인가. 주님의 품에까지 날아갈 수 있게 했던 그 소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칼 바르트가 그의 신학적 영감을 얻었던 모짜르트의 음악과는 다르다. 이용도 목사의 전집에 담겨 있는 여러 장의 사진 중에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마루에 앉아 가야금을 타고 있는 이용도 목사의 모습이다. 이용도 목사는 또 다른 그의 일기장에서 "나는 가야금 소리를 타고 하느님의 품에 안겼노라."고 말했다. 이용도 목사는 음악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났던 것이다. 다름 아닌 한국의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우리의 선율이요 우리의 가락을 통해서 말이다.
이용도 목사는 가야금을 통해 하느님의 품에 안기는 경험을 했고, 칼 바르트는 모짜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신학적 영감을 얻었다. 이 두 사람의 차이는 있을까? 하나도 없다. 한국 사람 이용도는 한국가락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갔고, 서양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서양가락을 통해서 하느님의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다. 주님은 이 두 음악 중에 어느 것을 버리거나 정죄하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 주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문화와 얼 속에서 함께 숨쉬기를 원하실 뿐이다.
3. 우리가 지금 부르고 있는 찬송가는 어떤 찬송들인가.
한국 찬송가집은 1892년 감리교 선교사였던 존스(George H. Jones)목사와 이화학당 교사였던 로드와일러(Louis G. Rothweiler)양이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펴낸『찬미가』를 시작으로, 각 교단별 찬송가 작업을 거쳐 1949년 감·장·성 세 교단이 하나된 찬송가의 사용을 목적으로『합동찬송가』를 발간하였다. 1967년에〈한국찬송가위원회〉가 구성되어『개편찬송가』가 탄생되었는데, 이 찬송가에는 한국 음악가들이 창작한 찬송가들이 27곡이나 포함되었지만, 각 교단의 다른 이해 때문에 사용이 중단된 이후 1983년 12월에『통일찬송가』의 출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찬송가 작곡가이자 평론가인 이천진 목사가 조사한 바에 따라 오늘날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통일찬송가를 간략하게 분석해 보면, 세계교회연합회 추천곡이 75편, 미국 침례교회에서 찬송 교육을 위해 추천한 곡이 55편, 독일 찬송이 20편, 종교개혁 이전의 라틴 찬송과 희랍 찬송이 14편, 미국의 복음성가는 무려 269편이나 되지만 한국 찬송가는 17편에 불과하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79장「피난처 있으니」는 영국 국가이고, 77장「전능의 하나님」은 제정 러시아 국가 곡에 의역한 것이다. 245장「시온성과 같은 교회」는 독일 국가이다. 이 찬송가를 유럽의 다른 나라에 가서 부르면 큰일난다고 한다. 왜냐하면 나치가 독일 주변 국가를 점령할 때 부른 독일국가이기 때문에 그 노래만 들어도 악몽 같은 세계대전이 생각나서 그런다고 한다.
특히 388장「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미국 소방대원 행진곡이다. 이 노래는 남북전쟁 때에는 북군이 "남군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신 사과나무에 목을 달고"라는 가사로 부른 전투곡이기도 하다. 그래서 찬송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이 찬송을 부르지 못하게 한다.
338장「천부여 의지 없어서」는 영국 오페라 작곡가 월리엄 쉴드(W. Shield)가 작곡한 민요이다. 그밖에 영국 민요로는 545장「하늘 가는 밝은 길이」, 78장, 149장, 173장 등이 있다. 미국 민요는 28장, 405장, 229장, 190장 등이며, 프랑스 민요는 125장, 160장, 520장 등이다. 그리고 캐롤송은 109장, 110장, 111장, 112장, 등 총 12편이다. 그밖에 독일 민요(14, 57, 309장), 흑인 영가(136, 420, 518장), 네덜란드 민요(32, 39, 517장), 스페인 민요(29장), 아일란드 민요(533장), 웨일즈 민요(515장)등이 있다.
이들 찬송들은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는 노래였지만 콘트라팍투어(Kontrafaktur) 방식으로 찬송가가 된 노래들이다. 콘투라팍투어라는 말은 흔히 우리말로 '노가바'라는 말이다. 기존에 있는 노래에다 가사만 바꾸어 부르는 것이다.
기독교와 관계없는 소위 서양 클래식 음악이 찬송가가 된 경우도 많다, 더 놀라운 것은 본래 연애 노래였는데 찬송가가 된 예도 있다.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는 경건하고 숙연한 분위기의 수난절 찬송이다. 어떤 목사는 수난 주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찬송을 부르며 주님의 고난을 가슴에 새겨 본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어 보았다. 하지만 이 찬송은 본래 기독교와는 상관없는 17세기의 독일 대중가요였다. 한스 레오 하슬러라는 17세기 독일 사람이 작곡한 이 노래의 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내 마음이 안절부절이네, 그 처녀 때문일세
나는 아주 안절부절하고 있네. 내 마음은 중병이 들었네
낮이고 밤이고 안식이 없고 언제나 탄식뿐일세
한숨과 눈물뿐이고 슬픔 속에서 자포자기 상태에 있네
그녀의 마음을 녹일 수만 있다면
내가 곧바로 다시 건강해질 것이라고...
이 연애 노래가 17세기에 독일의 목사요 찬송 작가였던 파울 게하르트에 의하여 콘트라팍투어 형식으로 찬송가가 된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가수 주현미의 노래「비 내리는 영동교」라는 곡에 찬송시를 붙여 찬송가로 만들어 부른다면, 이해가 되겠는가?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는 이렇게 외국의 국가, 민요, 영가, 대중가요 등의 가락에 찬송 시를 붙여 만든 것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비 기독교적인 가락에다 찬송 시를 붙여 만든 찬송가들이 문제가 있다 없다 하는 논의를 떠나, 비 기독교적인 음악조차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로 만들 줄 알았던 서양 사람들의 지혜와 열린 마음을 우리의 전통음악에도 적용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왜 우리는 외국 민요로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면서 우리 민요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왜 우리는 외국 악기와 장단으로 찬송가를 부르면서 우리 악기와 장단으로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기를 주저하는가?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한국 찬송가는 어느 나라 그리스도인이 하느님께 찬양하는 찬송가인지를 의심하게 한다. 불러서 은혜로우면 된다고 하지만,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가 어떤 것들인지 알고도 은혜롭게 부를 수 있겠는가? 우리는 매일 예배 시간에 남의 나라 국가를 부르고 있으며, 싸움터에 나가서 사람을 죽이도록 독려하는 전투가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민요는 천시하고 교회 안에서 정죄하면서 여러 외국 민요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찬송인 양 은혜에 차서 부른다. 이 얼마나 큰 모순이며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서양 찬송가의 가사와 가락에는 복음 이외에 그 나라의 문화와 정신과 강요가 스며 있다. 찬송가 가사가 아무리 은혜로워도 가락이 주는 정서적 영향은 크다. 우리가 매일 주일 예배 시에 습관처럼 부르는 찬송가 박자에 따라 우리의 의식과 성격이 바뀐다. 서양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우리에게는 남을 고려치 않는 전투적 신앙이 무의식적으로 형성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전도하러 갈 때도 우리는 행진곡을 부르며 마치 전투에 나가는 용사처럼 된다. 그리고 이웃은 보지 못하고 오직 앞만 보는 성공주의,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개인주의적 신앙관과 소위 로버트 슐러 식의 적극적 신앙관 등이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가락에 의해서 형성되어 왔다. 이런 찬송가 가락이 주는 의식의 영향은 서양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맞을는지 모르지만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왜곡된 신앙을 형성하게 했다.
4. 우리 가락에 우리 신앙고백을 담고
잘 알다시피 현행 찬송가는 민요나 민간 음악, 각 나라의 국가 등 비 종교적 가락에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을 가사화 하여 찬송가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처럼 서양 각 나라들의 민요와 국가, 심지어는 연애가를 콘트라팍투어 방식으로 바꾸어 부르는 현행 찬송가는 가락에도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가사에 관한 것이다.
현행 찬송가 가사를 분석해 보면 '성도의 삶'이 41.5%로 가장 많고, '성자' 15.6%, '예배' 12.9%, '성부'와 '성령'이 합하여 3.3% 순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우리의 찬양과 헌신과 사랑을 하나님께 드리고 이웃에게 베풀겠다는 의미의 가사보다는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내용이 더 많다. 죄 용서함 받고, 은혜도 받고, 사랑도 받고, 복도 받고, 위로도 받고, 재물도 받고, 건강도 받고, 소원도 이룬다는 내용의 가사가 많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신앙이 상당히 기복적이고 개인 중심적임을 나타내 준다. 여기서 기복신앙이 나쁘다 좋다를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께 찬양 드리는 시간에도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하느님께 드리며, 이웃에게 주님의 사랑을 나눈다는 의미보다는 무엇인가를 끊임 없이 '받겠다'는 욕심이 앞서 있다는 데에 있다.
이웃의 아픔과 민족의 고난은 내가 알 바 아니요, 오직 내가 받을 복과 죄사함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개인주의적 신앙과 기복적 신앙에 기초한 현행 찬송가를 부르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은 자연히 나 외에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고,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참 제자됨과 공동체성이 결여되고, 역사와 민족의 요구에 무관심한 탈역사성을 나타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구원받은 이들의 사랑과 헌신과 나눔, 더불어 살아가는 구체적인 신앙적 삶의 모습은 없고 피안적, 탈역사적인 개인 영혼 구원의 신앙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부르고 있는 찬송가가 이렇게 개인주의적이요 기복적인 신앙을 담고 있는 것은, 대부분의 현행 찬송가가 우리 한국인의 삶의 자리와 거리가 먼 서양의 17세기 경건주의와 19세기 근본주의 신학이 발흥할 때 만들어진 찬송가들이기 때문이다. 17, 19세기 신앙전통은 개인의 구원과 내적 체험을 강조하며, 문자적이고 교조적인 획일적 신앙관을 절대화하는, 다분히 그리스도 신앙의 한 부분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개인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신앙관은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지녔던 신앙의 근본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신앙을 기준으로 삼아 이 땅의 문화 유산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배타적이고 비역사적인 신앙관을 주입시켰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에 고스란히 스며 있는 것이다.
삶 한가운데 뿌리내리지 못한 신앙은 금방 생명력을 잃게 되고, 구원의 사명을 감당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서양의 17, 19세기 신앙전통을 담고 있는 현행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벗어나 공중에 떠 있듯이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남의 나라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대신 부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한국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주체적이고 책임적인 신앙을 감당하지 못하였고, 무의식중에 서양 찬송가 속에 스며 있는 그들의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신앙관, 그리고 십자가를 앞세워 약소민족을 지배했던 제국주의적이고 전투적인 문화까지도 배워가고 있는 것이다.
어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낮고 천한 세상에 오시어 나눔, 섬김, 사귐의 삶을 살다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시고 살리시는 성령님을 단선적이고 비좁은 서양 근본주의 신학 안에 가둘 수 있겠는가.
우리가 지금 부르는 찬송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세상을 향한 의로운 역사와 자연과 우주 만물 속에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은총, 그리고 민족의 역사 속에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자로서의 삶이 배제된 일방적인 찬송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우리는 한국 그리스도인들로서 한국 땅에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사명이 무엇이며, 그 사명을 지켜 나가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찌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성도의 결단과 삶이 담겨 있는 찬송가가 단 한 편도 없다는 것에 울분을 토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기독교는 나라를 빼앗긴 조선조 말에 들어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족의 독립과 구원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민족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지만, 우리 찬송가는 민족의 통일과 구원을 염원하는 찬송은 한 절도 찾아볼 수 없고 여전히 외국 민요 가락에 맞추어 나만이 구원과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부르짖고 있다.
나라는 갈라지고 하느님의 백성은 헐벗고 있는데, 우리는 안락한 교회 의자에 앉아 나 자신의 축복과 서양 신앙인들의 고백을 앵무새처럼 노래할 것인가, 아니면 강도 만난 민족과 강도 만난 사람을 돌봐주는 선한 이웃이 되고자 결단하는 찬송가를 부를 것인가. 나는 전자의 찬송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며 후자의 찬송만을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의 찬송가가 너무 개인주의적 신앙만을 담고 그리스도인의 의롭고 구원적인 삶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누구보다도 구체적인 하느님의 역사 속에서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자들이라 믿기 때문이다.
한국 찬송가를 다시 만든다면 다음과 같은 한국인의 삶의 내용과 고백이 담겨져 있어야 하지 않을까?
1) 찬송가 가사는 우리의 삶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이어야 한다.
2) 찬송가 가사는 순 우리말과 우리말 법을 살려야 한다.
3) 가난하고 약한 자에게 용기를 주는 찬송이어야 한다.
4) 민족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는 찬송이어야 한다.
5) 농촌교회 교인을 위한 찬송이 있어야 한다.
6) 민족절기 때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있어야 한다.
7) 한국의 자연을 느끼고 보존하는 찬송이 있어야 한다.
8) 일터에서 부르는 찬송이 있어야 한다.
9) 여성을 위한 찬송이 있어야 한다.
10)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을 위한 찬송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삶의 터전 속에서 고백된 노래말을 오랜 세월 우리 선조들의 숨결 속에 살아 있던 우리 가락에 담아 부르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 음악의 근본 원리는 '호흡'을 통한 가락으로 신명을 얻어서 천지인(天地人)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가락은 사람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자연의 기운과 하늘의 울림을 부르는 사람의 몸을 통해 호흡으로 나오게 하며, 그것으로 신명(神明), 즉 '하느님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가락은 단순히 악보에 의지하지 않고, 또 악기에 의존하지 않으며, 부르는 사람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 악기와 부르는 사람, 악보가 하나로 어우러져 새로운 기운을 창조해 내는 힘이 있다. 이 새로운 창조가 바로 종교적인 힘이요, 오늘 우리 그리스도교회가 회복해야 할 요소이다.
우리 가락의 원리는 몸과 마음을 일원론적으로 보며 그것이 유기체적으로 하나가 되어 자연과도 하나가 된다. 이럴 때 신과의 합일의 경지인 신명이 나는 것이다. 우리 가락은 노래 부르는 사람 혼자 내버려두지 않고, 듣는 사람이나 자연이 하나가 되어 전능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장구 가락을 보더라도 음양이 있어 이것이 서로 조화를 통해 막힌 것을 뚫고 끊어진 것을 이어 주어 하느님, 사람,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신명의 세계,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나아가게 한다.
5. 예배와 찬송이 바뀌어야 우리 신앙이 살아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절대 진리이지만, 우리가 고백하여 부르는 찬송가는 시대에 따라서 역사와 문화의 토양 속에서 언제나 새롭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역사를 말할 때, 말씀이나 진리와 같은 절대 개념에는 사(史)자를 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교리사(敎理史), 교회사(敎會史)와 같이 우리가 사(史)를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끊임없이 그 시대와 역사에 따라 변하여 말씀과 진리를 새롭게 해석하고 실천하도록 한다. 교리와 교회 그 자체만으론 신앙인들을 구원으로 바르게 인도할 힘이 없는 것으로, 시대에 맞지 않으면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변해야 한다. 교회와 교리도 변하는데, 하물며 교회 안에서 부르는 찬송가를 말씀처럼 성경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로 신봉해서는 안 된다.
미국장로교 찬송가 346장은 한국 민요 아리랑(Arirang)이다. 우리 민요 아리랑에 골로새서 1장 15∼18절의 말씀을 시로 지어 찬송가로 만든 곡이다. 우리의 모양을 서양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것이다. 더 풍성한 열매를 얻기 위해 우리의 모양을 취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다.〈한국성서공회〉의 민영진 박사가 번역한 것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1절) 주님은 하나님 형상이시오.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시라.
부활하시어 다스리시니.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라.
(2절) 주님과 더불어 새로 태어나 성령님 모시고 살아가니.
성령 열매 풍성히 맺어 주님 다시 오실 때 반겨 맞으리.
(3절) 주님의 지체된 우리 몸이 생명의 말씀을 먹고 사니
감사합니다. 찬양합니다. 주님 이름 높이며 살렵니다.
은혜로운 성경의 말씀을 찬송시로 지어 우리 가락에 맞추어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니 부를 만하지 않는가. 외국 민요 가락에 따라 찬송을 부를 때 보다 더 흥겨움이, 신명이 일어나지 않는가. 외국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가락으로 흥겨움에 하느님을 찬양하는데 우리는 왜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외국 찬송가를 배척하자는 것도 아니며, 또 우리 가락만을 고집하자는 것도 아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하느님께 가장 잘 찬양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한국의 흥겹고 신명난 가락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고백되는 찬송가 가사를 붙여 부른다면, 우리의 신앙은 더욱 풍성해지고 우리의 삶 속에서 더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남의 나라 민요를 찬송가로 부르면서 우리는 왜 우리 가락, 우리 악기에 맞추어 찬송가로 부를 수 없는가. 이것을 보시고 하느님은 뭐라 말씀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