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출신 하춘화가 부른 노래인데 백암이 짓고 고봉산이 곡을 붙인 민요풍의 가요이다. ①은 노래의 도입부로서 늦은 가락인데 판소리에서의 단가 곧 목풀이 역할을 한다. ②와 ③은 제1절인데 경쾌하고 발랄한 가락이 주를 이루며 흥을 돋군다. ③은 후렴으로 ④와 ⑤뒤에 공히 배치되는데 노랫말의 구체적인 의미 보다는 일종의 구음(口音:입소리)으로서 흥을 진작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노래는 전체 3절의 신나고 흥겨운 가락이 어깨춤을 절로 일게 하는 고향 사랑의 가요이다.
신령스런 바위라는 이름의 영암(靈巖), 그 명칭은 통일신라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물론 월출산(月出山)과 관련하여 생겨났다. 지금의 모습과는 판이했던 영암의 지형(地形), 삼국시대 당시엔 영암의 내륙까지 바닷물이 남실대는 천혜의 항구였다. 그것도 예사 항구가 아닌 국제 항구였다.
그 결과 사람과 물산이 집중되어 이른 시기부터 도자기 등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룩했으며 그것을 이웃 나라인 일본 등지에 전파시키기도 했다.
백제 왕인박사를 일본국에서 초청한 것은 당시의 영암 사정을 잘 대변해주는 좋은 예이거니와 그것은 영암으로 대표되는 백제의 학문적 수준이 매우 높았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영암의 상대포 등이 국제적 항구로서 일본, 중국 등 국외로의 정보 교류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모두 본래의 모습을 잃었지만 불과 50여 년 이전만 해도 영암은 국제적인 항구 도시의 유풍이 있었다.
영암 아리랑은 영암 출신가수 하춘화의 고향 사랑으로 태어나 영암을 알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 하지만 우리들, 호남이 고향이라고 말하는 우리들은 이 노래 이전에 이미 영암에 대해서 국제적 규모와 수준을 갖춘 자랑스런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영암의 본 모습 상실에서 오늘의 ‘개발’ 중독이 가져다 준 뼈아픈 회한을 깊이 새겨야할 것이다. 이 노래비는 월출산 천황사지 초입에 서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맞이하고 있다. 나주 평야의 널찍한 가슴을 벗어나 무슨 바다의 등대인냥 창공에 우뚝 벌어진 죄표에 이끌리다 보면 어느덧 영암 고을에 발길이 닿는다. 영암의 초입에 들어서면 신북면 갈곡들에서 들노래가 길손을 맞는다.
이 들노래는 영암 아리랑이 그랬듯이 여지없는 풍년을 구가하는 예축(豫祝)의 풀이가 아닐 수 없다. 노랫소리 손을 잡고 푸른 하늘 머리인 채 찾아가는 월출산, 영암과 월출산은 따로 얘기할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월출산은 국립공원으로 해발 809m의 천황봉(天皇峰)이 최고봉이다.
어느 산이 산사 한 둘 품어 기르지 아니 하랴마는 월출산은 삼한 최고의 풍수지리가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도갑사(道岬寺)를 비롯, 지금은 바람결에 흔적조차 희미하지만 도선이 승려가 되기 위해 머리를 깎았다는 이른바 낙발(落髮)터인 월암사, 얼마전 화재로 소실된 천황사 등 유수한 사찰이 국보와 보물을 안은 채 세간(世間)의 진예객(塵穢客)을 맞이하고 있다.
예로부터 월출산은 중국에 알려졌는데 바다에서 바라본 그 모습이 자색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아 화개산으로 일컬어졌다. 월출 삼동석(三動石), 월출산에는 3개의 동석(움직이는 바위)이 있어서 위대한 인물이 많이 태어난다는 소문을 들은 중국 당나라의 황제, 그는 사람을 시켜 그 바위들을 모두 넘어뜨릴 것을 명령했는데 하나의 바위만은 넘어뜨릴 때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의연히 서는 게 아닌가! 이 신령스러운 바위가 있어 영암(靈巖 신령스런 바위) 고을의 명칭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월출팔경의 으뜸인 천황일출, 달뜨는 모습이 가경(佳景)인데 어찌 해뜨는 모습인들 그만 못하겠는가마는 천황봉은 그리 높지 아니한 높이이면서도 그 범접을 허락지 아니한 까닭에 그곳의 일출은 월출과 더불어 장엄함을 한층 더해준다.
주위에 거느린 야트막한 야산들은 월출의 위용을 더욱 기품 있게 해준다. 월출산은 문자 그대로 달뜨는 산이다. 달과 풍요 다산과의 관계는 오래 전 신화의 상징에서도 확인 되는데 비근하게는 우리들 가슴 속에 자리한 물레방앗간의 낭만적 추억에 깃들어 있다. 달뜨는 밤과 물레방앗간이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하는 은밀한 사랑이라면 칠흑 같은 깜깜한 밤이 제격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뜨는 밤이 등장하는 까닭은 달이 지니는 생생력(生生力)과 풍요, 그리고 다산(多産)의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월출산은 나주평야와 영암의 들녘에 생명과 풍년을 가져다주는 달을 품은 산으로 숭앙되었다. 그랬기에 ‘영암 아리랑’에서도 달→풍년→지화자 좋다의 전개 방식이 등장한 것이다. 이렇듯 달은 창조적 행위와 깊은 관련을 맺은 것으로 오랜 세월 인식되어 왔다. 둥근 둥근 보름달처럼 과일과 오곡이 둥글게 영글기를 바랐던 월출에의 기대, 그것이 이제 애가심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으니 격세지감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물살이 급한 서호강을 막아 어렵게 만든 몽해들의 간척지, 그것이 불과 몇 십 년 전의 절실한 풀칠 방법이라고들 입을 모았었는데… 그래서 ‘영암 아리랑’에서 그 몽해들의 넘실대는 금빛 풍년 물결을 목이 터져라 찬미했는데, 이제 몇 십 년이 지난 지금 그것이 애가심이라니…
추석 며칠 전 월출산에 올라 사방 툭 터진 너른 들녘을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제각기 배를 뚝 내밀고 터질 것만 같다는 듯 튼실한 결실을 자랑하고 있었건만 어쩐지 짠한 맘에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저 알곡들을 어째야 좋단 말인가? 이제 더 이상 월출산의 달은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오죽했으면 애지중지 금지옥엽 같이 기른 농사를 제 손으로 갈아엎겠는가 말이다. 회사정(會社亭)의 긴급회의를 열지 않을 수 없음이라. 오백년 이상의 전통을 지닌 회사정의 모임, 그것은 주민 자치의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등을 논의한 오늘의 국회의사당과 같은 곳이었다.
영암군 군서면 서구림 마을, 구림(鳩林)은 비둘기가 모여 사는 평화로운 숲이란 뜻이지만 도선국사와 관련한 지명이기도 하다. 어느 겨울 낭주 최씨 처녀가 계곡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먹음직스럽게 생긴 참외 하나가 둥둥 떠내려 오더란다. 마침 허기도 지고해서 처녀는 덥썩 그 것을 잡아들고 맛있게 먹었는데 그로부터 갑자기 태기가 있어 해산을 했더란다. 명문거족인 집안에선 처녀의 해산은 있을 수 없는 망칙스런 일이라 하여 그 아이를 집 뒤 뜨락 바위 밑에 버렸더란다. 며칠 뒤,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찾았던 아이, 이게 웬일인가? 비둘기들이 날아와 한 날개는 깔아주고 다른 날개는 덮어주는 등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고 있는 게 아닌가? 놀란 처녀의 부모는 보통 아이가 아님을 직감하고 데려다 길렀는데 그 아이가 나중에 도선국사로 삼한 풍수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비둘기가 양육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구림마을, 그 곳은 왕인과 도선 외에도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의 기틀을 다진 책사 최지몽의 태생지이기도 하는 등 인물의 고장이다. 뿐만 아니라 열명의 제자를 한꺼번에 과거에 급제시킨 나주 목의 명 교수 오한 박성건의 간죽정(間竹亭)을 비롯한 유서 깊은 정자의 고을이거니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한석봉의 글씨와 어머니의 떡 전설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박장군의 가택인 육유당에 가면 한석봉의 글씨가 길손의 발길을 잡는다.
옛날 국제적인 항구 도시 구림, 이 곳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통일신라 적부터 인물과 물산의 중심지였기에 일찌감치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룩하였다. 오랜 전통과 역사에 걸맞게 이른 시기부터 자리 잡은 서구림 마을은 그 대동계로도 전국에 알려진 곳이다.
서구림 마을은 인근 갯벌의 간척으로 지남들과 학파들을 기반으로 생장, 발전한 자연촌이다. 들의 힘으로 생장, 발전하였다고 했거니와 이는 간척과 제언(堤堰)을 통한 생산력에 기반한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적으로 이름난 곳이었기에 그 곳을 간척하고 제언하여 넓힌 들녘, 그 안쪽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들앉은 구림마을 사람들, 그들의 본격적인 물적 기반은 1500년 중반에 건설한 지남제였다.
20세기 중반 학파농장이 만들어지기 이전까지 지남들녘은 구림 대동계의 물적 토대로서 많은 식솔들의 생존적 원천이었고 향촌 문화생산의 기반이었다.
이러한 농업 생산기반은 뒤 이어 영산강의 손과 발을 잘라 막은 20세기후반 영산강 하구언 사업으로 농토는 더욱 늘어나 이른바 호남의 곡창으로 그 명성을 만방에 드날렸다.
농업생산 사회는 공동의 사업을 요구했기 때문에 이웃간의 유대와 협동이 중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동계 등을 만들어 구성원의 결속과 유지 및 발전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런 논의를 위한 회사정 같은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리라.
회사정은 마을의 발전에 대한 전략 수립은 물론 문제를 해결하고 대안을 마련했던, 생각과 지혜의 나눔터였다. 지남의 들녘을 중심으로 번영과 발전을 이룩해 온 구림 사람들, 이제 그들이 다시 회사정에 모여 무엇을 얘기할 것인지… 농사, 생명줄로서 놓치면 죽을 것으로만 알았던 그 농사가 아니던가… 그를 통하여 이만큼 사람을 기르고 나라를 지켜왔건만, 이제는 천덕꾸러기로 전락될 운명이란다. 월출산 구정봉이 연출하는 기암괴석의 경이로운 장관들, 중국의 황산이 아름답다한들 이 보다 더하진 않으리라. “여기에 케이블카 설치해서 관광객을 맞으면 안 될까요?” 혼자 보기가 너무 아쉬워 내뱉은 한 마디였는데 동행했던 임낙평형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오늘 우리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선택하여 실행한 일들이 불과 몇 십 년 후엔 애가심이 될 수 있다는 눈앞의 현실에서 필자의 생각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리라. ‘영암 아리랑’은 계속 불리워져야할 터인데, 그것도 신명나고 걸판지게 어깨춤을 뽑아내야할 터인데, 무슨 묘안이 없을까? 저 황금 들판을 살려낼 수 있는 묘안이…
첫댓글 교수님 교수님 우리교수님, 역시 최교수님이십니다. 영암의 애착심 잘 보았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