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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봄 마가복음 2 강
• 말씀 마가복음 1:16-20
• 요절 마가복음 1:17
나를 따라 오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부활절 특강을 배우기 전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어떻게 복음역사를 준비하셨는가를 공부했었습니다. 이제 오늘 말씀에서부터 예수님의 복음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복음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면서 맨 먼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그의 제자들을 부르신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해 11월 26일 개척예배를 드렸고 2007년을 시작하면서 복음역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시작하신 복음역사 하나하나에 관심이 생깁니다. 어디서 시작하셨고 또 어떻게 시작하셨는가?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어떤 말씀으로 부르셨는가? 왜 그렇게 부르셨는가? 등등…. 그렇게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의 하신 일을 잘 따라야 하는 제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도 캠퍼스에서 제자들을 부르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갈릴리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신 예수님(16a) :
마가복음 1장 9,10절을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고 그때로부터 메시야로서의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9,10). 그런데 예수님은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시지 않고 다시 갈릴리로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14). 그리고 오늘 말씀을 보면 갈릴리 해변에서 그의 첫 번 제자를 부르셨습니다(16a).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마태 4:12-17)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갈릴리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는 ‘이방의 갈릴리’라 불려질 정도로 이스라엘에서 소외된 곳이었고 그만큼 상처와 아픔이 많았습니다. 그곳에는 흑암에 앉은 백성들, 그리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복음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역사는 당대 최강대국이었던 로마에서 시작되지 않았고 로마의 지배국 중에서 가장 약소국이었던 이스라엘에서 시작되었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변방이었던 갈릴리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사마리아로 그리고 소아시아와 유럽을 넘어 로마에까지 전파되었습니다(행1:8). 그러고 보면 UBF 역사가 한국사에서는 소외된 땅이었던 광주를 중심으로 일어나서 대전・대구・제주 등 지방이 먼저 개척되었고 그 후, 서울이 개척되고 세계 각국으로 뻗어 나간일도 우연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자 하면 갈릴리와 같은 변방에서도 복음이 시작될 수 있고 그곳이 하나님 역사의 중심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릴리는 지리적인 특성을 살펴 볼 때도 복음이 시작될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북쪽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룰 때면 자주 나오는 골란고원(高原)인데, 이 고원의 최고봉이 헬몬 산이고, 헬몬 산의 눈 녹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들어 갈릴리 호수가 되고, 그 물이 넘쳐 남쪽으로 흐르면서 요단강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이 사막인 이스라엘에서 갈릴리 호수는 물 근원 - 수원(水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에 ‘복의 근원’이 되라(창 12:2)고 하셨는데 그 말에는 ‘축복의 샘터’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 47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부흥의 환상을 선지자 에스겔에게 보여주실 때 성전귀퉁이에서 스며 나온 물이 흘러 강을 이루고 그 강물이 불어나면서 죽었던 땅이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물 근원이 살아나는 일이며 물 근원으로부터 시작되는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물 근원인 갈릴리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신데는 그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경기센타가 있는 연무동이 서울이 아닌 수원이고 수원의 중심부도 아닌 변방이긴 하지만 경기대학교 뒤에는 광교산이 있고 광교산 밑에는 광교저수지가 있고 그곳에서 광교천이 흐르니 영락없이 갈릴리입니다. 게다가 수원(水原)이란 지명의 한자를 풀어보면 ‘물 근원’이란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풍수지리설의 도움이 없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갈릴리요 복음역사의 중심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울로 또 서울에서도 강남으로 가려 애를 쓰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부르심이 있는 곳이 갈릴리이며 또 그곳에서 복음이 시작될 것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대학은 항상 그 시대의 물 근원이었습니다. 역사를 볼 때, 혼탁한 시대를 정화시켜줄 맑은 샘물은 항상 대학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종교개혁이 그러했고 18세기 대각성운동이 또한 그러했습니다. 언젠가 세계의 대학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의 부제(副題)가 ‘미국의 마르지 않는 샘 하바드’라고 붙여진 것을 보았는데 매우 의미심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캠퍼스의 목자로 부르시고 물 근원을 맑게 하는 일에 사용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섬기는 경기대가 하나님의 역사의 마르지 않는 샘이 되고 그 샘이 흘러 넘쳐 세계를 먹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약속하셨는데(요한 4:14b) 먼저 우리 안에서 샘물이 펑펑 솟아나기를 기도합니다.
2.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16b,17) :
예수님은 물 근원인 갈릴리 호수를 거닐며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하셨고 이스라엘의 위대한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부흥을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16b,17절을 보십시오.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고기를 잡기 위해서 열심히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사람을 낚는 어부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합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란 죄의 바다에 빠진 인생들을 구원하는 사람입니다. 물고기는 물이 삶의 터전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숨을 쉬고 물속에서 헤엄치고 뛰놀고 먹을 것을 얻으며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우리는 뭔가를 만나 신이나 있는 사람을 보면 ‘물 만난 고기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물에 빠진 경우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물론 수중발레(synchronized swimming)선수들이야 물 만난 고기처럼 물속에서 춤을 추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물에 빠졌다면 구원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보실 때 세상에는 거대한 죄의 탁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거센 탁류(濁流)속에서 제대로 헤엄도 쳐보지 못하고 떠내려가고 있으며 급기야는 폭포아래 떨어져 죽을 운명입니다.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타고 싶냐고 물으면 누구나 주먹을 불끈 쥐며 “물론이지요, 제가 안타면 누가 타겠습니까? 앗싸, 장학금!”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막상 입학하여 놀이 문화에 휩쓸리다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꼭 대학의 분위기를 문제 삼지 않더라도 사람의 마음속에 죄악의 파도가 항상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그간의 안일하고 게으른 생활을 청산해보려 하지만 어느덧 게으름의 파도, 정욕의 파도가 엄습하고 이내 의욕은 꺽이고 의지는 게으름 속을 표류합니다. 사람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들 죄악의 탁류 속에 떠내려가고 있습니다(롬 7:24). 이런 사람에게는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그 거센 탁류 속에 줄을 던져서 붙잡아 건져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람 낚는 어부는 죄의 탁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입니다. 죄의 파도가 넘실거리는 세상 속에서 가장 필요한 존재가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입니다.
그런데 탁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탁류에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조류를 따라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마태 7:13,14). 우리는 창세기를 배우면서 홍수심판 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일이 대세가 되었고 그들의 마음이 원하는대로 아내 삼는 것을 보았습니다(창 6:2). 그때 노아가 아무리 하나님의 심판을 전해도 그들은 듣지 아니하였고 홍수 심판이 임할 때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습니다(벧후 2:5, 눅17:27). 사람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보람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정말 고맙다’는 감사의 말을 듣는 것인데 상황이 이렇다보니 감사는커녕 이상한 사람 취급당하고 배척당하기 십상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하려다 뺨 얻어맞는 셈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사람을 구하려 한다고 해서 “정말 귀한 일 하시네요, 정말 수고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담스러워하고 회피하기 십상입니다.
또 탁류가 워낙 거세고 강하기 때문에 사람을 구하는 일은 위험하고 고된 일입니다. 거센 파도와 풍랑을 헤치고 바다에 나가야 재난 당한 사람을 구하는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많은 수고를 감당해야 사람을 구원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은 촌각을 다투기 때문에 자기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건강이 상하는 사람도 나오고 또 위험한 지역이지만 사람을 구하러 가야하기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하다가 다치는 사람, 병을 얻는 사람, 심지어 순교를 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고난도의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바다에서 사람을 구하려면 바다도 알아야 하고 배도 다룰 줄 알아야 하고 사람을 건져내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을 구하는 일은 값진 일이기는 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부담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 오던대로 물고기나 잡고 그 물고기를 팔아서 시장에 내다 팔고 가족들이나 잘 부양하는 삶, 고기 잡는 어부의 삶이 바로 나의 천직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목자생활을 하면서 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아는 분들도 그러하고 아직 그 삶을 살기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갈릴리 촌구석에서 물고기나 잡던 어부들이 어떻게 이런 어렵고 중요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17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들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해주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약속이고 그 앞에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이 명령입니다. 즉 앞의 명령은 순종하며 따르고자 힘써야 하는 부분이지만 뒤의 약속은 예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친히 이루어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을지, 그럴 가능성과 자질이 나에게 있는지 고민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될 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할 따름입니다. 다만 우리가 순종해야 할 명령이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배우면 누구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2주간 마가복음의 마지막 부분인 15장과 16장을 배웠습니다. 그 속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은 3년간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믿지 못하고 슬픔에 빠져 울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보면 3년간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예수님을 배우고 따른 일이 말짱 헛일이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더 읽어보면 달라집니다. 복음서가 끝나고 사도행전이 시작하자마자 약속하신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합니다(행 2:1-4). 그러자 제자들은 부활의 권능을 덧입었고 위대한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3천명을 한 번의 설교로 회개시키는 엄청난 일을 하였습니다(행 2:41). 그는 한 번의 그물치기로 3천명의 사람을 낚아 올렸습니다. 그는 앉은뱅이를 일으키기도 하였고(행 3:1-10) 그를 핍박하는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 4:1-22). 충동적이고 큰소리치기만 잘하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우고 따랐을 때 그는 인류를 구원하는 위대한 스승이 되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의 삶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많은 것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말씀을 잘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는 지성도 필요한 것 같고 강철 같은 체력과 뛰어난 절제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야 날마다 새벽을 깨워 기도할 수 있고 또 시간을 아껴 사람을 도우러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적인 안정이 생겨야 여유도 생기고 그래야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장비나 여력을 갖출 수 있을 것 같고 최소한 쏠로생활을 탈출하고 나서야 뭔가 사람을 낚는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대학생 때는 어렵고 지긋이 나이가 든 목사님 또는 목자님 정도는 되어야 사람 낚는 어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시한 조건은 한가지입니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우리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 해야 할 한 가지는 ‘예수님을 따라오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예수님을 힘써 배우려 하면 예수님이 능히 우리로 하여금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배우는 자세란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늘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본받으려는 마음입니다. 챨스 M. 셀던 이란 분이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습니다. 그 소설 속에 나오는 한 목회자는 어느 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란 질문을 마음에 품게 되었고 모든 행동의 근거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교회가 변화되고 지역사회가 놀랍게 변화되는 내용을 그 소설에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고기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또 ‘사람을 낚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많이 고민합니다. 민권목자가 다니는 은행이나 태헌목자가 근무하는 연구소에서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어떻게 하면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는지’ 끊임없이 세뇌시키기 때문(?)입니다. 또 각박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늘 물고기를 생각하게 하고 또 사람을 낚는 어부의 척박한 현장도 항상 우리 머릿속에 ‘어떻게 해야 자매 양들을 좀 얻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사람을 잘 도울 수 있을까?’ 하는 식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다른 모든 상념들을 버리고 이 한 가지 질문에 집중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바울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배우려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7-11)
우리는 4월에 무슨 생각을 해야 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의 삶의 현장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죽은 예수님을 찾는 자세를 버려야 합니다. 무덤 속에서 예수님을 찾지 말고, 지금 나의 삶의 현장 속에 살아계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또 죽음을 통해서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실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부활의 예수님을 배우려 해야 합니다. 4월 소기도회 때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어떻게 배웠는지가 간증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경기센타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을 덧입을 때 능히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 한국 근해에서만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능히 원양어업도 할 수 있는 International 한 사람들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믿음을 가지게 하사 2041년까지 10만의 선교사를 키우고 보내는 일에 실재적으로 사용하여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맺는 말 :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19,20)
-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를 불렀을 때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습니다(18) 그런데 조금 더 가시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그물 깁는 것을 보고 부르시자 그들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 나섰습니다. 시몬과 안드레도 그렇지만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아버지도 계셨고 또 품꾼이 있는 커다란 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부유했고 아버지 재산만 물려받아도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람들은 제대로 된 그물 하나 장만하려 난리이고 또 그럴듯한 배를 한 척 구하기 위해서 인생을 바칩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인생은 고기를 잡고 생계를 꾸리는 삶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작은 배인가 큰 배인가? 또 국산 그물인가 일제그물인가 아니면 중국이나 베트남제(製)인가의 차이입니다. 그물을 버리지 못하는 삶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바람 잘 날 없는 갈릴리 호수의 물살에 따라서 울고 웃는 소시민적인 삶이요,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리지만 얻는 것이 없는 허무한 삶이요(누가 5:5). 풍랑이는 세상속에서 의지할 것 없이 방황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을 때 그들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삶의 비밀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마태 6:33). 어떤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든든한 삶을 살았으며 무엇보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인생이란 모험입니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고 하면 어쩐지 강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이 얼마나 불안하고 힘겨운 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만용(蠻勇)이요, 교만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되 철저히 의지할 수 있기 기도합니다. 그물을 버리고, 배와 부친을 버릴 정도로 철저하게 하나님께 자신을 맡길 때, 그때 예수님은 그의 크고 높으신 뜻대로 인도하실 수 있고 또 마음껏 축복하실 수 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 이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맡아 인도하시며 귀하게 쓰실 것을 믿고 그를 따르고자 결단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