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한배달 30호(1995년 12)
<특집 I 홍익민주주의 시론( 환경보전)>
세계사의 흐름인 민주주의와 우리의 민족이념인 홍익인간이념을 융합한 「홍익민주주의」는 21세기가 추구하는 이념으로, 또한 민족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이를 현대화하기 위하여 본지에서는 지난 17호에 종합 시론을 발표한 이래 18호 정치, 19호 교육, 20호 경제, 21호 문화, 22호 사회, 23호 의학, 24호 의학 속편, 25호 농업, 26호 과학,27호 미술, 28호 건축, 29호 세계화 집중탐구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번 호에서는 홍익민주주의에서 본 환경보전을 모색해 보았다. 아직 시론인 점을 감안 독자제위의 관심과 참여를 기대한다 -편집자 주.
▶六齊日과 봄․여름에 殺生을 하지마라 /편집부
▶의외로 심각한 지구환경, 국제분쟁의 불씨로 타오르고 있다 /박창근
▶民族力量 결집할 求心軸부터 바로세워야 /한종섭
▶生態倫理의 재정립 시급 /김준호
▶돈과 맞바꾼 생명과 환경, 누가 책임지나 /남상민
▶천지인 합일로 “자연을 지키는 파수꾼” 유기항 옹 /편집부
<특집 I 홍익민주주의 시론( 환경보전)>1
六齊日 과 봄ㆍ여름에 殺生을 하지마라
자연의 섭리속에서 治國의 묘리 체득
편집부
우리나라 자연보호의 역사는 화랑(花郞)의 시원과 그 뿌리를 함께 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삼국 진흥왕 때 화랑도를 제정하고 최초로 배출한 화랑을 설원랑(薛元郞, 진지왕15. 서기 576)이라고 적고 있는데 자연의 참뜻을 배우고 자연과 더불어 영위한 이들의 수도생활정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花郞과 한뿌리
강원도 명주(溟州) 강동 한송정(寒松亭)을 비롯하여 낙산사 의상대, 강릉경포대, 통천총석정, 고성 삼일포 등 동해안 명승지들은 고려 예종연간에 이르기까지 5백여 년간에 걸쳐 화랑도 수도장으로 유명하거니와 명주 땅에 최초의 화랑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었다함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닌것 같다. 그중에도 한송정의 울창한 소나무 숲의 내력에 관하여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한종성 울타리에는 신라 때의 四仙인 永郞, 述郞, 南石行 安? 등을 비롯한 3천여 명의 화랑도들이 수도를 하면서 소나무 한그루씩을 심은 것이 오늘날에 이르러 이토록 울창하게 자라 구름처럼 덮여서 해를 가리게 되었으니……”라고 벌써 1천여 년 전에 이토록 인공으로 조성된 자연보호의 현장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그러한 까닭에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신이 이로 인하여 솟아나오고 뛰어난 장수와 용맹한 군사가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자연과 하나되는 심신의 수련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그리고 뛰어난 인물이 배출되었는가 하는 화랑도의 성과와 효용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자연과 하나되는 수련뿐만 아니라 고려사(世家권제 18․2)에 의하면 의종22년(1168) 1월조에 “왕이 觀風殿에 거동하여 새해에 즈음한 政令을 반포하여 가로되 仙風(화랑도)를 받들어 행하여라. 옛날에 신라에는 선풍이 크게 퍼져서 이로 인하여 龍王이 기뻐하시고 만민이 안녕을 누리게 되었다고 양경(兩京)에서 해마다 베풀어지던 팔관회(八關會)의 전통을 되살리라.”고 명하고 있다.
팔관회란 다름 아닌 고조선이래로 전승되어 내려오는 무천(舞天)ㆍ동맹(東盟)ㆍ영고(迎鼓)와 같은 제천행사의 하나로 이런 행사를 통해서 많은 선가(仙家)들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화랑도가 신라 청소년들의 기상을 드높이고 나라 안팎을 가리지 않고 시대를 초월한 제도로 발전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저 유명한 원광(圓光)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 연유하고 있다. 이것이 화랑도의 행동강령으로서의 실천덕목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 귀산(貴山)조에 보면 경주 사량부 마을에 사는 화랑 귀산이 한마을 친구 추항(@項)과 함께 지금의 청도 운문산 가실사(加窸寺)에 주석하고 있던 원광법사를 찾아가 종신토록 몸에 지니고 살 계명(誡銘)을 구하였다. 이때 내린 세속오계의 첫 계명이 충성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이고, 둘째가 효도로서 부모를 섬기며, 셋째 신의로써 친구를 사귀며, 넷째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서지 않으며, 다섯째 산(生)것을 죽일 때는 어질게 가려서 하라(殺生有擇)는 것이다. 귀산 등은 스승이 내린 가르침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서 질의하여 아뢰기를 “다른 계명들은 이미 명(命)을 받은 바가 있어 익히 알고 있습니다. 다만 다섯 번째에 이르시기를 산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하라는 이른 바 살생유택만은 홀로 밝히 깨닫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살생유택(殺生有擇)의 참뜻
이에 대하여 스승이 가로되 “육재일(六齊日, 한 달 가운데 재계하는 여섯 날 8ㆍ14ㆍ15ㆍ23ㆍ29ㆍ30)과 봄ㆍ여름철에는 산 것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니, 이는 살생에 있어 때를 가림(擇時)이며, 또한 말ㆍ소ㆍ개ㆍ닭 따위의 내가 부리고 키우는 가축을 죽이지 아니하며, 살(肉)이 한 점에도 이르지 못하는 미물(微物)을 죽이지 아니함은 살생에 있어 이른바 물건을 가림(擇物)이다. 이렇게 하여 오로지 저마다의 쓰임새 맞추어서 구태여 많은 죽임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 이는 가히 세속오계 중의 근본이 되는 으뜸의 선계(善戒)인 것”이라 하였다.
화랑도의 실천덕목으로서 원광법사가 처음으로 제시한 세속오계 중 앞의 네 가지 계명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이미 잘 알려져 있었고 또 세상에 널리 행하여지고 있었으나 다만 제5계명의 살생유택의 도의적 원리만은 당시의 사유(思惟)로서는 생소한 새로운 사상의 일종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첫째 때를 가려서 다루고 둘째 대상을 엄중하게 가려서 취하고 셋째 함부로 많이 차지하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를 몸소 실천하는 구체적이고 새로운 덕목으로 이때 벌써 자리매김 되었다. 이렇듯 화랑도의 실천덕목은 실로 우리나라 자연보존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그 철학적 근거가 되어서 자연애호의 기원을 이룩하였으며 실천사례의 효시(嚆矢)가 되었다.
천지(天地)의 조화(調和) 상하지 않게
한나라의 왕이면 마치 해와 달이 만물을 거느리듯이 수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그들 모두가 평화롭고 안녕한 가운데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것을 염원한다. 이와 같이 백상을 사랑하는 근본이치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그 오묘한 치국(治國)의 묘리를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고려사절요」성종(987) 정월조에 보면 왕이 조서를 내려 가로되 “2월부터 10월까지의 만물이 생성하는 때에는 산과 들에 불을 놓는 일을 금한다.”하였고, 「고려사」곳곳에 보이는 이런 류의 기사에 담긴 정신이 신라 화랑도들의 실천덕목이었던 살생유택의 택시(擇時)를 그대로 반영시키고 있어, 고려시대의 자연보호사상이 바로 신라의 화랑도에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고려사」세가 예종24년(1107) 3월조에는 왕이 조서를 내려 가로되 “만물이 발생하는 때에 즈음하여 짐승의 새끼를 잡지 않고 새의 알을 품은 것을 취하지 아니하는 것은 실로 예전(禮典)에 정해진 규칙이요, 또한 선왕의 인정(仁政)”이라고 내세워 이 도리를 어겨 때를 가리지 않고 사냥질을 하거나 혹은 농부들이 화전(火田)을 일으키느라 놓은 불이 생물과 그 밖의 물건에까지 연소되니 “이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만물이 생육하는 의(義)에 어긋나는 일이며, 족히 천지의 조화를 상하게 된다.”고 이때 벌써 오늘날로 말하면 생태계의 파괴와 자연의 자정(自淨)능력 상실을 우려하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고사목도 작벌 금해
조선시대 들어서는 병선을 만드는 국방상의 필요 때문에 국책으로 소나무 벌채를 규제하는 송금사목(松禁事目)이 한층 강화된다. 「조선왕조실록」태종7년(1407) 4월조에 각 도의 수령에게 하명하시어 봄이 한창인 때를 맞아 소나무를 심게 하다. 경차관 韓?이 왕에게 아뢰어 가로되 근래에 이르러 병선을 많이 만들었기 때문에 소나무가 거의 없어져 버렸습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각도의 관직에 있는 자들에게 엄명을 내리시어 소나무가 자랄 수 있는 것을 찾아내어서 산불과 도벌을 막고 또한 해마다 봄이 한창인 때를 골라 소나무를 심되 수령들이 직접 앞장서서 지도감독하게 할 것을 상소하고 있다. 세종6년(1424)4월조에 실록에 의하면 송목양성병선수호조개조(松木養成兵船守護個條)에는 아예 벌칙 1개조까지 그속에 포함시켜놓고 있다. 이 조건에 따르면 평소 병선의 수입에서부터 소나무의 관리, 수확, 벌채량 등을 자세히 규정하고 있을뿐더러 소나무의 수량까지 일일이 파악하는 엄밀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훗날 여러 가지 종류의 송금사목의 원형이 되었다고 한다. 소나무를 작벌(斫伐)하는 자에 대한 처벌과 관리, 관리부실관원의 처벌 등을 종합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도성내외송목금벌사목(都城內外松木禁伐事目, 예종2년(1469)3월조)은 숙종10년에 재도연해금송사목(별칭갑자사목)의 모법이 되었으며 이는 다시 그로부터 약 1백년 뒤인 정조12년(1788)에 제도송금사목(별칭무신사목)으로 개정반포되었다.
성공사례 邊山禁松
일종의 특정지역에 대한 소나무 보호관리규정이라고 할수있는 변산금송절목(邊山禁松節目)은 그 처벌규정이 다른 사목들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격하다. 심지어는 입산금지구역표내의 시들어 죽은 소나무(枯松) 또는 불에 타서 못쓰게 되었거나 자연수령을 다한 소나무를 가리지 않고 중등정도의 크기의 소나무(中松) 이상의 나무 그루 수량을 낱낱이 장부에 적어 놓아서 비록 조선의 재목으로 쓰이지 못하고 산속에서 썩어 버려지더라도 이의 작별을 허용하지 않았다. 생태계의 자생적 고리인 순환생육환경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서다. 이런 소나무를 남몰래 자른 자에 대한 처벌 또한 살아있는 소나무를 남몰래 자른 자와 동등한 조로 다스리고 있다. 이로부터 60년뒤인 1751년경에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저술한 택리지(擇里志)의 복거(卜居)총론 산수조에는 변산금송사목의 효과라고 할 수 있는 변산지방의 소나무 보존상황을 소나무가 하늘높이 치솟아 올라 해를 가리운다고 기술하고 있어 자연보호의 성공사례임을 증언해주고 있다. 정조때에는 임정(林政)을 더욱 강화하여 대전통편(1785) 규정대로 연해변 30리까지의 지역은 비록 사유림이라 할지라도 벌채를 금지하는 송금절목을 반포하였다. 그리고 송금절목의 행정적인 시행에 곁들여서 영정조시대의 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임관정요(臨官政要)」에 수록되어 있는 송금작계절목을 통해서 금송에 얽힌 당시의 세태를 엿볼 수 있다. 이 계는 금송 법령을 남용 또는 악용하여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억울하게 하는 관의 횡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백성들이 먼저 계를 결성하여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소나무를 지키고 가꾸려는 슬기에서 생긴 자위수단이기도 했다.
大典通編에도 규정
모두 23개로 구성되어 있는 금송작계절목은 작계의 목적과 강령․조직․임원․수칙(즉 금송의 대상. 방법. 처벌규정. 교체의 인계 등) 및 부칙이 그 내용이다.
이 절목의 제1조는 금송법의 내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될지도 모를 피해로부터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절목을 조항별로 반포하여 이를테면 환경법 교육까지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교육을 전국 각 동계마다 의무적으로 실시케 하여 그 시대 나름의 금송에 따르는 환경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국민 개개인의 생활 속에 침투시키고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대체연료가 거의 없던 이 시대에 땔나무와 숯(?炭)을 만드는 유일한 연료자원이기도 했던 산림은 전통적인 농본국에서 치수(治水)까지 담당해야만 했던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총아였던 것이다. 이런 절박한 현실적인 필요와 전래의 자연보호사상을 절묘하게 배합한 선인들의 지혜는 전방위(全方位)공해시대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다시없이 귀중한 교훈이 되고 있다.
<특집 I 홍익민주주의 시론( 환경보전)>2
의외로 심각한 지구 환경오염
국제분쟁의 불씨로 타오르고 있다
박창근/한국환경보호협의회 위원장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환경 상황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다.
즉, 그동안 인류가 지속적으로 파괴시켜온 지구의 자연생태계와 오염시켜 온 환경에 의하여, 이제는 지구의 물리, 화학적 내지 생태학적인 차원에서의 환경의 질이 어떤 측면에서는 전혀 개선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 되었다.
회복불능 오존층 파괴
그 단적인 예로, 현재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보호해 주고 있는 성층권의 오존층이 프레온가스 등으로 소멸되고 있는데, 만약 지구를 둘러 싸고 있는 오존층이 소멸되면 유해한 자외선과 우주선이 지구를 강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생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세계는 프레온가스의 제조, 사용 등의 억제를 위해 애쓰고(1987년 몬트리올 의정서 체결, 1992년 브라질 리우 UN 환경회의 등) 있지만, 그동안 이미 방출되어 성층권 아래에 축적되어 있는 프레온 가시는 지금 당장 전세계가 프레온가스의 제조, 사용을 중단한다고 하여도 앞으로 수 십년동안 계속 오존층에 도달하여, 오존을 소멸시킬 것이다.
그리고 현재, 온실효과 등으로 지구의 기온이 빠르게 상승(온난화)되고 있는데, 이런 지구 온난화는 지구의 기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또 다른 재앙, 즉 현재 전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대규모의 가뭄과 홍수는 물론 우발적인 지진의 발생 등을 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에 의한 심각한 위협은 기온 상승에 따라, 남북극의 빙산과 빙하를 녹여 해수면을 상승시키는 일 일 것이다. 아니 이미 남북극의 빙산과 빙하는 빠른 속도로 녹고 있으며 지구의 해수면도 해가 다르게 상승되고 있는데, 해수면이 상승되면 현재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육지 면적 15억 헥타아르가 대부분 강과 호수 그리고 바다가인 저지대이여서 인류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위기를 해소하기 위하여 전세계가 노력하고 있지만 지구 온난화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온실효과가 석탄과 석유 등의 에너지 연소에 있기 때문에 대체 에너지가 실용화되고 있지 않은 현 상태에서는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없다.
뿐만 아니라, 현재 전지구상에서는 지구의 모든 생태계(식생은 물론, 토양과 지하수 그리고 강물에 이르기 까지)를 질식시키고 있는 산성비 문제가 위협적으로 도사리고 있는데, 이 또한 에너지 사용에 따른 문제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이를 해소할 수 있는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 형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구 사막화 현상은 현재, 하루 서울 여의도만한 지구 녹지를 벗겨내고 있으며, 그동안 무한히 넓어(?) 오염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다도 기름과 각종 쓰레기에 의하여 병들어가고 있음이 증명되고 있다.
이렇게 지구의 환경은 개선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만을 위하고 있을 뿐 지구 환경보호에는 무관심하고, 설령 관심을 갖는다고 하여도 오히려 환경문제를 자국의 이익적 측면만으로 계산하고 심지어는 환경패권주의로 치닫고 있는 현실이다.
지구 사막화 현상도
만약, 앞으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이제까지의 전쟁 발발원인이었던 이데올로기나 종교 그리고 지원문제가 아닌, 환경오염에 따른 국제분쟁이 그 도화선이 될 것이다.
아니, 이미 그 도화선의 불씨는 세계 곳곳에서 확실하게 타들어 가고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등의 동부 유럽 국가들이 배출하는 대기오염 물질이 산성비와 산성눈이 되어, 노르웨이, 핀랜드, 스웨덴 등의 광활한 숲과 많은 호수를 죽여, 그 손해배상문제로 국가 간에 심각한 마찰이 일고 있는 경우나, 캐나다의 광활한(한반도 3분의 1의 면적) 판다로사 소나무 숲이 미국의 대기오염 물질로 고사하자, 양국간에 그 보상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고, 얼마 전 일어났던 <걸프전쟁>의 경우도 일단, 가시적인 전쟁은 끝났지만 정유시설 화재에 따른 지구의 대기오염과 원유 방류에 의한 해양오염 문제 등의 책임 소재를 묻는 또다른 마찰이 생겼던 것들을 예로 들 수 있다.
남의 나라의 예가 아닌 우리나라의 경우만 보아도 최근 공업화를 서두르고 있는 중국의 대기오염 물질이 편서풍에 의해 우리나라에 심각한 산성비 피해를 주고 있으며, 특히 거대한 호수로 비유되는 우리나라의 서해는 중국에서 유입되는 수질오염 물질로 조만간 죽음의 바다로 변할 것이 우려되는데, 최근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황하의 거대한 물결이 엄청난 토사를 서해에 퍼부어, 이른바 생태계의 늪 조성 과정과 같은 현상을 서해에 불러오고 있는데 여기에 우리의 오염이 가세하면 우리의 서해는 글자 그대로 죽음의 바다로 변할 것이 뻔하다.
그리고 안전성 문제로 국제간에 시비의 초점이 되고 있는 원자력발전소 문제도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그 영향권이 확실한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북한 등이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원자력 발전 사고에 대비한 최소한의 비상연락 체계(원자력발전사고를 조기 경보하고, 사고 수습을 위해 기술 지원하는 국제 컨벤션)에 가입하고 있지 않아 (일본과는 작년 3월, 양국에서 원자력 발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 즉시 전화나 팩시밀리로 연락하는 핫라인설치에 합의했다) 어느 한 나라에서 원자력발전에 따른 사고가 났을 때는 그 영향이 인접 국가에 막심한 피해를 줄 것이며, 그런 피해는 바로 정치문제로 비화되어 심각한 국가간의 분쟁으로 확대될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환경문제는 지국의 문제에서 이웃 나라와의 문제로 더 나아가 세계의 문제로 확산되고 있어, 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단순히 자국의 생태계 보호나, 환경의 질을 살리는 차원에서, 이웃 나라간의 분쟁을 억제하는 정치적 대책의 일환으로 까지 확대된 것이다.
무방비지대 原電사고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한 국가의 국력은 그 국가의 자원력(석유 등의 지하자원)과 비례해 왔다. 그러나 오늘 날과 같은 환경 오염 시대에서는 자원력 보다, 그 나라의 환경의 질이 국가의 국력으로 평가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국가의 형성조건이 1차적으로 국토며, 국토란 공기와 물 그리고 토양으로 이루어진 환경적인 형태로 그 환경의 질이 좋아야 국민의 건강할 수 있고 그래야 사회가 건전할 수 있어, 국가가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아무리 국토가 넓고 지하자원이 풍부해도 그 국토의 환경적 질이 나빠 국민이 안심하고 숨을 못 쉬고, 마음 놓고 물을 못 마시며 그리고 오염된 토양에서 수확되는 수확물을 믿지 못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불안과 불만이 쌓이게 되며,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성격이 포악해 지고 , 사회질서를 무시해 범죄와 향락 그리고 자포자기의 과소비를 하게 되는데, 이는 곳 사회를 병들게 하는 원인이며 그것은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는 동기가 된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만 해도, 50~60년대의 급속한 산업발전으로 엄청난 경제적 부를 이룩했지만 그 부산물인 공해물질이 일본의 국토를 병들게 해, 많은 나라들로부터 아름다운 자연과 환경의 가치를 모르는 이코노믹 애니멀(경제동물)공해대국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리고 이런 공해물질은 환경만 오염시킨 것이 아니라 일본 국민의 정신과 마음도 오염시켰고, 다시 사회를 병들게 해 물질만능과 퇴폐의 일본을 구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일본정부는 오염된 대기와 수질 그리고 토양을 원래의 상태로 환원시키기 위해, 공해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정부와 국민이 일체가 되어 환경 보호에 나섰다.
그 결과 다행히 오염의 확산은 막았지만, 그에 든 경비는 오염을 조장해 얻은 경제적 이익의 수 십배를 초과했고, 오염으로 이미 사망했거나 병든 피해자는 영원히 치유할 수 없게 되는 등 오염의 후유증은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정부는 1980년 <환경청>을 신설해 이 망국적인 오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 <더 편한 것>에 입맛을 빼앗긴 국민의 생활 패턴은 <과소비> <허영적인 소비> <과시적인 소비>로 생산을 더욱 부추겨, 대량생산에 의한 대량공해를 불러 왔다.
빗나간 환경패권주의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경우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지척에 북한이라는 호전적인 적과 환경오염이라는 망국적인 적을 갖게 돼, 두 개의 적과 싸워야 되는 입장이 되었다.
앞의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은, 그 적 보다 강한 군사력 등의 힘으로 적을 막고, 물리칠 수 있지만, 뒤의 환경오염이라는 보이지 않는 내부의 적은 물리적인 힘이 아닌 지혜로 막고, 물리쳐야 하기 때문에 더욱 국민적 결집력이 요구된다.
우리의 환경이 오염되는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집적적인 원인은 제품 생산을 위한 공장의 공정과정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즉, 공장폐수의 경우, 어떤 물건이건 그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물(공업용수)을 사용하게 되는데, 그 물은 생산되는 제품의 성질에 따라, 중금속이나 다양한 화학물질에 의해 오염되게 마련이다.
그래서 제품 생산을 위해 사용된 물(폐수)은 모두 공장의 폐수처리장을 거쳐 안전하고 깨끗한 물로 환원되도록 하고 있으나, 현재의 폐수처리 기술로서는 공장폐수를 100% 오염하기 이전의 물로 처리하지 못해 문제의 심각성이 큰 것이다.
그리고 제품 생산을 위한 공정과정에는 기계를 가동하기 위한 동력이 필요한데, 이 동력이 거의 석탄과 석유 에너지원의 연소에서 얻어진다. 그리고 이 연소에서 매연이 배출되는데 그것이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아황산가스 같은 대기오염 물질인 것이다.
따라서 공장에서는 제품 생산을 위한 공정 과정에서 발생되는 매연을 처리하기 위하여 집진기를 가동하지만 이 도한 폐수처리장의 경우와 같이 100% 매연을 제거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원료의 찌꺼기나 제품의 파편들은 버리게 되는데, 이러한 산업쓰레기의 처리도 간단하지 않아 또 하나의 공해를 불러오고 있다.
오염주범 대량생산
말하자면, 생산은 환경오염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대량 생산은 당연히 대량의 대기오염과 수질오염 그리고 폐기물오염을 불러 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이렇게 생산한 물건을 쓰고 버리는 것도 공해가 되어 인구폭발 이전에 쓰레기 폭발로 인류가 쓰레기 더미에 묻힐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그래서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그 무엇에 앞서, 소비를 억제해 생산을 줄이는 방법에서 찾아야 되고, 되도록 물건을 덜 쓰고, 아끼며, 가급적이면 쓰레기를 많이 만들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런 일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일로, 간단한 환경보호의 길이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본다.
우선, 무엇을 사기 전에 그것이 꼭 필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유행에 민감하거나, 쉽게 실증을 느끼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것이며, 견고한 것인가를 따져 보아야 한다.
가급적이면 플라스틱으로 완전히 고형된 물건은 피해야 한다. 쓰다가 고장 나면 쉽게 고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다른 용도에 전환할 수 있는 물건이 좋다.
그리고 1회용 물건은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한다. 조금 편리하고 위생적이라고 해서 1회용을 선호하는 것 같은데, 그것은 우리의 환경을 1회용으로 취급하는 것과 같은 생활 자세다.
또한, 쓰고 버리는 물건도 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꼭 버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어떻게 잘 응용하면 다른 용도에 쓸수 없는지? 내게는 필요 없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더 쓸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지금과 같이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더 편한 것만을 위해 소비에 몰두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에너지를 아끼고 자원을 절약하면 공해를 줄일 수 있고, 그러면 우리의 미래는 밝을 수 있다.
범지구적 차원접근
우리는 모두 어머니인 지구의 자식이다. 어머니인 지구는 우리들 인류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생물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고 양육한다.
그렇지만 오늘날 인류사회는 어머니인 지구에 대하여 심한 폭력과 파괴를 일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출산, 육아, 교육에서도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병원출산, 인공포유, 관리적 육아와 교육 등 인간 본래의 생물적인 자연적 본성을 차츰 상실하게 됨으로써 머지 않은 장래에 그 비극적인 결과가 가시화될 것이다.
즉, 미래의 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정신적, 심리적 장애를 입고 있으며 몸과 마음이 모두 허약해짐으로써 장차 자발성과 창의성을 잃고 가축화되어 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이런 인간의 비극은 인간에게만 한하지 않고, 모든 생명체를 유지시켜 주는 지구라는 환경에도 악영향을 끼쳐, 지구의 종말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까지 몰아가고 있는데, 이런 비극적 현실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있는 것은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국수적(國粹的)인 편협한 민족주의 내지 국가주의의 팽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환경악화의 시대에서는 지구의 환경문제를 범세계적으로 아니, 지구적 차원에서 평가 대처해 나가야 하는데도, 환경악화에 따른 자국의 피해를 자국의 이익적 측면만으로 대처해 나가려고 하는데, 문제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것이다.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는 환경문제가 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기 이전의 애국, 애족의 가치관이다. 그러나 환경문제가 전지구적인 문제로 등장한 현실에서는 민족주의는 인류주의로 국가주의는 국제 내지 세계주의로 바뀌어 단 하나뿐인 지구를 구출, 보호해야 할 것이다.
즉, 이제는 같은 민족이라는 개념보다는 지구성의 한 인류로 그리고 자구상의 한 국가로 오늘의 환경 위기를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특집 I 홍익민주주의 시론( 환경보전)>3
주인의식 없는 文化환경이 自然환경파괴 가속화한다
民族力量 결집할 求心軸부터 바로 세워야
한종섭/향토사학자
보통 환경이라고 하면 생활환경이나 자연한경만을 떠올리기 쉽다. 쓰레기나 수질오염 등 가시적인 공해에 찌들린 나머지 제 3의 또 다른 환경에 대해서는 생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깊은 연구까지는 더욱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3의 환경
필자가 오랫동안 역사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열악한 문화환경의 개선 없이는 삶의 질은 물론 고질적인 병폐나 경제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고칠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나머지 이를 제 3의 환경이라고 명명하고 환경과의 연계고리를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열악한 문화환경으로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그만큼 문화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진 탓인지 몰라도 이 현실자체를 인정하려하지 않는 경향마저 있다. 또한 문화하면 배부른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지레 생각하고 아예 남의 일로 치부해 버리고마는 습성이 몸에 배어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편견인가를 지금부터 밝혀보고자 한다.
문화환경이 삶에 주는 영향력과 비중은 어느 정도이며 어떤 것에 오염되어 무슨 병에 시달리고 있는가? 실제로 필자가 오랫동안 겪었던 사실만을 본 보기로 예를 들어본다면 우리가 우리 뿌리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우리나라를 스스로 평가할 때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늘 이렇게 생각해 왔던 것으로 안다. 북쪽에는 거대한 대륙으로 이어진 중국, 많은 인구와 함께 방대한 면적과 자원, 이에 맞는 문화가 있었기에 고려 조선 시대는 중국문화에 심취되어 왔었고 지금에 와서는 경제 대국 일본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즉 나 자신을 가꾸어보고자 하는 의욕보다는 이 작은 땅에서 또는 내세울만한 것도 별로 없는데 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낮게 비하시키면서 체념해 버리는 것에 익숙해 졌던 것이다.
지난 역사를 보는 시각에서도 거대한 중국 대륙과 단합된 지형의 섬나라 일본 사이에서 항상 외침으로 시련만 당하고 살아왔던 민족이라고 이야기하면 어느 정도 수긍을 하지만 이와 반대로 삼국시대 백제가 일본지역을 다스렸고 중국대륙을 차지할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고 한다면 국수주의적 발상이며 재야 사학이라고 핀잔을 주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이런 견해는 특히 많은 대중과 지식층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던게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생각했던 대중적인 것이 옳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래도 지구는 돈다던 갈릴레오의 독백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주장했던 것이 과연 진실이었을까?
그러나 백제 건국지의 거대한 유적이 발견되면서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몇 사람만의 주장이 오히려 역사의 진실로 밝혀지기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지식층에서 보편성을 주장했던 것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잘못이 있었던가를 분석해 볼 때 우리 문화환경이 오염될대로 오염되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판에 박은 고정 관념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고정관념
확실한 근거도 없이 배척만 하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왜곡을 스스로 불러들인 결과가 되었다.
삼국 중에서 백제는 제일 먼저 쉽게 멸망한 나라로 정치권에서 신라는 경상도, 백제는 전라도라는 등식에 의해 조성된 그릇된 환경에 길들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멸망할 때는 일대일의 싸움에서 허무하게 쓰러진 것이 아니다. 신라와 당나라 백제와 일본이 격돌한 동양최초의 국제전을 통해서 건곤일척의 승패가 가름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493년간의 도읍지가 경기도 한강주면이었고 63년간의 공주, 122년간의 부여도읍지 역시 충청도 땅으로 실제 백제인의 주류는 경기도로서 변방이었던 호남지방에 치우쳐 생각했던 것도 오염된 환경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일본 고대국가 성립과 연루된 백제를 일본학자들이 축소시키기 위해서 부족국가 또는 성읍국가로 왜소하게 평가하는데 경도되어 몇만평되지 않는 규모의 성(城)을 초기 도읍지로 보았고 삼각사기 초기 기록을 조작된 것으로 평가절하했던 것이다.
그러나 45만평에 이르는 초기 도읍지와 연계된 남한산성과 몽촌토성, 풍납토성, 아차산성 등 잃어버린 군소 성(城)들을 모두 합치면 고대국가로서 이보다 더 큰 규모의 세력을 가진 국가도 드물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지금까지 일본 학자들이 조성해 놓은 오염된 문화환경에 빠져들어 중독되었다는 표현이 옳을런지 모른다. 위축될대로 위축된 왜소병(倭小病)을 앓고 있었기에 찬란한 민족의 업적을 잃어버린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왜소병으로 축소
이런 역사의 교훈을 통해 시련을 많이 겪은 국가나 민족일수록 보다 단련되어 강하고 끈질긴 저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남북으로 적과 대치했던 백제는 시련을 겪은 만큼 강한 힘을 길렀고 중국이나 일본으로 진출하여 거점을 형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 시대의 요구된 상황이었다. 전성기에는 삼국 중에서 제일 강대한 국가였음이 유적조사에서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이와같이 잘못된 문화환경에 오염되면 그 파장이 다음과 같은 무서운 증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는 온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즉 1) 위축된 정신으로 자기 자신을 낮게 바라보고 판단하는데 치우치기 쉽다.
2) 혼을 심고자 하는 정신력이 약해진다. 역사에 대한 긍지가 없기 때문이다.
3) 내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키고자 하는 주인의식이 약해진다.
4) 깊고 멀리 생각하는 것보다 쉽게 포기하고 쉽게 단정해버리는 즉흥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위와 같이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근본 정신적인 것이 대부분이기에 삶 자체의 근본이 무너지는 현상으로 그 폭은 넓고 오류는 매우 심각하다는 것이다.
내 것 소중함 몰라
아무 거리낌 없이 명산을 허물어버리고 자연이나 심지어 문화재까지 훼손하는 것은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혼을 심고자 하는 정신력이 없고 길고 멀리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없다는 증좌다. 기업이나 개인이 각종 공해를 서슴없이 일으키는 것도 주인의식이 부족하거나 자기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데서 연유한다.
따라서 이는 시류에 영합하여 저지르는 자의적인 행동에 대해 자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이보다 더 무서운 병은 없을 것이다. 자신을 낮게 평가할 때는 수치심이 상대적으로 희석되기 마련이어서 환경파괴에 그만큼 둔감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열악한 문화환경이 잘못된 정신구조를 만들고 이에 편승한 저질적인 행동양식이 곧바로 환경파괴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근본을 정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이며 이에 걸맞는 건전 문화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막상 문화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하더라도 그 문제와 해결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환경파괴에 둔감
보이지 않게 시름시름 병들어 눕게 되는 속앓이와 같이 그 처방과 치료에 있어서 장기적이고 꾸준한 노력없이는 안되는 증상이다.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외상이라든가 배고파 못견디어 하는 증세와는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존재로 무엇인가 끊임없이 움직여야 된다. 이런 활동, 즉 살아있다는 몸부림을 바르게 유도하지 않으면 럭비공마냥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튈 수 밖에 없는 것이 또한 사람의 속성이다. 즉 그것은 과소비적이거나 향락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내실이 없다보니 겉보기만이라도 번지르르 번쩍거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속이 빌수록 과시욕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며 이것이 다시 과소비로 이어지는 악순환 속에서 생활환경은 병들어 가는 것이다.
이런 무분별이 자연환경파괴의 주범으로 등장한지는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문화환경이 좋은 곳일수록 사람의 심성순화를 촉진시키기 때문에 특히 문화재가 많은 지역 주민들의 생각이 더 깊고 범죄가 적게 일어난다는 통계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먼저 스스로 본받을 수 있는 표상의 인물(역사인물이나 훌륭한 조상 가운데서 선택) 을 선정하고 그들의 정신을 이어받으려는 노력으로 마음의 균형을 바로 잡도록 하는 것이다. 마음이 흔들리거나 거취없이 흐트러지는 것을 막기 위한 구심축을 세우는 작업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이 건전함과 삶을 풍요롭게 살찌우기 위해서 자신에게 알맞은 문화적 취향을 추구하고 북돋우어 가는 것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운 항목이다.
향기있는 사람들
예를 들면 어느 상점에 들어섰을 때 주인이 쓴 시 한 구절이 가게 벽면에 붙어 있는 것을 보고 단순히 이윤만을 추구하는 얄팍한 상인만으로만 보지 않고 푸근한 정서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조그만 문화공간이 그 영역을 잉크 번지듯 넓혀가는 사회.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구걸하는 사람처럼 행인들의 심금에 호소하는 아주 작은 문화행위가 거창한 구호나 정책보다 더욱 값지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성숙은 그만큼 앞당겨 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소신껏 살고자 하는 향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대접을 하는 풍토가 조성될 때 생활환경이나 자연환경의 오염의 근원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집 I 홍익민주주의 시론( 환경보전)>4
자연과 사람은 하나다
生態倫理의 재정립 시급
김준호/서울대학교 생물학과 명예교수
옛날에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자연 환경의 파괴가 자주 일어나고 또 큰 규모로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에 남해에서 시프린스호가 좌초되어 막대한 양의 기름을 바닷물에 흘렀고 뒤이어서 전대미문의 적조가 남해 일원을 휩쓸게 되었다. 적조로 말미암은 물고기의 죽음을 텔레비에서 보는 순간 지구의 종말과 무관하지 않구나 하는 탄식을 나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기름오염을 줄이려고 지나치게 많은 유화제를 뿌린 것이 큰 적조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전문가의 해석이다.
과학기술의 한계
해석이야 어떻든 양식하던 물고기의 떼죽음을 본 어부들의 괴로운 심정과 앞으로의 생활이 걱정된다. 기름오염과 유화제 살포가 큰 적조를 가져온 결과는 환경오염을 과학기술로 다스리지 못함을 입증하는 한 예이다. 기름오염을 비롯한 요즈음의 환경오염은 사람에 의하여 일어난 인재이다. 사람의 잘못으로 일어나는 환경오염을 과학기술이나 법률이나 행정력으로 막으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이 일으킨 환경오염은 본질적으로 사람 자신의 양심으로 치유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본다.
사람이 자연을 바라보는 자연관(自然觀)은 환경을 보전하느냐 파괴하느냐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인간의 자연관에 3가지 다른 견해가 있음을 인류학자 클러콘(Kluckhon, 1905~60)은 밝히고 있다. 즉 자연 밑에 사람이 존재하는 예속관(隸屬觀), 자연과 사람이 똑같은 위치에서 조화를 이루는 조화관(調和觀), 그리고 자연 위에 사람이 군림하는 정복관(征服觀)으로 분류하였다. 이들 자연관은 서양과 동양에서 각각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변천하여 왔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386~822 B.C.)는 자연의 구성원을 무생물, 식물, 동물 및 사람으로 분류하고, 무생물에 생장과 번식의 능력을 점지한 것이 식물이고, 식물에 운동과 감각의 능력을 점지한 것이 동물이며, 더 나아가 동물에 이성(理性)을 점지한 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식물이나 동물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 있음을 강조하는 정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자연관은 인간의 자존심을 만족시켰으므로 서양인의 자연관에 오랫동안 뿌리내리게 되었다.
인간중심 자연정복관
더구나 그리스도교의 자연관은 인간중심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을 닮은 사람은 만든 다음 그에게 식량이나 즐거움을 주는 동식물을 창조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지배하게 한다. 이 자연관은 이성을 가진 인간을 최고 지위에 받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과 자연을 엄격히 구별하고 자연을 인간이 지배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이 정복관은 오랫동안 유럽인의 자연관을 지배하여 왔다.
또 다른 서양사상의 흐름은 고대 그리스의 고전적 자연관에서 유래한 기계론(機械論)이다. 기계론은 복잡한 기계를 분해하여 각 부품의 성질과 기능, 그리고 부품과 부품 사이에서 일어나는 법칙성을 발견하는 분석적 방법이다. 종전까지 전체를 막연하게 봄으로써 애매했던 자연현상이 기계론의 분석적 방법으로 쉽게 밝혀졌다. 기계론적 방법은 만물을 창조한 전지전능한 하나남의 뜻을 알리는 수단과 상통한다고 해석되어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융합하게 된다. 그리고 기계론적 방법으로 얻은 자연과학의 지식은 자연을 정복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르네상스시대에 접어들어 지동설(코페르니쿠스, 1437~1543)과 천체운동법칙(케플러, 1571~1626)은 지식은 힘이다, 지식을 이용하여 자연을 인간에게 이롭도록 정복하라라고 주장하여 근세 서양인의 자연관을 대변하였다. 더구나 20세기 중엽에 서양을 풍미한 실용주의 철학(듀이, 1859~1952은 자연을 정복하는 행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동양의 자연조화관
영국의 탄슬레이(1936)는 자연계를 수많은 식물, 동물, 미생물, 물, 공기, 햇빛 등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생태계(ecosystem)로 상정하고, 생태계 내의 각 구성원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의존과 상호견제가 일어남으로써 평형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 이론은 현대 과학에서 자연을 통찰한 생태계의 평형이론으로 겨우 60년 전에 정립된 것이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수천년 전에 이미 동양철학(東洋哲學)과 도가사상(道家思想)과 불교교리(佛敎敎理에서 자연평형의 이론이 정립되고 전수되어 왔다.
동양철학에서는 환경을 대자연(大自然)과 자연(自然)으로 구분한다. 동양의 자연주의 철학자 (예컨대 ?象)들은 대자연을 천지(天地) 또는 우주(宇宙)라 생각하고, 자연을 땅위의 만물(萬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자연을 천지자연(天地自然) 또는 우주자연(宇宙自然)이라 하여 어미에 자연을 붙이는데 반해, 만물은 자연만물(自然萬物)이라 하여 어두에 자연을 붙여 표기한다. 따라서 천지자연과 자연만물을 하나로 통합하면, 자연은 천지와 만물 사이에 다리를 걸쳐서 전지-자연-만물의 위치가 정해진다. 여기에서 천지는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만물도 홀로 존재하지 못하므로, 자연은 양자 사이에 개재하여 조화를 유지함을 강조한다. 이처럼 동양에서는 아득한 옛날에 자연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자연과 천지만물의 조화를 이해하고 있었다.
생태계는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만물에 해당한다. 만물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풀이한다. 음양(Interacting principles of chinese philosophy)이란 음과 양이 서로 조화되는 관계를 말하면, 음속에는 양이 싹터서 자라고 양 송에는 음이 들어 있어, 양자가 서로 배타하지 않고 보상하여 조화를 이룸을 뜻한다.
五行의 相生相剋의 원리
오행(five elements of the chinese cosmogony)이란 일상 생활 용품을 만드는 기본재료인 쇠(金), 나무(木), 물(水), 불(火), 흙(土)과 같은 만물의 실재이며, 생태계의 여러 구성원에 해당한다. 오행의 5요소 사이에는 한 요소가 다른 요소를 배척하는 상극(相剋)의 관계가 있다. 즉 상생의 관계에서는 나무가 불을 낳고(木生火), 불이 흙을 낳고(火生土), 흙이 쇠를 낳고(土生金), 쇠가 물을 낳고(金生水), 물이 나무를 낳고(水生木). 이러한 상생은 생태계내의 한 구성원과 다른 구성원 사이에 상호관계가 일어남으로써 기능(機能)이나 독성(毒性)이 강화되는, 이른 바 상조작용(synergism)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오행상극의 관계는 생태계 내의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과 반응하여 기능을 감소시키는 이른 바 길항작용(拮抗作用 antagoinism)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만물, 곧 생태계의 구성원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의존과 상호관계를 동양철학에서는 수천년 전에 명쾌하게 정립하였다.
주역(周易)에서는 만물(생태계)의 평형을 음약, 승강(昇降), 진퇴(進退), 소식(消息)으로 풀이한다. 즉 생태계의 모든 현상을 상한(upper limit)과 하한(lower limit)을 반복하여 동적 평형(動的平衡)을 이루는데, 예컨대 쥐와 족제비 사이의 먹히고 먹는 관계에서 쥐가 증식하면 족제비도 따라서 증식하여 상한에 달하고, 족제비가 증가하면 쥐가 감소되어 하한에 이리는 주기(週期)가 되풀이됨을 설명한다.
한편, 불교에서 우주만유(宇宙萬有)에 대한 세계관을 나타낸 연기론(緣起論)에서는 모든 존재가 상대적 의존 관계로 이루어짐을 가르치고 있다. 반야경(般若經)은 모든 법(法)은 공(空)한 모양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더러운 것도 아니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不淨 不增不減)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이 내용도 만물이 상호의존적으로 연관되어 동적 평형이 이루어짐을 가르친다.
道ㆍ佛 융섭자연관 형성
한국인의 자연관은 동양철학에 바탕을 두고 불교사상에 영향을 받으며 더 나아가 도가사상(道家思想)과 풍수지리사상(風水地理思想)을 흡수하여 한국에 고유한 조화관을 형성하였다.
도교(道敎, taosin) 는 노자(老子. 600?B.C.)에 의해 정립되었고, 장자(莊子, 400?B.C.)에 의해 발전되었다. 공자와 맹자에 의해 정립된 유고(儒敎)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도교는 사람과 자연 사이와 조화관을 규정한데 특징이 있다.
도교에서는 사람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고 자연과 조화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즉 노자는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립하고 있다. 사람은 땅을 법칙삼아 어긋나지 않고 (人法地), 땅은 하늘을 법칙삼아 어긋나지 않으며(地法天), 하늘은 도를 법칙삼아 어긋나지 않고(天法道), 또는 자연을 법칙 삼아 어긋나지 않는다(道法自然) 여기서 도는 현상만물의 근원이고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이며 변화를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풀이한다(이남영,1986). 그리고 도는 감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유(思惟)에 의해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며, 변화무쌍한 자연 현상을 깊이 통찰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직관(直觀) 또는 달관(達觀)의 대상이다. 도는 천지(天地)의 시원(始源)이며, 만물을 생성하고 자라도록 하는 능력을 지녔고, 만물은 도로부터 생장의 능력을 받게 되므로 도는 곧 덕(德)이라고 풀이한다. 따라서 도는 천지만물을 생성하고 덕은 이것을 잘 키우는 것이다(道生之 德畜地). 덕을 유교에서는 인간의 행동규범을 규정하는 데 반하여 도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한 만물의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원리로 규정한다.
풍수지리설 영향 커
노자의 사상을 한층 발전시킨 장자는 도의 기능을 만물이 스스로 생겨서 스스로 변화하고(自生自化),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도 자기 모습을 유지하며(?立轉化), 거대한 자연계내에서 만물이 끊임없이 순환한다(循環反應)고 풀이 한다. 장자의 이 이론은 실로 2500년 전에 생태계 내의 물질순환을 벌써 설명했던 것이다. 이처럼 도가사상은 사람과 자연의 관계를 생태계의 원리에서부터 풀이하듯이, 심오한 조화관으로 맺어주고 있다.
한편 풍수지리사상이 원리는 천지인(天地人)의 관계를 호혜(互惠)와 조화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천은 하늘을, 지는 땅을, 인은 사람을 뜻하는데, 이 3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어우러져서 조화된 자연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우리 한민족은 북부아시아의 평원에서 살다가 소빙하기를 맞이한 5000년 전 이래로 한반도를 남하하여 안주하였다고 한다. 남하한 한민족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거나 자연에게 예속되는 일이 없이 사람과 자연이 조화된 생활 터전을 마련하였다.
생태적 양심이 관건
손상된 자연환경을 과학기술이나 법을 배경으로 한 행정력을 동원하여 복원하려는 시도는, 기름유출의 예에서 언급하듯이, 부작용을 낳는 결과를 가져온다. 마치 환경파괴에 대한 과학기술은 급성환자에게 극양을 먹여서 응급치료를 했다가 재발하는 격이지만, 자연환경을 보전하려면 생태윤리(生態倫理) 또는 환경윤리(環境倫理)라는 예방의학에 의존해야 한다.
윤리는 본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립된 도덕률로서, 특히 유교에서는 인간윤리가 강조되고 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생태윤리는 사람과 자연 사이에 정립된 윤리이다.
생태윤리는 197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철학자와 생태학자들이 연구하기 시작하여 1979년 환경윤리(Environmental Ethics)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연 4권 발간됨)라는 전문 학술지가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양의 생태윤리는, 전술한바와 같이, 서기전 3~5세기에 노자․장자의 도가사상에서 사람과 자연 사이의 도덕률로 정립되었고, 한국에서 풍수사상과 불교의 조화관이 곁들여져서 우리 고유의 생태윤리가 한국인의 의식과 생활 속에 스며들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환경이 파괴되어 가는 현시점에서 생태윤리의 중흥 내지 재정립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김준호, 1988,1992)
생태윤리(ecoethics) 는, 마치 사람과 사람이 접할 때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를 구별하듯이, 사람이 자연을 접할 때 선악이 다른 두 행위를 생태적 양심(ecological conscience)에 입각하여 구분하고 선한 행위를 하게 하는 도덕률이다.
생태윤리에서 선한 행위는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생물과 생물군집의 보호, 그 안정성의 유지, 자연의 심미감 보전, 재배식물과 사육동물에 대한 감사 표시, 천연자원과 에너지를 이용하여 만든 일상용품의 절약, 자연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 에너지, 곧 태양력, 수력 및 풍력의 이영, 생활용품과 쓰레기의 재이용과 재순환, 자연에 흔적(오염물질)을 남기지 않는 배려, 자연 자원을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생활, 생태권(生態圈, 사람과 모든 생물이 살고 있는 지구 표면)을 영속적으로 안정을 유지시키고 위기에 빠뜨리지 않는 실천 등이 속한다.
생태윤리에서 선악을 올바르게 구별하려면 생태학 지식을 갖춰야 한다. 생태학에 관한 지식이 없으면 자연환경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생태적 양심에 따라 선악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연자원 제자리 복귀
올바른 자연환경의 보전에 필요한 생태학 지식은 (1) 생태계 보전, 안정성, 종의 다양성 및 심미감에 대하여 이해하고, (2) 생태계의 구성원인 생산자, 소비자 및 분해자 중에서 사람이 소비자의 일원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하며, (3) 생태권의 모든 생물은 생존할 권리가 있으므로 인간이 그들을 간섭하거나 제어하지 않음을 이해하고, (4) 자연 자원은 그 낭비가 자연환경의 오염이나 파괴와 직결되므로 본래의 위치로 복귀시키는 일 등이다.
공업화가 한국에 상륙하여 자연환경을 비판없이 마구잡이로 훼손할 때 한국인은 정복관에 무기력해져 있었다. 자연의 정복자들은 경제 일변도의 정책과 기업의 이윤추구와 상업주의의 비호를 받으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조화관을 깔아뭉갠 채 자연환경의 파괴를 일삼았다. 그들은 과학(생태학)과 생태윤리가 없이 오직 기술만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파괴가 가중되었다. 사람에 의하여 파괴된 자연환경은 사람이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는 생태적 양심에 바탕을 둔 생태윤리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특집 I 홍익민주주의 시론( 환경보전)>
돈과 맞바꾼 생명과 환경, 누가 책임지나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秘資金파동 이후를 생각한다
남상민/배달녹색연합 연대 사업부장
이 겨울의 잿빛하늘만큼이나 우울한 마음들이 휑한 가슴을 안고 분노의 말들을 토해내고 있다. 한달 가까이 우리 사회는 집단적으로 심리적으로 공황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의 중요한 고비와 변화들은 평범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을 한데 묶어 극적으로 분출하는 것보다는 평범한 상식들을 무참히 꺾어버리는 일들로 만들어져 왔기에 역사의 흔적을 더듬는 우리의 마음은 뭉클한 흥분보다는 냉소로 가득차 왔다. 그래서 대통령과 정치인들의 화려한 수사에 뜨거운 감동보다는 냉소적인 반응이 먼저였고, 그 말들의 속뜻을 순식간에 파악하는 지혜를 갖게 되었다.
숱한 언어들의 붕괴
오래전부터 떠돈 전직 대통령의 수천억원 비자금설에 대해 당사자가 될 법한 사람들이 화를 낼 때 우리의 무지렁이 백성들은 어느쪽이 진실인지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가 화를 낼 때 사람들은 그를 믿어주기 보다는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옛말이 오히려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온갖 역사의 풍상을 겪어온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혜안은 슬프게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음이 증명됐다. 비자금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기 바쁘게 상식으로는 규모를 예측할 수 없는 규모의 돈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끝없이 은행에 묻어둔 장독속에서 줄줄이 달려나왔고, 마침내 방귀 뀌고 성내던 자는 감옥으로 갔다. 옛말에 안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허탈과 좌절감을 남긴채 특별 감방을 향해 어둠속으로 달려갔다. 지금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을 감옥으로 마침내 보낸 우리사회에는 후련함 보다는 어떤 좌절감이 더 깊어가고 있다. 그에 대한 깊은 연민때문인가? 그것이 결국 진실로 드러난데서 갖는 허탈감 때문만은 아니다. 국가, 도덕적 가치, 정치, 사회적 관계, 성실함, 신뢰, 역사 등… 대통령이라는 가장 포괄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을 이용한 그의 범죄는 우리가 인간의 정치경제적 행위의 가치를 표현하는데 사용되는 숱한 언어들의 붕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또한 비자금의 피해는 단순히 그 돈을 모은 과정에 대한 도덕적 문제만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수십억, 수백억원씩 받아 챙기면서 발주한 수많은 건설공사와 비자금을 위해 새롭게 입안된 정책들이 우리경제, 사회, 환경에 앞으로 미칠 영향은 얼마나 클 것인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온 핵에너지 정책을 고수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핵발전소 건설이 엄청난 정치자금원이 됐기 때문이라는 세간의 속설을 그는 전두환씨와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증명했다.
核사고 위험 배제못해
돈과 맞바꾼 핵발전소가 앞으로 우리 사회와 환경에 얼마나 심각한 위협을 안겨다 줄 것이라는 것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어느 한순간 핵사고가 일어난다면 그 규모는 이번 비자금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재앙을 안겨줄 것이다. 많은 문제점들이 수 없이 제기된 영종도 신공항 건설은 또 어떤가? 경제, 안전, 교통, 환경적인 측면 등 모든 부분에서 다른 후보부지보다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평가된 영종도 신공항 건설계획도 그와 재벌들의 돈욕심으로 결국 성사된 일은 아닌가? 그 외에 저유소 건설, 대규모 토목 공사 등 많은 문제점들이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것들을 보면 결국 오도된 정책결정 과정과 맞닿아 있고, 그것은 잘못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부패와 든든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것들이다. 그의 욕심은 비자금과 생명 환경을 맞바꾸도록 한 것이다.
골프장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골프장 건설을 인가받기 위해서는 청와대의 허가가 필요하고 결국 수십억원의 돈을 청와대 등에 갖다 바쳐야 된다는 것은 상식에 속해 왔다. 결국 이번 비자금 조사에서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 상식이 결코 그르지 않았음이 증명되었다. 노태우씨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는 동안 골프는 대중스포츠라는 이름으로 둔갑되었다. 대중 스포츠 진흥이라는 명목으로 박철언씨가 체육청소년부 장관으로 그럴듯한 자리를 옮겨 앉도록 했고, 노태우씨의 대통령 재직기간동안 골프장 건설허가는 남발되어 무려 139개나 이루어졌다. 이 숫자는 운영, 건설, 건설예정 중인 골프장을 전체 합친 숫자(1995년 4월 현재)의 70%에 해당되는 숫자이다. 그와 비례하여 골프장 건설 반대운동은 지역주민운동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될 정도로 곳곳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산을 허리채 잘라 국토를 곰보처럼 만들고 수많은 농민 등 지역주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골프장의 증가는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기존의 70% 허가 남발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장이 1897년 원산에 건설된지 100년 가까이 지났다. 반환경적인 골프장 이유를 먼저 골프장 건설업체의 논리에서 찾아보자. 골프장 사업자 협회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18홀 짜리를 기준으로 2,816개가 가능하고, 국민소득 증가에 따라 늘어날 수 밖에 없는 골프인구의 숫자를 일본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려해보면 5년후에는 260여개의 골프장이 운영되어야만 한다. 그들의 논리로 보면 체육 시설로 편입시켜 놓고는 세제상으로나 행적적으로 불합리하게 규제정책을 펴고 있는 문제점 등 대폭 개선되어야 할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특히 정부나 사회의 그릇된 이해를 인해 건전한 스포츠가 대중화 되는 것이 좌절되어서는 안된다. 사업자들의 얘기다. 그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합리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생태적 자원에 대한 애정과 효율적 이용을 위한 열정도 아낌없이 토로한다. 골프장은 임야의 경제성을 높이는 측면에서나 새롭고 아름다운 생태적 환경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자연의 재창조 과정이다. 잔디는 온갖 생명체의 터전이 되고 물의 저장고가 되는 녹색댐이다. 이 외에도 그들이 할말은 많다. 자본의 축적의 이유가 아니라 대중의 이익을 위해 골프장은 끊임없이 건설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사업자들의 논리는 잘못되었고 골프는 반드시 나쁜가? 왜 하나의 건전한 스포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보다 많은 사람에게 골프를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지역개발을 위해서 골프장은 더 늘어나야 한다는 논리는 타당하지 않은가?
경기도는 골프도?
95년 초 현재 전국적으로 운영 중에 있는 골프장의 숫자는 모두 88개이다. 그리고 건설 중인 것은 42개, 예정인 것 69개를 합치면 총 199개로 늘어난다. 그 중에서 102개(운영중인 47개)는 교통접근성이 가장 좋고, 산의 경사도가 낮아 골프장 건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쉬운 경기도에 밀집되어 있다. 그 숫자와 비율은 경기도를 골프도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진실에서 비켜 서 있는 말이 아님을 증명한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골프장의 평균 면적은 대력 36만평 정도이다. 한국 자연에 골프장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은 먼저 절토양(切土量)으로 드러난다. 93년에 발표된 골프장 조성을 위한 지형 변화 예측모델에 관한 연구(안득수 박사)에 따르면 18홀 규모의 골프장 건설을 위해서는 평균 688만 입방미터의 땅을 깎아내거나 메워야 한다. 이 부피는 동양 최대라고 하는 소양강댐의 70%에 해당하는 양이다. 심지어 이 평균치의 두배에 가까운 1,235입방미터의 산이 뭉개지고 메워진 예도 있다. 평균경사율이 35%이상인 산에 근사한 잔디밭을 깔기 위해 이루어지는 이런 엄청난 절토는 91년 용인에서 50여명이 산사태에 깔려 숨지도록 만들었다.
한국의 자연은 잔디의 밀집식재에 적당하지 않다. 온갖 공 들여 잘 가꾸어진 잔디밭도 관성용에 불과하다. 보호를 위해 사람들이 발걸음을 최대한 억제해야만 한다. 조성의 음덕을 얻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우리에게 묘둑의 잔디 가꾸기는 왜 그리 어려운가? 손등만한 묘둑에 안쓰럽게 소실된 잔디는 몇 해만 사람손을 거르면 숱한 들풀에게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래서 골프장의 잔디가 나이스 tit의 환호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 그래서 94년도에는 96품목의 농약이 헥타르당 균 14.8kg이 사용되었고, 어떤 골프장의 경우는 47.5kg까지도 사용한 것이다. 골프장 농약 문제가 오죽 심각하면 환경부가 과천 정부종합 청사 잔디밭을 유기농법으로 시험재배 하려고 할까? 하지만 전문가가 없어 시험재배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골프장 건설, 운영에 농약사용은 앞으로도 필연적일 것 같다.
골프장 반대 국제운동
잔디가 왕성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5~6월에는 특히 많은 물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기후적 조건은 잔디를 만족시킬 수가 없다. 결국 많은 양의 물을 뽑아올려 써야 하고, 그래서 경기도 광주 곤지암 컨트리 클럽 아래쪽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지하수마저 제대로 못마시게 되어 버렸다. 물의 지나친 사용은 빗물의 수요공급 시기가 맞지 않는데에도 있지만, 골프장의 잔디 식재를 위해 흙을 바꿔버린데에도 기인한다. 수만년이 걸려 만들어지는 표토는 한줌에도 수십가지의 생명체를 안고 있다. 나무의 들풀의 씨앗과 곤충의 다음 세대까지. 하지만 잔디끼리만 동질적인 집단을 이루어야 하는 골프장에는 오랜 역사와 생명을 안고 있는 표토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일 뿐이고, 물빠짐에도 좋지 않다. 그래서 수십센터씩 걷어내고 모래와 마사토를 대신 깔아야하는 것이다. 밑 빠진 독처럼 되어버린 새로운 토양과 잔디는 끊임없는 물의 공급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푸르름이 생명이 상징이 될 수 있는가? 사업자들이 강변하는 논리중의 하나는 잔디밭이 생명의 터라는 것이다. 숱한 나무와 풀과 벌레들을 몰아내고 단일하게 인공화된 생태계에 터잡을 수 있는 생물 종이 몇가지나 되는가?
공동체 해체만 가속
스코틀랜드의 양치기들이 자연적으로 목초가 멋지게 펼쳐져 있는 들판에서 심심풀이로 했다는 유래를 가진 골프장이 미치는 해악은 비단 우리의 문제만이 아니다. 많은 나라에서 자연과 사회적 조건을 무시한채 정치․자본가에 의해 마구잡이로 이루어지고 있는 골프와 골프장은 지역공동체와 환경문제를 악화시키는 존재가 되고 있으나, 자본의 탐욕성과 부패속에 그 수가 늘어만 가고 있다. 그래서 지난 92년 4월에 세계 골프장 반대 국제운동(GAGM, Glbal Anti-Golf Movement)가 만들어졌고, 93년부터 매년 4월 29일에 골프없는 날(No Golf Day) 행사를 많은 나라의 민간단체들이 해오고 있다. 올해의 경우 한국에서도 환경단체와 지역주민이 함께 서울시내에서 기념식과 거리 행진을 가졌다.
골프장의 환경적 비용의 문제에는 동의하지만 지역경제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필요성을 강조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20여개의 골프장이 운영되고 있는 용인군의 경우는 골프장을 통해 얻는 세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기초자치단체가 용인군이 되어야 하는가? 지방화 시대에서 지역경제 개발의 개념과 형식은 명백히 전환되어야 한다. 지역의 자연과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하여, 지역사회로 편익이 되돌려 질 수 있는 개발모형이 모색되어야 한다. 외부 자본개발은 지양되어야 하며, 그서의 전형인 골프장 건설은 당연히 지양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 운동을 즐기는데 평균 150평을 차지해야 하고, 수많은 생명과 지역주민들의 공동체의 따뜻함을 한순간에 앗아가는 골프장이 더 이상 건설되어서는 안됨을 노태우 비자금 사건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한다.
<특집 I 홍익민주주의 시론( 환경보전)>6
천지인 합일로 “자연을 지키는 파수꾼” 유기항옹
“땅이 살아야 지구가 살고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편집부
문명의 발달은 인류를 “장미빛 미래”로 안내하는 듯 했다.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인류는 보다 많은 시간을 과학을 연구하는데 힘썼고 그만큼 더 생활은 편리해졌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즐거움을 채 누리기도 전에 인류는 자신들의 엄청난 잘못을 깨달아야 했다. 인류의 손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어버린 자연이 인류 생각의 범주를 넘어선 복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극복했다고 생각한 괴질은 물론, 새로운 질병까지 창궐하여 인류의 목숨을 시시각각 노리고 있다.
땅은 하늘과 인간 잇는 징검다리
자연을 이루는 흙과 물, 대기는 이미 오염의 한계치에 이르러,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은 이제 너무나 자명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연을 살리는 길뿐 인것이다.
유기항(76세․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동) 옹은 자연을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 세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흙을 살려야 한다는 게 유옹의 지론. 요즘 농법이 잘못되어 그나마 남아 있는 흙이 죽어간다는 것이다.땅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원래 천(天) 지(地) 인(人)은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셋으로 나뉘어 있는 것입니다. 땅은 인간을 바쳐주고 자라게 해주면서 하늘과 잇는 다리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유옹은 땅에 대한 철학이 이미 대성의 경지를 넘어선듯 하다. 유옹은 이미 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 놓았다.
제가 땅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은 56년경부터입니다. 흙을 살리는 길만이 앞으로 인류가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흙이 살면 농약이나 비료를 뿌리지 않게 될 것이고, 세제의 사용도 줄며, 그만큼 쓰레기의 양도 줄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대기, 수질 오염도 줄지 않겠습니까?
유기항 옹이 토질을 살리기 위해 고심을 하던 어느날, 그는 한 잡지에서 제오라이트의 특성에 대해 실린 것을 보았다. 신의 계시일까. 그는 문득 제오라이트를 잘 이용하면 흙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것만 같았다. 잘 다니던 상공부 근무를 집어치우고 그는 제오라이트 연구에 매달렸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연구비를 준 것도 아니었다. 제오라이트 연구는 유옹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외국의 관련서적을 들쳐보던 중 외국에서 제오라이트를 객토제로 쓰고 있음을 알았다. 제오라이트의 특성 때문에 객토제로 뿌릴 경우 비료나 농약을 치지 않고도 한해 농사를 거뜬히 지을 수 있다는 것.
신비의 광물 제오라이트
광물학을 전공한 그는, 제오라이트가 응회암으로 우리 나라에도 많은 광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외국의 제오라이트 이용은 간단하고 단순했다. 제오라이트만을 흙에 뿌려 지력을 높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매년 일정량의 제오라이트를 뿌려줘야 하는 불편과 자원의 이용이 비효율적이었다.
유옹은 국내 제오라이트를 수집하여 실험에 들어갔다. 외국의 제오라이트를 구해와 국내 것과 비교하며 연구를 했다. 그 결과 국내 제오라이트가 외국 것보다 훨씬 효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으나 매년 토양에 뿌려야 되는 불편은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여러 실험을 거듭한 결과 4가지 정도의 화합물과 결합하면 매년 뿌리지 않아도 지력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농업의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유옹의 제오라이트는 인고의 세월과 노력의 산물이다. 상공부에 편히 근무할 수 있는 것을 마다하고 그는 국토의 훼손을 조금이라도 막고자 토질개량에 뛰어들었다. 64년 유옹은 토질개량제로 첫 특허를 받았다. 지력을 살리고, 제오라이트에 함유된 풍부한 미네랄로 인해 생산된 농산물은 맛이 훨씬 뛰어나고 영양가도 뛰어났다. 또한 비료를 사용할 필요가 없어 생산단가를 낮추는 것은 물론, 바쁜 농촌 일손의 절감을 가져왔다.
유옹은 개선된 제오라이트를 포비석이라고 부른다. 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의미다. 포비석은 물질과 쉽게 작용하며 엄청난 양의 산소를 발생한다. 이 산소로 인해 농토 속에 있는 나쁜 세균과 병충해 균은 죽고 이로운 세균은 살아남아 작물의 성장을 돕는 것이다.
유옹은 이것으로 81년 두 번째 특허를 받았다.
포비석으로 특허 따내
한 정보당 소요 제오라이트 양은 약 15kg이다. 이것은 일본의 150kg에 비해 1/10 밖에 되지 않는다. 가장 큰 특징은 일본의 포비석은 해마다 뿌려야 되지만 유옹의 포비석은 아주 악한 환경의 땅이 아닌 이상 한번만 뿌리면 영구하다. 요즘 각종 화학물질에 오염된 땅도 한 10여년 뿌리면 지력이 살아날 수 있다고 한다.
요즘처럼 땅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유용의 포비석은 한여름 가뭄을 해소하는 소나기요, 사막의 오아시스다.
유옹은 무엇보다 땅이 살아야 모든게 살 수 있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연구를 사용할 만한 곳이 없다. 정부도, 기업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80을 바라보는 그가 농사를 짓기란 너무나 힘든 일이다. 또 포비석을 생산할만한 경제력이 그에겐 없다. 평생 포비석 연구에만 심혈을 쏟아 가세가 기운 탓이다. 그가 상공부에만 계속 근무했더라면 그나 그의 가족들 모두 편안한 삶을 살았을 지도 모른다.
유옹은 결국 포비석연구에만 매달릴 수가 없게 되었다. 잠깐잠깐 시간을 내 돈을 벌어야 했던 것이다. 포비석연구도 연구지만 가족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옹은 제오라이트를 이용해 연고를 만들었다. 땅을 살리는 신비한 광물이 인체에 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때문이었다. 그의 기대대로 제오라이트는 동상, 화상, 살이 썩어들어가는데 등 여러곳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80년대 초 북한산에서 실족한 어린이의 동상을 말끔히 치료한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동상과 화상의 괴로움에서 해방시켰다. 요즘은 각등반대에서 필수적으로 그의 제오라이트 연고를 찾는다. 유옹은 이 연고를 산소크림이라고 부른다.
유옹이 미국 한 의료센터에 문의해 분석한 결과 제오라이트의 신비한 효능은 제오라이트가 물질에 닿았을 때 많은 산소를 발생시킨다는 것. 최근 실험결과로는 엄청난 원적외선이 산소크림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한다.
얼마전에 제일제당에서 찾아봐 산소크림을 상품으로 생산하자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일단 효능을 검사하겠다고 하더군요. 이미 산소크림이 화상, 동상에 효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현재 제일제당 연구팀에서 제품 생산을 검토 중에 있는 것으로 압니다. 조만간 연락이 오겠지요.
산소크림으로 약품개발도
그 일만 잘되면 유옹은 농사에 뛰어들 생각이다. 그동안 연구를 파란 꿈으로 무럭무럭 자라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땅이 살고 물과 대기가 살아나 아이들이 맘놓고 뛰어놀 수 있는 세상을 유옹은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누가 같이 농사를 짓자고 찾아오지나 않을까 문에 귀를 가끔 기우려 본다고 한다.
찾아오는 사람은 참 많ㄱ습니다. 그러나 모두 제법만 일러 달라고 합니다. 포비석은 큰 기업에서 생산체제를 구축해 대량으로 생산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산단가가 올라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포비석을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야 하고 또 화학물질과 합성과정을 가처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생 한 길을 걸은 유옹. 하지만 그 길은 너무나 멀고 험난한 길이었다. 땅이 무엇인가.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땅이야말로 인류의 영원한 친구입니다. 땅에서 나고 땅으로 돌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사람입니다.
농사를 짓고 싶어하는 것도 유옹의 땅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포비석을 만들어 그가 땅을 살릴 수 있게끔 했다.
농원을 하고 싶습니다. 포비석을 뿌려 무공해 농사를 짓고 그 농산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저에게 무한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포비석으로 지은 농산품은 맛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향이나 품질도 최고입니다. 이미 제가 다 경험한 것들입니다.
무엇보다 땅을 살리고 농업을 살려야 한다는 유옹. 이러한 그의 땅에 대한 애착이 결국 그를 야인으로 내몰았고, 땅을 살리는 포비석을 만들게 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의 연구가 이 땅에 피어나는 것만이 간절한 소원일 뿐이다. 그의 소박한 꿈이 하루빨리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심순기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