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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푸른 녹음에 휩싸인 석굴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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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이종찬 |
| "언제쯤 올라오면 감포 앞바다가 보입니까?" "날씨가 제법 맑다고 생각하고 올라와도 늘 안개에 가려 있기 십상이니더. 차라리 아주 춥고 화창한 겨울날 올라오모 감포 앞바다도 보고 해돋이도 볼 수가 있니더." "그래요? 안개를 머금어 토하는 산이라더니... 역시 그렇구먼."
석굴암으로 들어가는 일주문에 다가가자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수위아저씨가 길을 가로 막는다. 오른 편에 있는 매표소에 가서 입장권을 끊어오란다. 3000원이란다. 수위가 손짓하는 매표소로 가다가 문득 생각이 거기에 머무르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비져나온다.
그래. 그게 있지 않은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석굴암 일주문으로 향하자 수위아저씨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을 크게 뜬다. 매표소에 표를 파는 사람이 없느냐는 투다. 그때 내가 눈웃음을 치며 오마이뉴스 기자증을 내밀었다. 아, 석굴암을 취재하러 오셨습니까. 진작에 보여주실 것이지 왜 그랬습니까? 깜빡 했습니다.
석굴암으로 가는 길은 오랜 세월동안 잘 다져진 황토길이다. 근데 아직까지도 곳곳에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매달려 나비처럼 춤추고 있다. 수학여행을 온 듯한 한 무리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저만치 앞장서서 걸어가고 있다. 한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종달새처럼 열심히 조잘대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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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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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이종찬 |
| 그래.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황토길을 걸어갔을까. 신라 경덕왕 10년, 서기 751년에 재상 김대성이 창건했다는 석굴암.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대체 몇 년 전이란 말인가. 가만. 올해가 2003년이니 무려 1252년 전이 아닌가. 그래.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지었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세웠다.
근데 나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이제는 피안의 세계로 돌아가신 부모님께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래.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살아 계실 때 이 석굴암을 다녀가셨다. 그때 내 어머니와 아버지도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을 걸어가셨을 것이다.
"지금 가더라도 대불을 가까이서는 볼 수가 없니더." "아니, 왜요?" "대불을 마치 마네킹처럼 유리벽 속에 가둬놓았니더. 그게 다 그 지독한 왜놈들 때문 아인교. 그라고 조립을 잘못 해가(해가지고) 석굴암 주변에 석굴암에 들어가야 할 돌들이 많이 남아 있니더."
그랬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제가 석굴암 복원공사를 했단다. 그것도 세 차례에 걸쳐서. 하지만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뒤 조립을 잘못한 까닭에 석굴암 내부에 있었던 불상들의 위치와 석굴암의 정확한 구조를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단다. 게다가 일제는 보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시멘트로 석굴암 둘레를 막아버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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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 바로 아래에서 흘러내리는 감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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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이종찬 |
| 그때부터 천년을 넘게 버텨온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차기 시작했다고 한다. 석굴암은 이곳 내부가 자연적으로 습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환기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었단다. 그래. 우리 조상들이 누구인가. 과학기술의 결정체라고 하는 석굴암뿐만 아니라 지금도 흉내내지 못하는 청자, 백자 등을 만든 분들이 아닌가.
"석굴암은 왜놈들이 물러간 뒤에도 계속 방치되어 있었니더. 그라다가 1961년에 다시 복원했니더. 그때 내가 일을 참 많이 했니더. 그러나 그때는 이미 왜놈들이 만든 시멘트벽 때문에 석굴암 벽면에 물방울까지 맺힐 정도였니더."
"그래요? 그러면 그때 또다시 완전 해체를 하고 새롭게 조립했는가요?"
"그때는 시멘트 벽 위에 공간을 띄어놓고 다시 시멘트를 발랐니더. 그라고 석굴암 내부에 환풍기도 달고, 목조전실을 만들었니더. 그때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에 대형 유리벽을 설치했니더."
"아아, 가엾어라. 유리벽 속에 갇힌 부처여. 유리벽 속에 갇혀버린 천년의 세월이여. 유리벽 속에 갇힌 우주여."
그때부터 석굴암 대불은 새장 속에 갇힌 새의 신세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 뒤 석굴암은 이러한 처지를 보상이라도 받듯이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고, 1995년 12월에는 불국사와 더불어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어이, 더워! 저기 있는 감로수라도 한 잔 마시고 올라가입시더." "커! 물맛 한번 정말 좋구나." "커, 시원하다. 한 바가지 더 마셔야지." "그렇게 오래 살고 싶수?" "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안 하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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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여래좌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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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경상북도 | 석굴암 입구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돌들이 흩어져 있다. 그래. 이 기묘한 형태의 돌조각들이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 복원할 때 조립하고 남은 돌들이라고 한다. '망할 놈의 일본놈들 같으니라구. 해체를 했으면 복원이라도 제대로 할 것이지, 시멘트는 왜 발라.' 저절로 입에서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온다.
토함산 동쪽 봉우리 아래 마치 왕의 무덤처럼 볼록하게 솟아있는 석굴암은 천연석굴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석재를 짜맞추어 만든 인공석굴이다. 이 인공석굴은 인도와 중국의 석굴사원을 본 뜬 것이라고 한다.
석굴 속에는 높이 3.48m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석가여래좌상이 앉아 있다. 그래. 불(佛)은 오늘도 동남쪽을 바라보며 천년의 미소를 짓고 있다. 아니, 어쩌면 속으로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감포 앞바다에서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던 불이 이렇게 컴컴한 전각 속의 대형 유리벽 속에 갇혀있다니.
석굴은 크게 원형주실과 방형전실, 그리고 간도(間道)로 구성되어 있다. 연꽃처럼 둥그런 원형주실은 구릉형으로 그 위에 봉토를 덮었다. 네모 반듯한 방형전실의 지붕은 원래의 지붕이 아니다. 1963년에 새롭게 목조건물을 덮은 것이다. 이마 한가운데 보석이 박힌 석가여래좌상은 그 석굴 정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있다.
유리벽 때문에 사진이 제대로 나올려나. 대형 석불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자 이내 회색빛 승복을 입은 보살이 카메라 앞을 가로막는다. 보살이 가리키는 곳에는 사진촬영금지라는 붉은 팻말이 붙어 있다. 네모 반듯한 전실과 굴 입구의 좌우 벽에는 팔부신상과 인왕, 사천왕 등의 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석굴 내부를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대형 유리벽이 자꾸만 눈을 가로막는다. 석굴 내부의 석가여래좌상 주위에는 천부입상 2구를 비롯한 보살입상 2구, 나한입상 10구, 관세음보살입상 등 모두 40분의 불(佛), 보살(菩薩), 천(天), 나한(羅漢)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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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멀리서 바라본 석굴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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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이종찬 |
| "정말 어마어마하네. 근데 원래부터 이 곳에 저렇게 큰 바위가 있었을까요?" "아니니더. 토함산에는 화강암이 아예 없니더." "그러면 저렇게 큰 돌을 어떻게 이 높은 곳까지 옮겨왔을까요?" "어디 불가사의한 것들이 이 석굴암 대불뿐이겠능교. 경주 곳곳이 모두 의문부호들로 꽉 차 있는데."
석굴암 내부를 둘러보고 석굴암 반대편 절 마당으로 내려오는 길가에도 석굴암 내부에서 나온 돌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괴씸한 일본놈들 같으니라구.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주절거리며 희부연 모래가 깔려있는 절 마당에 내려섰다. 마당 한 귀퉁이에는 돌꽃이 피고 이끼가 낀 삼층석탑 하나가 파수꾼처럼 외롭게 서 있다.
또다시 청마 유치환의 시가 떠오른다.
목 놓아 터뜨리고 싶은 통곡을 견디고 내 여기 한 개 돌로 눈 감고 앉았노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