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신:6월 17일 오전 9시 30분> 북한방송 최 씨 사망 보도, 17일 오후 발인 예정
(서울=연합뉴스)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 총재가 15일 평양에서 사망했다고 조선중앙방송이 17일 보도했다.
북한은 16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중앙위원회, 조선해외동포원호위원회, 조선태권도위원회 공동 명의의 부고를 통해 "최홍희 선생은 불치의 병으로 주체 91 2002년 6월 15일 84살을 일기로 평양에서 애석하게도 서거했다"고 밝혔다.
부고는 "최홍희 선생은 해외의 어려운 조건에서도 민족의 얼이 깃든 태권도를 지켜내기 위한 활동을 적극 벌이면서 해외동포들을 조국통일투쟁으로 불러 일으키는 데 이바지했다"며 "최 선생의 서거는 조국통일위업 실현을 위해 우리민족과 모든 태권도인들에게 있어 커다란 손실로 된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최 총재의 사망직후 최태복, 김중린, 김용순 당중앙위 비서, 장 웅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등으로 장의위원회를 구성했다.
최 총재의 시신은 평양시 보통강구역 서장구락부에 안치되었으며 17일 오후 3시 발인한다.
함경북도 길주 태생인 그는 남한에서 3군관구 사령관, 제2훈련소장, 6군단장을 거쳐 62년 예편했다.
최 총재는 전역후 말레이시아 대사와 제3대 대한태권도협회장을 지내다 72년 캐나다로 이민한 이후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지난 14일 북한땅에서 눈을 감겠다며 방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제1신:6월 17일 오전 8시> '태권도 대부' 최홍희 씨 북한서 신병치료중 사망
'태권도'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만들었고 캐나다로 망명한 후에는 북한에 태권도를 보급하는 데 힘써 온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가 15일 84세의 나이로 북한에서 사망했다.
17일 오전 현재 북한 당국은 최씨의 죽음을 공식 발표하고 있지 않지만, ITF의 공식 웹사이트(www.itf-taekwondo.com)는 "우리는 토요일 사망한 최홍희 장군을 잃은 것에 대해 애도한다. 이번 주내에 애도의 뜻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을 위해 방명록이 마련될 것"이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토론토에 머물고 있는 최 총재의 측근도 16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위암 치료차 북한에 머물러온 총재가 지난 15일 숨을 거두었다. 부인과 두 딸이 임종을 지켜봤다"고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이 측근에 따르면, 최 총재는 3월 중순경부터 음식물을 토하는 증세를 보여 토론토의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는데, 이때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는 것.
최 총재는 증세가 악화되자 남북한 당국 양측에 서한을 보내 "남한이든 북한이든 나를 불러주는 곳에서 여생을 바쳐 남북 태권도 교류와 화합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오랫동안 그의 방한에 미온적인 입장을 보인 한국정부로부터는 귀국을 허락 받지 못했다.
결국 최 총재는 평양행을 선택해 지난달 13일 그곳에 도착, 소화기계통의 권위자로 알려진 북한 의사의 치료를 받아왔지만 '세월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
최 총재는 한국정부로부터는 '친북 반한인사'로, 북한당국으로부터는 '태권도의 대부'로 엇갈린 평을 받아왔지만, 그를 빼놓고 태권도의 역사를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세계태권도계의 상징적인 인물로 알려져 왔다.
1918년 함경북도 길주에서 태어난 최 총재는 일본 유학을 떠나 일본중앙대학에서 처음 가라데를 익혔다. 그는 학병으로 징집된 후 1944년 1월 평양 47부대에 배속됐으나 부대를 탈출, 항일 무장독립군에 합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됐다. 당시 학병 조직의 작전참모였던 최씨는 이듬해 6월 군사법원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달 후 해방을 맞았다.
생전의 최 총재와 이승만 대통령(오른쪽)
월남 후 서울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그는 국군 창설멤버로 3군관구 사령관, 제2훈련소장, 6군단장을 거쳐 5·16 쿠데타 주도세력에 밀려 62년 예편했다.
그는 자서전 '태권도와 나'에서 "1955년 4월11일 당수도, 공수도, 권법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전통 격투기를 하나로 묶어 태권도를 창시했고,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태권도'라고 쓰인 휘호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은 신동아(4월호)와의 인터뷰에서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WTF, 73년 창설) 총재가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휘호를 받자 최홍희가 지지 않으려고 만들어낸 것이다"고 응수하기도 했다.
이같은 논란 속에도 최 총재는 1965년 1월 대한태권도협회장에 취임했고, 이듬해 3월에는 서울에서 한국·미국·독일(당시 서독)·이탈리아·베트남 등 9개국 대표가 모인 가운데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하는 등 '태권도의 세계화'에 기여했다.
그가 72년 1월 돌연 캐나다로 망명을 한 이유에 대해서도 "3선 개헌에 반대하고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는 과정에서 망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ITF의 주장과 "주말레이지아 대사시절(1962.4∼64.11) 공금 유용 혐의를 받았고, 김운용과의 파워게임에 밀린 데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WTF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으나 두 가지 요인이 중첩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씨는 1948년 여순사건 군법회의 재판관으로, 당시 주모자로 지목된 박정희 소령에게 사형을 언도한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최씨는 1980년 대규모 태권도 시범단을 대동하고 방북 길에 올랐다. 그의 방북 행은 북한에 태권도의 씨앗을 뿌렸지만, 내외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때 최씨와 함께 방북 길에 올랐던 토론토의 박정태 사범(4월11일 별세)은 80년대 후반 ITF가 북한과 너무 밀착했다며 ITF와 갈라서 1990년 GTF를 창설하기도 했다.
2000년 12월26일 토론토 인근 자택에서 기자와 인터뷰를 할 당시의 최홍희 총재
최 총재의 측근들은 이에 대해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에 맞서 싸우며 소장의 지위까지 올랐던 최 총재가 망명 이후 북한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북한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방한이 어렵게 되자 총재는 더더욱 북한과 가까워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최 총재는 2000년12월 기자와의 단독인터뷰에서 스스로를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살아 생전 한국땅을 밟아보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최 총재의 죽음으로 ITF는 새로운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당분간 ITF는 아들 최중화 전 사무총장 지지파와 반대파의 내분에 시달릴 전망이다. 최씨 부자는 "ITF가 조선태권도위원회(위원장 황봉영)와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해야한다"(최홍희), "ITF와 조선태권도위원회는 거리를 둬야 한다"(최중화)는 의견 대립으로 부자간에 반목을 빚어왔다.
우여곡절 끝에 최씨 부자가 화해한 후 ITF는 작년 7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13차 총회에서 최 사무총장을 2002년 7월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차기총재로 내정했으나 올해 초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임시총회에서는 최 총재가 자신의 임기를 2007년 7월까지 재연장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최 총재는 이 문제로 아들과 갈등을 빚었고 중화 씨의 사무총장직을 박탈하기도 했다.
김운용 씨가 이끄는 WTF가 태권도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한 후 ITF와 WTF의 세 대결은 사실상 끝이 났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최 총재의 죽음은 ITF의 조직 붕괴로 이어져 ITF 조직의 흡수를 기대해온 WTF의 정치적 승리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최 총재의 방한에 대한 WTF의 집요한 견제가 한국 땅을 밟아보고자 했던 팔순 노인의 바램을 저버렸다는 데에 이르러서는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는 군인으로, 외교관으로, 그리고 '태권도에 미친 한 인간'으로 평생을 살다가 결국 객지에서 한많은 생을 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