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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강좌4] 스쿠버다이빙의 역사
에피타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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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빙의 역사
지구는 45억년전에 생성 되었고 바다가 생기는 데에는 그로부터 무려 수억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인간이 바다와 깊은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인간과 비슷한 사고를 가진 인어부족이나 영화 어비스(Abyss)에 나오는 물인간 등을 주제로 한 공상적인 글이나 영화들이 만들어져 바다의 신비를 더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전설이나 소설과는 달리 실제로 과거에 존재하였던 사실은 현재에 기록으로 남아 있거나 과거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역사가 되어 전해질 수 있다.
현생 인류와 가장 많이 닮은 직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원시인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만년 전에 지구상에 살았던 호모(Homo 라고 일컫는 속에는 서로 다른 원시인류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무리가 오늘날 인류로 진화 하였다. 인간의 학명은 Homo sapiens 임)인인데,이들을 인류라 한다면 아마 물가에 살았던 최초의 무리에서 최초의 다이버가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입증을 할 수는 없지만 먹이가 됨직한 물고기나 조개를 잡기 위해서 또는 적에게 쫓겨 우연히 물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계기로 해서 다이빙에 익숙해지고, 점차 그 기술을 발전시켜 후손들에게도 전수하였을 것이다.
어쨋든 그 시절의 다이빙은 생존의 한 방편이었지, 레져나 연구의 목적은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물가에 살았던 무리들의 아이들에겐 다이빙이 좋은 놀이중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미국지리학회(National Geographic)의 "자연과 사람들"이라는 TV 시리즈물 중에 "알 기딩스의 상어 이야기"에 나오는 요즈음의 타이티 어린이들처럼 거북이나 상어의 등을 타고 잠수 놀이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직업적인 다이빙은 5,000년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잠수는 매우 얕은 물에서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은 숨을 참고 가능한 많은 시간을 얻고자 함이었다. 가장 원시적인 이러한 방법으로 그 들은 해산물 채취나 간단한 수중 작업 등을 하였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수영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기원전 6세기경부터 원시 예술 작품(벽화)에 초기 물에서 활동을 한 그림이 전해진다.
카이로에 있는 역사 박물관에서 기원전 1,500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전에 이미 진주조개잡이 다이버들이 홍해에서 활약하였다는 옛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최초의 다이빙 기록과는 많은 시차가 있는데, 기원전 3,000년전에 이미 그리스의 크레타(Crete)에는 스폰지(Sponge:바다 속에 사는 해면동물을 일컬으며 지중해 연안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마모용 또는 수분 흡수용으로 사용하였음. 합성 스폰지도 이 동물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음)채취 다이버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기록으로 남은 역사상 세계 최초의 산업 다이버(Commercial Diver)이리라.
초기 다이버들은 군사 활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닻줄을 끊는 것, 선체에 구멍을 뚫는다 든지, 항구 보호 시설 건설 등의 활동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지금의 레바논인 페니키아의 도시(튀르스)를 정복하려 했을 때 적지의 수중 장애물을 다이버를 보내 제거하였다. 역사적 기록에는 기원전 333년에 유리로 된 다이빙 벨(Diving Bell)을 타고 알렉산더 대왕 자신이 직접 수중으로 들어가 자신의 다이버들이 일하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수중호흡장치의 개발
1531년경에 최초의 실용면을 고려하여 개발되어진 형태가 종의 모양처럼 생긴 잠수종 이었다. 이 모양의 잠수기는 단순히 종을 물 속에 담그면서 남아있는 종속의 공기를 사용하는 잠수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여 16,17,18세기 동안 종 모양의 잠수기는 계속 발달되었고, 상업적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형태의 종 모양 잠수기는 어느 정도의 시간 즉 몇 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다이버를 수중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었다. 초기 종모양 잠수기는 일정시간 동안 다이버가 숨을 쉴 수 있도록 공기를 잡아두기 위해 물통을 수직으로 가라앉히기 위해 자체적으로 중량을 가진 물체로 만들어 져야만 했다.
이 원리는 물이 가득한 통에 컵을 거꾸로 가라앉혀서 컵속의 공기를 사용하는 잠수 방법이라면 이해를 쉽게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컵 안의 공기는 주위의 물의 압력을 받고 갇혀 있으나 또한 주위를 둘러싼 물의 압력을 받는 것이다. 배나 움직이지 않는 수면 구조물에서 케이블로 매달려 지는 종모양 잠수기는 지상에서 단순히 종을 들어주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고정된 장치로서 그 속의 잠수부는 움직임이 한정된다.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장치를 가진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종처럼 생긴 잠수기 안에 매달려 있으면서 잠수기 속에서 머무르고 작업을 했다. 또는 숨을 참고 짧은 거리를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다.
1680년대 William Pphipps가 카리브해에서 전설로 전해진 보물을 찾기 위해 고용된 자신의 일꾼들에게 공기를 공급할 목적으로 좀더 무게가 있는 통을 만들어 냄으로써 잠수기를 개선시켰다.
1690년대에 에드먼드 할레이(Edmund Halley:유명한 천문학자)는 지상으로부터 공기를 공급해 줄 수 있도록 고안된 공기를 담은 무거운 큰 통들을 연결하여 공기를 공급할 수 있는 종모양 잠수기를 개발하였다.
그가 디자인한 잠수기에 Halley와 4명의 동료가 템즈강 20(60피트)미터 밑 수중 바닥에서 1시간 30분 가까이 머물러 있을 수 있었고 26년 후에 그의 종모양 잠수기를 개선하여 23미터(66피트) 깊이에서 4시간 이상 머물렀다.
그 시대의 대중 잡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기구들을 사용하여(입었다기 보다는 그안에서) 12 fathoms가 한계인데 보통 10 fathoms (60feet)에서 작업하면 작업시간은 적어도 30분 정도라고 묘사했다.
Lethbridg의 디자인에 의거한 몇 개의 유사한 고안품들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 공급과 기동성 부족이라는 근본적 문제점을 감수 해야했다.
근대적인 잠수장비의 등장은 18세기가 시작될 시기에 그 동안 사용되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발명품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다이빙을 하도록 바꿔 버렸다. 즉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장비들이 잠수 활동에도 사용되어 졌는데 그 중에서도 압축기의 개발은 새로운 장을 열게 하였다.
즉 수동작업에 의한 공기 펌프는 압축된 공기를 다이버에게 공급해 주는 것을 가능하게 했는데 (비록 초기에는 압력 한계가 있었지만) 이로 인해 최초로 실용적인 다이빙용 잠수복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거스트 시에드(August Siede)는 초기에 실용적인 잠수복을 개발하여 잠수계에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Siede와 몇 사람들이 힘을 합쳐 1800년대 초기에 성공적인 다이빙 장비를 제작하게 되었다.
딘 형제(존과 찰스:John & Charles)는 화재로 인하여 연기가 가득한 화재 현장에 들어가 구조할 목적으로 장비를 개발하여 특허를 받았다.
이 후에 이 형제는 물 속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장비를 개조하여 이를 Deanes’Patent Diving Dress로 이름이 붙여지고 시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Deane형제의 다이빙복은 다이버의 보호를 위한 무거운 천과 밖을 볼 수 있는 몇 개의 창을 가진 헬멧 그리고 압축된 공기를 전해주기 위해 연결된 호스로 구성되었다. 헬멧은 다이버의 어깨에 장착되어 자체 무게와 허리띠로 쓰이는 가죽으로 고정되었다. 이런 배열의 장비는 자체에 중대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다이버가 실수로 몸을 기울이게 되면 헬멧에 물이 차고 공기가 빠져나간다.
또한 August Siebe의 개조품은 색상을 가진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만들어진 방수가 되는 천으로 헬멧을 봉인했다. Siebe는 잠수복을 개선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헬멧 조립을 연구한 가치가 인정되고 초기의 표준이 되는 깊은 수심용 다이빙복의 원조처럼 인식되어졌다.
2명의 프랑스인 로그아롤(Messrs Rouquayrol)과 드네이로스(Denayrouse)는 지상으로부터 공기 공급을 받는 형태의 잠수 장비인 공기 공급 호스를 가진 헬멧형 다이빙복을 고안했는데 이 장비의 특징은 비상시에 사용자에게 공기를 공급할 수 있도록 등쪽에 장착된 자체적인 공기 저장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Rouquayrol / Denayrouse 의 개발 장비는 다른 여타의 고안된 잠수 장비와 다른 자동 요구식 밸브를 사용함으로 해서 구분될 수 있다.
Fleuss의 장비는 영국의 다이버 알렉산더 램버트(Alexander Lambert)가 7번 가 밑의 터널에서 부서져 열린 철문을 닫기 위하여 터널을 걸어다닐 수 있도록 고안되어 1880년경에 성공적으로 이용되었다.
스쿠버(수중자가호흡장치)의 개발
1926년에 함장 쁘리에(Prieur)는 마우스피스와 공기 호스를 장착한 등에 매는 압축공기통을 구상하고 설계하여 특허를 얻었다. Le Prieur 장비의 공기통은 2000psig의 압력 공기를 가졌다. 그러나 자동 요구식 밸브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공기가 물 속에서 낭비되었다.
1943년 에밀 까냥(Emile Gagnan)과 선장 쟈끄-이브 쿠스토(Jacques-Yves Cousteau)가 자신들이 개발한 장비를 아쿠아-렁(Aqua-Lung)이라고 불렀다. 이 잠수 장비는 압축된 가스 통에 2500psig이상의 압력을 저장하는 압축공기탱크가 2∼3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장비의 특징은 흡입식 요구 밸브인 레귤레이터을 사용함으로 해서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된 공기의 사용을 조절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다이빙의 역사는 발명, 발전 그리고 진취적인 사상이 담긴 여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수중장비의 발전과 탄생은 전쟁과 많은 연관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며 전쟁을 통해서 짧은 다이빙 역사에 장비의 진보와 이론적 체계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앞서 열거한 바와 같이 다이빙의 역사에서도 분야별로 최초의 기록들이 다양하며, 각각은 한편의 드라마와 진배없는 것으로 생존과 모험을 위해 험난한 바다에 도전하여 위험을 극복하면서 작성된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이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서양, 특히 유럽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다이빙 역사는 자연 지중해를 중심으로한 유럽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스쿠버다이빙역사
또한 우리나라 해녀가 일본 해녀보다 체질적으로 물에 대한 적응 능력이 월등하고, 1970년대 당시 한국과 일본 해녀가 모두 3만명인데 제주도에만 11,000명이 거주하였던 점이나 해녀가 활동하던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 제주도가 해녀의 발상지일 것으로 추정 하였다.
1963년 3월 대학의 모험심 많은 개척자들에 의해 남대문 근처의 골방에서 "한국스킨스쿠바클럽" 이 창설되었다. (김상겸, 이병두) 고려대학교(이병두, 황치효), 연세대 (윤석민, 오윤배), 한양대(노건기, 김광휘), 동국대(차 광), 중앙대에서 스킨스쿠바 다이빙 써클이 생겼다.(1968∼1969)
1971년 제주도 수중비경을 맛보고, 1972년 일본인 다이빙 강사와 다이빙을 해본 김광휘는 1973년 스쿠바 다이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73년 한국에서도 외국단체로는 처음으로 PADI(코스디렉터: 윌리암스)가 들어와 강사들을 배출하였다.
한편으로, 연세대 스킨스쿠바 써클 창설의 주축중 한사람이었던 윤석민을 중심으로 오윤배, 안정훈, 이요섭은 미도파백화점 부근에 스쿠바 다이빙 샵인 "바다상사"를 창업했으며 윤석민과 이요섭은 전길남 NAUI 강사(재미 공학박사)로부터 강사자격을 취득했다.(1978년) 이들이 현재"NAUI KOREA"의 주축 멤버들이다.
잠수동호회 멤버였던 김인영은(SCUBA DIVER지 발행인) 1979년 잠수이론이 체계화되지 못한 이땅에 "스킨,스쿠바 다이빙 원리"라는 잠수 이론서를 최초로 집필하여 발행하므로써 잠수계에 기원이 되는 한획을 그었다.(80년대 잠수이론 교육시 단체와 상관없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책임)
1992년 6월26일 드디어 한국에도 수중계의 두뇌집단이 생겨났다. 잠수와 관련된 의학자, 생물학자, 공학자, 학술계, 수중영상전문가, 잠수관련 특수부대 책임자들이 모여 "한국수중과학회(KOSUST)"를 창립했다.(고철환 서울대교수, 제종길 해양연구소 연구원, 윤석근, 이병두, 정의욱, 김광택등 33명)
또한 한국잠수협회(KUDA) 위상을 한단계 높였던 지봉규는 1997년 미국 잠수교육 협회인 " IDEA(International Diving Educators Association) "을 김석철(현 IDEA-ASIA대표)로 하여금 국내에 도입케 하였다. 그후 PDIC, NASE등 외국의 다이빙 단체들이 국내에 도입 되었으며, 앞으로로 계속 도입될 전망이다.
1970년대말에 수 백명도 안되던 스포츠다이빙인구는 1980년대 말에 6-7천명 정도로 늘어났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과거 20년동안 생겼던 인구가 한 해에 생기기 시작했으며 IMF직전에는 한 해에 1만명 정도의 인구가 탄생하고 있었다.
NAUI Course Director NAUI Nitrox diving Instructor ASHI CPR Instructor 김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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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드레이크/team DRA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