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출생의 근본인 조상이 있으며 姓(성)과 本貫(본관)을 사용하여 혈연계통을 표시하고 이 근본으로부터 혈연관계를 체계적으로 기록한 서책을 족보라고 하는데 一名 宗譜(종보), 世譜(세보), 家譜(가보)라고 하며 편찬단위에 따라 동일시조 이하 전자손이 함께 수록편찬 하는 것을 대동보 또는 대동세보라고 하고 그 이하 파단위로 하는 것을 파보라고 하며 집안 내역을 간단하게 기록한 것을 가승 또는 가첩이라고 한다.
족보는 무엇보다도 昭穆系圖(소목계도)가 가장 중요하고 中心이 되며 先祖의 문헌과 자료 혹은 규정등을 기록하여 一家의 역사를 표시하는 것으로 가계를 실증하는 소중한 보감인 것이다. 族譜의 편찬의미는 명확한 체계를 세워 계속적인 소목을 기록하여 종횡관계를 인식시켜 족인의 일원이라는 소속감과 일체감으로 종족간의 단결과 상부상조정신을 함양시키고 祖上의 忠, 孝, 節, 義, 정신을 발현시켜 영속적으로 계승하기 위함이라 하겠다.
族譜는 대부분 一世代인 三十年을 주기로 편찬 발간하는 것이 통례이다. 族譜는 최초에 王室의 系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왕대실록 璿源錄(선원록)같이 왕실계통을 記錄한 것이 일종의 族譜라 할수 있다. 각 씨족의 族譜가 발간한 것이 언제 부터 인지는 명백하게 알수 없으나 일반적으로 中國의 漢나라 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후한이후 右族(우족), 冠族(관족)이 성립됨에 따라 문벌과 가풍을 중요시하는 사상이 높아져 이때부터 譜學이 발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특히 문벌의 전성기인 魏(위), 晋(진), 南北朝(남북조)에 제가의 族譜를 수집 심사하여 갑을의 문벌로 구분하여 世族이 아닐 경우에는 고위직에 등용하지 않았으며 宋代에서는 이제까지 관에서 정한 공적성격을 띤 族譜가 사적인 성격으로 변하여 이때부터 族譜의 기능이 관리선발의 추천자료가 되고 동족의 收族(수족)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송대 이후의 族譜는 곧 이와 같은 기능을 中心으로 民間에 널리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族譜는 고려때 왕실의 계통을 기록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고려사회는 문벌귀족의 형성으로 族譜가 유행하였고 신분에 따라 사회활동 및 출세의 제한은 물론 문벌이 낮은 家門과는 혼인을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 族譜도 역시 中國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 형식이 도입되었는데 族譜의 편성, 간행을 촉진시킨 그 당시 사회의 특수한 배경과 성격을 도외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고려시대 귀문, 귀족에 있어서는 族譜의 체제를 구비한 세계, 항열의 방식을 取하여 동 항열에 같은 자근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當時 이미 系譜에 관한 관념이 일반화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 문종때는 주민혈족이 계통을 記錄한 부책을 관에서 비치하여 과거응시자에 대한 신분관계를 밝혔으며 송과 교류도 빈번하여 族譜의 유행은 필연적인 현상으로 보아진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국초부터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여 급속히 진전되었다. 왕실자신이 귀족정치의 국가형태를 取하였을 뿐 아니라 유교를 국시로 삼게되어 더욱 성족파별로 가승을 明白히 할 필요가 생기어 族譜가 없는 집안은 행세도 할 수 없는 정도였고 그 체제도 현재의 형태와 같이 완성되었다 특히 당시는 원시적 부족사회의 형태와 같은 동족의 부족이 各地에 산재하고 붕당학파의 싸움이 치열하여 배타적 관념으로 인하여 自然히 동당, 동파, 동족의 일치단결을 공고히 할 必要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간행된 族譜는 文化柳氏(문화유씨)가 1522~1566年인 중종 16年~명종 21年 嘉靖年間(가정년간)에 간행한 嘉靖譜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전하여 내려온 族譜가운데 문헌적으로 오래된 것으로 신뢰할만한 것은 安東權氏(안동권씨)가 1476年인 성종 7年 明나라 헌종 成化 12年에 간행된 成化譜로서 文化柳氏 嘉靖譜보다 약 80年 앞선 것이다. 그런데 文化柳氏 嘉靖譜 서문 가운데 嘉靖譜 보다 140年 전이되는 세종 5年 계묘 1423年 明나라 태종 영락 21年에 이미 文化柳氏譜가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永樂譜가 간행본인지 필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하여간 우리 나라 에서의 族譜는 安東 權氏譜와 文化 柳氏譜가 오늘날 남아있는 最古(최고)의 族譜라 할수 있다.
族譜가 나오기 전에는 필사에 의하여 가첩이나 家乘(가승)이 많았을 것이다. 1592年 임진왜란 때문에 많은 문헌과 함께 소실되었고 숙종 이후에 많은 族譜가 발간되었다. 당시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 등 社會的인 차별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고 호적이나 族譜를 위조하기도 하며 뇌물을 써가면서 族譜에 끼려고 수단과 方法을 가리지 않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