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3 강 - 般若品- 9
善知識아 後代得吾法者는 將此頓敎法門하야 同見同行에 發願受持니 如事佛故며 終身而不退者는 定入聖位하리라 然, 須傳授從上以來의 黙傳分付하야 不得匿其正法이나 若不同見同行하야 在別法中인댄 不得傳付니 損彼前人하야 究境無益이니라 恐愚人이 不解하고 謗此法門하야 百劫千生에 斷佛種性일까하노라
善知識아 吾有一無相頌하니 各須誦取하야 在家出家에 但依此修하라 若不自修하고 惟記吾言하면 亦無有益하리라 聽吾頌하라 曰
說通及心通하면 如日處虛空하나니
唯傳見性法하야 出世破邪宗이로다
法卽無頓漸이언만 迷悟有遲疾하나니
只此見性門을 愚人은 不可悉이로다
說卽雖萬般이나 合理還歸一하나니
煩惱暗宅中에 常須生慧日하라
邪來煩惱至요 正來煩惱除인데
邪正을 俱不用하면 淸淨至無餘하리라
菩提本自性은 起心卽是妄이라
淨心이 在妄中하니 但正無三障하리라
*********************************
善知識(선지식)아
後代得吾法者(후대득오법자)는→ 후대에 내 법을 얻은 사람은,
여기서 내법 이라고 하는 것은, 般若法(반야법)이요. 無念法(무념법)을 말합니다.
將此頓敎法門(장차돈교법문)하야→ 이 돈교법문을 가져서,
南頓北漸(남돈북점). 그렇게 해가지고 이 육조스님의 가르침을 頓法(돈법)이라 그래요. 돈의 반대는 점. 점점이라고 하는 점차 漸자를 쓰고, 이 돈자는 한꺼번에, 또 몰록 頓. 순식간에, 이런 의미인데 육조스님은 늘 頓敎法(돈교법). 또는 돈법. 이런 말을 써요.
한때는 우리나라에 이론이 분분했던 頓悟(돈오)니 漸修(점수)니 하는 문제의 논란이 있었는데, 육조스님께서 늘 잘 쓰시는 이 돈교법이 바로 그겁니다. 마음의 도리이기 때문에, 이것은 사물을 하나하나 쌓아가고, 제거할 때 그 사물을 하나하나 제거 하듯이, 이런 식의 이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생겨먹기를 어떤 현상의 사물하고는 다르기 때문에, 이거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 그렇게 되어있는 이치지, 차츰차츰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차츰차츰 되는 것은, (그런 입장도 있지만,) 그것은 시원치 않다. 마음의 원리에 제대로 합쳐지지 않는 이치다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수 억만 년 어둠이 깔려있는 동굴을 사람이 발견을 해서, 거기에 전기 시설을 해가지고 스위치를 올리면, 그 수 억 만년 어둠의 역사가 순식간에 밝아진다. 이겁니다. 그것이 언제 천천히 밝아집니까?
어둠의 역사가 수 억 만년이 됐다고 해서, 하루가 걸린다든지 아니면 시간이 걸린다든지 그런 이치는 없다 이겁니다.
스위치를 올리면 그 순간 그저 0.1초도 안 걸리고 바로 밝아지는 것이지, 제대로만 밝히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 천천히 밝아지거나 그런 것이 아니지요. 또 그 어둠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굴을 빠져 나가는데 시간이 걸린다든지 그런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육조스님께서는 돈교법이라고 하는 거예요. 돈교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마음이...
물질 같으면 그렇게 안 되지요. 아무리 기계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산더미처럼 그렇게 많은 물건을 만드는데도 시간이 걸리고, 없애는 데도 그렇게 시간이 걸리고 할 텐데, 그러나 마음의 이치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돈교법. 돈법이다. 그것이 통하는 것입니다. 頓悟頓修(돈오돈수) 라고 하는 말이 통하지요.
하는 방법상에 있어서 마음의 됨됨이가 그렇게 생겼기 때문에, 그것을 체험하고 또 수용하는 것도, 마음의 원리에 맞게 체험하고 수용하는 것도 가능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차츰차츰 해 나간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만만치 않게 있습니다.
此頓敎法門(차돈교법문)하야→ 이 돈교법문을, 당신이 하신 말씀을 돈교법문이라 그래요. 돈교법문을 가져서,
同見同行(동견동행)에→ 같이 보고 같이 행한다. 이겁니다.
發願受持(발원수지)→ 동행함에 발원수지. 원을 발하고, 받들어 받아 가져야된다. 돈교법문을 받들어 가져야된다. 우리가 같이 생활하고 여기서 같은 법문을 듣고 같은 수행을 한다면, 우리는 전부 돈교의 어떤 정신. 돈교 사상에서 수행을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如事佛故(여사불고)며 終身而不退者(종신이불퇴자)는 발원수지→ 부처님을 섬기는 것과 같이 하는 연고다.
돈교법문을 부처님 섬기듯이 그렇게 해야 된다. 불자가 부처님을 얼마나 잘 섬기느냐 이겁니다. 그러나 정작 섬겨야 할 것은 이 돈교법문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將此頓敎法門(장차돈교법문)하야→ 이 후대에,
後代得吾法者(후대득오법자)는→ 후대에 내 법을 얻은 사람은, 이 돈견법문을 가지고서 동견동행 해.
그리고 동견동행 하는 것에 대해서 발원수지해야 돼요. 부처님 섬기듯이 그렇게 해야 돼요.
종신불퇴자 해야 돼요. 이 몸이 다할 때 까지 물러서지 않아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돼요?
定入聖位(정입성위)하리라→ 결정코 성위에 들어간다.
결정코 성인의 지위에 들게 된다 이건 틀림없다 이겁니다. 이렇게만 하면...
돈교법문을 부처님 섬기듯이만 한다면, 이건 틀림없이 聖人(성인)이 된다.
然(연)이나 須傳授從上以來(수전수종상이래)의 黙傳分付(묵전분부)하야→ 모름지기 전수한. 전해준. 과거 종상이라고 하는 것은 “위로부터” 이런 말인데, 과거의 이전부터, 옛날부터 이 말입니다. 부처님으로부터 묵전분부해서 묵묵히 분부해서, 줘서,
不得匿其正法(부득익기정법)이나→ 그 정법을. 바른 법을 숨기지는 아니해. 정법을 한 번도 숨긴 적은 없어요. 숨길 匿자지요.
또 “以心傳心(이심전심)이다.” 그리고 “아는 사람들끼리만 전한다.” 이렇게 되어있긴 하지만 그러나 언제숨긴 적은 없다. 이겁니다. 모르니까 그것이 숨기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전혀 숨긴 것은 아니지요. 숨긴 것은 아니나, 若不同見同行(약불동견동행)해서→ 만약 동견동행 아니해서,
在別法中(재별법중)인댄→ 별법중에 있다면, 이 돈교법문에 대해서 같이 보고 같이 행하지 아니해서 따로 논다면,
재별법중이라. 다른 법 가운데. 그 당시 또 상대적으로 “北漸(북점)”이라고 해서 북쪽의 신수파 쪽에서는 “점점해야 되지, 한꺼번에 된다는 게 어디 있나? 삼아승지겁이라고 하는 길고 긴 세월동안 닦아야 부처가 되는 것이지 무슨 그런 한꺼번에 되는 도리가 어디 있냐?” 라고, 이렇게 주장하는 그 주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별법중에 있다.”라고 하는 것은 은연중에 그런 것을 뜻하고 있지요.
不得傳付(부득전부)니→ 별법중에 있다면, 그건 내가 이 돈교법문을 전해줄 수가 없다. 이겁니다. 전해 받을 수도 없고요. 그래가지고 만약에 예를 들어서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전부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지요?
損彼前人(손피전인)이예요→ 과거 앞의 사람들이 이 돈교법문을 전해 받은, 또 전해준 나 까지 전부 손해를 입히게 되는 것이다.
돈교 이 외에 점교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전해지지도 않지만 만약에 그런 사람들에게 이것을 전한다면, 이야기를 하게 되고 전한다면 그것은, 과거 선배를 욕보이는 일이고 손해를 끼치게 되는 그런 일이다.
손피전인. 앞에 사람들을 손해보이는 그런 일이라는 것입니다.
究境無益(구경무익)이다→ 그러면 결국은 이익이 없다. 그러니까 어느 시대이고 간에, 부처님열반 이후에 部派佛敎(부파불교)가 많이 성행해가지고, 소위 ‘20부파’ 크게는 大衆部(대중부). 上座部(상좌부). 이렇게 두 개로 나눠지지만, 거기에서 또 세분화 돼서 소위 ‘20부파’라고 하는 것이 생겼는데, 그 ‘20부파’라고 하는 것은 전부 부처님의 법을 받았지만, 거기에 개인의 견해가 가미 되다보니까, 약간의 개인사상이 거기에 加味(가미)되어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 했거든요.
초기에도 그랬었지만 그 후로 내려오면서 그것이 자꾸 많이 세분화 되고, 禪宗(선종)에 와서도 약간의 사상의 차이를 보이는 그런 경향이 사실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지요. 구경에 이익이 없다. 그러니까 내 “돈교법문을 공부하는 사람은 계속 이 돈교 사상에 의해서 공부하고, 또 그것이 전수 되어져서 내려 가 져야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되기 시작한다면 나까지 욕보이게 되는 것이고, 과거 이런 법을 전해준 과거 선배에게 아주 손해를 끼치는 일이 된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恐愚人(공우인)이 不解(불해)하고→ 혹, 어리석은 사람들이 알지를 못하고서,
謗此法門(방차법문)하야→ 이 법문을 비방해서, 이미 그 당시 비방이 있었어요. 비방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 법문을 비방해서,
百劫千生(백겁천생)에 斷佛種性(단불종성)일까하노라.→ 부처의 종자의 성품. 불종성이라고 해서 이것은 그야말로 부처님의 사상을 그대로 전수받을 수 있는 得法(득법)의 소유자이지요.
법을 얻을 사람! 그런 뜻에서 “불종성. 부처의 종자의 성품이라.”그래요. 이거는 사실 누구에게나 다 있어요.
다 있는 건데, 거기에 걸 맞는 법으로써 수행을 해야 그 사람을 불종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종성이 끊어진다 만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사실 불종성이라고 하는 것은 끊어지고 말고 할 것이 아니에요.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本性(본성)이거든요.
自性(자성)이거든요. 그걸 佛性(불성)이라고 하는데, 佛種性이고 佛性인데 그것은 끊어지고 말고 할 것이 없는데...
이 頓敎法(돈교법)! 바른 가르침의 법이 끊어진다면, 결국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할 기회가 없어지지 않느냐? 그렇다면 불종성이 끊어졌다고 표현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지 않느냐? 우리가 이렇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謗此法門(방차법문)하야→ 이 법문을 비방해서,
百劫千生(백겁천생)에 佛種性(불종성)이 끊어질까 염려한다. 두려워한다.
善知識(선지식)아 吾有一無相頌(오유일무상송)하니→ 유명한 게송이지요. 육조단경에 육조스님의 게송이 몇 개가 나와요. 여기 처음 등장 하나요?
저 앞에 한 번 있었나요? :(8강 오도송)
나에게 무상송이 있는데, 各須誦取(각수송취)하야→ 각각 모름지기 외워서
在家出家(재가출가)에 但依此修(단의차수)하라→ 재가나 출가에 다만 이것을 의지해서 수행하라.
若不自修(약불자수)하고→ 만약 스스로 수행하지 않고,
惟記吾言(유기오언)하면→ 오직 내 말만 기억하고 잘 외우고 있기만 하면,
亦無有益(역무유익)하리라→ 또한 이익이 없으리라. 그러니까 이것을 외우는 것은 기본이고, 외웠다 하면 여기에 근거해서 이 도리대로 수행을 하고, 그렇게 살아야지 말만 기억하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聽吾頌(청오송)하라 曰(왈)→ 내 게송을 들으라. 말씀하시기를,
說通及心通(설통급심통)하면 如日處虛空(여일처허공)하나니→ 이 설통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이치에 맞게 하는 것을 설통. 그래요.
그리고 심통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깨달은 것을 심통. 이렇게 합니다.
과거 선지식들 중에서 심통한 사람들은 많은데, 설통한 사람은 드물어요. 그렇게 흔치가 않습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분들 외에는 이 두 가지를 통한 분들이 많지 않지요.
그런데 역사에 나타나지 아니한 위대한 선지식. 글로 표현하고 말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사실 몇이나 되겠어요? 그러나 공부는 독실하게 해가지고서 마음을 깨달은 분은 또 의외로 많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 반대로 그냥 설통만 다 하고 심통한 사람은 하나도 없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 설통은 엉터리 설통이지요. 이 심통이 안되면, 설통 해봐야 그것은 그냥 말만 번드르르 한 것이지 여기서 말하는 설통은 못 되지요. 설통급심통하면→ 말로도 통하고 마음으로도 통할 것 같으면,
如日處虛空(여일처허공)하나니→ 마치, 저 태양이 허공에 떠있는 것과 같다. 태양이 허공에 저 높이 척 높이 떠있으면, 얼마나 시원스럽게 보이고, 자유롭게 보이고 또 환하게 세상을 비추지 않습니까? 그리고 만물에게 많은 이익을 주고요.
唯傳見性法(유전견성법)하야 出世破邪宗(출세파사종)이로다.→ 오직 그 사람! 설통하고 심통한 그 사람은 태양과 같아서, 오직 견성법을 전해요. 자기성품 보는 도리를 전한다. 이것이지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이것이지요.
출세파사종이라→ 세상에 나와 가지고서 삿된 종을, 삿된 가르침을 전부 깨뜨린다. 예나 지금이나 삿된 가르침이 늘 많으니까요. “불교”하면 불교 안에서도, 천차만별의 가르침이 있으니까요.
法卽無頓漸(법즉무돈점)이언만 迷悟有遲疾(미오유지질) 하나니→ 법. 그 자체. 진리 그 자체에는 돈과 점이 없지요. 그것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요. 돈이니 점이니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하느냐? 거기에 따라서 頓이다 漸이다 하는 것입니다. 법에는 돈과 점이 없건마는 미오유지질하나니→ 미와 오에 지질이 있다. 더디고 빠른 것이 있다. 더딘 사람은 미혹한 사람이고 漸에 해당되고, 빠른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고 그것은 頓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只此見性門(지차견성문)을 愚人(우인)은 不可悉(불가실)이로다.→ 다만 이 견성문을. 성품을 보는 이 도리, 이것은 頓이고, 자기 마음자리 한번 봤다하면 그것은 끝나 버리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불가실. 이것은 알 悉(실)자예요. 안다는 뜻입니다. 알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道理(도리)를 모른다. 우리가 “見性(견성).” “견성”하는데 견성의 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說卽雖萬般(설즉수만반)이나→ 우리가 비록 설명할 때는 만 가지가 돼요. 팔만사천법문이 있잖아요? 팔만사천법문이 있지마는,
合理還歸一(합리환귀일)하나니→ 이치에 딱 맞추어 놓으면 하나로 돌아간다. 이겁니다. 하나...
“하나로 돌아간다.” 오직 그 하나지요.
性品(성품)하나!
自性(자성)하나!
佛性(불성)하나! 그 자성에서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나에게도 여러 수 천만 가지가 있고 너에게도 수 천만 가지가 있고, 세상이 있고 온갖 것이 벌어지기 시작 하는 것이지요. 설명하다보니까 만 가지가 넘지요.
따지고 보면 一心(일심)에서 나온 거예요. 불성! 자성자리 하나에서 나온 것이다. 그 말입니다.
설즉수만반이나 합리환귀一하나니→ 말 할 때는 만 가지지만, 이치에 딱 합해 놓으면 하나로 돌아가나니,
煩惱暗宅中(번뇌암택중)에→ 번뇌의 어두운 집 속에,
常須生慧日(상수생혜일)하라→ 항상 모름지기 지혜의 태양이 거기서 나오도록 좀 해라. 이겁니다.
번뇌의 암택중. 참 아주 멋지지요? 번뇌의 어두운 집 속에... 우리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보통 중생들의 삶은 번뇌암택중에 사는 것입니다. 형광등으로 불만 방에 환하게 켜 놨다고 해서 밝은 것이 아니에요.
마음이 어두우면 백날 밝아봐야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번뇌의 암택중에. 참 아주 적절한 표현이지요. 번뇌의 어두운 방속에다가 지혜의 태양이 솟도록 하라. 지혜의 태양이 떠오르도록 하라 이겁니다.
生= 떠오르도록 하라. 그것이 제일 급선무다 이겁니다. 불교를 만난 이유도 그것이고, 거기에서 우리가 불교를 만나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것!
煩惱暗宅中(번뇌암택중)에 常須生慧日(상수생혜일)입니다.
지혜의 태양이 더, 어느 모퉁이에서 떠오르도록 하라 이겁니다.
뜨기 시작하면 그냥 순식간에 방이 환해져버리니까요. 이겁니다.
불교를 믿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러면 그 방안에 금이 있는지 똥이 있는지 알 것이 아닙니까? 똥은 치워낼 것이고 금은 챙길 것이 아닙니까? 어두우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지요. 어두우면 아무것도 모르는 거예요 어두우면...
인생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어느 정도인지 캄캄한데서 어떻게 알겠습니까? 밝아야 알지요 밝아야...
일단 밝아야 삶의 가치. 인생의 가치를 아는 것이지요. 이 한마디로 불교를 다 설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 어둠과 밝음의 문제. 이것에 대해서 참 아주 민감해요 보며는... 경전에서나 조사스님들의 법문 속에서도, 자주 지적하는 대목입니다.
邪來煩惱至(사래번뇌지)요→ 삿된 것이 오면 번뇌가 이르고, 바르지 못한 소견. 그것을 사라고 그래요.
사래번뇌지→ 삿된 것이 오면 번뇌가 이르러 오고,
正來煩惱除(정래번뇌제)인데→ 바른 것이 오면 번뇌가 제거 된다.
邪(사) 正(정)을 俱不用(구불용)하면→ 사와 정을 함께 사용하지 아니하면,
淸淨至無餘(청정지무여)하리라.→ 텅 비어가지고서 남음이 없을 것이다. 사다. 정이다 하는 것. 정이라고 하는 것이 좋은 것 같지만, 그것도 역시 정이라고 하는 흔적이 있는 한은 아직 부족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예 사니. 정이니 하는 것을 아예 쓰지 아니 하는 그 자리. 그 자리가 정말 훌륭한 자리입니다.
淸淨至無餘하리라.→ 청정에서 무여에 이른다. 남음이 없는 이것을 “無餘涅槃(무여열반)이다.” 이렇게도 할 수가 있지만, 남음이 없는 데 까지 이른다. 아무것도 번뇌가 남아 있지 아니할 것이다 이겁니다.
菩提本自性(보리본자성)은 起心卽是妄(기심즉시망)이라→ 보리의 본자성! 우리의 깨달음의 자성자리! 아주 좋은 자리지요. 알맹이라고도 할 수가 있고, 깊은 본래의 마음 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데, 거기에 어떤, 기심하는 것은 어떤 한 생각을 일으키는 거예요. 이 마음 心자. 이때 마음 心자는 어떤 생각이지요. 어떤 상대적인 생각을 하나 일으킬 것 같으면, 곧 그것이 망이다 이겁니다. 妄靈(망령)된 것이다. 진짜가 아니다 이겁니다.
그것은 물에 물거품이 일어난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겁니다.
괜히 흔들리니까 거품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거품은 진짜 물이 아니지요.
淨心(정심)이 在妄中(재망중)하니→ 청정한 마음이 그 마음가운데,
망령된 생각 가운데 있으니,
但正無三障(단정무삼장)하라→ 다만 바르게 삼장을 없게 하라.
다만 바르게 해서 삼장이 없게 하라. 이 삼장은 3가지 장애라고 하는 것인데, 業障(업장). 報障(보장). 煩惱障(번뇌장) 그래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장애가 있는데요. 우리가 보통 무엇을 하는 일이 전부 업입니다.
직업이 없어도 업을 지어요. 직업이 있는 사람만 업을 짓는 것이 아니고요. 하는 일이 전부 업인데요. 그것을 통해서 어떤 결과가 있게 되겠지요. 그것을 果報(과보)라고 하는 갚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報. 보가 있게 되고... 우리는 안할 수가 없어요. 하는 일이 전부 障碍(장애)입니다.
그 다음에 거기에 따르는 어떤 그 결과도 전부 장애입니다. 報障(보장).
그것도 결국은 장애라고요. 그런 것들은 결국 어디서 일어나느냐?
“번뇌에서부터 생긴다.”
그래서 번뇌도 장애요. 번뇌 때문에 업을 짓는 것도 장애요. 그 업 지어서 과보를 받는 것도 장애입니다.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는 어떤 선업을 지어도 선업 그 자체도 역시 “마음의 장애다.” 하는 것입니다.
淨心在妄中(정심재망중)하면 但正無三障(단정무삼장)하라→ 다만 아주 바르게 돼가지고서 아까 正來煩惱除(정래번뇌제) 라고 그랬지요?
삼장이 없다. 그것이 그렇다고 손발 묶고 가만히 있느냐 하면, 그런 상태는 아니지요. 더 활발하게 삶을 펼치더라도 그것은 이미 장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텅빈 삶! 바른 그 어떤 삶은...
|
첫댓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_()_()_()_
'惟記吾言(유기오언)하면→ 오직 내 말만 기억하고 잘 외우고 있기만 하면, 亦無有益(역무유익)하리라→ 또한 이익이 없으리라.' 먹기 위해서 사는건 개. 돼지이지요. 오직 성성하게 살기 위해서 먹어야 합니다.
<無相頌>... 說通及心通하면 如日處虛空하나니 唯傳見性法하야 出世破邪宗이로다 法卽無頓漸이언만 迷悟有遲疾하나니 只此見性門을 愚人은 不可悉이로다 說卽雖萬般이나 合理還歸一하나니 煩惱暗宅中에 常須生慧日하라 邪來煩惱至요 正來煩惱除인데 邪正을 俱不用하면 淸淨至無餘하리라 菩提本自性은 起心卽是妄이라 淨心이 在妄中하니 但正無三障하리라... _()()()_
말로도 통하고 마음으로도 통하면 마치 태양이 허공에 떠있는 것과 같나니, 오직 見性法을 전하야 세상에 나와 가지고 삿된 가르침을 전부 깨뜨림이로다. 법에는 頓과 漸이 없건마는 더디고 빠른 것이 있으니, “견성”하는데 이 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모름이로다. 말 할 때는 만가지지 마는 이치에 합해 놓으면 하나로 돌아가나니, 번뇌의 어두운 방 속에다가 지혜의 태양이 솟도록 하라. 삿된 것이 오면 번뇌가 이르러 옴이요, 바른 것이 오면 번뇌가 제거 됨인데. 邪와 正을 함께 사용하지 아니하면, 텅 비어가지고서 남음이 없다 하리라.
우리 깨달음의 자성자리에 한 생각을 일으키는 것은 妄 이라, 청정한 마음이 망령된 생각 가운데 있으니, 다만 바르게 삼장(業障(업장). 報障(보장). 煩惱障(번뇌장)을 없게 하라... 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감사드립니다... _()()()_
煩惱暗宅中에 常須生慧日하라....번뇌의 어두운 방속에다가 지혜의 태양이 솟도록 하라...대원성님, 고맙습니다. _()()()_
대원성님의 수고에 마음 공부 잘하고 갑니다...고맙습니다._()()()_
_()()()_
煩惱暗宅中에 常須生慧日하라...[번뇌의 어두운 집 속에 항상 모름지기 지혜의 태양이 거기에서 나오도록 하라]..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_()()()_
"번뇌의 어두운 방속에다 지혜의 태양이 솟도록하라".....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_()()()_
대원성님 참으로 수고하였습니다. 읽고 또 읽고 번뇌암탥중에 상수생혜일이라 너무 감사합니다.
煩惱暗宅中(번뇌암택중)에 常須生慧日(상수생혜일)하라...고맙습니다._()()()_
청정한 마음이 망령된 생각 가운데 있으니 바르게 삼장(업장,보장,번뇌장)을 없게하라._()()()_
저 역시 그전에는 漸悟가 맞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頓悟가 아닌 깨달음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_()()()_
대원성님...감사 감사드립니다...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煩惱暗宅中 常須生慧日 _()()()_
감사합니다. 대원성님_()()()_
마하반야바리밀()()()
_()()()_
감사합니다_()()()_
煩惱暗宅中(번뇌암택중)에 常須生慧日(상수생혜일)입니다. 지혜의 태양이 저 어느 모퉁이에서 떠오르도록 하라 이겁니다._()()()_
_()_
삼배 올립니다
煩惱暗宅中에 常須生慧日하라.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淨心在妄中 , 但正無三障 .......고맙습니다.
煩惱暗宅中(번뇌암택중)에 常須生慧日(상수생혜일)입니다. 지혜의 태양이 저 어느 모퉁이에서 떠오르도록 하라 ...고맙습니다_()()()_
煩惱暗宅中 常須生慧日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감사합니다
_()()()_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淨心在妄中(정심재망중)하면 但正無三障(단정무삼장)하라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마하 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_()()()_
_()()()_
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