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4일 있었던 생협연구회 모임은 생활협동조합중앙회 곽창렬 고문님을 모시고 생협의 태동기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생활협동조합운동사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날 시간이 넉넉치 않아 남은 이야기는 다음에 한번 더 모시고 듣기로 했습니다. 아래는 곽고문님이 준비해오신 자료를 요약한 것입니다.
1. 생활협동조합운동의 시발
(1) 생활협동조합 태도의 배경
1960년대 정부의 경제개발정책 이후 1970년대 우리나라의 경제는 급속히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발전과 성장은 대량생산, 대량판매, 대량소비의 고도산업사회를 출현시킨 반면 노동자에 대한 억압, 소비불균형 및 도농간 소득 불균형 등의 문제를 초래했다.
이 때 이미 선진 각국에서는 산업화정책의 추진으로 소외된 계층의 상대적 빈곤을 완화시키고 국민경제의 안정에 기여할 수 있도록 정책적으로 소비자 생활협동조합을 육성시키는 등의 사회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으나, 우리나라 정부는 거의 무관심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은 소비자들로 하여금 자각된 협동조합 활동을 추진하게 하였으며, 1960년대에 자발적으로 활동으로 신협운동을 성장시킨 신협인 중에서 생활협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생활협동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2) 신협의 공동구매사업이 지역생협으로
그 당시 신협을 구성하는 조합원들은 농어촌의 영세한 농어민, 광산촌의 광산노동자, 도시지역의 영세소득계층과 근로생활자들이 주류이었다. 신협의 신용사업으로도 기존 금융기관의 높았던 문턱에 비하여 진정 이들을 위한 획기적 금융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협의 여수신 업무만으로는 농어촌에 있어서 영세농어민의 생산물을 소득과 연결하는 효과적 판매방도를 찾을 수가 없었고, 특히 광산지역의 복잡한 유통구조로 인한 일용품 가격의 잘못된 형성은 광산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가계를 더욱 어렵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당시 신협연합회의 사무국 대표자로 일하던 필자(현 생활협동조합중앙회 곽창렬 고문님)는 신협법(1972년 제정)을 근거로 법의 근거를 갖고 신협의 조합원을 위한 경제사업 실시와 그 활동 범위의 확대를 구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구 신협법 제31조에 규정한 신협의 사업중 동조 제1항 6호「조합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위한 교육 및 지역사회개발」의 '지역사회개발사업'을 신협의 조합원을 위한 경제사업실시 근거로 하고자 주무부인 재무부에 지역사회개발사업으로 신협의 경제사업실시 여부에 대한 유권해석을 요청한바, 1973년 12월 31일 재무부로부터 신협이 조합원을 대상으로 지역사회개발사업의 일환으로 경제사업(공동구매·공동이용 및 공동판매업무)을 실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얻어냈다.
그러나 신협의 모든 체계가 신용사업위주여서 경제사업이 잘 맞지 않는 점, 임직원의 교육부족, 내부적 마찰 등으로 인한 어려움이 있었다. 이후 한때 신협의 경제사업 실시 조합수가 많을 때에는 200여 조합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1979년부터 신협의 경제사업 억제정책에 따라 신협의 경제사업은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였다. 이에 여러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지역생협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3) 천주교 원주교구의 생활협동조합 지원활동
천주교 원주교구에서는 1980년 10월 '사회개발위원회'를 설립하여 농촌지역에 생협소개, 설립지원, 운영지도, 임직원교육, 사업지원 등의 다양한 활동을 수행하였고, 1982년 12월 '농촌생협협의회(후에 생협강원도연합회로 개편)'를 구성하여 농촌지역의 생협들이 연합하여 공산품의 공동구매와 농산물의 도시지역 생협에 대한 공동출하를 실시하는 등 관할구역 내의 농촌과 광산지역의 개발을 위하여 농촌과 광산지역에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지도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농촌지역 농민과 광산지역 노동자들의 의식계발과 경제적 생활개선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에 따라 강원도에서는 1980년도 중반에 천주교구 관할 내의 강원도 영월군, 평창군, 원성군, 횡성군, 정선군, 충북도의 제원군, 중원군과 경기도의 여주군내에 26개의 농촌 생협이, 그리고 원주시내에 3개의 단위신협이 생협업무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백, 정선의 광산지역에도 10여개의 광산노동자생협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2. 생활협동조합의 체계적 육성
(1) 생활협동조합의 전국연합조직 설립
1982년 9월 1일 신협의 경제사업을 실시하였던 경험을 가진 사람, 당시 신협의 부대사업으로 경제사업을 실시하고 있던 조합의 대표자, 독자적 생활협동조합활동을 하고 있던 사람, 그리고 생활협동조합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회동하여 독립조직으로서의 자발적 생활협동조합의 전국연합조직을 설립하여 체계 있는 생활협동조합 제도의 확립, 조합운영 방식의 통일과 업무지도, 협동적 공동구매업의 추진, 임직원의 경영능력 배양을 위한 교육훈련의 실시, 생활협동조합의 설립과 운영을 법으로 보호하여 공신력을 부여하는 생활협동조합법의 입법추진 등의 업무수행을 위하여 생활협동조합중앙회(초기에는 소협중앙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후 1983년 2월 20일 전국 각지의 생활협동조합 활동 관련자 대표 16명이 회동하여 생협중앙회 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고, 1983년 9월 30일까지 생협중앙회 설립에 동의한 76개 단위조직의 동의를 받았다. 그리하여 1983년 10월 13일 생활협동조합의 전국연합 조직체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탄생하였다.
(2) 생협중앙회의 사단법인 허가 취득
1984년 3월 25일, 생협중앙회는 경제기획원장관에게 사단법인 설립허가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이에 대하여 경제기획원에서는 전국의 단위조합을 현지 답사하여 실태를 확인하고 1984년 11월 5일에 경제기획원 유소 336-226호로 생협중앙회의 회원 중 다수가 기존조직의 부대사업 형태였으므로 모든 회원조합은 반드시 독자적 정관을 갖는 독립조직인 생활협동조합으로 하고 회원조합의 자본금(출자금)의 충실화와 유능한 경영진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래서 독립조직으로서 생활협동조합 체제를 갖춘 조합만을 회원으로 확보하여 1987년 3월 23일에 법인설립 개편총회를 개최하여 임원을 선임하고 체제를 정비하였다.
생협중앙회는 1987년 3월 28일에 경제기획원으로부터 법인허가를 취득하였고 1987년 4월 16일에는 법인등기를 완료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인정하는 유일한 생활협동조합의 전국연합체로서 사업과 활동을 수행하게 되었다.
(3) 생협중앙회의 운영 및 운영자금 조달
1983년 10월에 설립된 소비자협동조합중앙회(현 소비자생활협동조합중앙회 - 이하 생협중앙회라 함)는 단위생협의 정관례, 회계방식, 사업실시 요령 등을 체계있게 정하여 단위생협이 채택하도록 하고 임직원 교육과정의 설정, 그리고 유관 행정기관이나 세무관서와의 대외활동, 관련 국제기구와의 연대활동, 그리고 생협법의 제정과 관련하는 활동 등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회원조합으로부터 수납되는 자체회비 수입금으로는 겨우 생협중앙회의 일반관리비 예산으로 충당하고 교육, 지도, 홍보 및 조사연구 활동 등에 소요되는 예산은 외부로부터 재원을 조달하여야 했다.
부족한 예산의 재정조달을 위한 활동의 결과로 1989년 5월부터 1998년 4월까지 9년간 네덜란드에 소재한 천주교 주교회의 사회개발재단(BILANCE재단 - 종전의 CEBEMO재단)으로부터 교육, 지도, 홍보 및 생협연구 활동비로 676,000여달러(6억4천여만원) 그리고 독일에 소재한 기독교 사회개발재단(Evangelische Zentralstelle for Entwicklungshlife - EZE)으로 부터는 1년간(1990년 8월부터 1991년 7월) 시청각교재 및 홍보자료 작성기기, 이동교육용 차량, 생협소개 테입제작과 같은 용도의 목적으로 185,000마르크(8천2백여만원)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3. 생활협동조합의 성장기반 조성
(1) 다원적 조직의 극복
생활협동조합운동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측의 소협연합회 설립에 이어 통일교에서도 전교활동의 일환으로 교회단위로 생활협동조합을 설립하고 통일교 본부조직 내에 한국생활협동조합연합회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생활협동조합운동은 기존 단체가 생협을 자체 사업수단으로 실시하려 하였던 시행착오, 그리고 각기 독자적으로 추진하려던 다원적 조직의 분산된 활동으로 협동과 힘의 결집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생협중앙회만은 생활협동조합 연합조직체로서의 정통을 유지하면서 우리나라 민초들의 생활협동조합의 육성과 발전을 위한 역할과 활동을 담당하여 수행한 것이다.
(2) 초기 생협운동의 시행착오
생협중앙회의 설립초기에 운영되던 단위생협은 주로 상설구판장을 설치하여 슈퍼마켓방식으로 운영하였다. 독자적 활동으로 시발된 1980년대 중반의 생협상설구판정은 생협자체의 내부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자체자금 조달능력의 한계, 그리고 능력있는 경영자의 부재에다 거대자본의 유통업계 참여 및 중소유통업자들의 반대와 저지활동을 극복하지 못한 채 생협의 상설구판장 운영은 성장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시행착오를 겪게 되었다.
(3) 생협사업의 개발과 확대
198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의 공동구입형 사업방식을 채택하여 조합원들로부터 사전주문에 의한 소공동체 단위로 생활물자를 배달공급하는 무구판장형 방식을 채택하는 생협이 늘어남에 따라 생협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거의 모든 생협의 가장 활발한 사업은 유기농산물의 직거래사업이다. 생협을 통하여 소비자들이 함께 힘을 모아 유기농법으로 생명농사를 짓고 있는 생산자와 연대하여 생산자는 소비자의 생명을 보호하고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활과 생업을 보장하는 도농직거래사업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사업방식을 채택한 생협은 1990년대에는 조합원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사업규모도 확대되어가는 추세이다.
생협의 사업가운데는 구매공급사업 외에, 조합원의 생활과 생업에 필요한 시설로서 조합원 개인으로서는 설치하기가 어렵고 설령 설치가 가능하더라도 조합원 개인의 이용만으로서는 그 시설활용의 효율이 매우 저조하여 시설물의 지속적 유지가 어려운 것을 생협에서 시설물을 설치하고 조합원으로 하여금 편리하고 적은 부담으로 이용하게 하는 시설물의 설치운영사업인 공동이용 시설사업(보건의료사업, 유아보육사업)이 있다.
(4)생협법 제정의 실현
1980년대 후반기부터 생협중앙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생협법의 입법활동은 정부당국의 생협에 대한 무관심과 생협 육성정책의 부재, 그리고 재계와 중소유통업자들의 집단이기주의에 의한 분별없는 극렬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생협법의 입법활동은 번번히 저지당하고 실패를 되풀이하였다.
1998년, 생협법제정을 추진하기로 방침을 세운 재경부는 관련부처와의 협의를 거쳐 생협법안을 확정하고 동 생협법안을 6월 1일에 입법예고하였다. 그러나 1998년 7월 2일 생협법안이 규제개혁위원회에 회부되어 4개월에 걸쳐 진통을 겪은 후 정부제안으로 1998년 11월 27일에 국회에 제출되었다. 그리하여 1998년 12월 29일에 의결되었고 1999년 2월 5일 생협법은 법률 제5743호로 공포되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미흡하나마 생협법이 없는 것보다는 생협법이 제정되어 생협의 설립근거라도 마련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 생협사업의 지나친 축소와 생협연합조직의 설립근거마저도 없는 바람직하지 못한 내용의 생협법은 제정되게 되었다.
4. 생활협동조합의 발전방향
생협운동에 있어 중요한 사항은 일상의 소비생활을 생산활동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즉 의식주 등에 필요한 생활물자(생활수단)의 소비는 기본적으로 인간 생명의 유지와 인류의 생존을 위한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활수단을 소비하는 행위는 바로 인간을 생산하기 위한 행위가 되는 것이며, 생산수단을 인간중심에서 본다면 단순한 소모성의 "소비"가 아닌 "생산"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협활협동조합은 현대사회의 전체구조 속에서 생활자들의 자기 방어를 위한 조직으로서 기능을 해야하며 동시에 기존의 잘못 형성된 생활양태를 개혁하여 새로운, 그리고 바른 생활문화의 개척을 주도하고 실행하는 주체적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해야한다.
그러기 위해 기본적으로 생활협동조합에 대한 이념이 정립되고 이를 공유함으로써 생활협동조합의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하며, 생협운동의 정신(자립의 의지, 협동의 실천, 개척의 미래)으로 인간생명의 보호, 인간생활의 개선, 인간사회의 발전이라는 생협운동의 실천과제들을 하나씩 실천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