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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핑계 삼아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분명 앞으로도 쭉 ‘이성미 = 깍쟁이 같은 개그우먼’이라 단정 짓고 살았을 거다. 그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치 인생에 든든한 서포터라도 얻은 양 마음이 든든하다. 불같은 20~30대, 좌절과 희망으로 다시 선 40대 그리고 지금 50대까지… 이성미씨와 1박 2일 동안 진행한 인터뷰는 수많은 여성들이 공감할 만한 ‘어른이 되어가는 길’에 대한 자화상 같았다.
지난 연말, 이성미씨를 만나러 목동 SBS 방송국에 갔다. 그는 후배 개그우먼 박미선이 새로 MC를 맡은 <절친노트>에 이경실과 함께 절친으로 출연해 녹화 중이었다. 오랜만의 방송국 나들이가 낯설기는 리포터나 그나 마찬가지. 7년 만의 복귀 때문일까? 그는 너무 많이 바뀐 환경 속에 혼자만 그대로 서 있는 느낌이라며 속마음을 전한다. 자연스레 인터뷰가 시작된다. 그와 첫 인터뷰를 준비하며 잡은 주제는 ‘세월’. 캐나다에서 지낸 7년을 정리하고 다시 TV 앞에 선 그와 마주했을 때 처음 든 생각 때문이다. 세찬 파도에 쉼 없이 부딪히며 겉은 둥글어지지만 속은 더 단단해지는 조약돌마냥 그는 전에 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모두 세월의 결과다.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 이제 쉰하고도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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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듦은 나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는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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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월 동안 저는 참 많은 노임을 받은 거 같아요. 어떤 일에 욕심내지 않을 때 그 자리가 내게 주어진다는 걸, 손을 펴고 있으면 많은 것들이 들어온다는 걸 시간을 통해 배웠죠. 살면서 참 많이 배웠어요.” 객관적인 시선으로 냉철하고 정확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것도 지나간 세월이 그에게 준 선물. 캐나다에서 보낸 7년은 그에게 자신의 단점을 바라보는 힘을 길러줬단다. 깎아낼 것과 버릴 것, 넘치는 것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세상을 보는 눈도 조금은 달라졌다고. 홀연히 떠난 7년간의 캐나다행이 여전히 ‘잘 떠났다’고 생각되는 지점이다. 그에겐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살다 보면 아쉬운 순간이 있게 마련이라지만 그는 예외다. 세월이라는 게 후회한들 되돌릴 수 있을까마는 행여 가능하다 해도 되돌리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분명한 생각이다. 오히려 시간을 소중히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몇 시간만, 며칠만 더 살고 싶다고 하지 않냐며 반문한다. 후회보다는 다가올 시간들에 대한 기대감이 그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길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20대가 꽃봉오리라면, 30대는 꽃이 피어나는 시기죠. 40대는 그 꽃이 만개해 향기를 내는 때고요. 가장 아름다운 40대를 지나 꽃이 지고 열매를 봐야 할 때가 50대죠.” 꽃이 피고 지는 세월 동안 그 역시 50대에 접어들었다. 그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도록, 잘 썩지 않도록 돌보는 일이 바로 지금 할 일이란다. 스무 살에 대중 앞에 섰으니 우리가 그를 본 지도 무려 30년이 지났다. “세월은 나를 다지는 일”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에겐 자신을 다져온 길고 긴 시간이 있었다. 그 속엔 슬펐던 시간, 힘들었던 시간, 기뻤던 시간이 모두 들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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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과속처럼 빨리 지나간 시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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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는 그에게 과속 같았다. “세월이 시속 20킬로미터라고 하더니… 웬걸, 과속이었다”는 그의 우스갯소리처럼 20대는 돌아볼 틈도 없이 10년이 후딱 지나갔단다. 밤을 새워도 짧게만 느껴졌다던 그때, 그의 나이 스물이었다. 성우를 꿈꾸다 1차, 2차 예선도 거치지 않고 우연히 개그콘테스트 본선에 참가했다가 대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 스무 살의 이성미. 일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재미있던 그때, 인생은 밝았고 세상은 웃을 일만 가득했다. 지금이야 개그계의 원로 같은 이홍렬, 주병진, 최양락, 임하룡 등이 함께 어울리던 동료들. 요즘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지방 공개방송이라도 있는 날이면 다 함께 방송국 버스를 타고 가는 길 내내 마이크 잡고 장기 자랑도 하고 노래도 부르던 추억들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당시 아버지와 단둘이 살던 여의도의 집은 동료 개그맨들의 숙소처럼 이용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늘상 남자 동료들 틈에 묻혀 지내는 딸을 보며 노심초사했단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개그우먼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김미화, 이경혜 등도 한참 뒤에 데뷔했다). 그러니 남자 동료들 이 그를 얼마나 아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특히 이홍렬의 칭찬과 주병진의 격려는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는 초등학생처럼 들뜨게 만들었단다. 스물한 살 때부터는 시집가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누군가를 웃겨야 하는 직업 때문일까? 자꾸 사람들이 자신을 우습게보는 것만 같아 투덜거림이 늘고, 하루빨리 일을 그만두고 시집이나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다. 하지만 10년 동안 일에 치이다 변변찮은 연애도 못 해보고 서른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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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회 없는 결정 그리고 남겨진 책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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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는 제게 찬바람이 휙 몰아치던 때죠. 혹한기를 지나 매서운 바람 속에서 버티며 철도 많이 들었어요. 어떻게 보면 가장 행복하던 시간이기도 하죠.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얘기지만, 살아오면서 바꾸고 싶지 않은 시간이에요. 딱 한 개를 잃고 9만9천 개를 얻은 셈이죠.” 그에게 30대는 역경의 시기였다. 미혼모의 길을 선택하면서 그는 2년 반 동안 브라운관을 떠났다. 그는 “내 인생에서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었던 시간”이라고 회고한다. 그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며 살 수 있었다고. 사람들은 그 힘겨움을 어떻게 이겨냈을까 싶겠지만, 그에게는 그리 힘들지만은 않은 시간이었다. 생명을 선택했기 때문. 무남독녀의 천청벽력 같은 임신 소식에 “나가!”라던 아버지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른 것도 그런 이유다. 어떤 변명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단다. “결혼 전에 그런 일이 있었으니 반성했죠.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이잖아요. 대가는 따랐지만 그동안 기울어졌던 나를 반듯하게 세울 수 있었어요. 안 그랬다면 전 더 망가지고 더 교만해졌을 거예요.” 혹한기 같은 시간을 버티면서 그는 살면서 겪는 고통이나 고난이 언젠가 보다 나은 삶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될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행여 그가 외로워하지는 않을까 싶어 동료 개그맨들이 현관문이 닳도록 찾아올 때도, 2년 반 만에 다시 함께 방송하자며 그의 손을 잡고 이끌 때도,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도, 두 번의 자연유산 끝에 힘겹게 얻은 둘째 아이도… 모든 게 고맙고 소중했다. 그는 30대의 큰 산을 넘으며 힘겨운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웠다. 다른 이의 상황을 놓고 자기만의 잣대를 들이대는 우도 더 이상 범하지 않았다. 고난에 놓인 사람들에게 어떤 결정을 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기 때문이다. 수많은 일을 겪으며 그는 마흔을 맞이했다. 너무 바빠서 숫자(나이)를 셀 겨를도 없을 만큼 세월은 매서운 바람처럼 지나갔다. 그렇게 마흔까지, 그의 인생은 직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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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내 인생의 쉼표 찍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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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되면서 그의 인생은 안정권에 접어든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 그리고 아버지와 같이 살 수 있어서 행복했다는 그. ‘나도 이렇게 누리며 살 수 있구나’ 싶을 만큼 물질적·정신적으로 가장 충만하던 그때. 하지만 삶은 언제나 고요하지만은 않다. 그는 아무런 준비도 못 한 채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을 맞이한다. “제 별명이 ‘심청이’였어요. 아버지 역시 무남독녀밖에 모르는 봉사 같은 분이었죠. 오직 저를 위해 사셨어요. 그런 분이 어느 날 제 곁을 떠나신 거예요.” 2002년 아버지가 그의 곁을 떠난 날, 그의 인생도 와르르 무너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던 그때. 그저 가족과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단다. 캐나다 이민을 결정한 것도 그런 이유다. 첫째 은비가 유학 보내달라고 했을 때도 ‘여기서 하라’며 딱 잘라 말한 그가 아이들을 이끌고 캐나다로 간다. ‘깔끔하게 정리된 옷장’ 같다고 할까? 캐나다의 생활은 그에게 삶의 정리 정돈을 가르쳐줬다. 일상 또한 보통의 주부 생활 자체였다. 유독 아침잠이 많던 그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새벽형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아이들의 도시락을 싸고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니 하루가 참 길었다는데. 한국을 떠날 때 막 14개월이던 셋째와 함께 그는 모처럼 휴식을 즐겼다. “음~ 쉼표 같은 시간이었어요. 그 쉼표가 굉장히 오래 지속됐지만 말예요!” 그 시간은 7년간 이어졌다. 그런데 돌아보면 그 시간이 각기 다른 느낌을 주었다고. 처음 1년은 소풍 간 느낌이더니, 2년째는 수학여행 온 느낌이더란다. ‘내가 여기 사는구나’ 느낀 것은 3년째 되던 해부터다. 그리고 5년 만에 ‘내가 여기 사람이구나’ 깨달았다는데…. 문제는 5년째부터 나타났다. 땅에서 2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느낌이랄까? 친구도 많고 생활도 즐거웠지만 뭔지 모를 목마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남의 나라 시민권이 있어도 ‘역시 내 나라는 대한민국이구나’라는 생각, 그게 어떤 건지 뼈저리게 느껴지더라는 것. 다시 친구들 품으로, 남편 품으로 돌아갈 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7년이라는 시간은 7개월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불기도 전에 혹 하고 넘어진다’는 불혹의 40대가 저물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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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파이팅! 나의 5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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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에 접어들면서 그는 처음으로 ‘세월’을 생각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을 수도 있다는, 인생을 잘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른다운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단다. “옛날에는 50대면 굉장히 나이 먹은 사람, 할머니 같은 사람이었잖아요. 진짜 ‘어른’의 나이죠. 누구에게든 상처 대신 격려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컴백도 빨라졌다. 넓디넓은 방에서 혼자 새우잠을 자던 남편의 모습은 그에게 영구 귀국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곧 아이들의 의견을 묻고, 친구들의 의견을 물었다. 양희은, 이홍렬, 이경실, 박미선… 절친들은 다시 한 번 그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오래전 단골집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처럼 그는 사람들 품에 안겼다. 더불어 생각지도 못한 일도 다시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와 좋은 점이오? 1순위는 내가 볼 수 있는 사람을 볼 수 있는 거죠. 다시 일을 시작한다는 건 2순위예요! 친구들을 보며 내가 참 많이 그리워했구나 싶은 생각, 나이가 들면 이렇게 외로워지는 거구나 싶더라고요.” 그를 반기는 건 친구들뿐만 아니다. TV 속 변함없는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 짓는 우리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오버를 못 해서 경실이처럼 웃지 못하고, 기력이 안 돼서 영자처럼 못 웃긴다”는 그의 말처럼 시청자들은 사부작사부작하는 그의 웃음을 반갑게 맞이했다. 청년 사역을 하며 만난 아이들 80명은 또 어떤가. 스물다섯 살부터 서른두 살까지 마음으로 돌봐야 할 수많은 ‘자녀’가 생겼다. 모두 그가 안아줘야 할 아이들이다. “저 역시 한때 깍쟁이 같았죠.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한 생각 때문이에요. 누구도 나를 보호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 그게 저를 뾰족하게 만들었어요.” 지난 삶에서 마주친 고난과 역경은 50대의 그에게 지혜를 안겨줬다. 뾰족하던 마음을 둥글게 하고, 분노로 가득하던 마음을 비우는 법도 알았다. 사랑을 받고 싶으면 먼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도 그가 깨달은 사실이다. 자녀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의 달라진 모습은 아이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키워줬다. 지난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 첫째 은비는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엄마, 존경합니다. 잘 키워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쓴 아이의 마음을 읽으며, 오빠가 보낸 편지를 고이 간직하는 딸들을 보며 그는 혼자 생각했단다. “아! 나는 참 부자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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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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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둘! 50대도 이제 시작인데 그는 일찌감치 60대, 70대의 밑그림을 그려두었단다. 아홉 살인 셋째까지 자기 앞가림을 할 나이가 되는 60대부터는 남편과 함께 남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 누구든 상관없다. 지친 연예계 후배든, 길가로 나온 10대든, 북한의 굶주린 아이들이든… 그들과 따뜻한 마음을, 엄마의 사랑을, 밥 한 숟가락을 나누고 싶단다. “풍선을 불 때 말이에요. 갑자기 너무 크게 불면 나중에 오그라들고 쪼그라들면서 볼품없이 변하잖아요. 그런데 요새는 대부분 풍선을 너무 빨리 크게만 불려고 하는 것 같아요. 조금씩 한숨씩 불어넣어야죠.” 한숨, 한숨 바람을 불어넣는 일뿐 아니라 조금씩 바람을 빼는 일 또한 더없이 중요하다는 걸… 세월의 끝은 나눔이라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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