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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으로 본 재건교회의 정체성 II: 재건교회 정체성이 도전 받는 원인
요즘 들어서 친일파 진상규명 작업이 과거사 문제와 맞물려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게다가 정경언론유착의 X파일 소용돌이가 몰아치면서 우리 사회는 과거사 해결문제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이러한 와중에 친일파들, 과거사의 악역들, 또한 X파일의 구체적인 명단들이 심심치 않게 개봉되면서 우리사회가 어수선하다. 친일파 문제와 같은 맥락에서 해결되어야 할 과거사 문제를 앞에 놓고 기독교계는 ‘도둑 제 발 저린 모습’인 것 같다. 대형교회의 대명사격인 조용기 목사는 자신이 그동안 “값싼 복음”을 전했다고 몇몇 목사들과 함께 공식적으로 실토했다. 그들의 위치에서 쉽지 않은 고백이다. 교리적-개인/가족 비리사건들로 고민하던 그들이 과거사 청산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계속해서 사회에 끌려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적 정화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부끄럽게 느껴진다. 얼마나 교회가 못났으면 사회적 지탄 대상으로 여겨졌을까?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복음의 진리를 수호하는 사명을 잃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회를 깨끗하게 해야 하는 순기능의 역할을 역기능으로 바꾸어가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개혁주의 재건신앙운동이 사회나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여야 된다고 생각한다. 고마운 것은 재건교회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여러모로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 이는 그들이 재건교회의 신학이 정립되지 못했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따가운 시선들이 부정적이든 아니면 긍정적이든 고마운 일들이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도전들이 재건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기여가 크다고 생각한다.
김남식 목사는 합동측 교단 소속 목사이고, 총신에서 선교학을 가르쳤던 분이다. 재건교회에 대한 남다른 관심 속에 다음과 같은 글들을 발표했다. “재건교회 형성과 신학”(종교개혁과 개혁신학: 낙산홍치모 교수 은퇴기념논문집 pp.717-739)과 “신사참배 양태론” (신학지남, 2003년 여름호, pp. 325-367)이다. 이 글에서 나타나는 그의 논지를 크게 두 가지로 분석하면, 재건교회가 한국교회사 안에서 미치는 정치적 역할과 신학적 문제점이다. 그는 재건교회가 신사참배 반대 운동에 있어서 강경한 입장을 고수한 교단으로 인정하려고 노력한 점에서는 매우 고무적이다. 허나 재건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평은 오늘날과 그 당시 놓여있는 지평 사이를 융화시키지 못한 체 자신의 편향적-정치적 관점에서만 비평하였다는 점에서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하면 재건교회 초기신학에 흐르고 있는 개혁주의 신학의 바른 이론과 실제의 실천적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한 면에만 치우쳐있는 결과론적 관점에서 해석 하려했다. 필자는 재건교회의 초기신학은 개혁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되어진 위대한 신앙의 결과로 보고 싶다. 이런 점에서 그 당시와 현재까지의 신학적 발전과 퇴보를 단순하게 하나로 싸 잡어서 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재건교회의 신앙적 특수성과 신학적 비연속성이라는 재건교단 자체의 특유한 색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운동”과 “정화운동”의 차이점은 과연 무엇인가?
김남식 목사는 신사참배반대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재건교회와 고신교회 지도자들의 그 당시 신앙행동들과 그들의 모임에서 결정하고 체결한 문서들을 바탕으로 신학적 고찰로 이어갔다. 이러한 분석들을 바탕으로 두 교회를 비교대조하는 가운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재건교회의 재건운동은 ‘정화 운동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낸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확립을 함께 한 고려파의 ‘진리 운동’과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재건교회의 성격 형성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바른 신앙 노선은 교회의 생명력을 계승하는 계기가 되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문제는 신학적 근거가 정립되지 못한 ‘정화운동’의 방법에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재건교회형성과 신학", p. 6)
김남식 목사가 두 교단을 비교/대조하며 내린 결론으로 보면, 재건교회에서 펼쳐진 신앙운동은 개혁주의 신학과 관계가 먼 운동이며, 또한 잘못된 신학으로 인해서 바른 신앙과 교회의 순수성에 문제가 크다고 보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그가 쓰는 용어에 나타난 신학적 의미가 재건교회를 객관성 있고 순수한 교단으로 보려는 의도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의 전반적인 비평적 접근은 재건교회 초기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재건교회 초기 지도자들 이후에 나타나는 문제점에서는 필자도 동감하는 바가 크다. 허지만 재건교회 초기신학을 바르게 조명하지 않고서는 어떤 비평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것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중심신학은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 교회중심의 개혁주의 신학의 진정한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재건교회 초기신학의 출발점은 분명한 칼빈의 삼대 중심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을 전제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무엇이 “정화운동”이고 무엇이 “진리운동”인지를 분석 해 보려고 한다.
고신교단의 진리운동은 그의 글 “신사참배 수난 후 한국교회 재건 양태연구” 356-358쪽 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간단히 그의 입장에서 요약하여 말하면, “진리운동”은 고신교회의 지도자 한상동 목사를 주축으로 한 회개운동과 신학교육을 바탕으로 한 운동을 말한다. 신사참배를 총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가결한 목사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작업이 해방 이후에 가장 큰 이슈가 되었다. 이는 지극히 성경적-역사적-경험적인 방법임을 자타가 공인하고 있다. 무너진 교회공동체나 국가공동체가 새롭게 조직되거나, 발전하기 위해서는 화해와 회복이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에서 명료하게 강조하고 있는 바다. 역사적으로는 초대, 중세, 근대, 그리고 현대교회사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이러한 회개운동은 지나치게 강조해도 아무 부작용이 없을 정도이다. 특히 히틀러 당시의 목사들이 고백교회 목사들에 대해서 기득권 포기를 선포한 경우는 회개의 진정한 의미를 잘 대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승리한 수진 종들이 앞장서서 회개를 촉구한 신앙운동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한상동 목사도 출옥성도로써 당연히 이러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그가 제안한 자숙안은 고작 3주간동안이며, 자숙내용에서 보면, 공인죄로 여기는 것은 신사참배, 신도연맹가입, 미소기바라이(신도침례)뿐이었다. 동방요배를 비롯하여, 신도예배, 밀고, 부일행위, 백귀남행, 사임압력등은 자인죄로 인정하고 각자의 양심에 달려있다고 주장하였다. 자숙방법은 고작 예배인도와 성례집례및 공중기도인도중지 정도였다. 게다가 일본 기독교단 시대에 안수 받은 목사 장로는 재시취하여 시무하게 하였다. 영적지도자들의 배교적 행각에 대한 회계방법이 요즘 일반 교육계에서 교사들이 실수 하면 교단에서 ‘영구 퇴출’해야 된다고 주장하며 새로운 법을 만드는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하면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징계방법인데도 이러한 비진리적인 자숙안을 신앙적 진리운동으로 잘못보고 있다는 점에서 의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김남식 목사는 한상동 목사가 평양장로회 신학교의 신학적 전통을 계승하는 작업이 진리운동의 중요한 요소로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필자는 이 점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수긍하는 바나 그 당시 상항을 부분적으로 보기보다 전체적으로 잘 살펴서 결론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 가결한 목사들은 대부분 평양신학교 출신들이다.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성경도 신학도 잘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실천분야에서 완전히 실패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고신교단의 지도자 한상동 목사나 재건교회 초기지도자들인 이북재건 교회의 김린희 전도사나 이남재건의 최덕지 전도사 모두는 평양신학교 교수들 밑에서 교육받았다. 그들도 평양신학교 내지는 평양여자신학교 출신들이다. 신학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최고의 실천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한상동 목사와 같이 신학 교육을 바탕으로 한 신앙운동을 펼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단지 기반이 약했을 뿐 아니라 방법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여기에는 분명한 시대적 갈등 속에서 핑개치 못한 여러 가지의 어려운 조건들이 있었다.
첫째 요인은 일제 강압 보다 더 무서운 공산주의 사상으로 인한 역경이다. 사상 투쟁이 해방 직 후 부터 이북 전체는 물론이고 남한에도 심화 되고 있었다. 이로 재건교회 성도들은 보다 큰 환란을 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 6.25를 맞게 되었고, 이북재건교회 지도자 김린희 전도사는 결국 교회를 지키다 뜻을 다 이루지 못한 채 순교하고 만다. 이북 재건교회 교인들은 순교내지는 남한으로 뿔뿔이 헤어져서 남한 재건교회와의 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시대적 상황이 신학교 설립과 신학 교육 발전을 이바지 하지 못하게 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두 번째는 재건교회가 신사참배를 허용한 기성교회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이에 새롭게 시작하는 가운데서 재력과 인력이 매우 부족하였다. 한상동 목사가 신학교를 세워서 후배 양성을 쉽게 할 수 있었던 요인은 배교한 기성교회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들어가서 싸워서 빼어나온 인력과 재력이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배교한 기성교회에 들어가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바르게 인식하고 있었다. 새롭게 교회를 세우자고 하여 개척정신으로 일구어나가다 보니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특별히 새롭게 교회를 개척할 재력과 그 교회를 맡아서 수고할 인물들의 부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남은 자들은 대부분 평신도들이었다. 목사들은 대부분 배교하였고, 몇몇 신앙을 지킨 자들은 경남노회로 복귀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회 하나 형성할 목사 인원도 충족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결국에는 이러한 어려움이 재건교회의 최악의 상태를 낳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나중에 이 부분은 ‘말씀중심’에서 자세히 강조하려한다). 분명한 것은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개혁주의 재건신앙운동을 하기위해 인물과 재력을 얻기 위한 어떠한 타협과 아부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진정한 진리운동의 주체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고신대 교회사 교수 이상규 목사는 한상동 목사를 분리주의로 보고 있다. 경남노회에서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한다. 굳이 이상규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고신교회의 신앙운동은 진리운동이 아니라 분리주의 경향이 농후한 ‘교회 빼앗기 운동’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진리운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은 용어상의 문제가 된다. 물론 한상동 목사가 경남노회를 탈퇴할 때 많은 교회와 인력이 힘이 되었고, 이로 인해 신학교육에 박차를 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결과론적 입장에서 그 진리운동의 영향으로 오늘날 고신교회가 재건교회보다 교회와 교인수가 훨씬 우세하고 신학교도 규모가 크다는 양적원리 (big theory)에 입각한 신앙적 평가는 지극히 잘못된 평가 기준이 된다. 고신교단의 현재 당면한 엄청난 문제들을 통해서 결과론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고신교단의 여러번의 분리들 그리고 현재 고신교회의 신학교 문제나 고신의료원 비리사건으로 인한 국선 이사 파송문제가 그러하다. 누구든지 부흥의 양적 원리와 분리주의 경향이 있는 공동체는 반드시 거기에 맞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재건교회가 질적인 원리에 강조점만 두고 양적인 면에 소홀히 해온 것은 인정하는 바다. 그러나 한 면만 보고 진리운동으로 단정 짖는 부분적 평가는 고쳐 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김남식 목사 자신의 입장에서 본 고신교회의 진리운동을 살펴보았다. 온건한 입장에서 신앙운동을 하였다는 평가는 흡족하지만 편협적인 평가에 대해서는 미흡한 점이 많다. 그는 재건교회의 신앙운동에 나타난 여러 가지 요소들을 산발적으로 분석하여 내린 결과로 “진리운동”과 색깔이 다른 “정화운동”으로 명명하였다. 그가 재건교회 신앙운동을 “정화운동”으로 단정 짖는 이유는 재건교회의 신학 부재를 가장 큰 원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재건교회의 “정화운동”이 “재건주의”와 “신율주의(新律主義)” 그리고 “성별(聖別)주의“와 ”배타주의“ 또한 ”여성운동“의 문제점을 낳았다고 그의 글에서 산발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가 보는 “정화운동”은 다음과 같은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외형적 판단들 때문이다. “재건주의”는 재건교회가 교회와 예배당을 혼동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신사참배한 자들에게 받은 안수와 세례를 다시 받아야한다는 것 때문이다. “신율주의”는 성경을 따르려하다가 율법주의가 된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하루에 4번 예배드리고 일곱 번을 찬양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성교회를 ‘마귀당’ 이라고 정죄한 것, 그리고 재건교회를 선택 받은 무리요 진리를 위한 그루터기로 여기고 있다는 것 등이다. 특히 성경해석상의 문제점을 이러한 근본적인 요인으로 보았다. 성별주의는 기성교회를 ‘마귀당’으로 여기면서 그 교회 구성원과는 절교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식기도, 우상타파, 외국 구제품사양, 사치품과 파마머리 금지 등이다. 배타주의는 ‘동참죄’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죄의 확대는 사진 찍기 반대, 증명수취거부, 현실교회당 소각 등이다. 여성운동에 대한 문제는 신학적 탐구의 결여, 여성지도자에 대한 지나친 경외심의 발로로 보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지적하며 재건교회 신앙운동을 신학적 부재로 생긴 이질적 신앙운동으로 비하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재건교회 초창기 신학적 특수성과 신앙전수의 비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인정해줘야 정당하다. 문제가 있다면 그 이후에 나타나는 분별력 없는 답습이 부분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이북재건과 이남재건 교회의 전체로 보기 보다는 부분적 내지는 제한적 문제로 살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분류의 근거도 없이 도매금으로 초기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매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 비평 받아야 마땅하다.
재건교회 초기 신학은 앞에서 언급한대로 칼빈의 개혁주의 신앙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존 칼빈은 그의 주옥같은 저술들인 기독교강요와 성경주석들을 통해서 거짓교회와 참교회를 분명하게 구별하였다. 그리고 말씀중심이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설명하였다. 물론 칼빈 이후에 극단적 칼빈주의자들에 의한 신학적 변질이 문제가 됨을 후대 학자들의 박사학위 논문들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물론 칼빈이나 종교개혁자들 자신들도 문제가 없지 않아 있다. 칼빈의 과격한 개혁으로 인한 희생자들과 존 낙서의 민중 선동으로 인한 서민들의 피해들 등은 그 당시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종교개혁의 특수성이라는 틀 안에서 보아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초기 재건교회의 신학적 관점들도 이러한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건교회 초기신학은 칼빈주의에 입각한 살아있는 성경 신학에 바탕을 둔다. 그 당시 잘못된 교리와의 싸움에서 실제적인 신앙을 확보하였다는 점에서 개혁신학이 바르게 부각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재건교회의 신학은 마치 새로운 약을 발명하여 임상실험해서 성공한 경우와 같이 거짓교회의 핍박 속에서 신앙을 이겨낸 참교회의 신앙성공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 교단 보다 재건교회 신학은 살아있다. 이러한 점에서 김남식 목사는 재건교회의 신학적 바탕을 하나님에 관한 것, 교회에 관한 것, 성경적 삶에 관한 것으로 그의 비평적 방법의 재료로 삼았다. 필자는 재건신앙운동은 개혁주의의 삼대중심사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갈파하려 한다.
재건신앙운동은 하나님 중심 신학에서 시작되었다!
재건교회의 가장 자랑스러운 신학적 모토는 “하나님께만 충성하자”이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나타난 십계명 중 1,2,3계명은 하나님외에 다른신을 섬기거나, 절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는 신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은 재건교회 초기지도자들에게 분명히 있었다. 이들이 일제 감옥에서 일본 귀신들과 싸우느라 전 생명을 다 받쳐 하나님께만 충성하였다. 이들 만큼 하나님 중심으로 산 자들은 없다. 이것은 자타가 다 공인하는 바여서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자들이 중심이 되어 재건교회가 해방 후 시작 되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다.
이런 점에서 지도자들은 구약 선지자들 같이 재건교회를 남은자의 무리라고 당연히 믿고 있었다. 물론 다른 나라로 도피한 성도들과 토굴에서나 집에서 신앙 지킨 자들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였지만 기성교회 목사나 교인들만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남은 자로 인해 한반도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쓰임 받고 있다는 점에서 감사하며 살았다. 이러한 모습이 신앙운동 가운데 회개운동에서 잘 나타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실패한 사람도 회개하면 회복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보다 철저한 회개를 촉구하였다. 오늘날의 교육계에서 잘못한 교사들에 대한 영구퇴출 법 제안에 비춰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이다. 선지자들 같이 신앙으로 실패한 자들을 깨우는 일은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론을 바탕으로 한 개혁주의 운동임에 틀림없다.
또한 초기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메시야 사상이 분명하였다. 예수그리스도를 절대로 부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았고,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마치 처녀가 신랑 앞에서 지조를 지키는 모습으로 살았다. 이러한 순수한 신앙으로 어떠한 고초를 이겨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순교의 신앙이다. 예수님의 부활의 정신으로 어떠한 유혹, 심한 고문, 그리고 가족들의 어려운 박해 속에서도 성도의 신앙은 지켜졌다. 사탄을 이기신 주님을 믿고 승리할 수 있다는 부활의 신앙으로 이겨나갔다.
경건의 신앙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의미한다. 재건교회 초창기 지도자들은 기도와 예배중심으로 살았다. 보통 우리는 식기도를 식사전에 한번 하지만 그들은 식사 후에 도 하였다. 금식 기도는 즐겨서 하였다. 그리고 예배도 하루에 4번 드렸다. 이들은 경험적 신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엄청나게 강한 인상을 줄 수도 있었다. 배교한 자들과 절교하고 그들 예배에 동참하지 않는 행동들은 그러한 의지의 반영들이었다. 이것은 그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체험적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러한 신앙을 따라가기에 너무 힘들다고 비평하거나 또한 맹목적으로 그러한 신앙에 빠져 외형적인 면에서 흉내를 내는 것도 문제가 된다.
재건신앙운동은 교회 중심의 신학을 바탕을 두었다.
다음과 같은 재건교회 초기 신앙명제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신사참배는 명백한 우상이며 우상숭배 한 교회는 ‘마귀당’이다.
이러한 교회 곧 ‘현실교회’에 다니는 교인들과는 ‘절교’해야 한다.
필자는 참교회와 거짓교회에 대한 신학적 비교를 칼빈의 입장에서 오덕교 교수의 비평을 재비평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정리하였다. 여기서는 간단하게 논하려 한다. 만일 신사참배한 기성교회를, 우상숭배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를 잘못으로 삼아 마귀당 이라고 비난 했다면 재건교회는 문제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일본신은 천왕이어서 예수그리스도보다 위대한 왕으로 섬기는 일을 기성교회가 앞장섰다는 점을. 이러한 신념은 메시야 불신 사상이며, 배교적 행위라는 점이다. 요즘 한국사회에서는 친일파들에 대한 비난운동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다. 그 중에서 근사한 예가 있다. 친일파가 작곡한 노래를 모르고 잘 부르다가, 그 사실을 알고 나서는 부를 마음도 생기지 않고 부르지도 않는다. 소설이나 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더 나가서 독립기념관이나 그 외 몇몇 건물들의 현판들이 친일파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해서 그 현판들을 내리는 현상들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 특히 광화문에 있던 중앙청에 대한 스토리는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이다. 크고 웅장하게 돔 형식으로 잘 지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잔당이라고 해서 모두 부셔버리고 박물관으로 사용할 다른 건물을 지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보고 “건물과 친일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매 아까운거!” 라고 말한다면, 이는 필시 외적인 면으로 좋고 값진 것에 가치관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보낼 것이다. 하물며 영적인 문제를 다루는 교회가 친일파의 앞잡이가 되어 그곳에서 신도예배를 행하였다면 더욱 강열하게 대항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신을 섬긴 후 예배를 드리는 교회당을 부셔버리거나 불태워 버리지 못한 것에 후회하는 사람들이 요즘은 더욱 많이 생길만하다. 친일파의 잔당들의 교회가 서로 싸워서 분리된 교회 교인들 중에는 그런 생각 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친일파의 노래와 건축물들이 지금 우리의 입에서 ‘절교’되고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라!
왜 이러한 현상들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는가? 이는 그들의 제국주의사상이나 신도사상에 물들 수 있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신학 공부할 때 느낀 점이 있다. 그 장로교단은 존 낙서의 후예들로서, 다른 교단에 가서 함께 예배 동참을 하지 않는다. 이는 그들의 사상에 물들 수 있다는 염려 속에서다. 단지 설교나 강의는 허락한다. 이는 그곳에 가서 그들에게 자신들의 바른신앙과 사상을 전할 기회를 삼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개혁교회들이나 재건교회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사회 안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합동측 장로교회는 옛날에 새찬송가를 그들만 사용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시골에 있는 교인이 서울이나 다른 곳으로 이사할 경우 그 교회 담임목사가 다른 교회 소개할 때 새찬송가 쓰는 교회만 가라고 했다. 이는 신학적으로 바른 교단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교인들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문제는 절교나 동참을 거부하는 것이 지역적, 이기적 욕심에서 나온 요건이라면 단호히 거부해야 된다. 그러나 재건교회의 절교는 진리를 수호한 교회가 그 당시에 오염된 친일정신과 신도사상을 대항하며 신앙생활을 하려는 신앙적 몸부림이며 아름다운 유산이라고 믿어야 한다. 곧 개혁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재건신앙운동의 위대한 산물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재건신앙운동은 말씀 중심에 기초를 두었다.
개혁주의 재건신앙은 성경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Sola Scriptura) 믿고 살았다.
그리고그 말씀을 바탕으로 실천하며 살기를 부단히 노력하였다. 재건초기 지도자들은 모두가 평양신학교 출신들로서 그 당시 정통보수신학을 공부하였다. 성경론에 있어서는 66권이 하나님의 계시로 되어진 완전한 말씀으로 믿고 있었다. 유기적 영감설 혹은 기계적 영감설을 믿었다. 종말론에서는 무천년설과 후천년설 보다 세대주의적 내지는 역사적 전천년설을 신앙관으로 삼고 있었다. 그 당시 성경해석적 방법은 전통적인 방법인 문법적-주해적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종종 성경 주해와 설교에 신비적 해석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는 부인할 수 없다. 초대교부들과 어거스틴도 이러한 해석을 한 적이 있고 오늘날 여러 목사들 중에도 종종 영해 곧 알레고리 해석을 하곤 한다. 특별히 이 당시는 역사 비평인 양식비평, 문서비평, 전통비평, 그리고 정경비평, 또한 문학비평인 구조비평, 문예비평 등의 해석적 방법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그 당시 재건교회 지도자들은 신학과 실천의 이중성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평양신학의 정통성을 이어나가야 되겠다는 의지 보다는 거짓교회와 성도들에 대한 개혁의지가 더 강하게 작용하였다. 이로 인해 신학 이론보다 성경말씀을 적용하는 면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오직 교회와 신앙개혁이 초기지도자들의 삶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말씀에 따른 실천적 삶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교단이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러나 노회를 설립할 목사 수가 충족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여성안수 문제를 낳게 된다. 여성 안수직에 대한 문제는 재건총회 역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역사의 증언 1,2,3권에 간혈적으로 잘 나타난다. 참고하기 바란다. 여기서 필자가 느끼는 바는 여성안수직이 진리문제든 아니면 교회정치에 관한 문제든 아니면 양면의 문제이든 간에, 이것으로 인해 교단 분열의 원인 제공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교단 조직을 위해 조급하게 법을 바꾸며 성경연구기간도 제한적이었고, 또한 반대하는 입장과 충분한 대화를 하지 못한 체 분열의 상처만 남게 되었다. 사실은 그 당시 최덕지 전도사는 자신을 목사로 인정하려는 무리들에게 성경이 여성 안수를 허락한다면 받아드리겠다고 하여 헌법개정위원들에게 성경 연구를 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특이할 만하다. 더 훌륭한 것은 서로 헤아졌다가 34년 만에 다시 통합하였다는 점이다.
필자는 여성안수직에 대한 성경적-역사적-문화적 관점에서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입장 양면에서서 지금도 계속 연구 중이다. 1960년대부터 최근 목회와 신학 잡지에서 논쟁한 김세윤 교수의 글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까지, 서로 대립되는 양측의 이론들을 분석 종합한 결과 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세 가지만을 소개하려 한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는 옛창조(언약과 계시)와 새창조에 대한 이중구조를 어떻게 적용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여성직에 대한 인식이다. 세 번째는 사도 바울이 교회 안에서 여성의 리더쉽 내지는 여성직에 대해서 어떻게 언급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이러한 논지를 간단히 두 가지 입장에서 김세윤 교수의 문제점을 필역하고자 한다.
1. 김세윤 교수의 최근 글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에서는 역사비평적 방법에서 여성안수 반대 이론으로 가장 강력한 증거가 되는 디모데전서 2:11-12과 고린도전서 14:34-35절을 사본학적 입장에서 불안한 문서들로 본다. 그래서 후대에 삽입되었다고 단정 짖는다. 다시 말하면 후대에 쓰여 진 후 지금의 위치에 끼워졌다고 믿고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가 남녀 평등을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3:28절과 쌍벽을 이루는 말씀을 창세기 1:26-28로 보고 있다. 또한 창세기 2장의 배필문제와 창세기3장의 타락에 관한 본문 등을 여성안수 가능성의 본문들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역사비평적 방법은 이러한 창세기 인용을 허락할까? 필자는 창세기를 설교적 방법으로 영국 노팅엄 대학에서 박사과정 논문을 마친 사람이다(1년교정). 어느 성경보다 가장 역사비평에 대한 논쟁이 심한 곳이어서, 역사비평의 '지뢰밭'이라고 할 정도이다. 창세기 1-11장을 역사 비평적 관점에서 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김 세윤 교수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학자이다. 그러나 그의 구약해석은 신약 신학자여서 그런지 몰라도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부분이 너무나 단순하고 일방적이다. 역사비평적 입장에서 보면 창조나 타락에 관한 창세기 본문들은 모두가 문서들의 결합내지는, 구전으로 내려오다 형성된 이야기나 신화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남녀평등과 여성안수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물로 보기에는 우습게 여겨질 수 있다. 만일 그가 성경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 한다면, 역사비평적 방법만으로, 말썽이 되는 본문들을 쉽게 잘라버려서 문제를 '아인파흐'(독어-단순하게) 하게하려는 노력은 이율배반적인 모순에 빠질 수 있다. 요즘 자유주의의 본산지인 독일 내에서도 역사비평 특히 문서설이 부도났다고 말할 정도라는 것을 그는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점에서 몰트만이 지혜롭다. 그는 창세기를 건드리지 않는다. 자신도 역사비평적 방법에 익숙했기 때문에 그 사정을 다 알 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는 개신교회의 “그리스도 중심적 교회관”이 여성안수를 반대하게 한 근본적인 요인으로 꼽고 있으면서 “성령의 사귐”안에서 이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러나 이 방법도 삼위일체 개념에서 보면 일방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다.
2. 김세윤 교수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12제자 가운데 여성제자가 없었다는 것을 “문화적 양보”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서” 여성 제자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 하려면 인간으로 오실필요도 없었고,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나, 죽으신 이후에 다시 살아나실 필요도 없었다. 이는 이러한 기적들이 오히려 인간들에게 문화충격을 줄 뿐이다. 예수님의 12 남성제자들의 선택이나 구약의 12 남성지파 선택은 어떠한 문화적인 배경도 없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발로이지, 문화차원에서는 도저히 논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옛 창조와 새 창조의 이중 구조는 구원사적인 차원에서 예수님의 초림에서 끝이 아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이 구조는 서로 상호보완 속에서 같이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구약에 나타난 계시를 예비계시로 보고 신약에서는 완성된 계시로 보려는 데서 그의 견해는 예수님의 초림에 집중된 문화적 관점에서 구원사를 논하려 한다. 물론 성경을 보는 방법이 마이크로적인 방법으로 깊고 세밀하게 보는 것도 있지만 성경을 전체로 보려는 마크로 적인 방법과 함께 요즘 새롭게 연구되는 방법들을 인정하면서 바르게 풀어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 외에 나타나는 성경 본문이나 신학적인 논쟁은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위에서 언급한 몇가지만 해결된다면 필자도 수긍할 수 있다고 본다.
현재 재건교회는 지난 수 십 년 동안 재건교회의 신앙적 특수성과 신학적 비연속성에 나타난 시행착오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심한 오명을 받아 온 것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재건교인들은 초기신앙과 신학의 위대함을 깨닫고 있다. 위대한 신앙 유산은 기득권을 담보로 한 재산권이 결코 아님을 자각하고 있다. 개혁주의 재건신앙운동이 오늘날 교회의 보편적인 사명임을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재건교회 목사들 중 몇몇은 개혁주의 재건신앙운동을 방불케 하는 혁신적인 강의나 교육 내지는 실천으로 한국교회나 사회에 도전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내적으로는 공동체정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얄팍한 수인 “돈 가지고 장난치는” 일로 인해 교단을 겁주고 또한 비슷한 수법을 전염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한다. 또한 개 교회 “정관 신상품” 개발로 인한 분리주의적 심화현상이 질서와 대화를 통해 실현 가능성 있는 교단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점에서 심히 걱정이 된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다양한 성격들을 서로 인정하며 통일성을 만들어나가려는 복음적이며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인내와 대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잘 잘못을 떠나서 서로 바르고 좋은 것은 인정해 주고 잘못된 것은 시대적인 변화 속에 고칠 것은 고치고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 아무리 개혁을 부르짖는다 해도 이단성이 아닌 전통적, 법적, 행정적 테두리를 질서와 대화 안에서 풀어가야지, 일방적 내지는 폭력적 방법으로 해결한다면 서로에게 상처가 되고 공동체의 발전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의 무서운 결과가 도래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개혁상품을 파는 장사꾼”으로 전락하든지 아니면 “교권주의의 횡포”로 남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필자는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 재건신앙운동이 사회정화운동에 계속 떠 밀려 가거나 이기적인 발상으로 인한 분리주의 혹은 극단주의의 오명을 받지 않도록 서로가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재건신앙운동이 한국 개혁주의 사상에 초석을 놓았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 자부심을 갖고 힘써 이 위대함을 계승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재건서울노회 2005년도 여름수양회<제주도 표선>에서 특강한 것을 올려놓았다. 재건교회 정체성을 확립하여 교단과 노회가 더욱 발전하기를 누구보다 원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는 서울노회 임원들 특히 사이버 총무인 한용문 목사께 깊은 감사드린다. 또한 개혁주의 재건신앙운동에 바탕을 두고 한국교회와 사회를 가꾸어나가기를 원하는 여러 목사님들께도 감사드린다. 김남식 목사의 글이나 기타 여성안수에 대한 찬반의 글들을 재사모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권영삼 전도사와 재건교회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 고마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첫댓글 목사님의 지적노고에 감사함을 표합니다...이런 글이 신학교 내에서 구체화 된 논증으로 표현되지 못함을 아쉬어합니다...샬롬!!!
재건교회의 정체성과 활력을 새롭게하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글, 잘 읽었습니다. 퍼갔구요, 신학교 가을학기가 서울에서 출발하는 것, 축하드립니다. 평안하세요!
목사님 각주 부탁드립니다.
권영삼 전도사님이 올려놓은 자료들 (1차내지 2차자료모두) 외에 김세윤 교수의 '하나님이 만드신 여성'은 2004년 11월 출판된 것 보시고 (글을 쓸 당시 책 분실; 김세윤 교수도 각주생략) 목회와 신학은 작년에 서창원목사 논쟁한 부분을 보십시요.
재건 신앙이 진리 운동이었다고 신학적으로 정립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교단 정체성에 대하여 내외적으로 비평을 받고 있는 부분들을 하나님 중심신학, 교회중심 신학, 말씀중심 신학으로 변증해 주신 점.. 우리 자신들이 먼저 깊이 새겨야 겠습니다. 앞으로도 개혁주의 신앙을 변질케 하는 수면아래 숨겨진 부분들도
바르게 재조명하셨으면 합니다. 바른 신학자가 필요한 혼란스러운 때이니 목사님의 그 신학 사상 끝까지 지켜 가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학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단에 목사님과 같은 신학자가 있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