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풍천백(豊川伯) (지파(址派))
1. 풍천노씨(豊川盧氏) 입향사(入鄕史)
가. 함양(咸陽) 입향사(入鄕史)
풍천백 지(址)의 후손 유(裕)는 풍천노씨의 기세조로 1100년경(고려 익종) 황해도 풍천에 살았다.
그 후 그 아들 장용(藏用)은 연천으로 옮겨 살았고, 장용의 손자 정(貞)이 사천으로 이사하였다가
다시 개성으로 옮겨 오래 눌러 살았다.
그러나 그 무렵은 외세의 침공과 내란이 자주 있어 민생고가 격심하여
살길이 막연한 관원이나 백성들은 남부여대하고 피난길을 찾는 일이 잦았다.
정의 아들 서린(瑞麟)은 가까운 철원으로 이사를 하였으나
그 무렵 왜구는 예성강을 건너 옹진 땅을 침공하고,
또한 북쪽의 홍건적은 압록강을 넘어 칩입할 때 임금도 어보로 천도지를 몰색하게 되므로
민심이 동요되어 갈팡질팡하던 때였다.
이때 서린의 둘째 아들 천계(天桂)는 1340년경(고려 충혜왕) 경상북도 청도로 피난하여
잠시 살다가 다시 경남 창원의 화목리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아들 손자 증손에 이르기까지 누대를 살았다.
천게의 증손 숙동(叔仝)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이 있어 청운의 꿈을 안고
고명한 선생을 찾아 함양 개평땅(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의 김점집에 이르게 되었다.
김공의 본관은 경주로 그는 당대의 이름 높은 선비요 대학자였다.
청원에서 이곳 개평땅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리가 아프고 허기가 져서
동구 밖느티나무 아래서 잠시 쉬었다가 김공 집을 찾으려는 데 그만 잠이 들었다.
그때 마침 김공도 낮잠을 자고 있던 중 잠결에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서
큰 용 한마리가 트림을 하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김공은 이 꿈이 분명 상서로운 꿈이라 매우 기뻐하면서
즉시 하인을 불러 이르기를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로 달려가 사람이 있거든
정중히 모시고 올 것이며,
혹 사람이 아니고 나무 막대기라도 있으면 이를 소중히 들고 오라고 하였다.
그 하인의 안내를 받은 숙동은 사랑방으로 들어가
김공과 대면하는 자리에서 찾아온 연유를 말하였을 때,
김공은 장차 나라의 큰 재목이 될 것이라는 것을 숙동의 관상에서 엿 볼 수 있었으며
숙동의 청을 기쁘게 받아 들였다.
그 후 숙동은 쾌히 응락하고 더욱 학문에 열중하였으므로
훗날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세조 때 호조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에 이르렀고
풍천노씨를 일으킨 중시조이다.
그 후 숙동의 자손들은 맑은 계류가 흐르고 전토가 비옥한 곳으로
천령산 밑 개평에 새터를 잡으므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풍천노씨의 세거지가 된 것이다.
풍천노씨는 이곳에서 문장과 벼슬에 오른 자손들이 많이 배출되어
명문과 벌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길이길이 자손들이 복을 누리는 길상지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