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국내 10대 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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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우-김근하 유괴살인 사건
1967년 7월 18일 경남 진주시 진주교대 앞길에서 과외공부를 마치고 귀가하던 박춘우(7)군이 20대 청년들에 유괴당했다. 경찰은 유괴사건 발생 18일만에 김경태 등 유괴범 3명을 붙잡았으나, 춘우군은 남강 백사장에서 변사체로 발견했다. 범인들은 유괴한 춘우군을 데리고 다니다가 불편해 납치한 날 밤 모래밭에 파묻은 뒤 1백50만원을 요구하는 협박편지를 4차례 보내고 붙잡혔다. 범인들은 모두 납치살인강도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해결한지 하루만인 8월 5일 밤 부산시 서구 동대신동 1가 앞길에서 과외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김근하(11)군이 20세 가량의 괴청년에 납치당한 사건이 또 발생했다. 범인은 납치한 근하군을 왼쪽 가슴을 칼로 찔러 죽인 뒤 상자에 넣어 포장한 후 택시를 타고 시청뒤 진주식당 앞에서 내렸다. 택시운전사가 이를 수상히 여겨 파출소에 신고, 경찰과 함께 달려가 범인을 붙잡아 조사하던 중 달아나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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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국내에서 발효
우리나라의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가입이 1967년 4월 14일부터 정식으로 발효되어 우리나라가 72번째의 GATT 가입국이 됐다. 이에 따라 재무부는 체코 유고슬라비아 쿠바 등 공산국가를 제외한 68개 가트 가입국과 우리나라와 별도의 무역협정을 맺은 자유중국 태국 필리핀 월남 캄보디아 5개국 등 총73개국에 대해 이날부터 최혜국 대우를 실시하고 가트 가입때 양허한 수입품목에 양허세율을 적용하도록 지시했다. 양허세율이 적용된 대상품목은 모두 60개품목으로 그 중 17개 품목은 14일부터 세율을 인하하고, 41개 품목은 당시의 세율 그대로 두기로 했으며 2개 품목은 세율의 인상한계를 미리 정해놓도록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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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56함 침몰
1967년 1월 19일 오후 2시40분쯤 동해 어로저지선 근방에서 명태잡이 어선을 보호 중이던 해군 56함 당포호가 북한 해안포의 집중포격을 받고 격침됐다. 해군 56함은 이날 명태잡이 어선 1백여척이 고성군 수원단 남쪽에서 어로저지선을 넘어가는 것을 남쪽으로 돌아오도록 운항 지도하던 중, 수원단 남쪽 북한 해안포대에서 퍼붓는 2백36발의 포격을 받았다. 56함의 함장인 김승배 중령은 즉각 응사명령을 내렸고, 20여분간 교전 끝에 적의 2탄이 다시 56함 기관실에 명중함에 따라 선체는 정지하고 이어 통신실 포대 등에 8발이 또 명중해 교전한지 1시간여 만에 56함은 침몰했다. 56함에 타고있던 78명 중 32명이 실종되고 46명만 구조됐으나 구조자 중 32명이 중경상을 입고 그중 4명이 병원으로 이송중 사망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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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대통령에 박정희 당선
박정희 대통령의 4년 치적을 판가름하는 제6대 대통령선거가 1967년 5월 3일 전국7천8백63개 투표소에서 일제히 실시됐다. 선거에서는 박 후보가 5백68만8천6백66표를 얻어 신민당 윤보선 후보의 4백52만6천5백41표 보다 1백16만2천7백31표를 더 많이 획득, 대통령에 당선됐다. 투표율은 83.6%였다. 박 대통령의 재선은 국민들이 조국 근대화로 민족을 중흥시키겠다는 박대통령의 공약에 기대를 걸었고 집권당의 강력한 조직과 막대한 자금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반면 신민당은 민중계와 신한계가 단합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이후 6월 8일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공화당이 전국 1백31개 지역구에서 1백3석, 신민당이 27석, 대중당이 1석을 차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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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 창당
재야권력의 집합체인 신민당이 1967년 2월 7일 정식 발족, 공화당과 더불어 보수 양당제가 갖추어져 6대 대통령선거부터 1대1의 대결을 하게됐다. 민중-신한 양당은 오전 11시 서울시민회관 소강당에서 합당선언대회를 갖고 이어 오후3시 양당 대의원 48명과 재야측 대의원 3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신민당 창당대회에서는 대통령후보에 윤보선씨, 당대표위원에 유진호씨를 선출해 지도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신민당은 자유당과 한국독립당을 흡수해 명실공히 한국의 대표적인 야당으로서 반독재 민주주의의 선봉에 나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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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 사건
중앙정보부가 1967년 7월 8일 동 베를린을 거점삼아 북한에 드나들면서 간첩활동을 해 온 북한 대남 공작단사건 전모를 발표했다. 발표에 의하면 대학교수를 비롯, 유학생 예술인 의사 공무원 등의 지식인들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 공작단에 포섭되어 1958년부터 1967년 사이에 동독 주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며 간첩활동을 해왔고, 일부는 평양을 방문해 밀봉교육을 받는 등의 이적활동을 해왔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에서 20차례에 걸쳐 미화 10만달러의 공작금을 받고 귀국한 후 정부시책을 비방하거나 반 정부활동을 해 온 혐의가 추가됐다. 이 사건은 건국사상 최대의 정보사범사건으로 구속 107명, 학계-문화계의 저명인사 등 관련자가 194명에 이르렀다. 12월 13일 선거공판에서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 외국환관리법 등이 적용되어 조영수 정규명 2명에게는 사형, 정하룡 강빈구 윤이상 어준 4명에게는 무기징역 등이 선고됐으며 피고인 34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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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 한일호 침몰
1967년 1월 14일 밤 경남 창원군 천가면 가덕도 서남쪽 2km 해상에서 해군후위구축함 충남호와 여수-부산간 정기여객선 한일호가 충돌, 한일호에 타고 있던 승객과 승무원 등 1백여명이 숨졌다. 이날 참사 해역엔 폭풍주의보가 내려 초속 10m의 북서풍이 불고, 2m내지 3m의 파도가 일고 있었다. 충남호는 동해안에서 18일 동안의 해상경비 임무를 마치고 약 20노트의 속도로 진해기지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일호에는 사고당시 1백8명의 승객과 13명의 선원 등 1백21명이 타고 있었지만 표를 사지 않은 잡상인과 어린이 등이 포함돼 있어 피해가 더욱 컸다. 이날 사고는 충남호가 가덕도를 우회하는 순간 부산으로 가던 한일호가 나타나 단성 5발을 울렸는데도 한일호가 충남함 선수좌현을 들이받아 10여분만에 침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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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몰광부 양창선씨 구출
1967년 8월 22일 낮 12시40분경 충남 청양군 사영면 구룔리 구봉 광산서 광부 양찬선씨가 수갱을 수리하는 중 갱도가 무너져 매몰됐다. 구조작업을 시작한지 나흘 만에 지하 1백25m지점에 갇힌 양씨와 지하 2백50m지점의 제2배수장을 전화로 연결하고 26일 오후 1시부터 본격 굴진작업에 나섰다. 양씨는 집에서 가져간 도시락과 지하수로 연명했다. 이때부터 전국의 신문과 방송이 양씨 매몰사건을 대서특필, 전국민의 관심을 모았다. 매몰 열흘째인 31일에는 민병규 박사 등 의료진의 도움으로 지상에서 지하에 갇혀있는 양씨와 전화진단까지 했다. 이같은 전국민의 관심 속에서 양씨는 매몰당한지 15일 8시간35분만인 9월 6일 밤 9시15분에 극적으로 살아나왔으며, 건강은 대체로 양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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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문무대왕암 발견
1967년 5월 15일 경북 월성군 양북면 봉길리 약2백m 앞바다에 있는 대왕바위에서 바닷물 속에 지어진 문무대왕릉이 발견됐다. 둘레 약 2백m의 대왕바위에 동서와 남북으로 정확히 십자수로를 깎아내고 그 중앙에 패진 4평 가량의 해중못에 해중릉이 조영되어 있었다. 유골은 못 안 석함속에 안치된 것으로 보였으며, 그 위에 길이 3.59m, 두께 0.9m의 큰거북 모양의 화강암 개석이 덮여졌다. 이런 릉의 조영방식은 사문을 배치하고 그 중에 사리를 안치한 기원전 2세기의 '산치' 탑을 위시해 5, 6세기 중국육조시대의 목탑 그리고 신라의 봉황사탑, 백제의 미륵석탑 등의 양식과 비슷하다. 문무대왕은 "내가 죽으면 서국(인도) 식으로 화장을 하여 동해에 장사를 하라. 그러면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으리라."는 뜻의 유언을 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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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한일각료회담
한국과 일본이 국교회복 이래 처음으로 1967년 8월 9일 동경 영보관에서 제1회 각료회담을 개최했다. 한일각료회담의 주요의제는 한일양국관계의 전반적 검토, 최근 국제정세에 대한 양국 입장설명, 양국 경제현황설명, 경제협력문제, 무역문제, 조세문제, 농수산문제, 해군 및 선박차관문제 등이다. 한국의 장기영 부총리와 일본의 미키 외상을 수석대표로 한 회담에서는 양국에서 각기 6명의 각료가 참석, 두차례의 개별회담을 비롯해 두차례의 전체회의, 그리고 문제별로 분과회의로 나뉘어 열렸다. 회의는 지역적 협력체제의 유지강화를 위해 계속 협력한다는 기본관계 원칙을 확인하고, 일본은 한국의 제2차 5개년계획 조기달성을 위해 2억달러의 민간상업차관을 새로 공여할 용의가 있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폐막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