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포스트"[The Jakarta Post] 2009-2-6 (번역) 크메르의 세계
무 소쿠 : 캄보디아의 보배
Mu Sochua: One of Cambodia's precious gems
기사: Sara Veal
사진: Lucia De Giovanni
캄보디아의 훈 센(Hun Sen) 총리는 최근 어떤 사람이라고 특정하진 않았지만 한 여성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훈 센 총리는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반응을 보인 이 여성에 의해 오히려 고소까지 당해있다.
훈 센 총리의 이러한 공개적 비난은 여성차별이 일상화된 캄보디아의 전형적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무 서쿠(Mu Sochua)를 쓰러뜨릴 수 있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지난 20여년 동안 무 서쿠는 캄보디아의 착취당하는 국민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그녀는 1972년 베트남 전쟁의 여파로 부모님께 인사도 못드리고 캄보디아를 떠났고, 그 후 18년 동안 해외망명 생활을 했다. 부모님은 결국 크메르루즈 정권 하에서 희생됐다. 18년간의 해외생활을 통해, 그녀는 미국과 프랑스 파리, 그리고 이태리에서 공부 및 일을 했고, 이후 태국-캄보디아 국경 지대의 난민촌에서 활동했다. 1989년 귀국한 이래로 그녀는 조국의 재건에 매진해왔다. 여성 및 아동 문제를 중심으로 처음에는 활동가로, 그리고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해왔다.
"저에게 캄보디아 재건에 동참한다는 것은 하나의 선택사항이었지만, 저는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현재 집권여당인 "캄보디아인민당"(CPP)의 최대 견제세력인 삼랑시당(SRP) 소속 국회의원 무 서쿠(Mu Sochua)의 말이다.
1991년 무 서쿠 의원은 캄보디아 최초의 여성조직인 "케마라"(Khemara)를 창립하고, 푼신펙당(FUNCINPEC)에 입당하여 1998년 총선에서 밧덤벙 도 선거구에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그녀는 곧장 여성보훈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제가 장관직에 임명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나라가 서구세계에 공식적으로 문을 열기 전에 귀국했다는 점도 작용했죠. 1975년부터 1990년까지는 엠바고(금수조치)가 있던 시절입니다."
장관직에 취임한 그녀가 최초로 시도한 것은 양성평등에 관한 캠페인 "니어리 로따나"(Neary Rattanak: 여성은 보석) 운동이었다. 이는 오래된 크메르 속담인 "남자는 금, 여자는 하얀 천"이란 말을 "남자는 금, 여자는 보석"이라고 바꾼 것이다. 이러한 개작은 여성도 남성만큼이나 가치있다는 것을 주장한 것으로, 만일 여성이 "더럽혀졌더라도" 보석과도 같이 새롭게 빛을 발할 수 있다고 하는 의미로, 여성은 한 번 물들면 마치 진흙묻은 하얀 천처럼 되돌리기 어렵다는 기존의 관념을 파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004년 7월, 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부정부패들이 존재한다고 폭로한 후 사임을 했다. 이후 삼랑시당에 입당한 그녀는 2006년에는 이 정당 최초의 여성 서기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그녀의 투쟁에 대해, 2005년 노벨평화상 후보 지명 및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이끄는 "바이탈 보이스"의 "올해의 세계 인권지도자상"을 비롯해, 여러 상들이 수여됐다.
무 서쿠 의원은 영어, 프랑스어, 크메르어가 유창하며, 미국 대학에서 받은 심리학 및 사회복지 학위도 소지하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국제적 배경은 그녀의 사업들을 강화시켜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포인트를 중심으로 해서만 그러하다. 그녀는 말한다.
"서양의 지식인들은 저로 하여금 인권, 양성평등, 삶의 질과 같은 국제적 표준들을 캄보디아 여성들에게 적용할 것을 기대하고 있지만, 하지만 이러한 가치들과 문화 사이에서 어떤 균형이 필요합니다."
"저는 캄보디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완벽하게 서구로부터 들어온 것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캄보디아 국민들 누구라도 차별없이 국가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긍정적 변화의 핵심이라고 믿고 있다.
"[발전이란 것은] 그 국가가 가진 원초적 자원들을 보존할 수 있는 데 토대를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법치주의 지배가 정착되지 않아 이러한 풍부한 자원들이 잘못 관리되고 있습니다."
(크메르의 세계 추가사진) 2006년 미국 버클리대학이 수여한 인권관련 공로상 시상식에서의 무 서쿠 여사. 그녀는 이 대학의 동문이기도 하다. [출처: 버클리대학] |
무 서쿠 여사의 세 딸들도 그녀의 인도주의적 행보를 뒤따르고 있다. 그녀는 자신에게 아들이 없다는 사실에 대해 동양인들은 대체로 "안스럽게" 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자신은 딸들이 지독하게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딸들이 교육과 보건, 그리고 양성평등 문제에 관해 오히려 보다 강경한 투쟁을 하도록 자신을 자극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제가 성차별적 폭력의 피해자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에 갈 때마다, 제 자신 혹은 제 딸들이 이러한 폭력의 악순환에 피해를 입는다면 어찌할까를 상상하곤 합니다."
그녀의 투쟁은 훈 센 총리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결정을 감행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지역구 껌뽀웃(Kampot)을 방문한 훈 센 총리가 그녀를 지칭하여 공공연하게 "강한 다리"(cheung klang: 쩌응 클랑)라고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이 말은 여성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크메르 전통 어법이다. 그녀가 훈 센 총리를 고소하자, 훈 센 총리는 맞고소를 한 후 집권 여당을 통해 국회에서 그녀의 국회의원 면책특권 박탈시키는 조치를 취했고, "캄보디아 변호사협회"(Cambodian Bar Association)에 대해서는 그녀의 변호사인 꽁 삼 온(Kong Sam Onn)을 조사할 것을 요구했다. 면책특권이 없다면 그녀는 투옥될 수도 있고, 그녀의 변호사 역시 변호사 자격 박탈을 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대해 더욱 강력한 투쟁으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만일 제가 훈 센 총리의 말에 대항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은 더 이상 저에게 도움을 청해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훈 센 총리의 발언은 그녀 자신의 권리를 짓밟은 것으로 일반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폭력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무 서쿠 의원은 캄보디아 사법부가 행정적으로 종속되어 있어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을을 잘 알고 있지만, 이 재판을 통해 취약한 캄보디아의 사법적 현실을 공개하고 어떤 사람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음을 보이려 시도하고 있다. 판결이 어떤 결과로 나오든, 그녀는 미래를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인도네시아를 모델로 언급하면서, 캄보디아가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아세안 공동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날이 와야 한다는 바램을 갖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그러한 날을 위해, 우리는 먼저 우리 국민들에게 납득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아세안 공동체의 눈들에 신뢰를 심어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제가 지금 하고있는 일은 장기적 투자에 해당합니다. 제가 정치권에 남아 활동하는 이유는, 캄보디아의 새로운 리더십이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이웃국가들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녀의 이번 결정은 어떤 누구라할지라도, 또한 그녀에게 더러운 말을 던질지라도, 그녀가 결코 물들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첫댓글 아름답게 보입니다,,,얼굴이,,
황량한 죽음의 들판에 핀 한송이 "인동초"로 보입니다. 무 서쿠의원님이 추구하는 목표가 이루어져 캄보디아에도 인권이 존중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 피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