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정씨(羅州丁氏)
<氏族의 연원>
정윤종(丁允宗). 고려조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냈다. '庚午譜' 서문에 보면 나주정씨(羅州鄭氏)는 고려조에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을 지낸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면서 상계에 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萬姓大同譜', '朝鮮氏族統譜', '靑丘氏譜' 등 옛 문헌을 종합하면, 丁씨의 대조(大祖)는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 그는 唐나라 사람으로 대상(大相)의 자리에 있다가 당 선종7년(신라 문성왕15년) 우리나라 압해도(押海島)로 귀양 온 후 사면되었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그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어 우리나라 丁씨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주정씨(羅州丁氏)는 조선 숙종과 경종 연간까지 관향을 압해(押海)로 써오다 영조때에 압해(押海)가 폐현(廢縣), 나주(羅州)에 부속하게 되자 관향이름도 나주(羅州)로 고치게 되었다고 하였다.
숙종 '辛巳譜'(順天譜)와 고종 때의 '庚午譜'에 '羅州押海丁氏族譜'라 이름을 붙인 연유가 여기에 있다.
<本貫地 연혁>
나주(羅州)는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인데, 신라 경덕왕 때 금산군(錦山郡)으로 고쳤다.
견훤이 이 지방을 중심으로 후백제를 세웠으나 궁예가 빼앗아 나주(羅州)로 고쳤다.
고려조 성종14년에 진해군(鎭海軍)이라 불러 해양도(海陽道)에 소속시켰으며 현종9년에는 목(牧)으로 승격되었다.
조선 세조 때 진(鎭)을 두었으며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는 나주부(羅州府)로 되었다가 다음 해에 부(府)가 폐지되자 1군(郡)으로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주요 성씨로 丁, 金, 羅, 吳, 鄭, 陳, 朴, 南씨 등이 있었다.
<派名錄>
교리공파(校理公派) - 사직공파(司直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월헌공파(月軒公派) - 문화공파(文化公派), 공안공파(恭安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연안부사공파(延安府使公派)
어사공파(御史公派)
전적공파(典籍公派)
서윤공파(庶尹公派)
야은공파(野隱公派)
사연공파(司鍊公派)
나주정씨 종친회의 6개파 : 교리공파(校理公派), 월헌공파(月軒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전적공파(典籍公派), 서윤공파(庶尹公派), 야은공파(野隱公派)
나주정씨 월헌공파 종회의 6개파 : 문화공파(文化公派), 전적공파(典籍公派), 고암공파(顧菴派), 초암공파(草菴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派)
<주요 世居地와 변천>
6세의 대까지는 압해(押海)를 중심으로 세거한 것 같고, 7세 정원보(丁元甫)의 대부터 일부가 개성(開城)에서 세거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庚午譜'에 있으며, 정원보(丁元甫)의 손자인 정안경(丁安景)의 대는 황해도 백천(白川)에서 세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1세 정대흥(丁大興)의 후손들은 전남 무안군(務安郡) 일로면(一老面) 일원에서 터를 잡았고, 정대익(丁大翼)의 후손은 평양(平壤)에서 세거하다 일부가 13세 정유근(丁有根)의 대 이후에 평남 강동군(江東郡)으로 옮겨간 것 같으며, 13세 정옥정(丁玉精)의 후손은 강원도 원주(原州)에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2세 정수곤(丁壽崑)의 후손은 충북 음성군(陰城郡) 원서면(遠西面) 일원에서 터를 잡은 것 같으며, 일부가 14세 정윤업(丁胤業) 이후 황해도 해주(海州)로 옮겨가고, 일부는 정신업(丁愼業)의 대 이후로 전남 무안군(務安郡) 이서면(二西面), 도림면(道林面) 일원으로 옮긴 것 같다.
또한 18세 정시창(丁時昌) 이후 충남 홍주(洪州)에 터를 잡은 것 같고, 20세 정양상(丁良相)의 대를 전후해서는 전남 나주(羅州)에도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2세 정수강(丁壽崗)의 후손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터를 잡은 것 같고, 16세 정호서(丁好恕)의 후손은 고양(高陽)에서 대대로 살며 여주(驪州) 일원으로 세거지를 확대한 것 같다.
16세 정호인(丁好仁)의 후손 중 17세 정언선(丁彦璿)의 대부터는 경북 예천(醴泉)으로, 19세 정춘도(丁春燾)의 대 이후로는 안동(安東) 일원으로, 19세 정휘신(丁徽愼)부터는 충남 서천군(舒川郡) 한산면(韓山面) 일원으로 세거지를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16세 정호의(丁好義)와 정호지(丁好智)의 후손은 경기도 광주(廣州)에서 세거하며 20세 정수신(丁守愼) 전후로 천안(天安)으로 옮겨간 것 같다.
16세 정호례(丁好禮)의 후손은 17세 정언랑(丁彦瑯)의 대 이후 장단군(長湍郡) 송서면(松西面) 일원으로, 정언복 이후로는 전주(全州)로 옮겨간 것 같다. 19세 정경도(丁慶燾) 이후로 개성(開城)으로, 정예도(丁譽燾)의 대 이후로는 경남 창녕(昌寧)으로 세거지를 확대한 것으로 보인다.
16세 정호덕(丁好德)의 후손들은 광주(廣州)에서 세거했고, 정호경(丁好敬)의 후손은 백천(白川)과 개성(開城) 등지에 세거하며 18세 정시식(丁時栻)의 대 이후 안동(安東)으로, 정시찰(丁時札)의 대 이후 충주(忠州) 등지에 터를 잡은 것 같다.
16세 정호성(丁好誠)의 후손들도 광주(廣州)에 세거하며 18세 정시주(丁時柱)와 정시제(丁時梯) 이후로 고양군(高陽郡)과 양주(楊州) 등지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정호양(丁好讓)의 후손은 고양군(高陽郡)에서 세거하며, 19세 정건도(丁健燾)의 대 이후로 경북 상주(尙州), 선산(善山) 일원으로 세거지를 확대한 것 같다.
정호약(丁好約)의 후손은 17세 정언(?)의 대부터 경북 영주(榮州)에 터를 잡았고, 18세 정시건(丁時健) 정시매(丁時邁) 이후로 금당(金塘)에, 정시운(丁時運)의 대를 전후해서는 강원도 원주(原州)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정호공(丁好恭)의 후손은 고양군(高陽郡) 심천(深川)에 세거한 것으로 보이며, 17세 정언영(丁彦瑛)의 대 이후로 충주(忠州)로, 19세 정도익(丁道益)의 대 이후로는 경기도 통진(通津)으로 세거지를 확대한 것 같다.
정호관(丁好寬)의 후손은 경기도 용인(龍仁)에서 터를 잡은 것 같으며, 17세 정언황(丁彦璜)은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후 원주(原州)에서 세거한 것 같다. 22세 정학조(丁鶴祖)의 대 이후로는 상주(尙州)에서도 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정호선(丁好善)의 후손은 용인(龍仁)에서 세거하면서 광주(廣州) 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한 것 같으며, 정호제(丁好悌)의 후손은 백천(白川)에서 터를 잡고 상주(尙州) 등지로 옮겨 간 것 같다.
그리하여 1930년 당시 나주정씨(羅州丁氏)는 강원도 원성군(原城郡) 일원, 충남 서천군(舒川郡) 마서면(馬西面) 일원, 전남 나주군(羅州郡) 남평면(南平面) 일원, 무안군(務安郡) 일로면(一老面) · 몽탄면(夢灘面) · 청계면(淸溪面) 일원, 경북 성주군(星州郡) 용암면(龍岩面), 상주군(尙州郡) 외남면(外南面), 예천군(醴泉郡) 용문면(龍門面) · 지보면(知保面) 일원, 영주시(榮州市), 황해도 황주군(黃州郡), 평남 강동군(江東郡) 고천면(高泉面)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1980년대에도 예천(醴泉), 상주(尙州), 거창(居昌), 울주(蔚州), 서천(舒川), 이리(裡里), 서울 등 각 지역에 터를 잡고 있다.
<氏族史의 개요>
나주정씨종회(羅州丁氏宗會)에서 펴낸 '월헌집(月軒集)'에는 문과 급제자 64명의 명단이 실려있다.
기호(畿湖)의 현성(顯姓)이라 하지만 한 문중에서 이만한 수의 대과(大科)합격자를 낸 씨족도 드물다. 조선조 9대 옥당(玉堂)은 나주정씨(羅州丁氏) 뿐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정조께서 "옥당(玉堂)은 정가지세전물(丁家之世傳物)"이라고 했다 한다.
뿐만 아니라 나주정씨(羅州丁氏)는 문한(文翰)으로도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분도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정약전(丁若銓) 정약종(丁若鍾)의 형제들이지만, 이분들 말고도 유명한 문집으로 역사에 이름을 빛낸 분이 여러 명이다.
그중에 앞서 든 '월헌집(月軒集)'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정수강(丁壽崗)의 저작문집이며, 영조대왕의 어제어필(御製御筆)로 칭찬을 하였다. 그외 정범조(丁範祖)의 '해좌문집(海左文集)', 정시흡의 '우담문집(愚潭文集)' 등이 있다.
말하자면, 나주정씨(羅州丁氏)는 사환(仕宦) 뿐 아니라 문행(文行)과 학덕으로도 나라 안에 널리 이름을 빛낸 인물들을 배출한 명족(名族)이라고 한다.
그 대표적인 분들을 간추려 소개한다.
월석(月石) 정수곤(丁壽崑)은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지냈는데, 특히 문장에 뛰어나 ‘동방문선(東方文選)’에 그의 시문(詩文)이 실려있다.
월헌(月軒) 정수강(丁壽崗)은 성종8년 문과에 급제, 북도병마평사(北道兵馬評事),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장령(掌令),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으며, 중종반정원종일등공신(中宗反正原從一等功臣)에 책록되었는데, 뒤에 삼사(三司)의 벼슬을 두루 거쳐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 · 병조참판(兵曹參判)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그는 문장과 강직한 충절로 유명하다. 연산군의 폭정을 보고 청맹(靑盲)이라 핑계하며 사직(辭職)을 요청한 일화가 전해지며, ‘월헌문집(月軒文集)’ 중 ‘포절군전(抱節君傳)’은 의인소설(擬人小說)로 알려져 있다.
월봉(月峰) 정옥형(丁玉亨)은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간 뒤 검열(檢閱) 이조정랑(吏曹正郞) 장령(掌令)을 거쳐 판결사(判決事)를 지냈으며 병·형조판서(兵·刑曹判書)에 있을 때 법령(法令)의 모순을 조절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을 저술했다.
그는 또 진하사(進賀使)로 明에 다녀왔으며 보익삼등공신(保翼三等功臣)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라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냈다. 예법(禮法)에 통달하여 중종, 인종의 국장(國葬) 때 제조(提調)가 되었고, 명종 때 공안(恭安)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삼양재(三養齋) 정응두(丁應斗)는 조선조 중종2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설서(說書)를 거쳐 전적(典籍), 정자(正字),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중종33년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이조좌랑(吏曹佐郞) 정언(正言) 교리(校理) 장령(掌令) 사인(舍人) 사간(司諫)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승진하여 참의(參議), 대사간(大司諫) 승지(承旨) 대사헌(大司憲), 경상 경기 평안 함경 전라관찰사(觀察使), 공조참판(工曹參判)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 좌우찬성(左右贊成)에 이르렀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고, 덕성이 뛰어나 효행과 의·열(義·烈)에 본보기가 되었다고 한다.
관압사(管押使)로 중국에 가서는 ‘강목광의(綱目廣義)’ ‘무경(武經)’ 등의 서적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국방강화를 주장한 ‘삼도관방록(三道關防錄)’을 저술하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충정(忠靖)이라 시호(諡號)가 되었다.
고암(顧菴) 정윤희(丁胤禧)는 총명과 지혜가 뛰어나 22세에 생원(生員), 진사(進士)에 모두 합격하였고 명종11년, 21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다.
그는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오랫동안 바깥 주군(州郡)을 돌아다녔는데, 들어와 도승지(都承旨), 예조참의(禮曹參議),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특히 그는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으로 사육문(四六文)을 가장 잘하였는데, 한때 관각(官閣)의 찬술(撰述)에는 반드시 공(公)이 추거(推擧)되었다고 한다.
초암(草菴) 정윤우(丁胤祐)는 선조3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형조(刑曹)·예조(禮曹)·병조좌랑(兵曹佐郞)과 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를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사인(舍人),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동래부사(東萊府使), 광주목사(光州牧使) 겸 독포어사(督捕御史)에 이르렀다. 선조17년 사신으로 명에 갔을 때 명 신종이 그의 탁월한 문장에 감탄하여 ‘유엽배육매(柳葉杯六枚)’를 하사(下賜)했다 한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호암(扈菴) 정윤복(丁胤福)은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뒤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는데, 선조22년 반란을 일으킨 정여립(鄭汝立)과 친하다는 혐의로 파직되었다.
임진왜란 때 우통어사(右統禦使)가 되었고, 선조가 서행(西幸)할 때 부상으로 호종(扈從)하지 못했으나, 그 뒤 왕을 호종(扈從)하기 위해 성천(成川)으로 가다가 병사하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추록(追錄)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북록(北蔍) 정호공(丁好恭)은 서장관(書狀官)으로 明에 다녀온 뒤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동원(東園) 정호선(丁好善)은 강원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어 부정을 범한 춘천부사(春川府使) 이원엽(李元燁), 양양현감(襄陽縣監) 신경우(申景遇)를 파면시켜 지방의 관기(官紀)를 확립하였고 광해군의 난정을 한탄하고 사직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안변부사(安邊府使) · 풍기군수(豊基郡守)에 올랐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파수대장(把守大將)으로 죽령(竹嶺)을 지켰다.
정곡(鼎谷) 정호관(丁好寬)은 사성(司成)을 지냈는데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남애(南崖) 정호서(丁好恕)는 정주목사(定州牧使)에 있을 때 이괄(李适)의 난을 토평(討平)하여 황해도병사(黃海道兵使)에 이르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덕암(德巖) 정창도(丁昌燾)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淸에 다녀와 황해도관찰사(觀察使)에 올랐으며, 경신대출척 때 무고로 6년간 유배생활을 하다가 적소에서 죽었다.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묵졸헌(默拙軒) 정언황(丁彦璜)은 지방 수령(守令)으로 여러 곳에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지고 암행어사(暗行御史)와 감사(監司)의 표창을 받았다. 그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의 구제를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외직(外職)을 지원하여 회양부사(淮陽府使) · 제주목사(濟州牧使) ·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정언벽(丁彦璧)은 19세에 소과(小科)에 급제, 32세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예·병조좌랑(禮·兵曹佐郞), 수찬(修撰), 교리(校理) 등을 역임했다. 청빈강직하고 논리정연한 성품으로 사림(士林)들이 칭송했다 한다.
우은(寓隱) 정시술(丁時述)은 보첩(譜牒)에 밝아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가 되어 ‘선원록(璿源錄)’을 교정하였고,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를 저술하였다. 정도복(丁道復)은 태안(泰安), 춘천(春川), 안주(安州)에 재임해 있을 때 선정을 베푸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를 기리기 위해 백성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좌승지(左承旨), 홍문관(弘文館) 경연관(經筵官) 등을 역임했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은 독학으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였고 원주(原州)에 은거하며 후진양성과 농업에 종사하였다.
도학군자(道學君子)로서 명성이 높아 여러차례 집의(執義), 사업(司業)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고, 진선(進善)에 있을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위를 잘못이라 상소하였다가 삭직(削職)을 당했다.
숙종22년 장희빈(張禧嬪)의 강호(降號)를 반대하는 상소를 하는 등 당파와는 관계없이 자기 뜻을 기탄없이 토론하였는데, 그의 학문은 정약용(丁若鏞), 이익(李瀷) 등 실학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우담(愚潭) 선생이라 불리었으며, 광암사(廣岩祠)에 향사(享祀)하였다.
두호(斗湖) 정시윤(丁時潤)은 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三司)를 두루 역임했다. 시강원 필선에 있을 때 탐관오리의 처단과 빈민구제를 주장했으며, 丁氏族譜(順天譜)를 간행했다.
자계(雌磎) 정현조(丁俔祖)는 정조의 명을 받아 ‘문원보불(文苑黼黻)’ ‘황명사략(皇明史略)’ 등을 저술하였으며,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는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간 뒤 대사간(大司諫) · 이참(吏參) ·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에 이르렀고 순조1년에는 지실록사(知實錄事)가 되어 ‘정조실록(正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시호(諡號)는 문헌(文憲)이다.
향와(香窩) 정지원(丁志遠)은 문장이 뛰어나 영조로부터 문방제구(文房諸具)를 하사받았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한다. 형·병조판서(刑·兵曹判書)를 역임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귀향하여 향유(鄕儒)의 존경을 받았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이익(李瀷)의 유고(遺稿)를 보고 민생을 위한 경세(經世)의 학문에 뜻을 두고 이얼(李蘖)에게 서학(西學)을 배웠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쳤으나 주문모(周文謨)사건에 연관되어 좌천되었고 신유박해(辛酉迫害)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어 학문적인 체계를 완성하고 5백여 권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학문은 유형원(柳馨遠)과 이익(李瀷)을 계승하여 유학의 정신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으나 양명학적(陽明學的)인 면도 지니면서 이이(李珥)의 주자학적(朱子學的)인 실천윤리와 북학파(北學派)의 사상을 흡수했으며 이기론(理氣論)에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설을 종합, 집대성하였다. 시호(諡號)는 문도(文度).
일성루(一星樓) 정약전(丁若銓)은 왕명으로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를 편찬, 벼슬을 버리고 천주교(天主敎)에 입교(入敎), 전교(傳敎)에 힘을 기울였으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 ‘논어탄(論語灘)’, ‘송정사의(松政私議)’ 등을 저술했다.
정약종(丁若鍾) 역시 천주교(天主敎)에 입교(入敎)하여 우리나 최초의 천주교회장(天主敎會長)으로 전교(傳敎)에 힘쓰다가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옥사(獄死)하였다.
정약종(丁若鍾)의 아들 정하상(丁夏祥)은 9차례나 북경에 오가며 신부(神父)의 파견과 조선대리감목구(朝鮮代理監牧區) 설치를 요청하여 여러번 서양의 신부를 맞아들이는 등 전교에 활약하였고 신학(神學)교육을 받았으며,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 뒤에 복자(福者)의 위(位)에 올랐다.
그가 체포되기 전에 집필하였다는 ‘상재상서(上宰相書)’는 우리나라 유일의 호교론(護敎論)으로 중국에서 널리 전도에 활용되었다.
향수(香壽) 정학교(丁學敎)는 글씨·그림에 특히 뛰어났으며 국사(菊史) 정이섭(丁理燮)은 고종22년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 · 이천부사(利川府使) 등을 역임했다. 정선민란(旌善民亂)이 일어나자 안핵사(按覈使)가 되어 군수(郡守) 이규학(李奎學)을 파면하고 민란(民亂)을 평정하였다.
해초(海樵) 정관섭(丁觀燮)은 흥양현감(興陽縣監)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 거창부사(居昌府使),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지냈고, 정의배(丁義培)는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순교자(殉敎者)들의 의연한 태도에 감동되어 46세에 입교(入敎), 천주교(天主敎) 서울지구회장(地區會長)에 임명되어 전도(傳道)에 노력하였으나 순조1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현대의 인물로 우향(又香) 정대유(丁大有)는 서예(書藝)의 대가(大家)로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 심사위원을 지냈는데 그림에도 능하여 매화(梅花)를 특히 잘 그렸다.
석인(石人) 정태진(丁泰鎭)은 신문학(新文學)에 뜻을 두어 연희전문학교,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원을 마친 뒤 함흥영생여고(咸興永生女高)에서 교편을 잡았고,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다가 타계했다.
부천도서관의 족보해설에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