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담마 철학의 과오 2 - 법
불교에는 형성작용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법’(法, dhamma)이다. 불교를 한 단어로 압축시킬 수 있는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대승의 일원적인 관념론적 실체사상에 매몰된 대승 학도들이라면 아마도 쉽게 ‘마음’이라고 대답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불법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듯이 그 정답은 ‘법’이라고 해야 근본 가르침에 부합하는 대답이 된다. 다만 포괄적인 만큼 그 개념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 경에 나타난 법은 단순하지 않고 다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법의 가장 포괄적인 의미는 사건 · 사실일 것이다. 즉 ‘~ 일’, ‘~ 것’에 해당한다. 교리적으로 설명하자면, 정신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 법이다. 예를 들자면 3법인 중에 ‘모든 법들은 자기가 없다.’(諸法無我, sabbe dhammā anattā)에서의 법이 그런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 경우다. 그런데 법이라는 단어는 불교 이전부터 바라문교에서 사용되던 말이었다. 어원적으로는 √dhṛ(유지하다.)에서 파생한 명사로 존재에 관련된 단어다. 바라문교에서는 신성자(브라흐마)가 세계를 창조하면서 드러낸 자연의 질서 내지 진실한 법칙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도표에서 ③에 들어갈 내용으로는 자연의 여러 법칙들이 해당된다. 또한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덕이나 질서 등도 해당될 것이다. 경에서 코살라 파사익왕은 세상의 종말이 닥친다면 “‘법의 실천’(dhamma cariya)과 바른 실천과 선행과 공덕행이 아닌 다른 무엇을 하겠습니까?”라고 말한다.(상1-393)여기에서의 법도 문맥상 바르고 참된 도덕 법칙을 의미하고 있다. 이렇게 법에는 진실(諦, sacca)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라문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바라문교에서의 진실이란 신성자라는 존재에 입각한 진실이며 그런 존재성을 함축하고 있는 진실이었다.그러나 불교에서는 창조신과 같은 실체적인 존재를 상정하지 않으므로 불교에서의 진실이라는 존재성은 생성됨(有, bhava)이라는 개념 안에서만 다루어진다.(‘있음’atthi과 ‘생성됨’bhava의 차이는 주석 152번을 보라.)모든 진실은 ‘생성된 것’(bhūta), 즉 사실의 일부일 뿐이다. 격의법으로 차용된 단어인 ‘법’과 ‘진실’이라는 개념이 불교 안에서 이루어지는 개념상의 이동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①에 들어갈 대표적인 내용으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실들’四聖諦을 들 수 있다. 법은 경에서 대부분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쓰이는데 이 가르침을 포괄하는 교리가 바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실들’이다. “부처님들께서 찾아내신 괴로움苦과 같이-일어남集과 소멸滅과 길道이라는 ‘법의 교시’를 드러내셨다.”(디1-312)에서처럼 네 가지 진실은 곧 법으로 다루어진다.
②에 들어갈 대표적인 내용으로는 ‘깨달아지는 법’을 들 수 있다. 이 깨달아지는 법은 방법론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불교수행의 방법론적인 가르침은 거의 ‘37항목의 깨달아지는 법’으로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법에 대한 이 모든 분류의 공통분모 혹은 법의 핵심개념은 진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같이-생겨남을 알아보면 법을 알아보고 법을 알아보면 따라서-같이-생겨남을 알아봅니다.”(맛1-683)에서 불교의 진리인 따라서-같이-생겨남과 법이 일치를 이루며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또한 “법을 알아보면 나를 알아보고 나를 알아보면 법을 알아봅니다.”(상3-347)혹은 “와셋타여, ‘한결같은 이’如來는 법의 몸이라고도, 신성한 몸이라고도, 법의 생성체라고도, 신성한 생성체라고도 지칭하기 때문입니다.”(디3-161)에서도 법은 진리를 의미한다. 벤다이어그램상의 공통분모로서의 진리를 규정하자면 ‘모든 사건 · 사실에 관통하며 흐르는 진실한 법칙인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법의 다면적인 의미는 문맥에 따라 어느 한 의미가 두드러지게 표명되더라도 다른 의미를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법을 문맥에 따라 번역을 달리하면 법의 원융한 맛을 깨트리게 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dhamma’를 비교적 잘 표현하는 ‘법’法이라는 번역어를 일관되게 사용하되 도표에서와 같은 다면적인 의미를 충분히 상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비담마 철학에서는 법을 이와 같이 다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법을 자성화, 즉 실체화시켜 버렸다. 이것은 아비담마 철학의 최대 과오다. 대표적으로 남방상좌부를 살펴보겠다.
상좌부에 의하면 법에는 법을 법이게끔 해주는 ‘자체성질’(自性, sabhāva. 물론 근본경전에는 이런 단어조차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외도들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실체를 성립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였었다.)이 각각 박혀 있다. 이것은 법을 최소 단위로 만들어 주는 변함없는 궁극의 실재다. 철학 용어로 실체에 해당한다. 최소 단위인 법은 72가지가 되는데, 이것의 현란한 조합이 사람과 세상을 이룬다. 이런 각각의 법들도 무상 · 고 · 무아라는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는, 즉 자체성질의 차원에서는 항상하고 자기가 있는 것이다. 만일 자체성질이 변하는 것이고 자기라고 할 것이 없다면 자체성질이라는 말도 성립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자체성질을 상정하게 된 이유도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아비담마 철학의 이율배반적인 근본 모순이다.
상좌부에서는 자체성질을 가진 법만이 궁극적인 최소 단위의 실재이기 때문에 나머지 법들은 현상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법에 대한 1차 왜곡에 이어서 또다시 법에 대한 2차 왜곡이 진행된다.
즉, 법을 ‘대상으로서의 법’(dhamma ārammaṇa)과 ‘영역으로서의 법’(dhamma āyatana)으로 구분한다는 점이다.
(아길-636)‘대상으로서의 법’이란 다른 감각기능들이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오직 정신意根만의 대상을 말한다. 여섯 종류가 있다.(아길-319)(1) 감성물질(다섯 가지), (2) 미세한 물질(열여섯 가지), (3) 마음, (4) 마음부수(52가지, 아길-193 참고), (5) 열반, (6) 개념.
그런데 ‘영역으로서의 법’法處은 다시 더 축소되어 (2) 미세한 물질, (4) 마음부수, (5) 열반, 이 세 가지에 한정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근본불교에서 나타난 ‘열두 가지 영역’十二處의 마지막인 ‘법의 영역’法處은 위의 도표에서 나타난 포괄적인 의미의 법과 같은 내용이다.
법의 포괄적이고도 다면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왜곡되어 편협해진 법의 영역으로는 일체sabba를 12가지 영역으로 규정한(상4-111)부처님의 뜻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정신의 대상이 곧 법의 영역이고 이것은 앞의 색·성·향·미·촉이라는 영역도 포괄하고 있다.
물론 다른 감각기능이 파악할 수 없고 정신이 개입해야 파악할 수 있는 특별한 대상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물리법칙이나 철학적인 가치, 개념 등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다른 감각기능들의 도움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앞에서 다루었지만 경에서 순수 의식의 영역은 무방해물의 경계인 ‘무한허공의 영역’, ‘무한식별의 영역’, ‘아무 것도 없는 영역’에 대한 고정됨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법의 포괄적인 영역은 형성작용보다도 넓다. 그 이유는 법에는 형성작용에서 제외되는 하나의 개념, 즉 꺼짐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수학적으로 ‘법 -형성작용 =꺼짐’이라는 도식이 성립한다. 꺼짐이란 ‘모든 형성작용의 멈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꺼지기 직전까지는 형성작용일 것이다. 그런데 아비담마 철학에서는 열반, 즉 꺼짐을 궁극적인 실재로 상정하면서도 개념paññatti은 궁극적인 실재가 아니며 법의 영역에도 들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규제집에서 “무상한 모든 형성작용들은 괴롭고 자기가 없으며 형성된 것들이다. 또한 꺼짐도 단지 제시(paññatti, 아비담마 철학에서는 ‘개념’으로 해석한다.)일 뿐이고 자기-없음이라고 결정된 것이다.”(V5-86)라고 나타난다. 그래서 3법인의 세 번째를 ‘모든 형성작용들은 자기가 없다.’라고 하지 않고 ‘꺼짐’까지 포괄하도록 ‘모든 법들은 자기가 없다.’라고 한 것이다. 쉽게 말해 ‘꺼지면 어떠한 자기도 없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명제라는 말이다.
아비담마 철학의 자체성질이란 실체 개념이고 이것은 부처님이 부정한 자아 개념이다. 열반이 궁극적인 실재라면 자체성질이 있어야겠지만 열반도 자기-없음無我이다. 열반, 즉 꺼짐은 아비담마 철학의 자체성질이나 궁극적 실재로서의 법으로 다루어질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게다가 위의 규제집의 구절에서 상좌부 철학은 ‘paññatti’라는 단어의 개념도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꺼짐도 하나의 사건法이며 이 사건을 ‘꺼짐’이라고 개념적으로도 제시하고 현실적으로도 제시할 수 있다.
철학에서 ‘실체’의 정의는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주는 것’이다. 아비담마 철학에서 법을 법이게끔 해주는 것은 자체성질이었다. 이것은 ‘망상적인 규정’이다. ‘추정된 것’이고 ‘착각에 빠진 것’이다.
불교에서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주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 있는 ‘형성작용’일 뿐이다. 불교에서는 실체 대신 이 형성작용을 내세울 뿐이다. 물 · 불 · 바람 · 흙도 ‘네 가지 큰 생성체들’(네 가지로 크게 생성된 것들)이라고 표현했지 이것을 근본물질이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이 네 가지가 각각 자체성질을 지닌 궁극적인 실재로서의 근본물질이라고 본 사상은 인도 고대 유물론인 차르바카 학파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은 ‘자체성질주의자’(svabhāva vāda)라고 불렀다.예컨대 남방상좌부에서 물(水, āpo)의 자체성질이라고 말하는 ‘점착성’ 혹은 ‘응집성’도 물의 본래적인 성질이 아니라 분자의 결합상태, 온도, 관찰자의 감각기능 등의 조건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 ‘임시 성질’일 뿐이다. 그리고 순수 정신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성질이라고 볼 수도 없다.
남방상좌부 철학의 오류를 일일이 거론하는 것은 번다한 일이다. 더욱이 같은 아비담마 철학의 한 부류인 북방 설일체유부와 궁극적 실재에 대한 분류, 개수, 개념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둘의 진위 논란도 험난하다. 이 점은 여러 경우의 수를 갖는 해석을 가져온다. 어느 한 쪽이 왜곡 · 변형되었거나, 둘 다 왜곡 · 변형되었을 경우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확실한 것은 어느 한 아비담마 철학을 맹목적으로 부처님의 친설이라고 전적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는 점이다. 모든 문제점들을 속속들이 밝혀낸다면 후련하겠지만 아비담마 철학의 체계망상에 휘말려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아비담마 철학에 의해서 법이 어떻게 자체성질이라는 실체개념으로 왜곡되었고 불교의 근본교리를 얼마만큼 뒤흔들어 놓았는지를 확인한 것으로 만족한다고 하겠다.
첫댓글 문제 제기만으로도 의미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法에 대해서 (봄봄의)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라고 한다면
담마는 기본적으로 <의미 있게> 분류(분별이라고 해도 상관없음) 되어 질 것(진 것, 하고 있는 것)
즉 그림으로 그렸다고 치고 말로 설명하면
바둑판처럼 가로로 여러 줄, 세로로 여러 줄을 긋고
그 하나 하나 칸에 일정한 방식(이 또한 법)으로 분류되어 질 것을 위치시키면(담으면 = 담마)
또한 중생들이 그렇게 담고(담마) 있는 것 각각이 담마(擔持, 법)입니다.
이렇게 當然하게 적절하게 담으면 그것을 법이라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비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비법은 또한 이러한 분류 법에 의하면 비법 또한 법입니다.
법과 비법으로 이분(분류)됩니다.
옛적 인도 땅에서
브라문은 브라만이 당연히 해야 할 행동 규범이 있고 …
남자는 남자로서 … 여자는 … 어른은 … 아이는 … 등등
그 문화권에서 당연시 되고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이고 당연히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들이
마누 법(마누사 다르마 = 인간법)이지 싶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담아 지니고 있는 擔持)는 또 다른 법들의 원인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연기법(연법)이고 그 결과 생겨난 결과가 연이생법(과법)입니다.
이러한 연이생법이 또 다시 연법으로 작동하여 또 다시 이어지는 연이생법을 생겨나게 하는 것을
이른바 緣起라고 이름(=법)합니다. 이렇게 분류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직접 목격하신 분은 세존 시대에서 세존이 최초이시고
이렇게 직접 목격(아빈냐)하신 것을 빠린냐하시고서 인간을 포함하여 범천을 포함하여 …
그렇게 직접 아시고 보신 내용을 설명하신 것이 이른바 법(대문자 담마)이고
그 제자들은 그 대문자 담마를 본인이 각자 과연 그런지 말씀하신 대로 따라 담게(소문자) 되면
그것은 담마-아누-담마(法隨法 -담마 짜 아누 담마 짜)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담마란 분류되어 질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분류된 것. 또한 그렇게 분류되어질 것을 담고 있음.
그렇게 담고 있음으로 해서 또 다른 법의 원인이 되는 것. 어떻게 되어 질 것. …
이와 같은 것이 아니라
이것이 담마이다. - 예를 들어 본 카페에서 흔히 만나는
[心意識- 중간에 -名色]
이 중간에(majjhe) 위치하는 것(12연기 법 혹은 연이생법)만이 담마이다.-라고
중간에(majjhe) 위치하는 것-----에 대한 의견은 여기서는 생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