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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해의 청정
일곱 가지 청정 중에 세 번째인 ‘견해의 청정(見淸淨)’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성적인 수행자는 수행 단계를 하나 올라가고자 할 때 도덕성(戒)을 정화해야 합니다. 도덕성이라는 바탕에 발을 확고히 디딘 다음에 마음을 정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여야 합니다. 정신적․육체적 현상을 알아차림에 의해 마음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게 되며, 주의력은 알아차림의 대상들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즉각 알아차리는 찰나삼매를 통해 마음의 청정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알아차림이 편안해졌을 때 하나하나의 알아차림마다 일어나는 마음과 물질을 구분하는 통찰 지혜가 생깁니다. 마음과 물질을 구별할 수 있을 때 유신견(有身見)을 어느 정도 제거됐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단계가 견해의 청정(diṭṭhi visuddhi)입니다.
삿된 견해에는 62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상견(常見), 단견(斷見), 유신견(有身見)이 대표적인 삿된 견해입니다.
(1) 상견은 존재 안에 생을 구성하는 육체적․정신적 과정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죽은 다음에까지 계속되어 영속하는 자아라는 실체, 영혼이라는 개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영혼은 결코 죽지 않고 몸만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번 생에서 현재의 몸이 소멸되면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현 생명체로부터 영혼이 다음 생으로 이어 간다고 믿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근에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서 영혼에게 그들의 공덕을 나누어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몸과 별도로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며, 사람이 죽을 때 현생에서의 정신과 물질은 현생에서 정지되고 끝납니다. 다만 선업과 불선업, 의도와 무지와 갈애로 구성된 원인만이 남는 것입니다. 만약 생존의 원인들이 아직 남아 있다면, 그의 새로운 마음과 물질이 새로운 생에서 다시 생성됩니다.
죽은 다음에 일부는 아귀의 세계에서 아귀들로 재탄생합니다. 그런 아귀의 세계에서는 다른 존재가 공덕을 베푼 것에 대해서 아귀들이 ‘잘했습니다(sādhu)’라는 말로써 공덕을 베푼 존재들을 기쁘게 해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른바 영혼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는 그러한 영혼은 오지 않으며, 아귀의 세계로부터 ‘잘했습니다’라고 말할 뿐입니다.
(2) 단견은 상견에 반대되는 것인데, 죽은 다음에 마음과 물질의 절멸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 단견에 의하면 물질적 몸과 영혼은 죽은 다음에 사라집니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다음 생으로 윤회하지 않기 때문에 선행과 악행에 대한 아무런 과보가 없으므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단견은 다른 존재의 세계를 부정합니다. 이것도 삿된 견해입니다.
(3) 유신견은 수행하는 여러분이 명확하게 알아야 할 것으로,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유신견은 명상의 장애물이므로 이를 제거해야만 명상이 발전되기 때문입니다. 유신견은 마음과 물질, 즉 정신과 육체를 ‘자아’ 혹은 ‘나’라고 생각하는 삿된 견해입니다.
그러나 마음과 물질, 즉 정신과 육체를 구분하는 지혜를 얻을 때까지 위빠사나 명상 수행을 하면 유신견을 없앨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하시 큰스님께서는 “알아차리는 동안 마음과 물질만 있다는 견해가 ‘견해의 청정’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행선을 할 때 여러분은 걷는 것은 물질이고 걷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라고 구별합니다. 여러분은 걸을 때 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걸어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동안 발을 드는 것, 앞으로 내미는 것, 내려놓는 것은 물질이고,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라고 확실히 알게 됩니다. 마음과 물질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 이런 식으로 지각하여 아는 것이 견해의 청정입니다.
또한 배의 일어남, 꺼짐을 알아차릴 때 일어나고 꺼지는 움직임을 의식과 별도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일어나고 꺼지는 것은 물질이고 움직임을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볼 때, 눈과 형상의 대상은 물질이고, 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이라고 구분합니다. 냄새 맡고, 맛보고, 닿는 것을 느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할 때 마음의 대상과 마음의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모두 마음입니다.
또한 쑤심이나 통증이 있을 때 쑤심이나 통증을 알아차리는 것은 마음입니다. 여기서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알아차리는 동안 대상을 아느냐, 즉 지각하느냐와 그것을 구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정신적 계발을 통해서 수행자에게 얻어진 통찰 지혜가 ‘정신적 계발에 기반을 둔 통찰 지혜(修慧)’입니다.
책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서 생긴 지혜는 ‘배움으로 구성된 지혜(聞慧)’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배우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여 생긴 지혜가 ‘사고에 의한 지혜(思慧)’입니다. 그러나 수행하는 여러분들은 수행을 통한 정신적 계발에 기반을 둔 통찰 지혜를 획득해야 합니다.
이런 지혜를 얻으면 알아차리고 있을 때 거기에는 알아차려야 할 대상과 아는 마음뿐이라는, 마음과 물질의 본성을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알아차릴 때마다 개별적인 자아 혹은 ‘나’라는 것이나 남자나 여자는 없고 오직 마음과 물질뿐입니다.
처음부터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하여 여러분은 견해의 청정을 계발합니다. 하나에 집중된 마음으로 소위 말하는 존재를 분석하고 조사합니다. 이 분석과 조사에 의해서 그것이 ‘나’라거나 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속적인 흐름이며, 일어나고 사라지는 상태에 있는 마음과 물질의 복잡한 혼합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그것은 마음과 물질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므로 여러분은 분명하고 올바른 견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존재의 참된 본성에 대해서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됨으로써 여러분은 영원한 영혼이라는 잘못된 개념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견해는 완전히 정화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유신견에 대해 좀더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빨리어 삭까야(sakkāya)는 보이는, 즉 지각할 수 있는 물질과 마음의 무더기를 의미하고, 딧티(diṭṭhi)는 삿된 견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물질과 마음, 즉 물질과 마음의 무더기를 ‘개별적 자아’, ‘나’ 혹은 ‘중생’이라고 보는 견해를 유신견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음과 물질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것은 남자다, 이것은 여자다, 이것은 스님이다, 이것은 동물이다” 등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존재들을 개별적 자아라고 부르지만, 이것들은 실재가 아닙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질문할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사람입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머리카락입니다.”
“사람의 근육을 사람이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심장이나 간 등의 내장을 사람이라고 합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뼈를 사람이라고 합니까?”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사람이란 것을 찾고자 할 때는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교 응용심리학인 논장(論藏)에 의하면,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명칭(이름), 즉 빤냣띠(paññatti)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자, 여자, 사람과 중생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이름일 뿐입니다. 실재이고 존재하는 것은 마음과 물질의 본성입니다. 그러면 또 이렇게 물을지 모르겠습니다.
“머리카락은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그것은 물질입니다.”
“몸의 근육은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물질입니다.”
“뼈는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물질입니다.”
“내장은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그것도 물질입니다.”
“그러면 의식은 물질입니까 마음입니까?”
“그것은 마음입니다.”
그런 식으로 누가 어느 것이 실재이고 존재하는 것인지 물으면, 여러분은 실제로 존재하는 마음과 물질을 말할 수 있습니다.
법을 분명하게 알고 이해하려면, 법의 두 가지 분야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실재하는 것으로 절대적인 빠라맛타(실재․최승의법)라는 분야와, 다른 하나는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빤냣띠(개념․모양․명칭․관념)라는 분야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세상에는 단지 네 가지가 실재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빠라맛타(paramattha)라고 하는 절대적인 실재입니다. 이 절대적인 실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마음(citta)
(2) 마음의 작용(cetasikā)
(3) 물질(rūpa)
(4) 닙바나(nibbāna)
네 번째 실재하는 닙바나는 지극히 행복한 최고의 상태이며, 고통이나 쇠퇴함이 없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것이며, 이름일 뿐이며, 환영이나 환상으로 실재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재하지 않는 상대적인 것도 다루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말씀에 의하면, 어떤 것이 실재하고 절대적인가라는 생각을 통하여 통찰(위빠사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지도 아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실재하는 것을 구별할 때 혼동이 돼서 수행자가 신기루와 같은 환영을 좇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생물들과 무생물들의 본성을 철저하고도 엄밀하게 조사해 보고, 우리들 스스로 그들이 생물적으로 실재하는지, 즉 실체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 판정해 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소위 남자나 여자나 짐승은 그 내부에 아무런 실체가 없는 단지 명칭일 뿐이어서 그것을 엄밀하게 조사해 보면, 오직 실재하고 실체적인 것인 마음과 물질의 범주 안에 들어오는 관념들만 그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짐승은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이며 단지 명칭일 뿐인 빤냣띠라는 것입니다.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빤냣띠, 즉 명칭의 분야에서는 인간, 비구, 남자, 여자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마음과 물질이라는 등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점심을 먹고 있을 때를 가정해 봅시다. 그때 밥은 물질이고, 카레는 물질이고, 수저도 물질이며 돼지고기도 또한 물질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내가 “이 물질을 이 물질로 떠서 저 물질 안에 넣는다”라고 말한다면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재하지 않고 상대적인 빤냣띠라고 하는 명칭 분야에서는 우리는 실재하고 절대적인 빠라맛타 분야의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실재하고 절대적인 빠라맛타 분야에서는 ‘나’라고 하는 것이나 그 사람은 없고, 남자나 여자도 없고, 사람이나 존재도 없으며, 실제적으로 마음과 물질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는 순간에는 눈과 형상과 형상을 인지하는 정신의 기능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앞의 두 가지는 물질이고, 정신의 기능은 마음입니다.
그리하여 보는 순간에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물질과 마음이며, 오직 물질과 마음만 있다고 아는 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며 바르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실재이며 존재하는 것인 물질과 마음이 내 몸이고 내 무더기이며 내 것이라고 보는 것은 삿된 견해입니다. 세속인이라고 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삿된 견해인 유신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들은 자신이 물질과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지한 사람이 다섯 가지 무더기들, 즉 몸의 무더기, 느낌의 무더기, 지각의 무더기, 정신적 형성의 무더기, 의식의 무더기를 ‘나’, ‘내 물질’, ‘내 중생의 물질’ 그리고 ‘나’를 포함한 물질이라고 잘못 인지합니다.
수행하는 여러분들이 이 삿된 견해를 버리거나 끝내기 위해서는 물질과 마음을 구별할 수 있을 때까지 부처님께서 염처경에서 가르치신 대로 위빠사나 명상수행을 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행선을 할 때에는 ‘왼발, 오른발’ 혹은 ‘발을 들어서, 앞으로, 놓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앉을 때에는 다리와 팔을 뻗고 구부리는 것을 포함한 모든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하며, 앉은 다음에는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보거나 듣거나 맛보거나 냄새 맡거나 피부에 무엇이 닿거나 생각하거나 망상할 때나,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순간 무엇이든지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는 동안 이러한 정신적․물질적 현상이 동시에 함께 일어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알아차릴 때 일어나고 꺼지는 형상은 물질이며, 알아차리는 것, 즉 아는 것의 본성은 마음입니다. 앉아 있음을 알아차릴 때 앉아 있는 형상은 물질이고 알아차리는 것, 즉 아는 것의 본성은 마음입니다. 볼 때 눈과 형상은 물질이고, 형상을 알아차리는 것, 즉 아는 것의 본성은 마음입니다. 코와 냄새, 맛과 혀, 감촉과 피부도 그렇습니다. 또한 마음의 대상을 생각하거나 망상할 때는 마음의 대상이나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 즉 아는 것이 모두 마음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알아차리고 있을 때만 이것은 물질이고 이것은 마음이라고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 단계에 도달하면 마음과 물질의 무더기들을 살아 있는 개인인 ‘나’라든지 ‘내 몸’이라든지 ‘내 소유물’이라고 잘못 인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것들이 실제 존재하는 그대로 깨닫게 되면, 여러분들은 즉시 올바른 견해를 갖게 되어 견해의 청정을 얻습니다.
이와 같은 견해의 청정으로 유신견은 거의 뿌리 뽑힙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꾸준히 알아차림을 계속해 간다면, 유신견이 완전히 제거되어 뿌리 뽑히고 고귀한 흐름에 든 자가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흐름에 든 자가 되어 수다원위를 성취하면 유신견이라는 짐을 완전히 벗어버리고, 그 이후로는 사악도에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염처경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신으로부터 유신견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되풀이되는 윤회의 위험을 인지한 수행자가 고통으로부터 즉각적으로 구원되기를 추구한다면, 가슴에 창이 꽂혔거나 찔린 사람 혹은 머리에 불이 붙은 사람과 같은 정도로 화급하고도 신속하게 유신견으로부터 빠져나오려고 급히 서둘러야 합니다.
재가수행자들은 해야 할 많은 의무가 있을 것이며, 다른 것보다 그들이 의무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그 의무를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악도에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들이 유신견을 완전히 제거하게 되는 수다원과의 지혜를 성취한다면, 그러한 사악도로부터 해방될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번 생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혜택을 받는 황금과 같은 기회를 가진 훌륭한 인간으로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십시오. 그리하여 자신으로부터 유신견을 완전히 제거하고 견해의 청정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견해의 정화를 위해 정신적․물질적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는 노력을 계속하여 유신견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있는 도과의 지혜를 얻음으로써 모든 고통이 소멸한 닙바나를 성취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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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