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을 향한 남성의 기호는 서로 다른 성장과정과 家風에 따라서 각기 거기에 상응하는 형태로 표현된다고 학생 때 배웠다. 그 때 교수가 들었던 실례가, 어떤 사람은 코스모스 같은 가녀린 여자를 좋아하고, 또한 어떤 이는 모란같이 탐스럽고 넉넉한 여성을 좋아하는 따위의 차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또 어떤 이는 비록 따갑게 찌르는 가시를 가졌더라도 장미가 아니면 꽃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제 눈에 안경이므로 나무랄 일이 아니다.
만약 누가 내게 어떤 꽃의 여자가 좋은가를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양란 같이 은근한 향기로서 내면적 광채를 발하는 여성에 마음이 이끌린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의 외모상 미추로서 저울질하기 보다 그 내면적 가치를 내다보고 싶다는 것이 필자의 의사다.
고대 인류사를 보면, 태초에 파밀고원에서 발생한 인류가 우랄산맥과 천산산맥을 넘어서 동쪽으로 이동했을 때, 그 많은 사막의 먼지를 막기 위해서 작아진 눈, 그리고 찬 공기가 기도 속으로 직접 흡입되지 않도록 히팅 시스템으로써, 호흡곤란과 폐염을 막아주려고 아래를 향해서 길어진 코, 몰아치는 황사 바람에 부딪쳐 생긴 돌출된 광대 뼈 등 척박한 생활환경이 만들어낸 우리 여성들의 밋밋한 얼굴은 화려함 하고는 거리가 다소 멀다는 점에서 동양란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을지 모르겠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처럼 그런 유사성이 내가 그 꽃을 좋아하게 된 동기일른지 모른다.
우연한 기회에 방송 프로에 출연했을 때 이야기인데, 그 때 한국인의 유전자로서 형성될 수 있는 최고의 미인이라는 극찬 속에, 성형외과 의사들이 선정했다는 톱클래스 미녀 1위의 탤런트 H씨가 간밤에 과음으로 구토하고 인사불성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오바이트해서 한동안 필름이 끊겼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실색했던 일이 있었다. 겉만 번지르하고 속은 텅 빈 이런 여성에게 한국인의 유전자로서는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예찬이 과연 어울리는 것인가를 생각하던 나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나왔다. 너무 어처구니 없다는 생각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또, 한 프로그램을 끝내고 개최된 ‘쫑파티’에서 본 다른 미녀 연기자의 상스러운 행동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장하다면서 순대 한 접시에 총각김치를 반찬삼아 쩝쩝거리며 먹는, 절제되지 않은 그녀 모습은, 평소 브라운관에서 대해왔던 그녀의 지적인 이미지하고는 정반대의 캐릭터였고 그보다는 오히려 돈사 속의 꿀꿀대는 가축같았다.
그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한동안 그녀의 열열한 팬이었던 나는 크게 실망했는데, 어째서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자산이랄 수 있는, 천부의 미모를 살리지 못하고 정돈되지 않은 모습을 팬들 앞에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이 대리석으로 만든것 같은 미녀의 복강 속에도 대사종산물이 너무 많이 들어 있다는 암시가 아니었을가 , 선입관이 나쁘니까 결론도 斜視的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겉보기에 제아무리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에 버금가는, 귀틔나는 용모라 할지라도 그 언행이 이 정도로 막 되먹게 되면, 잘생긴 얼굴이나 체격도 장점으로 작용할 수가 없다. 필자의 상상인데 미녀 탤런트가 결혼해서 해피앤딩하지 못하고 결별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기대에 상반되는 실망이 자초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이런 장미형 미녀들에게 실망하면서 실로 우연한 계기에 동양란 타입의 여인이 내 머리속에서 여왕의 자리를 점유하기 시작했는데 그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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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동양란의 청초한 매력에 흠뻑 빠진 것은, 20여 년 전 종로에서 강남으로 병원을 옮겼을 때 한 제주도 유지로부터 선물 받은 風蘭이 모멘트가 되었다.
이 풍란은 그 당시 생김새가 하도 초라해서 오픈 하우스 세리머니에 참석했던 한 친구로부터 ‘꼭 방직공장에 취직하려고 상경한 村婦같다’ 라고 혹평 받았던 화초다. 가격도 알아보니 난 중에서 가장 싸서 1만원이면 상품을 구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들고 온 하객의 말은, 그런 세평과는 다르게 극찬으로 일관했다.
‘난초는 그것을 기르는 주인님이 정을 주는 것에 보답할 줄 아는 지체 높은 士女같은 꽃입니다. 많이 사랑해 주시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애정 표현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초의 미색과 품격 높은 향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에게 풍란을 보내면 공연한 오해만 받아요. 돈을 아끼느라고 麥門冬 같은 잡초를 가져온 것으로 착각하죠. 진실로 난을 이해하는 지적 수준이 없으면 豚公 면전에 내놓은 진주 같은 것이 돼버리거든요.’
속마음으로는 ‘꽃을 기르는데, 웬 기르는 이의 학식과 품격이 필요한가.’라는 반발이 있었지만 꾹 참고 그 자리를 모면한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난을 기르려면 먼저 나 자신이 난 재배에 관한 전문지식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격언대로, 첫눈이 내리는 미끄러운 길을 무릅쓰고 명동 古書籍商이 즐비한 중국대사관 골목을 찾아 난초잡지를 몇 권 사들고 돌아온 나는 밑줄을 그어가며 시험을 앞둔 고시생처럼 잡지를 탐독했다.
원산지 사람의 손을 거치는 동안 前處置를 받았음인지 봄이 박두하자 細葉 사이로 흐린 녹색의 꽃대 몇 개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너무 물을 많이 주지 않으면 수일 안에 꽃이 필 것이라는 애란가 친구의 말대로 며칠 후 오얏 꽃 같은 백색의 작은 꽃이 비좁은 꽃대 피막을 뚫고 나오기 시작했다.
나 같은 백면서생이, 누구나 먼저 선비가 되지 않고서는 개화시키기 어렵다는, 난초 꽃 피우기에 성공한 것은 진실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난초의 첫 개화를 기념하여 조촐한 파티가 병원 거실에서 열렸고 그 자리에서 ‘병원 전체를 난초 향기로 채우자!’라는 구호로서 축배를 들며 난초의 健勝을 기원했다.
그러나 고난은 그 후에 발생하기 시작했다. 꽃이 지고 그해 6월 장마철이 되자 줄기차게 쏟아지는 비로 인해 습도가 한껏 높아지면서 갑자기 상승한 습도 탓인지 난초 잎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마치 홍역을 치르는 유아처럼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주근깨 같던 그 반점이 파여져서 궤양을 만들더니 이파리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마치 해수온도의 상승으로 서해바다로 잘못 진입한 고래가 썰물에 갇혀서 숨을 헐떡이듯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것이었다. 놀라서 전문가를 초빙, 상담해 보니 開花 호르몬의 과용과 수해가 겹쳐서 만든 식물의 특이한 병세라고 했다.
결국 난은 그 자생지의 지형을 닮아서 물이 沙土를 통해 신속하게 빠져나가야 하는 것을, 흙 속에 함유된 유기성분이 고갈되었다고 생각한 내가 분토 교체를 잘못한 것이 화근이었다. 留水는 난에 절대로 해로운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너무 쇠약한 개체가 질병으로부터 회생하기 어렵기는 인간과 화초가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인지 그렇게 극진히 보살핀 보람조차 없이 멀리 제주도에서 시집 온 풍란은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러자 진작에 물과 공기가 다른 서울로 데려온 것이 잘못이니 차라리 그 녀석이 살던 한라산 기슭으로 다시 보낼까 하는 생각을 실천하지 못한 내 우유부단이 후회스러웠다.
하지만 일단 유명을 달리하면 우리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손쓸수 없는법. 이제는 그것을 추모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일이 없었다.
난을 기르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이 녀석은 인간의 여인상을 골고루 간직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햇볕을 너무 주면 고사하고, 부족하면 뿌리가 자라지 않고 잎사귀만 무성해져서 볼품없는 용모가 되어버리는 따위 연약한 특성이, 주인의 보살핌을 잃은 여성에서 출현하는 몰락상과 너무나 흡사했던 것이다.
무성한 잎은, 태양이 주는 光 에너지를 더 받으려고 길어지는 일종의 적응현상인데, 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그 모습이 응급실에서 마주치는 위기국면의 인간과 너무나 닮았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에서 크라이머들이 그러하듯 햇볕이 없으면 생명의 근원인 뿌리를 튼튼하게 만들 수 없어서 그렇게 발버둥 쳤던 모양이다.
그런데 난초가 가지는 일반적인 매력은, 그 집요한 생존투쟁이 아니라 은근하면서도 강력한 난향의 유인작용이 아닌가 싶다. 동물들이 惱殺 당한다는 퀴퀴한 냄새의 페로몬하고는 달라서 세계적 브랜드의 어떤 향수로도 흉내 내지 못하는 고귀한 臭氣가 그 속에 담겨져 있고, 그 냄새에 넋을 잃은 선비들이 재치넘치는 필치로 난을 그리고 거기에 詩題룰 붙였던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함께 살면서 경험한 사실인데, 방안에 동석하고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도 외출해서 돌아오면 한결 진해진 향기를 통해서 선비를 짝사랑하는 난초의 연정을 확인하게 되는데, 난과의 사이에서 연모의 기분을 맛보려면 먼저 식물과의 교감술을 어느 정도 익혀야 된다.
태국에서 수입되는 胡蝶蘭이나 템파레 같은 洋蘭들은 원색적 색감과 그것이 조화되어 만들어내는 화려함 때문에 대중의 사랑을 받지만, 따지고 보면 그 사랑은 술집 호스티스에 대한 본능의 뿌리에서 출발한 욕구 같은 것이다. 지나친 메이크업으로 그 생 얼굴을 가리고 눈마저 거친 쌍꺼풀 수술로 아름답기보다 공포를 안겨주는 인조미인의 전형적 모습과 너무 닮아서 나는 양란이 싫다.
그런 천박한 미에 비하면 동양란이 가진 매력이 동양의 학문적 특징인 溫柔로움과 절제된 욕구가 상통하여 요란스러운 양란보다 더 강한 지배력을 가졌는지도 모른다. 이 은근스러움과 형이상학적 내용이 어찌보면 야생동물을 포획할 때 쓰는 큐라레라는 마취제와 비슷한 약리작용을 펼치는 모양이다.
이 모호한 매력에 눈을 뜨게 되면 동양의 학문에 이끌려서 이 땅에 주저앉은 백인 승려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엉성하기 짝이 없고 그 실체가 감지되지 않는데도 학문으로서 거기에 심취하는 서양인들을 보노라면 꼭 강력한 공략만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난의 인간 유인도 이와 같은데, 그다지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자신의 精髓를 짜내어 정제한 자연의 향기를 주인에게 제공하면 남자는 그것에 현혹되어 난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런데 앞서 난을 가져다 준 제주도 명사의 말대로 이쪽에서 사랑을 먼저 보내지 않으면 아름다운 꽃은 물론이고, 향기도 만들지 않는다는 항간의 속설이 혹시라도 남자들의 흔들림 없는 慕情을 촉구하는 경구로서 난을 여성으로 人格化해놓고 지어낸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남자가 그러한 것처럼 여자에게도 개체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서로 다른 특성이 있게 마련이다. 지나치게 발랄해서 버르장머리 없는 철부지 같은 여성이 있는가 하면, 너무 조심성이 많아서 점잖은 선비 가문의 규수같이 자신을 낮추고 겸양하는 미덕으로 무장한 구시대적 이미지의 여자도 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여자는, 미국의 저급한 청년문화에 감화되어 자신의 위치와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겉보기로는 제법 앞서 가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냉혹한 현실에 부딪치면 거품처럼 그 부피가 적어지는 경박한 여인들인데, 이런 여자를 보면 황소 흉내를 내려고 배를 부풀리다가 터져버린 이솝의 <개구리 우화>가 상기되어 나도 모르게 절제할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온다.
꽤 당당해 보이던 여자가 외국에 나가서 입국신고 때 그곳 법무부 공무원이 묻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이솝의 그 개구리가 생각났는데 남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놀부 심리가 아닌지 내가 그런 나를 많이 걱정했다.
반대로 어수룩해 보이는 여인이 漢詩 한 구절을 인용해서 자기의 주장을 조용하게 펼치거나 ABBA의 <I have a dream>같은 신식 노래를 원어로 부르는 재주를 보게 되면, 난향을 맡았을 때와 같은 몽롱한 정신상태에서 그녀 속으로 흡인되는 나를 발견한다.
만약 사랑을 고백하는 당신에게 한 여인이 “春蘭如美人, 不採香自願”이란 蘇東坡의 한시로 대답하면 당신은 어떤 마음이 될것인가. 상상만으로도 몸이 떨리는 용해의 순간인데, 이것이 장미보다 난에 더 마음이 끌리는 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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