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누기
된장도 김장도 함께 담그는 남매들 지난 2월 방송된 KBS <1박2일> 시청자 투어 2탄에서 유독 눈길을 사로잡은 팀이 있었다. 바로 11남매 팀이었다. 40대부터 60대까지의 중장년층이 특유의 우애와 유쾌함으로 시청자들에게 형제가 많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재산인지 보여준 까닭이다. 수소문 끝에 11남매의 막내인 박미경 씨와 연락이 닿았다. 구수한 경상도의 사투리가 정겨운 그녀는 멀지 않은 시일에 ‘큰오빠 집에 모두 모여 장을 담그기로 했으니 그날 오시라’ 했다. 매년 남매가 모두 모여 된장을 담그고, 김장을 해서 함께 나눈다고 했다. 예로부터 ‘우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바로 이런 풍경 때문 아닌지 궁금해졌다.
경남 고성 거류면 거산리. 바다보다 푸른 보리밭이 봄바람에 춤을 추는 그곳에 11남매의 여섯째이자 맏아들인 박용일 씨의 집이 있었다. 이날 모인 형제들은 박봉선(첫째, 63), 박쌍순(셋째, 62), 박옥자(다섯째, 56), 박용일(여섯째, 54), 박용열(일곱째, 52), 박미자(여덟째, 49), 박용배(아홉째, 46), 박미경(막내, 42) 씨. 장사 때문에 주말에는 자리를 비울 수 없는 둘째(박쌍이)와 넷째(박복자), 외항선 선장이라 1년 이상 바다에 나가 있다는 열째 박용예 씨는 아쉽게도 함께하지 못했다.
“전해 12월에 만든 메주를 가지고 보통 매년 이맘때쯤 된장을 담급니다. 간장도 끓여놓고요. 연례행사지요. 가을 김장은 더합니다. 배추 8백 포기를 한꺼번에 담그거든요. 다 같이 매달려도 하루에 다 못 끝내 2박 3일 동안 김장에 매달리지요. 조금씩 하는 것보다 이렇게 많이 하는 게 맛도 더 좋습니다.”
큰며느리 김문재 씨의 손맛이 가득 담긴 봄나물 밥상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다 같이 마당으로 나갔다. 마당 한편에 놓인 큼직한 장독에는 간장과 메주가 가득했다. 모두 자신이 늘 해오던 위치에 서서 일사분란하게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셋째 쌍순 씨가 장독대 근처에서 메주와 간장을 꺼내 건네주면 막내사위가 나르고, 작업대 앞에선 봉선 씨가 동생, 올케들과 함께 열심히 반죽을 해대는 식이었다. 용일 씨는 도구를 챙겨주며 가마솥에서 간장을 끓이고, 용배 씨는 감독관 역할을 한다며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참견을 했다. 혼자 한다면 고된 노동일 터였지만 모두가 모여 이렇게 분업을 하니, 집 안 곳곳이 금세 특유의 활기로 시끌벅적했다. 손은 쉬지 않고 일을 하면서도 남매들은 서로 농을 걸고 장난을 치느라 웃음소리가 사그라질 새가 없었다.
“솔직히 행사랍시고 이렇게 된장도 만들고 김장도 하지만, 실은 한 번이라도 더 얼굴을 보며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구실일지도 모르지요. 형제들 다 모이면, 서로 웃고 떠들고 하느라 얼마나 재미난지 모릅니다.”
5년 전 용일 씨가 귀향하면서 11남매의 유쾌한 만남은 더욱 잦아졌다. 두 달에 한 번씩 갖는 ‘정기월례회’는 몇 년째 계속되고 있고, 1년에 몇 번씩 봉고차 한 대에 몸을 싣고 전국 곳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한다. 딸들끼리 만든 ‘7공주회’의 외유는 수시로 이뤄지기 때문에 셀 수조차 없다. 어디 그뿐인가. 막내인 미경 씨가 한 포털에 만든 가족 카페에는 ‘조카 00가 영재학원에 들어갔어요’, ‘우리 아빠 생신 축하해주세요’ 등의 박 씨 가족 뉴스가 수시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어쩜 이리 사이가 좋을까, 흐뭇함을 넘어 신기하기까지 했다. 가족이 한 집에 살면서도 대화할 시간은커녕 얼굴 마주칠 시간도 없다는 요즘 시대에 참 보기 드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긍정적 서열화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기 11남매가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낸 이곳, 거산마을은 참 아름다운 곳이다. 남해 당항포 앞바다를 곁에 두고 푸른 수풀과 서정적인 갈대밭이 어우러진 모습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봄이면 지천에 널린 나물을 캐고, 여름에는 시원한 물가에서 싱싱한 재첩을 잡았다는 그들의 어린 시절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막내인 미경 씨가 태어날 무렵 어머니는 40대였고, 맏이인 봉선 씨와는 무려 스물한 살 차이가 난다. 미경 씨가 1백 일쯤 되었을 때 봉선 씨는 이미 결혼을 했다고. 성장 시기가 달랐던 만큼 11남매가 모두 함께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모두 나이가 들고 나서 우애가 더욱 돈독해진 것. 소위 말하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라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일까? 이제는 마치 친구처럼 툭하면 만나서 잘도 어울린다. 비단 형제뿐만 아니라 올케, 동서, 형수와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한 가족이 됐다. 형제 많은 집안이 모두 화목한 것은 아닐진대, 이 유별난 우애의 비결은 무엇일까?
“어머니가 시집와서 첫째 누이부터 내리 딸만 다섯을 낳았어요. 거의 10년간 아들을 못 봤으니 소박맞기 직전 아니었겠습니까? 그러다 10년 만에 용일이 형님을 낳고, 저까지 연달아 아들을 봤지요. 거기서 끊었으면 좋았을 낀데, 그 당시에는 죽는 아가 많아 예비로 아들을 더 낳은 겁니다.”(박용열) “남동생이 처음 태어나던 해가 가장 기억에 남지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찌나 발걸음이 가볍던지….”(박봉선)
“내가 태어났을 땐 죽으라꼬 윗목에 밀어놨다 아닙니꺼. 먹을 것도 없어서 혼자 밭에서 풀 주워 먹고 다니고…. 출생신고도 깜박하고 안 해놨다가 동생인 용일이 태어나고 나서야 하는 바람에 호적에는 누나가 동생으로 되어 있어요.”(박옥자)
“동사무소도 먼데 11명의 출생신고를 일일이 하러 나가는 것도 귀찮았을 끼다. 열한 번을 우째 하노.”(웃음)
아버지 박석규 씨는 늘 잘 다린 한복을 챙겨 입고 다니던 선비 같은 분이셨단다. 멋쟁이도 그런 멋쟁이가 없었다고. 어머니 황명수 여사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로 농사며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11남매 교육도 엄격하게 시키셨다고.
“어머니는 늘 내가 자랑할 건 자식 많이 낳아놓은 것밖에 없다고 하셨어요. 혼자서 다 키우느라 무척 고생하셨을 텐데 한 번도 많다, 힘들단 말씀 안 하시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서열을 엄청 중시하셨다는 거지요. 무조건 손위 형제에게는 복종해야 돼요. 지금도 저희는 그래요. 무조건 복종입니다. 아랫사람이 대들고 이런 거 절대 없어요.”
풍족하지는 않아도 많은 형제 틈에서 부대끼며 잘 성장했고, 하나 둘 각자의 가정을 만들어나갔다. 딸들은 각자 짝을 만나 가정을 꾸렸고, 아들들은 직장생활을 하거나 사업을 하기도 하고, 외항선 선장이 되기도 했다. 나이가 들면서 자식도 키워 세상에 보내고 손자도 보았다. 그렇게 함께 늙어갈수록 형제애는 점점 깊어졌다. 흩어져 살수록 가족의 소중함이 새삼 사무쳤다.
장남인 용일 씨는 창원에서 오랜 직장생활을 하다 언제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농사를 짓겠다는 결심을 잊지 않고 실천에 옮겼다. 덕분에 남매들은 모이기 좋은 아지트를 하나 얻은 셈이 되었다. 그때부터 11남매는 똘똘 뭉쳐 다니기 시작했다.
“큰오빠랑 큰올케가 참 잘해요. 솔직히 우리는 모이면 수가 엄청나잖아요. 그 손님치레 다 하고, 농사지은 찹쌀이며 흑미를 사돈댁에 보낼 것까지 한 포대씩 트럭에 실어 날라다 줍니다. 싫은 내색을 조금이라도 하면 우리도 안 갈 낀데,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고 살뜰히 챙깁니다. 이런 사람 또 없습니다.”
신나는 모임
자주 보고 실컷 놀기 매년 날을 잡아 김장을 담그고 형제 수대로 나누자는 용일 씨의 제안에 뜻을 함께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지금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임을 주선하고 수시로 모인다. 자식들이 장성하고 삶의 여유가 생기자, 이러한 가족 모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닫게 된 것.
“우리가 모여서 우째 노는지 알면 기가 막힐 낀데요. 40대, 50대 아줌마 아저씨가 돼 가꼬 말뚝박기를 하면서 놀 정돕니다.”
“다른 형제들 보면 명절에만 모여가 얌전히 ‘니 어째 지내노’ ‘내는 이래 지낸다’ 그러다 온다 하지만은, 우리는 여자 남자 다 같이 고스톱도 치고 노래방도 가며 새벽 3시까지 논다 아닙니까?”
남매들뿐만 아니라 올케, 사위들까지 똘똘 뭉쳐 함께 놀고, 따로 떨어지는 것이 싫어 함께 거실에서 잔단다. 나이 들어 이렇게 친한 남매지간도 드물지 싶다.
정성껏 손으로 치댄 된장을 각자 가져갈 통에 나눠 담으니 일이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때 마당 한가운데 상이 펼쳐지더니 큰오빠가 직접 담갔다는 오디 막걸리가 등장했다. 분홍빛의 향긋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건배를 하며 “우리가 남이가!” 하고 우렁차게 외치는 이 유쾌한 가족의 함성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심인가는 모르겠지만 올케들도 계원들이랑 놀러가는 것보다 시누이들이랑 노는 게 더 재밌다카대. 지난번에 <1박2일> 촬영 갈 때는 형제들만 간다고 삐쳐가지고…. 그 담서부터는 우리 구호가 원래 ‘우리가 남이가’ 이래 하는데, 올케들만 ‘우리가 남이다!’ 이카대.”(웃음)
“형제간이 제일 편하고 좋잖아요. 여행을 가도 출발하는 순간부터 재미납니다. 우리는 차를 따로따로 타고 안 가거든요. 꼭 한 차에 끼어가야 됩니다. 언니들은 쉴 새 없이 노래 부르고 춤추고, 그러다 지치면 자고, 일어나서 또 부르고. 여행지에 도착할 때는 목이 다 쉬어있더라고요. 얼매나 웃긴가 모릅니다.”
언젠가 청도에 놀러갔을 때는 방 4개짜리 펜션인데 한 방에서 다 같이 잔 적도 있었다고. 우애도 이런 우애가 없다. <1박2일> 시청자 투어에 신청한 것도 이런 특별한 우애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컸단다.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 이렇게 사이좋은 대가족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신청서에 썼어요. 처음엔 자신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내 혼자 보내고는 어차피 떨어질 거 같아서 언니, 오빠들한테는 알리지도 않았지요.”(박미경)
반쯤 포기하고 있던 미경 씨에게 출연 요청이 왔을 때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 문제는 나머지 남매들을 설득하는 일. 처음에는 ‘전국적으로 남우세스러운’ 일이라며 완강하게 고개를 젓던 큰오빠도 “오빠가 안 가면 나머지 형제들 다 못 간다”는 막내의 애교 어린 협박에 할 수없이 넘어갔다. 갈 때는 고민이 많았지만 가서는 어느 팀보다 확실하게 놀고 왔단다.
“재밌더라고요, 배가 고파서 그렇지. 라면 쪼가리 몇 개 주는데, 우린 밥을 한 끼라도 안 먹으면 손이 벌벌 떨리거든.”
“우리 덩치를 보이소. 굶어가 되겠는가. 촬영 끝나고는 다들 오전에 공항에서 헤어졌는데 우리는 바로 횟집으로 가서 회를 몇 접시 먹었나 모릅니다. 어마어마하게 먹었습니다.” 열두 번째 동생으로 인정한 김종민과의 우애도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김종민은 촬영이 끝난 후 가족 카페에도 가입해 ‘형님, 누님들 저 종민이에요. 저도 여기 회원이에요~’ 하며 인사글까지 올렸단다. “처음엔 진짜로 어리버리한 기, 성질나더라고. 아는 착한데 똑 부러지지 못해 갖고. 연예인 같지가 않더라고.” “얼마 전에 욕지도편 봤나? 제기차기도 못하고, 가위바위보도 못하고…. 보는 내가 안쓰럽더라.” 2박 3일간 함께 보낸 정 때문인지 이후로는 <1박2일>을 볼 때마다 김종민한테만 눈이 가더라며 또 한참 이야기꽃을 피웠다. 방송이 나가고 난 후 남매들은 모두 유명인사가 됐다. 남편과 함께 한국은행 경남지부에 다니는 미경 씨는 회사 사보에 <1박2일>에 출연한 경험담을 싣기도 했다. 동네 사람들이 알아보는 건 예사다. 대부분 형제가 많아서 좋겠다며 그렇게 부러워한단다.
따로 또 같이
모두 다르지만 최고의 화합 겨우내 잘 익은 메주가 남매들의 손을 거쳐 구수한 된장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까지 뿌듯해졌다. 앞으로 이들은 1년여 동안 이 된장을 먹으며 오늘의 추억과 언니, 동생을 떠올릴 것이다. 용일 씨는 3년 전에 담갔다는 오디 진액을 담아주는 등 끊임없이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무리 퍼주어도 아까워하는 법이 없다. 부모 맘을 꼭 닮은 영락없는 큰오빠다.
몇 시간 동안 남매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생김새도 그렇고 성격이나 말투도 각자의 개성이 뚜렷했다. 특히 외모는 한 남매임에도 참으로 제각각이었다. <1박2일> 작가한테서도 모두 한 엄마 뱃속에서 나온 남매가 맞느냐는 질문을 들었단다.
맏이로서 11남매의 무게중심을 잘 잡아주고 마치 엄마 같은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는 첫째 봉선 씨, 개그우먼 저리가라 할 정도의 유머감각과 조그만 일에도 눈물을 뚝뚝 흘린다는 정 많은 쌍둥이 쌍이와 쌍순 씨, 장사 때문에 이 자리에 함께하진 못했지만 늘 유쾌한 넷째 봉자 씨, 가족들이 입을 모아 ‘사고뭉치’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말하는 멋쟁이 옥자 여사, 퍼내도 퍼내도 바닥나지 않는 화수분 같은 마음씨를 지닌 든든한 큰오빠 용일 씨, 강한 승부욕과 비상한 머리를 지닌 일곱째이자 둘째 아들인 용열 씨, 모두가 인정하는 11남매 최고의 미인 미자 씨, 누나들을 위한 기특한 물주, 크게 농장을 운영하는 용배 씨, 최연소 선장 기록을 세웠다는 대단한 마도로스 용예 씨, 마지막으로 언니 오빠들의 매니저이자 부지런한 심부름꾼 미경 씨. 하나하나 바라보면 남매치고는 참 닮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외모도 성격도 다른 사람들이지만 모아놓으면 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가족의 힘이다.
“형제자매들 때문에 더 힘들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저희는 반대로 서로에게서 살아가는 힘을 얻습니다. 젊을 때는 물론 친구가 좋지만, 나이 들면 형제자매만큼 힘이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박미자) “저에게 가족은 ‘휴양지’ 같아요. 직장생활하면서 지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언니들과 자주 연락하고 만나는 게 저에게는 최고의 휴식이 되더라고요. 셋째 언니는 몸살이 났다가도 같이 놀러갈 때만 되면 싹 낫는대요.”(박미경)
가족들과 상상 이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며 한 달이 멀다하고 놀러 다니는 미경 씨를 이상하게 보는 친구도 많다. 올케랑 동서랑 한 방에서 같이 자고 스스럼없이 지낸다는 이야길 듣고 놀라는 동료도 있다. 하지만 미경 씨에게 가족은 세상의 어떤 관계보다 소중히 여겨야할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오히려 함께 성장기를 거치며 울고, 웃고, 다투고, 희생한 형제자매들의 소중함을 시간이 흐를수록 잊어간다는 것, 그것이 더 슬픈 현실 아닐까. 그 소중함을 알기에 미경 씨는 등뒤에 있는 10명의 언니 오빠가 든든한 지원군인 것만 같아 행복하다.
형제자매 간의 우애는 모든 인간관계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같은 곳에서 같은 성장기를 보낸 만큼 누구보다 내 편에서 날 가장 잘 이해해줄 사람들이 바로 형제자매들이다. 이들에게는 그런 소중한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열 명이다. 세상의 어떤 보물을 이에 비하겠는가.
취재를 마치고 나오는데 이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그리고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부럽다는 생각이 고개를 내밀었다. 4월의 봄볕을 받아서일까, 고성 11남매의 우애가 듬뿍 담겨서일까, 마당 한쪽에 켜켜이 놓인 통에 담긴 된장이 온기를 품은 듯 따스해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