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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숙자
시작 노트
어느새
열 한 번 째 동인지가 만들어 지는 가을입니다.
행복합니다.
마당에 노란 국화 향마저도
부자가 되게 해 줍니다.
꽃잔디와 조가 잡초가 되다.
원숙자
잠깐 나갔다 왔을 뿐인데
깨끗하게 휑~ 하다
마당에 꽃 잔디가 모두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시든 풀 더미 속에서 꽃잔디를 찾아
심어놓고 물을 줬더니 살아났다
잠깐 통일 기원 예술제에 다녀왔더니
갠신히 살려 놓은 꽃잔디가 모두 사라졌다
이제는 뽑아서 멀리 버려 다 말라 버렸다
다시 찾아 심어놓고 이건 풀이 아니고 꽃이라고
누누이 당부를 하고 서울에 다녀왔다
키 큰 수숫대 옆에 조가 모두 사라졌다
엄마, 서숙 (조의 전라도 말)은 왜 다 뽑아버렸어?
야좀봐, 내가 언제 뽑았다고 헌다냐
난 수수밭에 풀만 맸구만...
엄마 잘 했어
풀밭에서 조모종을 찾아 심고 물을 줬다
간절히 살아나기를 기원하면서...
울 엄마 기억도 함께 살아나서 건강해졌음 좋겠다.
목련이 피던 날
원숙자
햇살은 엉덩이를 긁어대고
어화둥둥 바람은 흔들어 대는데
참을 수 없어 크게 기지개를 켰다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들린다
아이들의 환호성
엄마
하늘 좀 봐요. 예쁘다
내려다보니 아이 엄마가 찰칵 찰칵 사진을 찍고 있다
오늘 만큼은
하늘을 가르며 우르릉 거리는 포 연습 소리
멈춰도 좋겠다
할아버지 이름은 김서방
원숙자
나 할아버지 이름 안다
나도 알어~~
쌍둥이가 언성을 높여 뽐내고 있다
민서가 얼른 김~~
예서가 지지 않으려고
김서방이야~ 할아버지 이름은 김서방, 맞지잉
민서는 아냐, 기~ 임, 자아앙~~
문이 드르륵 열리고 할아버지가
-다녀왔습니다 -
귀가 어두운 왕할머니는 알아듣지 못했다
통역사인 내가 큰소리로
엄마~ 김서방이 인사허잖여
놓치지 않고 예서는 의기양양하게
거봐, 김서방 맞잖어~~
향기로 전하는 편지
원숙자
북에 계신 형제 여러분 안녕하세요.
다른 해 보다 바람도 없고 비소식도 없어 풍성하게 목련이 피었습니다.
흐드러진 목련향이 아까워 장항아리를 열어놓고 향이 베이기를 기다립니다.
해 마다 송화 가루가 날아와 장항아리에 내려앉기를 기다렸는데
아직은 이른 탓에 목련꽃 향기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해맑은 햇살이 달콤합니다.
이런 날 쉬지 말고 차라도 만들어 사이좋게 나눠 마시라는 뜻이겠지요.
지붕위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아들이 올라갔습니다.
멀리 북녘 오성산이 보이네요.
며느리도 따라 올라가 목련 송이를 따고 있습니다.
비염에 좋다고 했더니 아이들에게 먹이고 싶다고 합니다.
표 나지 않게 군데군데 골라 따서 바구니에 담아놓으니
연분홍빛이 이쁘고 소담스럽습니다.
잘 손질해서 미니 건조기에 말려, 볕 좋은 마당에서 이틀을 말렸습니다.
따뜻한 물에 한 송이 띄웠더니 향이 아주 좋습니다.
우리 집보다 추운 북녘에는 아직도 이 꽃이 피지 않았겠지요.
봄바람도 빛나는 철조망을 넘어 갈 때는 머뭇거리며 느리게 넘는다는 걸
전 알고 있거든요.
먼저 담근 목련꽃 향기 보내드립니다.
부디 이 향기 받으시거든 빛나는 총, 칼, 포, 탄, 철조망까지 모두
향기에 실어 날려 보내시고
해맑은 얼굴 마주보며 목련꽃차나 한잔 마시면 어떠실런지요.
평안한 마음으로 虛心坦懷 (허심탄회) 한 답장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2016. 4. 11 통일을 기원하는 이 올림
섭섭한 마음에
원숙자
빈말이라도 이렇게 아플 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한번만 물어봐 주지, 참으로 섭섭해서 마음속으로 몹쓸 인간 내다 버렸다.
어려서부터 아무리 아파도 밥을 걸러 본적이 없는 나다. 내 입은 특별해서 조미료만 많이 넣지 않으면 뭘 먹어도 맛이 있다. 울 엄마는 그것도 복이라고 하셨다. 모시고 있던 친정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드리고, 몸살이 심하게 나면서 그 복마저 없어졌다. 입맛도 밥맛도 잃어버렸다. 목은 부어서 물도 넘기기 힘들고, 밥이나 반찬은 쓰고 질겨서 넘어가질 않는다. 오늘 아침도 밥상을 두 번이나 차렸어도 한 수저 뜨다가 굶고 말았다.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아픈데 누구 하나 병원에 가자거나 약하나 사다 주는 사람이 없다.
움직이기도 힘든데, 너무 아파서 참을 수 없으니 혼자서 서럽게 운전하고 병원에 갔다. 접수하고 기다리는데 눕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참고 검사 받고, 치료 받고, 주사 맞고 와서 저녁을 차렸다. 그리곤 밤새 혼자 아파서 온 찜질도 하다가 냉찜질도 하다가 참을 수가 없어 아침 일찍 진통제를 사러 나갔다. 누구 한사람 ‘내가 사다 줄게’ 하지 않아 섭섭하다. 하긴~ 내가 그렇게 심하게 아픈 줄 알면 아침을 두 번이나 차리게 하진 않았겠지만...
오늘은 나가기 싫다면서 남편은 방에 누워서 계속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아침에 사온 진통제를 두 알이나 먹었어도 효과가 없다. 난 빨래를 널고 개키고 세탁기를 돌리고, 누웠다 앉았다 몸살을 앓고 있다. 아파도 일은 해야 한다. 갑자기 일어난 남편은 씻고 나오더니
“나갔다 올게”
열두시가 다 되어가서 ‘점심은 무얼 차려야 하나’ 걱정하고 있는데 홀연히 나가버린다.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척 섭섭하다. 조금 후 부재중 전화를 보고 걸었더니 혼자 국수를 먹고 있단다. 아마도 어지러움도, 아픈 것도 참고 집안일을 하고 있는 걸 보니 건강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마음이 싸~ 하다. 더 아픈 것 같기도 하다.
“여보세요 남편~ 설령 내가 아프지 않아도 엄마를 고려장 시켜놓고 얼마나 마음이 착잡하고 아플지 조금만 어루만져 주면 안 되나요?
“ 나, 마음도 몸도 많이 아프단 말야”
오늘도 난, 섭섭한 마음에 남편을 아웃 시켜 버렸다. 쾅쾅 도장을 열두 번 찍어서......
2016. 9. 13
백봉례 여사의 신세타령
원숙자
내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죄라면 배우지 못한 것이지...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저 똑똑한 사위가 상속세 두 번 낼 필요가 있겠냐며, 아들에게 모든 땅을 상속해 줬다. 남편의 오랜 투병 생활로 통장에 잔고를 모두 털리고 난 나는 마음이 무척 허전했다. 그저 자주 만나는 딸한테 하소연 아닌 하소연으로 마음을 달랬다. 빈털터리가 되어버린 나는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제법 통장에 수 천 만원은 아니어도 몇 천 만원이 모였다. 이제 겨우 마음이 채워지는 거 같았지만 자식들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넘어져서 머리를 다쳤다. 머리 수술을 하고 나오자마자 통장을 챙겨 자식에게 줬다. 똑똑한 딸은 나 죽으면 상속세로 육십 프로는 떼어간다면서, 아들 며느리 앞으로 돌려놨다. 나는 그렇게 빈털터리가 되었다. 이집 저집 떠돌다 요양원에 보내졌다. 난 그저 고향이 그리워서 매일 고향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을 뿐인데 자식들은 힘이 들었나 보다. 혼자 살아도 좋으니 고향에 가는 것이 소원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난 걸어서라도 가고 싶었다. 그래서 매일 보따리를 쌌다. 아니 몰래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기도 했다. 나의 하나님 아들과 교주인 며느리는 그런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 많이 힘들었나 보다. 모실 수가 없다면서 두 손 발을 들었던 거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허리가 부러졌다고 넷째 딸네 집에 오게 됐다. 이번이 세 번째다. 요양원에서 받아주지 않았고, 병원에서는 간병인이 낯설어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딸네 집이 요양원 보다는 편하다. 그럼에도 사위가
“엄마, 이제 나랑 우리 집에서 함께 살아요”
그 마음을 받아 주지 못하고
“아~ 내가 아들이 없어 며느리가 없어”
큰소리는 쳤지만 난 아들 집으로 갈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그저 딸네 집이라는 이유로 이곳은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다. 괜스레 공밥 먹는 것이 미안해서 불편한 몸으로 나가서 풀도 뽑고, 빨래도 걷어다 개켜 놓으면, 덜 말랐다면서 딸은 다시 내다 넌다. 밥은 모두 덜어 버리고 꼭 어른 수저로 한 수저 정도만 먹는다. 처음 요양원에서 밥 많이 먹는다고 혼났던 기억 때문이다.
나는 일찍부터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자식 하나는 옆에 두고 싶었다. 그래서 정읍에 사는 딸보고 옆으로 이사 오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끝 내 오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때 이사만 왔어도 이렇게 떠돌이가 되어 고향을 그리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이것이 내 운명이면 받아 들여야지. 그저 목울음을 삼키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접고 평상에 앉아 은행나무 열매만 세고 있다. 마침 닭 모이를 먹기 위해 날아드는 참새가, 친구가 되어 제잘 거려 주니 조금은 위로가 되는 거 같다. 빨리 유치원에 간 증손녀들이 오면 좋겠다. 참새처럼 제잘 거리는 것을 보고 있으면 고향 생각이 잊어진다. 나의 믿기지 않는 신세도 함께.......
못된 딸
원숙자
어렸을 때 나는 앞집 김씨 아저씨와 아랫동네 윤씨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사람인줄 알았다. 그 아저씨들은 시도 때도 없이 할머니께 소리를 지른다. 아주 큰 소리로... 그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동네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다. 하늘에 신이 있다면 그 아저씨들을 때려주라고 기도 한 적도 있다. 아침에 자다가 김씨 아저씨 목소리에 놀라서 깨기도 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 하면 난, 매일 아들에게 혼만 나는 그 두 할머니가 생각났다. 혼나면서도 두 할머니는 한 번도 아들에게 화내는 일 없이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더 이상한 건 아버지를 따라서 자식들도 할머니께 소리를 지르는데 혼내주는 일이 없었다.
요즘엔 내가 그 못 된 아저씨가 되었다. 보통 목소리로 말하다가 더 큰 목소리로, 더더더 큰 목소리로 말을 하는 데, 아이들과 남편은 왜 할머니를 구박하느냐고 난리법석이다. 난 그저 사실을 전달하는 것뿐인데...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말을 흘려버린다. 그럼 난 다시 더더더더 크게 소리를 지른다. 엄마는 그제서야 ‘ 몰라’ 하신다. 못 들었다는 뜻이다. 소리를 지르다 보니 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다. 그냥 두자니 말 짓이고 애길 하자니 싸우는 것 같다. 주변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자꾸만 애길 하는데, 가족들은 내 소리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난 오늘도 어렸을 적 그 아저씨들처럼 엄마를 구박하는 못 된 딸이 되었다. 참 마음이 아프다. 손 자녀들이 보고 있는데 그 아이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보일까. 왕 할머니를 구박하는 나쁜 할머니로 보이겠지. 참고 참다가 또 한 마디 하는데 딸이 말한다.
“ 엄마, 왜 할머니께 소리 질러”
땅이 뭐길래
원숙자
조그만 깊이 생각했더라면 지금처럼 후회하진 않았을 텐데....
진안 마이산 관광지 옆인 우리 땅은 뭘 해도 좋은 땅이다. 그때는 엄마 마음을 몰랐다. 나는 그저 농촌일이 많은 것이 싫었다. 왠지 엄마 옆으로 이사를 가면 머슴이 될 것 같은 생각이 강했다. 일흔이 훨씬 넘은 작은 아버지랑 엄마는 사리갯제 옆에 있는 땅에 집을 짓고 이사를 오라고 계속 설득하시면서
“내가 늙어서 기운 없으면 내 옆에 누가 있겄냐. 너라도 옆에 있으면 좋잖여”
“ 꼭지 너밖에 없어. 오빠도 순이도 아무도 너처럼 일 할 수 있는 자식이 없어. 너가 와서 큰집 거, 우리 거 다 농사지으면 지금 직장 다니는 거 보다 훨씬 나을 거야. 내가 다 알켜 주고 도와 준당게.”
작은아버지도 열심히 나를 꼬셨다. 그때마다 나는
“싫어요, 난 농사일이 힘들어서 싫단 말야.”
정말 농사일이 자신이 없었다. 엄마의 노후 대책인지도 모르고...
그러다 어느 날 이사 갈 마음을 먹고 남동생한테 얘기를 했다. 작은집 도라지 밭에 집을 짓고 이사를 가겠다고 했더니, 바로 다음날 올케한테 전화가 왔다. 그 땅은 큰 딸 유치원을 지어주려고 한단다. 도로 변이라 절대로 안 된다면서... 나는 농사짓기 싫은 참에 잘 됐다고 생각해서 두 번 다시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철원으로 이사를 했다.
엄마는 포기 하지 않고 다른 쪽 땅을 내어 주면서 그 곳에 식당을 하든 찻집을 하든 이사를 오라고 성화셨다. 그곳엔 큰 저수지가 있어서 전망이 아주 좋았다. 엄마의 오랜 설득 끝에 남편과 나는 호텔 조리를 공부한 아들과 장사를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남동생을 만나 땅 천 평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얘기를 끝냈다. 적당히 땅값도 쳐줄 생각이었다. 마침 남편이 교통사고로 놀고 있어서 우리에게는 아주 잘 된 일이었다.
또 올케가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울기 까지 하면서 그곳에 둘째딸 유치원을 지어 줄 거라고 한다. 엄마하고 상관없이 엄마가 가져야 할 땅을 손에 쥐고 엄마 입장은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유아 교육과를 진학한 조카는 한명도 없는데 유치원을 두 채나 준비하고 있는 올케가 야속하다. 남편은 괜히 형제지간에 의만 상한다면서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때는 이미 엄마는 여든 중반이어서 누군가 옆에 있어줘야 할 만큼 연로 하셨다. 그래서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올케가 아주 잘 모셔 줄줄 알았다. 그런데 올케는 엄마를 모신지 얼마 되지 않아 두 손을 들고 한 밤에 둘째 언니네로 모셔다 드렸다.
그때 엄마가 간절히 원할 때, 조금만 깊이 생각해서 우리가 엄마 집 옆으로 이사만 갔어도 엄마는 구십 평생 사셨던 고향집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고 계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 집에 오신지 벌써 석 달이 지났다. 난 정주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 쓰면서 마음을 조렸다. 내 마음은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싶다. 잘은 못해드려도 편하게는 해드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남편에게도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겠다고 매일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나 혼자 사는 집이 아니다. 남편과 며느리, 손녀들, 모두가 치매 걸린 엄마를 불편해 한다. 파리채로 아이들을 때리기 때문이다. 나도 가족들 눈치가 보인다. 갈 곳 없는 엄마는 또 요양원으로 모셔야 한다. 목욕을 시키는데 난데없이
“ 나 요양원에 안가”
난 목이 메여 가슴이 아려온다.
난 자리
원숙자
매 맞은 적이 없는데 엉덩이뼈가 시리고 쑤신다. 편도랑 후두가 부어서 침도 넘어가지 않고 이도 모두 솟아서 치통이 심하다. 처음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봉숭아꽃에 백반을 넣고 꼭꼭 찌어서 회푸데 종이 오려 봉숭아물을 들여 주셨는데... 오늘 그 손가락 발가락이 심하게 콕콕 쑤셔서 수저도 들 수가 없다.
엄마가 오실 땐 몰랐다. 언제나 그 곳에 계신 것처럼, 자연스럽게 한 식구가 되었다. 아무 부담 없이 반찬에 조금 더 신경써주고, 수저하나 더 놓았을 뿐이다. 크게 힘들게 하는 것도 없이 나만 조금 부지런하면 됐다. 노인의 향기가 누군가에게 해가 될까봐 아침마다 목욕을 시켰다. 유난히 더운 여름이라 운동도 시킬 수가 없어 더욱 할 일이 없었다.
엄마는 혼자서 집을 몇 바퀴 돌다 도로변까지 걸어갔다 오신다. 평상에 누워 참새 숫자도 세고, 은행나무 열매도 세고, 호박도 따고, 오이도 따면서 하루를 즐기신다. 행여 외로우실까봐 사위는 새참에 소주랑 족발, 치킨, 머릿고기 등을 사와서 사이좋게 나눠 먹는다. 그럼 엄마는 기분 좋은 농담을 한마디씩 하시곤 하셨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엔 ‘이젠 집에 가야 허는디....’ 크게 한숨을 쉬신다. 딸네 집이라 눈치가 보이시나 보다.
단 한번만이라도 ‘나 여기서 살고 싶어’ 라고 말해 주시면 좋을 텐데... 아무리 편하게 해드리려고 노력해도 딸네 집은 편치가 않나보다. 어느 날 부턴가 엄마를 세뇌시키려 작정을 하고 반복적으로 교육을 시켰다.
“엄마, 나 여기서 살고 싶어, 해봐”
“......”
열 번 스무 번 반복을 시켜도 단 한 번도 따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프게 떠나는 날 모시고 나가는 데 서럽게 꺽꺽 거리며 목울음을 삼키시는 것이 마음이 아파 다시 모시고 들어왔다. 하룻밤을 자고, 추석 새고 오시라며 모든 가족들은 인사를 했다. 엄마는 기분 좋게 아이들에게 용돈도 주셨다. 손자며느리도 용돈을 주시면서 놀러 오라고 초대까지 하셨다.
서울 둘째 딸네로 가면서 차안에서
“ 엄마 , 너랑 살고 싶어, 이렇게 한번만 해봐, 응?”
“ 너만 딸이냐? 그만큼 했으면 됐다.”
끝까지 너랑 살고 싶다고 못하시는 엄마가 안쓰럽고 섭섭하다.
아이들이 뛰고 있는데도 집이 텅텅 비어 있다. 밥상을 봐도 그 자리가 허전하다. 일부러 정 들이지 않으려고 등 돌리고 잤는데... 등이 시려서 잠을 설쳤다. 등 뒤에서 찬바람이 분다. 결국 난 크게 병이 나고 말았다. 처음으로 남편 새벽밥을 굶겼다. 약도 진통제도 효과가 없다. 의정부 성모 병원까지 다녀왔다. 몸살이란다.
보다 못한 가족들은 다시 모셔오라고 한다. 그래도 난 참아야 한다. 내 인생의 절반은 내 가족들 거다. 애써 참고 있어도 자꾸만 눈물이 난다. 지금 엄마의 모습이 앞으로 다가오는 나의 미래다. 나의 자화상을 엄마를 통해 보면서 엄마의 난 자리가 엄청 크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쌍둥이는 오늘 아침 유치원에 가면서
“ 함머니, 오늘은 왕함머니 와요?”
어린것들도 왕할머니의 난 자리를 느끼나 보다. 엄마의 누워있던 자리가 크게 휑~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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