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수도 꼭지 [성숙과 노화1]
성숙과 노화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흔히 사람들은 이 두 가지에 대해 혼동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노화가 곧 성숙이라고 생각한다.
노화는 육체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모든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
나이가 들고 늙어간다고 해서 모두 성숙해진다는 뜻은 아니다.
성숙은 내면적인 성장을 의미한다.
우리는 육체에 일어나는 현상인 노화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다.
생노병사는 인간의 몫이 아니다.
우리가 깨어 있는 삶을 살 때 성숙의 꽃이 피어난다. 성숙은 인간의 몫이다.
우리는 삶에 성숙이라는 양념을 첨가할 수 있다. 나이가 들어가되 항상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간다면 노화 속에서 성숙의 꽃이 활짝 피어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다. 내면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분명히 변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전혀 느끼지 못한다. 지나가는 행인처럼 내면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당연히 아무런 감흥도 없고 중요성도 느낄 수 없다. 물론 그 변화가 기억의 창고에 남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삶 속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조금만 깨어 있다면 지성이 될 수도 있는 변화들이 말이다.
우리의 부재로 인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우리는 현존하고 있으나 부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성장 대신 노화를 선택한 셈이다. 우리가 조금만 깨어 있을 수 있다면 똑같은 경험이 성숙의 열쇠가 될 수 있다.
삶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수면 상태로 사는 삶과 깨어 있는 삶이다.
수면 상태의 삶은 노화로 이어지다 죽음으로 끝난다. 매 순간 잠에 빠져 있다.
매 순간 늙어간다. 매 순간 죽어간다.
전 생애가 길고 지루한 죽음의 과정일 뿐이다.
깨어 있는 삶은 어떠한가?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하는 경험은 모두 지성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위를 하는 자가 아니라 행위를 지켜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단지 표피만 보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깊이를 꿰뚫어본다. 이해가 깊어지고 매 순간 깨어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내면 깊은 곳에서 변형이 일어나면 각성의 눈이 더 커진다. 실수를 하게 될 때조차 우리는 경험을 얻게 된다. 더 이상 실수를 하지 않는다.
성숙한 사람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하지만 늙어가는 사람은 똑같은 실수를 하고 또 할 수밖에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실수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그대가 지금 어떤 문제에 대해 화가 나 있다고 하자. 그대는 같은 문제에 대해 어제도 화가 났다. 그저께도 화가 났다. 당연히 내일도 같은 문제에 대해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화를 내고 후회한다. 다시는 화를 내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하고 또 화를 낸다.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결심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화가 날 때,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화를 지켜보라. 화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쓸데없는 짓인지 알 수 있다. 당연히 어리석고 쓸모없는 짓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더 이상 화를 낼 수가 없다.
분노는 죄가 아니다. 어리석은 짓일 뿐이다.
우리는 분노를 통해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악을 끼치게 된다. 아무런 이득도 없이 서로에게 상처만 입히고 만다.
성숙한 사람은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더라도 결코 화를 내지 않는다. 성숙한 사람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지 않는다.
결심은 그가 아직 성숙하지 못하다는 뜻이다.
성숙한 사람은 미래에 대해 미리 결정 내리지 않는다. 성숙한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뿐이다. 지금 이 순간의 삶이 내일을 결정한다. 성숙한 사람은 오늘을 산다.
나머지는 스스로 일어나게 되어 있다.
분노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분노는 유해 물질과 같다. 사람들은 지옥같은 분노를 겪을 때마다 후회하고 결심을 한다.
혹은 절이나 교회를 찾아 가서 회개한다.
"저는 이제 신神 앞에 맹세를 합니다. 앞으로 절대 화를 내지 않겠습니다."
이런 맹세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분노가 유해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상황은 종료된다. 분노의 문이 닫힌다.
마치 물거품처럼 분노가 사라져 버린다.
똑같은 상황이 내일 또 벌어지겠지만 우리는 결코 그 상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미 앞선 상황을 통해 교훈을 얻은 우리는,이해가 존재하는 한 우리는 사람들이 흔히 바보처럼 시달리는 상황 전체를 보면서 가볍게 웃어넘기거나 심지어 즐길 수도 있다.
이해는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물론 최면에 걸린 것처럼 살아갈 수도 있다.
99%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혹은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살 수도 있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가는 삶, 우리는 매 순간 성숙해진다. 수면 상태로 살아가는 삶, 매 순간 늙어갈 뿐이다.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결코 현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더 바보같이 굴 수도 있다. 로봇처럼 습관에 의존해서 살다 보면 젊었을 때보다 더 바보 같아질 수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국 무의식적으로 죽게 될 것이다.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은 오직 노화를 거듭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물론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에게는 죽음조차 삶의 일부일 뿐이다.
죽음은 그가 산 삶의 절정이 된다.
그는 죽음을 통해서 가장 큰 배움을 얻게 된다. 그는 두 팔을 벌려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맞이하듯 죽음을 끌어안는다.
성숙한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성숙한 사람 앞에서, 죽음은 갈등과 좌절을 겪은 나머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죽을 수 있으나 성숙한 사람은 죽지 않는다.》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붓다와 예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죽음 없는 삶을 살았다.
죽음이 그들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으나 그들은 냉담하고 무관심하게 죽음을 대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음이 가까운 곳에서 일어날 수 있으나 그들에게 일어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는 죽지 않는다.
우리의 존재는 지복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존재는 신성하다.
우리는 누구나 이러한 지복을 경험할 수 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고 지복만이 남아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경험은 경전이나 책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과 다르다.
지복은 책에서 얻을 수 없다.
우리들 스스로 경험해 보아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경험을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우리는 많은 고통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아픔과 고통이 두려워서 사람들은 수면 상태의 삶을 선택한다.
경험을 포기하고 철학과 원리를 믿는다.
소위 최면 상태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인들을 추종한다.
붓다와 예수가 왜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잠에서 깨어나라고 외쳤는지 알겠는가?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도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외면했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이 붓다와 예수를 외면한 이유를 알고 있는가?
우리는 먼저 인간의 메카니즘에 대해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그들처럼 내 말을 듣되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내 말을 지식화 할 수는 있으되 그 진정한 의도를 성취하지 못한다.
"그래, 이 사람은 깨어 있으라고 말을 하는군. 깨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깨어 있는 사람만이 성숙함을 얻는다고 하니까."
이런 식으로 내가 한 말을 지식화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지식에서 도움을 얻을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보아야 한다.
나는 진정으로 깨어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가?
혹은 깨어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나는 왜 잠에 빠져서 살고 있는가?
깨어 있는 삶은 무한한 지복으로 향한 길이다.
궁극적인 진리로 가는 길이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고통이 두려워서 깨어 있는 삶을 외면한다.
《각성은 고통을 동반한다.》
의식이 깨어 있게 되면, 우리는 고통에 대해서도 깨어 있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진정제를 맞고 잠에 빠져들기를 원한다.
잠에 빠진 삶이란 고통에 대한 자기방어이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고통이 두려워서 잠에 빠진 채 살아간다는 것은 그로 인해 기쁨도 외면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수도에 두 개의 물꼭지가 있다.
한쪽에는 '고통'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쪽에는 '기쁨'이라고 쓰여 있다.
그대는 지금 고통이라고 쓰인 꼭지를 잠그고 기쁨이라고 쓰인 꼭지를 틀고 싶다.
자, 게임의 법칙은 이렇다.
고통의 꼭지를 잠그면 기쁨의 꼭지도 즉각 잠긴다. 두 개의 물꼭지는 사실상 하나의 수도꼭지에 속해 있다. 깨어 있는 의식, 혹은 각성이라는 수도꼭지에 속해 있다. 두 개의 꼭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하나의 현상에서 비롯된다.
선택은 두 개의 물꼭지를 함께 틀거나 두 개를 모두 잠그는 것뿐이다.
마음이란 모순적이다.
마음은 더 많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면서 깨어있는 삶을 외면한다. 행복이란 우리가 깨어 있을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또한 마음은 덜 고통스럽기를 원한다.
우리가 깨어 있지 못할 때 덜 고통스럽다.
당연히 마음은 우리에게 진정제를 맞고 잠에 빠져들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이 딜레마에 빠져 있다.
행복은 좋은데 고통은 싫다고 외치는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우리가 고통을 원하지 않으면 삶에서 기쁨이 즉시 사라져 버린다. 행복이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행복이라는 물꼭지를 틀면 고통의 물도 함께 흘러 넘친다.
《삶은 고통과 기쁨이다.》
우리는 두 가지 모두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한다.
《삶은 행복과 불행이다.》
우리는 양면 모두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한다.
《삶은 낮과 밤이다.》
고통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잠에 빠져 살 수밖에 없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각과 의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노화를 거듭하다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삶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다.
우리가 깨어 있는 삶을 원한다면 고통과 기쁨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
고통과 기쁨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깨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가 깨어 있게 되면 과거에 견딜 수 없었던 고통조차 마주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고통조차 고통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