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어느때보다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담론이 활발하다. '한국'과'한국인'에 대한 질문은 곧 우리가 '한국'과 '한국인'으로서만 살수 없는 세계화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하다.바꿔 말하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 '특화시키는것'이야말로 세계화 시대의 생존전략이라는 뜻도 된다.이런 맥락에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이야말은 유효하다.한국적인 것만 고집할수도,다국적 문화의 조류에 마냥 휩쓸릴 수만도 없을 바에야 '한국'이라는 컨텐츠로 세계를 공략하는 것보다 더 좋은 해결책은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상호관계를 간과할경우 오류에 빠지기 쉽다.'한국'이라는 특수한 가치를 통해 세계가 공감할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끌어내야 한다는 뜻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무조건 한국적인 것을 고집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모든 한국적인 것들이 다 세계적이 될수는 없다.'대지'의 작가 펄 벅은 우리 국악을 가리켜 '여자가 골방에서 혼자 우는 소리같다'고 했지만,한국인 중에도 이만큼 귀가 뚫린 사람은 많지 않다.그런가하면 유네스코가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한글은 글자와 소리가 일대 일로 대응되는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표음문자이다.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은 '의심할 바 없이 이 문자는 인류가 쌓은 가장 위대한 지적성취의 하나'라 했고,퓰리처상을 수상한 바있는 미국 교수 다이아몬드는 '가장 훌륭한 알파벳이자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표기법 체계'라는 글을 과학 잡지 '디스커버'에 게재하기도 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인이 다 함께 한글을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우리가 라틴어나 히브리어를 우리 글처럼 쓸수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백남준이나 백건우처럼 세계가 먼저 인정한 예술인들도 있다.그러나 이를 두고 '한국적'인 컨텐츠로 세계를 움직인 예라고 할 수는 없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 '다다익선'이나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백건우의 곡 해석이 뛰어난 것임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여기에 한국적 정서가 녹아있다고 보기는 힘들다.이들의 성공은 한국적인 것에에서 소재를 걸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봐야 옳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기에 세계적이 될 수 있었던 예로는 최근작 '취화선'을 꼽을수 있다.같은 감독의 작품으로 칸느에 진출했던 '서편제'나 '춘향뎐'과 비교해보면 이작품의 감독상 수상 이유가 더욱 뚜렷해진다.'서편제'의 경우 일부러 제자의 눈을 멀게 하면서까지 소리의 맥을 지키려 했던 스승의 집착은 보편적인 인간 감정에 맞지 않았다는 후문이다.'춘향뎐'역시 그 예술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정조를 목숨보다 우위에 놓는 태도가 서양인들의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고 한다.반면,'취화선'은 오원 장승업의 예술혼을 한국적 미학에 담아내면서도 삶과 죽음.사랑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주제를 다뤘다는 평가를 받았다.특수한 시대,특수한 문화,특수한 얘기를 다루면서도 그것이 만인의 감성에 호소할수 있을때 세계적인것으로 승화 될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대한민국의 국민화가는 둘'이라는 말이 있다.이중섭과 박수근을 이르는 말이다.오원 장승업이 술에 취한 '신선'이었다면 이중섭은 '사랑'에,박수근은 '사람'에 취해 살았던 '인간'이었다.이들은 일제시대와 6.25, 이별과 가난을 온 몸으로 겪어내면서도 붓을 꺾지 않았다는 점에서 닮은 꼴이다.표현기법은 달랐지만 작품 속에 한국을 담았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닌다.가장 한국적인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화가로 꼽히는 이중섭은 야수파적인 강렬한 색감으로 소.닭.어린이.가족 등을 주로 그렸다.가난을 절감했기에 오히려 가난을 정겹게 그렸던 화가 박수근은 화강암처럼 두터운 질감과 평면화 된 구도 속에 아기보는 소녀,짐을 진 아낙네,절구질 하는 새댁의 모습을 담았다.
반면 이들이 생을 다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이중섭은 생활고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처절한 외로움 속에서 전국을 떠돌았다.
그가 정신 이상과 영양실조로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죽었을 때,이중섭은 막 불혹의 나이를 맞은 직후였다. 그에 비하면 박수근은 '불행이 클수록 사는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알았던'사람이었다.보통학교밖에 다니지 못했을만큼 가난 했지만 그는 한번도 세상과 불화하지 않았다. 질박한 화면 속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그 무게에 눌리지 않고 의연해 보이는 박수근 그림의 한국인들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모습이었던것이다.
한국 미술계에 이중섭과 박수근이 있다면,음악에는 세계적 거장 윤이상이 있다. 윤이상의 이름은 한국인들에게 긍지이자 상흔이다.이 천재적 작곡가는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2년여의 옥고을 치른후, 죽을때까지 고국땅을 밟지못했다.베를린 예술원 종신회원이었던 그는 생일 날 독일 대통령으로부터 꽃바구니를 받을만큼 대가로서 살았지만,우리 정부로부터는 일생을 배척 당했다. 윤이상이 얼마나 조국을 그리워 했던가는 그가 만든곡들의 제목만 봐도 알수 있다.실내악곡 '낙양(洛陽)','예악(禮樂)',오페라 '유령의 사랑','심청'등이 그것이다.그는 한국 전통 악기의 음색을 서양 악기로 옮기는 작업에도 열중했다.윤이상에게 있어 오보에는 피리를,하프는 가야금을,플롯은 대금을,바이올린은 해금의 다른 이름이었다.
윤이상이 죽은후 그의 고향 통영에서 해마다 '윤이상 음악제'를 개최하는 등 복원 움직임이 일고 있어 반갑다.그러나 조국이 외면한 한국의 위대한 음악혼이 타국에서 쓸쓸히 죽어갔다는 사실을 되돌릴 길은 없다. 그가 유럽에 건너 가 파기 했다는 작품들을 우리가 영원히 들을수 없는것처럼....
문화예술 장르 외에 가장 한국적인 것으로 세계적인 것이된 분야로는 태권도와 발효식품을 들수 있다.이 둘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한국인의 특질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 분모를 갖고있다.태권도의 '자기방어'와 발효식품의 '삭은 맛'은 한국인의 유순함과 인내심을 닮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 고유의 전통 무도이자 스포츠인 태권도는 그 역사가 자그만치 4천년이나 된다.언제 어느 쪽에서 덮칠지 모르는 야생동물의 공격을 즉각적으로 막아내기 위해서는 민첩한 방어동작이 필요했고,이것이 태권도로 발전했다는 설이 있다.태권도의 기본 자세인 막기.차기.지르기의 형태도 거의 동물적으로 공격을 방어 할수 있는 동작 개발의 필요성에서 나왔다는것이다.고구려의 벽화에서도 오늘날의 형태와 유사한 도복,띠를 착용한 주인공들이 왼손을 들어 얼굴막기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여럿 발견할수 있다.
태권도는 조선 태조에 이르러 육체적 노동을 천한것으로 간주한 양반 문화 때문에 수모를 겪게 된다.조선말기에는 일본 가라데와 중국 무술의난입등으로 몇몇 사범들의 비밀 지하 교습을 통해 겨우 명맥만 유지할 수 있었다.그러나 베트남 전에 참전한 용사들이 태권도 기술을 이용,맹위를 떨치게 되면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이른다.지금은 미국,스페인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매니아들이 확산 되는 추세이며,필리핀만 해도 50만의 태권도 인구를 자랑한다.
한편 우리 전통된장에서 음식물로는 최초로 항체생성을 증가하는 물질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끈바있다.마침 전 세계적으로 콩 섭취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발표라 학계뿐만 아니라 지구촌 사람들의 이목을 새삼 집중 시켯다. 그런가 하면 발효되어 우러나온 '삭은맛'은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수 없는 독창적인것이다. 김치,된장 뿐 아니라 간장과 고추장 등 한국 식문화의 두드러진 특징은 발효에 의한 삭은 맛이라 할수 있다. 금방 만들어 재빨리 먹어치우는 패스트푸드와는 달리 묵힐수록 맛깔스러워지는 발효식품의 감칠맛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한국적 정서와 꼭 맞아 떨어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올봄에도 천지엔 라일락이 흐드러진다.'미스킴 라일락'이라고 불리는 '왜성 정형나무'는 서양인들이 무척 아끼는 꽃나무이지만,원산지가 우리나라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않다.
1948년 미국인 매더가 북한산 백운대 부근에서 반출해 간뒤 역수입되어 지금은 어디서나 볼수 있는 정원수가 됐다. 김치가 기무치로 변해 역수입된 꼴이다.
한국적인 컨텐츠로 세계에 진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미스킴 라일락이나 기무치처럼 우리 것을 뺏기는 일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곤란하다.이중섭과 박수근의 그림,윤이상의 음악과 태권도와 발효식품은 시대와 유행을 초월해 '우리가 가장 나중까지 지닐것'들이다.지금 만나지 않으면 영영 만나지도 못할 수도 있는 소중한것들을 마구 흘려보내고 있지않은 지 주변을 살펴야 할때다.
첫댓글 역사가 ...다시 뒤로 가는 날이 옵니다요 !!!
얼쑤 ~~~~지화자 ...ㅎㅎ 잘 보았습니다 ..
나의 정체성....천성이 게을러 아마 죽어서도 모를겁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