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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이사야서 개론
주제 :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이사야는 메시아 예언으로 유명한 선지자입니다. 구약성경에 이사야서가 없었다면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시라는
증거를 세울 수가 없었을 정도로 그토록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예언서입니다.
이사야서의 핵심(核心) 장을 말할 때에 53장을 택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53장은 이사야서뿐만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에 있어서도 메시아 예언의 핵심적인 장입니다. 신앙생활에 생기가 없고 심령의 갈증을 느낄 때에 53장을 낭독해보십시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4-6). 이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갈보리입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는 또 하나의 핵심(核心) 장이 있습니다. 그것은 6장입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다”(6:1) 하고 말씀합니다. 왕이 죽던 해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계시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永存)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6-27).
즉 보이는 왕, 지상의 왕, 유한한 왕은 갈리어도, 보좌에 앉으신 영존(永存)하시고, 여상(如常)하시며, 무궁(無窮)하신 왕은 갈리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요, 지상의 나라들이 하늘 보좌에 의하여 통치되고 있음을 계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보좌(寶座)에 앉으신 하나님”은 성경 전체로 보아도 중심적인 주제입니다. 53장에 나오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복음(福音)의 핵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이 복음의 주체(主體)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에 의하여 계획되고 성취해 나가시는 복음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 아들의 복음”(롬 1:1, 9)이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의 중심에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어린양”이 와야 하고, 그의 백성 된 자들은 이를 기억하고
바라보아야만 한다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한 요점입니다.
이사야서의 두 주제, 즉 “보좌와, 어린양”이 성경 마지막 책인 계시록에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계 7:10) 하고 함께 만나게 된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계시록에는 “보좌”가 44회, “어린양”이 29회나 등장합니다. 이처럼 “보좌에 앉으신 이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은 이사야서뿐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있어서도 중심적인 주제입니다.
이사야가 웃시야 왕이 죽던 어려운 시기에 높이 들린 보좌를 본 것처럼, 요한도 밧모라 하는 유배지에서 높이 들린 보좌와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을 뵈었던 것입니다.
① 이런 맥락에서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 1-39장까지는 주로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에 대한 경고, 즉 “진노”를 말씀하는 내용이고,
㉡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고 시작이 되는 40-66장에서는 초점이 위로와 회복, 즉 “은혜”에 맞춰져 있습니다.
전반부의 죄에 대한 진노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6:1)의 공의(公義)와 결부되어 있다면, 후반부의 은혜는 보좌에 앉으신 이의 사랑의 발로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갈보리 십자가에도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② 선지서들을 구속사(救贖史)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노라면 공통적인 구조(構造)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 먼저 “문제”를 제기(提起)한 후에,
㉡ “해답”(解答)을 제시(提示)하는 구조(構造)라는 점입니다.
문제(問題)는 항상 인간이 일으키고, 이에 대한 해답(解答)은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통해서 행해주신다는 것이 선지서의 공통적인 구조입니다. 성경은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③ 이사야 선지자는,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1:4)
하고,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심판 당하게 된 슬픔과 절망으로 시작됩니다.
이 “좌와, 허물”, 이것이 문제(問題)입니다. 이 문제를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가 있으며, 또한 해결했단 말인가? 해결은커녕 눈 덩이같이 점점 커져만 가는 것을 선지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이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
의 죄악(罪惡)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53:6) 합니다.
이는 자기 아들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삼으셔서 대속하여주실 것에 대한 명백한 예언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서의 큰 구조(構造)입니다. 이런 구조는 다른 선지서도 동일합니다.
이를 볼 수 있어야만 회중들에게 문제만이 아니라, 해답도 제시해줄 수가 있고, 천국 문을 열어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선지서에는 윤리적(倫理的)인 면과 신학적(神學的)인 면이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먼저 윤리적인 면인데,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점에서 확고해야 할 점은
윤리, 즉 인간의 책임은 중요합니다만, 그러나 “윤리”로는 해답에 이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는 자력구원의 불가능성입니
다.
㉢ 이점이 구약의 성도들, 그리고 신약의 성도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하는 신학적(神學的)인
문제로 결부가 되는 것입니다. “메시아언약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가능해진다는 것이 해답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은 메시아언약을 우상으로 바꿔치기 했다는 배신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심판을 당하고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④ 1장을 예로 들어 상론(詳論)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하는 2-8절까지에서 “죄악”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후에,
㉮ 9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 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
으리로다” 하고, “남겨두심”이라는 해답이 주어집니다.
㉡ 다시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 지어다” 하는 10-17절까지는 또 “죄악”이라는 문제를 제기한 후
에,
㉯ 18절에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朱紅)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하고 해답이 주어집니다.
㉢ 또다시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하는 21-23절은 “죄악”이라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 이에 대해 하나님은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義)의 성읍이라, 신실(信實)한 고을이
라 칭함이 되리라”(26) 하고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⑤ 선지서를 상고해 보십시오. 이처럼 “문제와 해답, 절망과 소망, 심판과 회복” 등이 수도 없이 반복(反復)이
됩니다. 이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면 선지자가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고 맙니다.
㉡ 그래서 학자들은 이사야서를 대하면서, 내용의 배열(配列)이 연대기(年代記)적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주제
(主題)별로 정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 크게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혼란
스럽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선지자들이 횡설수설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런 말은 선지자 당시에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28:10) 하고 이사야 선지자를 조롱한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은 인간의 소행으로 인한 “절망”과, 하나님이 행해주실 “소망”을 수고로움을 아랑곳하지 않고
10번, 100번, 수도 없이 반복해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러한 선지자의 심정, 곧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어야만,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고전 2:16) 한 주의 마음을 가지고 설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서를 설교할 때에 인간의 소행인,
“심판, 멸망, 절망”을 말씀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해주실, “복음, 구원, 소망”을 전해주어야
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천국 문을 닫고 여는 사활이 걸려있기 때문입니다. 해답(解答)이 어디에 있는
가 하는 점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⑥ 둘째 부분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다”(40:1, 2) 하고 시작이 되는데, 무슨 복역의 때가
끝이 났다는 말씀인가? 1차적으로는 70년의 포로 기간이 끝났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40:3) 하고 세례 요한
에서 성취된 예언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 그러므로 이 복역의 때가 끝났다는 예언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4-5) 하신 “때가 찬 경륜”(엡 1:9)과 결부가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의 후손→아브라함의 자손→다윗의 자손→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어떻게 이루어 오셨는가를 상고하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 하신 그 언약, 즉 구속사역을 어떻게
이루어 오셨는가를 상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언제나 “때가 찬 경륜”(엡 1:9) 가운데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길 예비케 하시고 메시아를 보내시려 한다는 것이
“복역의 때가 찼다”는 궁극적인 의미인 것입니다.
⑦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41:8)
하고, “아브라함”을 상기시키십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생산한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혈혈
단신으로 있을 때에 내가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케 하였느니라”(51:2) 하고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언약”
을 상기시키십니다.
㉠ 또한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나라를
굳게 세우고”(9:6-7) 하고 말씀하면서,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
라”(55:1-3) 하고 다윗에게 세워주신 언약을 상기시키십니다.
㉡ 이처럼 이사야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아 언약에 근거하여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
리라”(9:7) 하는 복음을 증거하는 예언서입니다.
설교자라면 누구나 선지서에 메시아 예언이 있음을 인정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메시아에 대한
증거가 선지서에 있어서 “중심(中心)이냐, 지엽(枝葉)이냐”에 분명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하면 선지서들의 핵심적
인 주제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 확고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마치 쌀밥에 검은콩이 섞여 있듯이 선지서에 메시아 증거도 섞여있는 양 여겨서는 아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주객이 전도되고, 복음이 실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 물론 선지서에는 다양한 내용들이 있습니다만 중심주제는 인간이 범한, “죄”라는 문제(問題)와, “메시아 예언”
이라는 해답(解答)으로 요약이 되고 결론은,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하심으로 구원이 가능
하여진다는 것이 핵심인 것입니다.
이를 망각하고 선지서에서 교훈이나 축복은 보면서도, 해답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고 증거하지 않는
다면,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56:10) 하는 책망을 면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⑧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상고하는 내내 놓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있는데,
㉠ 첫째는, 주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으신, “메시아”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선지자는 증거합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
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9:6).
㉡ 그렇다면 둘째는, 이런 분이 어찌하여 “한 아기”로 오신단 말인가? 즉 그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행해주셨는
가 하는 물음입니다. 선지자는 증거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53:5).
다른 것을 다 전한다 해도 이 두 가지 요점을 빠뜨린다면 그것은 이사야서나, 복음서의 겉만 핥은 것이 됩니다.
반면 다른 것은 모른다 해도 이 두 가지 요점만 듣고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여기에 사활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⑨ 성도들이 은혜받기를 원하십니까? “은혜”가 무엇인가? 무가치한 자에게 베푸시는 호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베푸신 여호와의 행사를 먼저, 더 많이 자주자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
라 그 이름을 부르며 그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 이름이 높다 하라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온 세계에 알게 할지어다”(12:3-5),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25:6, 8),
㉢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
도다”(53:6),
㉣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
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55:1, 3) 하는 말씀 등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러한 영광스러
운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⑩ 그러므로 선지서의 기록목적은 당대를 위한 것도 아니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해주심을 증거 하는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계획, 즉 하나님의 나라건설은 바벨론 포로귀환으로 회복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인 성취는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의 후예들이 돌아올 수 있어야만 합니다.
㉠ 그러므로 선지서의 예언에는 복합성(複合性)이 있습니다. 즉 두 장면(場面)이 겹쳐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첫째는, 선지자 당대로부터 시작하여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되는 장면이고,
둘째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하여 재림 때의 최후심판으로 완성될 장면이 겹쳐져 있는 것입니다.
㉡ 이사야서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7:14),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9:6)
한 탄생으로 시작하여,
㉢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53:8),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53:10) 한 대속적인 죽음을 당하실 것과,
㉣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65:17, 25, 66:22) 한
재림으로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65:17)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