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베드로후서 개론
주제 :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3:18)
사도 베드로는 두 편의 서신서를 기록했습니다. 전서의 기록목적이 외부(外部)로부터 닥쳐오는 불같은 박해를 대비케 하기 위한 것인 반면, 후서의 기록목적은,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2:1) 한, 내부(內部)로부터 일어나게 될 거짓 선생을 경계하기 위해서 기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두 위협에 직면해 있으며,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보다는 내부에 침투한 이단사상이 치명적인 해독을 끼쳤던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아픈 상처를 안고 있는 사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과 거짓을 절실하게 경험한 장본인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명하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금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1:14), 즉 순교가 목전에 이르렀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15)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후서는 사도의 유언(遺言)과 같은 말씀입니다.
거짓 교사에 대한 경계는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행한 고별설교에도 나타납니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는 말을 하면서,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 아노니”(행 20:29-30, 38) 하고 경계했습니다. 그렇다면 현대교회는 더욱 이단사상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성경은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그러면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문제(問題)가 무엇인가?
①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단을 가만히 끌어 들여”(2:1) 한 이단이 침투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단사상은 두 방면으로 교회에 해독을 끼치는데 그것은 복음을 변질시키는 교리(敎理)적인 왜곡과, 윤리적(倫理的)인 타락입니다. 진리에서 잘못이 되면 필연적으로 윤리도 뒤틀리게 되는 것입니다.
㉠ 베드로후서에 나타난 교리적인 오류는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2:1)하는 구속교리에 대한 부정과,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3:4) 하는 재림을 부인하는 것 등입니다.
㉡ 그리고 윤리적인 타락은 한마디로, “호색(2:2)과 음란”(2:18)인데,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2:18) 하고 말씀합니다. “겨우 피한 자를, 음란으로써 유혹한다”는 말은 “음란”이 사탄의 최후무기라는 그런 느낌을 줍니다.
② 이에 대한 대비책, 즉 해답(解答)이 무엇인가? 베드로후서의 요절은 3:18절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합니다. 이단의 유혹에 미혹되지 않는 길은 비법(秘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도는 이단문제로 직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1장에서 우선적으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1:3),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1:4)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 또한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1:2),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1:3) 하고, “앎”을 강조합니다. 신앙이 성숙해지는 데는 어떤 지름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주신 것을, 알고, 믿을” 때에 내 것이 되는 것이요, 믿음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사도의 첫 말씀이 무엇인가를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1:1) 하고 말씀합니다.
㉠ 그리스도인이란, 첫째로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자들이요,
㉡ 둘째는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라 합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강조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한 “칭의”를 믿음으로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단에 대한 대비책, 즉 해답은 복음으로 무장을 시키는 일 외에 다른 비법은 없습니다.
④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주셨는가? 사도는 이점을 “보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보배”라는 말이 전 후서에 6번(벧전 1:19, 2:4, 6, 7, 벧후 1:1, 4)이나 등장합니다.
㉠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벧후 1:4)에 의하여,
㉡ “보배로운 피”(벧전 1:19)로 구속함을 받아,
㉢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벧후 1:1)을 그 누가 미혹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마디로 하나님은 보배로운 자기 아들을 대속 제물로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후에는 무엇이 따라야만 하는가?
㉣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1:4) 한 하나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 단계를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1:5-7) 하고 8단계로 말씀을 합니다. 최고의 단계가 사랑인데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단에 대처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를 장별로 살펴보면,
<1장>
⑤ 1장에는 “앎”이 강조되어 있는데 6번(2, 3, 8, 12, 14, 20)이나 등장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행사(行事)를 알아야만 이단에 미혹을 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합니다. 영적인 무지(無知)는 이단이 기생하게 되는 온상입니다.
㉠ 그리고 알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12, 13, 15) 하고 생각에 호소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합니다. 기쁨, 감사, 승리 등은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행해주신 보배로운 약속, 우리 죄를 구속하여주신 보배로운 피, 우리에게 주신 보배로운 믿음과 산 소망, 등을 묵상(黙想)할 때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하나님의 행해주신 일을 믿음으로 받을 때에 은혜를 받는 것이요, 그런 후에 이 영광스러움을 망각하지 않도록 자주자주 묵상할 때에 활력이 넘치는 승리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도는,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니”(1:15) 합니다. “필요한 때”가 언제인가? 환난을 당할 때, 이단의 유혹을 만났을 때, 시련을 만나 회의에 빠지게 될 때입니다. 이런 때에 “생각나게 할”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주려는 것입니다.
㉢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1:15-16) 합니다. 이는 변화산상의 경험을 가리키는 말인데, 사도 베드로는 주님이 변화하시는 모습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들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再臨)은 분명하다는 말씀입니다.
⑥ 그런데 사도는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1:19) 하고 말씀합니다. 사도가 경험(經驗)한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기록(記錄)된 말씀 곧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1:19) 합니다. 문제는 이 성경을 주의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 율법은 돌 판에 기록이 되었지만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 10:16)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단의 미혹에 대한 방비책은 새 언약을 성도들의 마음 판에 기록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필요로 할 때에 묵상하고 싶어도 묵상할 말씀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무장해제와 같은 상태로 백전백패를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설교는 하나님께서 언약하시고 이루어주신 하나님의 행사에 대한 앎보다는, 인간이 행해야 하는 교훈과, 축복에 치우쳐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단에 미혹될 확률은 그만큼 높은 것이 됩니다.
<2장>
⑦ 2장은 당시 교회에 침투한 이단의 특성을 말씀하는 내용인데 그래서 “호색(2), 음란(7, 18), 음심”(14)이 자주 등장하고, “미혹, 유혹”이라는 말이 4번(14, 15, 18, 18)이나 나옵니다. “미혹한 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한다고 말씀합니다. “겨우 피한 자”를 음란으로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음란은 사탄의 마지막 무기라 할 수가 있습니다.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2:19) 합니다. 유혹하는 자들은 “우리는 자유하다” 하고 말하나 실상은 멸망의 종들이라는 것입니다.
㉡ 이것이 초대교회에 복음을 곡해한 율법폐기론 자들의 방종입니다. 이에 대해 사도는,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하고 경고합니다. 이단의 유혹에 진다면 멸망으로 끌려가는 포로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3장>
⑧ 사도는 서신을 마치기 전에 또다시 “일깨워, 생각하게,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3:1-2) 하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망각하지 않도록 “생각하고,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3:4) 한 주님의 재림(再臨)입니다.
㉠ 노아 당시는 물로 심판을 하셨으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保存)하여 두신 것이니라”(7) 합니다.
⑨ 그러면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3:8-9) 하고 말씀합니다. 사도는 심판의 필연성을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서 경고합니다.
㉠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셨다는 것(2:4),
㉡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홍수로 심판하셨다는 것(2:5),
㉢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하셨다는 것(2:6)을 말씀합니다.
㉣ 이 예시(豫示)를 통하여 “이제 하늘과 땅은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었다”(3:7) 하고
확증합니다.
⑩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하고 결단을 촉구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3:11-12) 합니다.
㉠ 그리고 전서(前書)를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벧전 5:12) 하고 “은혜”(恩惠)로 마쳤는데, 후서에서도 마지막 권면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3:18) 하고 “은혜(恩惠), 지식”으로 마치고 있습니다.
㉡ “은혜”가 무엇인가? 무가치한 자들에게 베푸는 호의입니다. 성도들이 은혜입기를 원하는가?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주신 행사를 우선적으로 그리고 더 많이 전해주어서 알게 해주어야만 합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기를 원하는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은혜를 먹여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행해주신 은혜를 아는 만큼 충만해지고, 믿는 만큼 견고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베드로후서는 현대교회에 더욱 적실성이 있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