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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남홍숙
│대표 작품│
끝 길 외 4편
남 홍 숙
나는 문경새재보다 더 높으냐고 물었다. 헤식게 웃는 아이는 비교도 안 된다며 내려다보지 말라고 한다. 오로지 운전이나 잘하라는 의미다. 이곳이 삶의 끝 길 같다는 아이의 농 섞인 말에 모골이 송연해진다. 자동차가 구름 위를 달리고 있다고. 우리는 점점 하늘로 가고 있다고.
검푸른 여름 숲이 짐승 같기만 하다. 산길은 구절양장만큼이나 꼬불꼬불하고 달구지 길만큼이나 좁은 외길이며 산의 이마에 걸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아이가 앉아 있는 왼쪽은 절벽강산이다. 나는 오른쪽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다. 목이 마르다. 그러나 갑자기 나온 여행이기 때문에 차 안에는 먹을 것이라곤 없다.
긍정적이고 순한 아이가 자꾸 헤실헤실 웃는다. 평소의 웃음소리와 억양이 다르다. 내가 귀신 웃음소리 같으니 그만 웃으라고 하자 아이도 떨꺽, 좌정을 한다. 갑작스레 정적으로 가라앉아 버린 분위기가 더 겁을 준다. 웃도록 그냥 둘걸, 잠시 후회가 된다.
며칠 전 지인에게서 들은, 이곳을 지나칠 때마다 차가 굴러 떨어져 있었다는 언질을 왜 깜빡했을까. 아이 말대로 이곳이 우리의 끝 길이라면 지금 우리는 저승길로 향하고 있는가. 무섬증의 밀도가 높아진다. 오들오들 소름이 돋아난다. 의식이 깊은 우물 속으로 까무룩 잠겨드는 듯하다. 그 틈새로 집에 남겨 두고 온 가족들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이곳을 무사히 통과하여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단세포적인 의지가 남폿불마냥 되살아난다. 아이 말대로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는다. 풍경을 따라와서 풍경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생(生).
그것에 낭창 매달려 있는 혼. 내 안은 지금 그 하나만이 오롯하다. 너무 천천히 가면 차가 기우뚱하다가 금방 벼랑 끝으로 굴러 떨어질 것 같아, 무서움을 필사적으로 참고 속도를 조금씩 낸다. 자동차는 오직 앞으로 달려야만 한다. 절벽 위의 길은 여전히 꼬불꼬불 좁다.
어릴 적 키 크느라 꾸던 꿈, 천 길 우물 속이나 절벽 아래로 툭 떨어지던 꿈이 느껴진다. 어느 날은 그런 꿈이 두려워서 일부러 잠들지 않고 꼬박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키 크는 게 정한 이치라고, 얼른 자라고, 빙그레 웃는 모습으로 재촉하셨다.
아내를 늘 병상에 눕혀 놓고 어린 자식들을 바라보던 아버지의 그 당시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때 아버지는 천 길 벼랑 끝에 서 계셨던 거다.
되돌아갈 수 없는 일방통행의 길. 삶과 죽음이 맞물려 있던 길.
자식들 앞에서 엄마보다 더 자상했던 아버지였지만 마음속은 항상 절벽이었을 거다. 그 속을 아픈 엄마에게 술주정으로 푸셨던, 아버지의 가팔랐던 심정이 왜 하필 이때 이해되는 걸까. 왜 이제야 쓰라린 통점으로 다가오는 걸까.
이틀 전 한 지인에게서 받은 여행 정보에 눈이 멀었다. 들은 정보를 꼼꼼히 챙기지 않아 화를 당하고 있다. 반딧불이가 모여 산다는 말에 나는 그저 혹하였다. 지도책을 펴 보니 지인이 말한 이곳 스프링부룩(Spring Brook) 주변이 온통 녹색이었다. 호주는 워낙 청정 지역이지만 반딧불이가 사는 곳이 궁금하였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도 맑기만 한데 이곳은 우리 마을과 어떻게 환경이 다른지 확인하고 싶어서 불현듯 길을 떠났다. 어느덧 호주에 2년을 산지라 혼자 떠나도 될 것 같아 가볍게 나서기로 했는데 딸아이가 옆에서 지도책이라도 봐 준다고 따라 나선 것이다. 몽골고원 같은 초원의 대평원을 상상하면서 왔는데, 덜미를 잡혔다.
아내를 죽음에 덜미 잡힌 채, 수년을 같이 매여 지내야 했던 아버지. 논밭 팔아서 서울의원을 찾고 용하다는 무당은 모두 다 불러 몇 차례나 귀신을 쫓아내었지만 끝내 그 끝 길에서 돌아오지 않은, 지금 내 나이대의 엄마. 아버지는 산속에 홀로 들앉은 엄마의 봉분 앞까지 밤마다 쳐들어가 몇 년간 더 술주정을 하였었다.
그 아버지가 그 엄마의 길에 있다. 엄마의 길을 따라가고 있다. 아버지가 암에 걸리셨다고 한다. 수술을 받았지만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되어 가망이 없다고 한 의사의 말을 동생이 조심스럽게 전해 준다.
당신이 어디쯤에 서 있는지 생의 좌표를 가늠치 못하시는 팔순의 아버지. 가물가물한 의식으로 자꾸만 우신다는 아버지. 언니들도 아버지를 따라 자꾸 운다고 한다. 나만 머나먼 이국에 와 있다고 편안히, 앉아서 아버지의 투병 소식을 듣고만 있다. 비행기만 타면 아홉 시간 거리인데도, 앉아서 전화번호만 꾹꾹 누르고 있다. 아버지는 이 잘난 자식 목소리만 들려주어도 고맙다고. 너희만 괜찮으면 고맙다고. 오로지 고맙다고. 고맙다고. 웃는 목소리를 들려주신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초행길이다. 아버지도, 나와 내 아이도, 초행길의 벼랑 위를 달리고 있다. 우리가 지나고 있는 천 길 벼랑 길이 끝나면 어떤 길이 나올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애가 탄다, 애가 탄다.
보라, 그 낭만에 빠지다
하동골 벚꽃인가.
봄빛 속을 하르르 날던 분홍 꽃잎들.
그가 바다 건너 산 넘어 호주 브리즈번에 왔는가.
먼 길 오느라 분홍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는가. 낮밤 쉬지 않고 오느라 꽃마다 길 밝히는 초롱, 초롱을 달았는가.
형광의 보라 꽃을 구름처럼 피워올리는 호주의 봄꽃―벚꽃나무보다 큰 체형으로 신록의 숲에 에워싸여 낭만한 풍채로 서 있는 자카렌다―을 볼 때마다 나는 자카렌다, 그가 경외로워진다. 일 년에 단 한 번, 한 달 동안 점점 더 귀색으로 개화하는 이 꽃은 사시사철 피다 지다 하는 호주의 뭇 꽃과는 다르다.
꽃 자체에서 찬탄을 자아내기보다는 아낌없이 발산하는 보랏빛 색채가 주는 정형 혹은 율동의 신선한 파격 때문에 한 번 더 눈길이 쏠린다. 허공을 정제하는 연보라색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신성한 미감을 체험하기도 했다. 하동의 벚꽃이 분홍의 대표 주자라면 자카렌다는 보라의 대표 격이다.
자카렌다, 현란한 보랏빛.
멀리서 바라보면 형광색 보라가 휘모리장단으로 다가오고, 가까이 가 보면 꽃송이 전체를 툭툭 떨어트리는 단조의 운율이 느껴진다. 비늘 같은 잎, 한 잎 한 잎 흩날리는 벚꽃에 비해 슬쩍 한 송이 꽃잎이 통째로 떨어지는 모습에서 동백의 피울음은 아니더라도, 가슴 쓸어내릴 애수가 감돈다. 아쉬운 듯 바람을 비껴 낙화하는 모습이 흐느낌 같기도 하다. 떨어지는 ‘꽃짓’ 속에 절제와 지엄이 엿보이기도 한다.
우미하며 차분한 품새에서 꽃송이가 하나씩 버려지는 걸 볼 때마다 그에게서 생의 연륜이 깊은, 지천명에 접어든 남성성이 떠올려진다. 하동골 벚꽃이 지천명의 화사한 여성이라면 내가 호주에서 만난 자카렌다꽃은 지천명의 경외할 남성이라 할 만하다.
하늘 쪽으로 카메라를 들어 올리자 초롱꽃, 그가 나의 렌즈 속으로 쏙 들어온다. 줌을 늘여서 그를 내게 가까이 오게 해 본다. 바싹 다가온 그가 바람에 흔들, 흔들리고 있다. 바람은 내 오감을 자극하기에 알맞은 그의 향취를 실어다 준다. 카메라를 내 가슴께로 안아 본다. 그와 나 사이가 밀착된 듯하다. 렌즈도 센시티브 해진다. 렌즈 안으로 들려오는 그의 속삭임까지 포착하여 내게 전해 준다.
‘내 보라를 담고 싶소?’
그가 질문했으니 내가 답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대담한 꽃짓에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바르르 몸이 떨린다. 이보다 더 정(淨)하고 이보다 더 비애로운 물음이 있을까. 카메라 렌즈 속에서 관능 시의 도드라진 주체가 된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밀었다 당겼다 하는 바람의 결에 순응하는 그의 태도가 보랏빛 오르가즘으로 물결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카메라 셔터를 바로 누르지 못하고 그의 은밀함에 빠져 든다. 숨죽이며, 처음 찍어 보는 카메라의 렌즈를 상하 좌우로 조심스럽게 돌려 본다. 그러다 보니 내 몸에 땀이 흠뻑 배었고 그의 향취는 더욱더 농 짙어져 있다. 그의 세포 증식에 나도 한몫했는가.
아직은 자신의 이미지를 끊임없이 농 짙게 피워내고 있는 꽃잎이지만 그들은 이제 한 달이 지나면 홀연히 떨어질 것이다. 이 꽃잎이 다 떨어지고 나면 나는 뭔지 모를, 확연히 잡히지 않을 상실감과 그리움으로 마음이 저려 올 것이다. 달포가 지나도록 곁에서 생명을 감지할 수 있었던 이 꽃의 실체를 잊지 못할 것이다.
셔터를 누를까 하다가 내 안에 그를 심기로 했다. 그의 생명 그대로, 그의 숨결 그대로 심기로 했다. 나의 이 시간도 함께 담기로 했다. 호두 껍데기 안에서 무한한 우주가 만들어지듯이, 내 찰나의 이 시간이 영원으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담기로 했다.
보르헤스는 그의 단편 「알렙」에서 우리들 정신에 망각으로 뚫려 있는 수많은 구멍들이 있다고, 세월이라는 슬픈 풍상 작용 속에서 베아뜨리스의 모습을 변질시키고 상실해 가고 있다고 하지만 나는 자카렌다, 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 나의 영혼을 변질시키지 않으려 한다.
내년에 또다시 피어날 보랏빛 그날을 꼬박 기다리기로 한다. 1년이 하루로 축약되는 그날이 되면, 그는 또 하동골의 묘음과 단조의 운율을 지니고서 내가 있는 호주 브리즈번으로 다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쉼표처럼 허공을 떨게 하던 그 꽃 한 잎, 또 한 잎, 내 가슴에다 꼭꼭 담아 둔다.
나무가 수직으로 크는 이유
그가 한곳에만 서 있다고 해서, 한곳에만 ‘마음 빛’을 쏘진 않는다.
통시적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며 싱그럽게 서 있다. 위에서 유장하게 내려다보는 모습은 세상을 안는 품새다. 또, 위로 향한 자세에서 좀체 전복되지 않을 그의 욕망이 감지된다. 편협하지 않으면서, 도저하고 도도한 기운으로 저 높은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오르고 있다. “본다고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써도 다함이 없는” 노자의 도를 그는 지니고 있다.
그에게서 하늘은 아득히 먼 곳이었다.
도달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거리였다. 땅을 헤치고 나온 작디작은 그에게 누구 하나 눈길을 준 적이 없었지만 햇살이나 바람을 업고 침묵으로 푸르게 자라났다. 그가 움직일 수 없어, 낡거나 닳아 버린 자리처럼 더러 지겹기도 했을 법한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속으로 뿌리를 깊게 내리뻗으면서 더 빛나는 생기와 생동감을 발하였다. 한 뼘도 못 되는 자투리의 좁은 터에서 태어난 그는 점점 눈부시고 풍요한 영토로 가꾸어 갔다. 속내가 깊은 탓이리라.
그에게 햇살과 바람이 친절만 베푼 건 아니다.
햇살은 따갑게 내리쏘며 그를 애타게 말려 놓기도 했고 바람은 그를 후려쳐서 생채기도 남겼다. 그러나 햇살과 바람이 없으면 나무, 그는 생명을 잃고 만다. 바람과 햇살도 그가 없으면 살아가는 맛을 잃으리라. 햇살은 그에게 쉼없이 영양을 공급하고 바람은 그에게 여유와 청빈의 도를 날라 주며…, 영원한 벗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그들 운명의 천은 짜여진다. 그가 어린나무일 때 받은 상처는 옹이로 박혀 있지만 그는 그리 속 좁은 물상이 아니어서, 넓고 깊은 관조로써 상처를 스스로 위무하고 삭이며 싱싱하게 자라난다.
밤은 깜깜해서 무섭고 비는 차가워서 싫고 눈은 금방 녹아 버려서 거부감이 느껴질 법도 하지만 그는 편애하지 않고 덤덤히 받아들인다. 그 앞에 서 있다 보면 나 자신의 마음이 가볍고 왜소하게만 느껴진다. 새는 음색이 고와 반기고 바람은 시원해서 내게 머물기를 바라며, 별은 꿈을 키워 준다고 호들갑스레 내 삶에 끌어와 편애하는 나의 모습이, 그 앞에서 간사하게 느껴진다.
나무는 묵언의 언어로 자라났다.
“고요하고 잠잠하며 멀고 아득한 사이”에 나무, 그의 주변으로 인간이 둘러싸이기 시작한다. 침묵의 언어로 서 있는 나무에 반하여 인간은 환성을 지르기도 하고 나무의 가지를 마구 부러뜨리는가 하면 나뭇가지에 매달려 열매를 따 내기도 한다. 오진으로 휘감긴 인간의 영혼을 나무에 의탁하여 말끔히 씻어 내리기도 한다. 그런 와중에도 나무는 “침묵이라는 거대 이미지”로 서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듯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침묵이 있다. 그럴 때 나무는 성자가 된다.
하늘의 넓은 품이라야 나무를 안을 수 있다.
나무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하늘이 떤다. 어느덧 키가 자라 하늘에 닿은 나무의 초록 잎을 감동으로 껴안은 하늘이 바이브레이션 하듯 무성의 현을 켠다. 우람한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는 2층 발코니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조우하는 모자간의 상봉을 보는 듯하다. 나뭇가지가 떠는 것 같지만 떨리는 가지를 하늘이 떨며 반기는 것이다. 높은 창공에서, 초록의 싱싱한 나무를 떨며 맞아들이는 하늘을 보니 내 마음도 한기가 서린 듯 떨려 온다. 하늘과 나무, 그리고 내가 삼위일체가 되었는가. 키가 자라 마침내 하늘의 품에 안긴 나무는 초록빛 기구처럼 넘실대며 한바탕 춤을 춘다. 나도 슬며시 나무와 하늘 사이에서, 그들의 춤사위에 끼어든다.
땅속에 뿌리를 발처럼 디디고 하늘까지 닿아 땅과 하늘을 잇는 끈이 되는 나무, 그의 물리적인 자궁이 땅이라면 애초 그 영혼의 근원은 하늘이었을 거다. 대척점에 있던 기쁨이나 미움이 심연 깊숙이에서 맞닿게 되는 꼭짓점이 있듯이, 땅과 하늘도 어쩌면 한 곳에서 만나게 되는 점이 있는지도. 그 점이 나무인지도. 하늘과 땅 사이에 자라나는 나무가 있어 노자의 도가 생겨나게 되었는지도.
인간의 위치에서 나무를 보면 성자 같지만 하늘에서 나무를 내려다보면 나무는 아직 못다 자란 어린아이로 보이리라. 나는 안지도 품지도 못하고 밑에서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나무지만, 하늘은 나무를 어머니처럼 품어 안는다. 이 푸르고 드넓은 하늘에서 모성애가 느껴진다. 새들이 높고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날아와 그네 타듯 매달리자 하늘의 가슴은 콩콩 뛰기도 하고 더 큰 새가 날아들자 쿵 내려앉는다. 하늘은 새와 나무가 높은 가지에서 매달려 노는 모습이 귀엽다기보다는 위험 수위라고 느끼는 것 같다. 자식을 품고 사는 어머니 마음은 하늘이라고 별수 없이 근심 덩이를 안고 있나 보다.
나무의 꿈은, 산 채로 하늘에 오르는 거다. 하늘은 나무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각
A4용지를 가위로 오린다. 사각사각. 가위는 종이를 먹어 치우는 종이의 천적 같기도 하고 종이가 감당할 수 없는, 종이의 삶을 압박하는 인물 같기도 하다.
내가 가위질을 하자 종이 끝이 점점 뾰족해진다. 종이의 가늘어진 끝을 더 작은 예각으로 만들려 할수록, 가시처럼 된 종이 끝은 뭉텅한 가위를 계속 헛손질하게 만든다. ‘쪼븟한’ 종이는 아래로 향하거나 구겨지면서 가위의 아귀를 빠져나간다. 뾰족한 모서리 끝에 가위를 대고 각을 더 작게 오리려고 끈질기게 노력하지만 구겨지기만 하지 잘려지지는 않는다. 더 이상 잘려 나갈 각이 없다. 자주 이렇게 장난을 하다 보니 그 속에서 많은 것이 떠오른다.
오늘은 만들어지는 각을 책 속의 주인공과 연결 지어 본다.
각이 더 이상 좁혀질 것도 없게 된 종이는, 아버지와 교장 선생의 아귀에서 자신의 생이 구겨지고 부러지다가 결국은 설 자리가 없어 죽음을 택했던 한스 기벤라트를 연상시킨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섬세한 소년 한스는 아버지와 교장 선생의, 공부에 대한 집착 때문에 희생양이 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의 강압으로 신학교에 들어가고 교장 선생의 강요로 착실히 공부를 하였으나 자유스러운 성격의 하일너를 사귄다. 그러나 어느 날 학우인 하일너마저도 떠나 버리면서 그의 몸과 마음은 무너져 간다. 수재이던 한스는 점점 성적이 떨어진다. 급기야 자퇴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빈민 거리의 사람들과 사귀고 엠마라는 처녀와 짧고 허무한 교제를 끝내면서 또 한차례 좌절감을 맛본다. 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새 삶을 개척하려 해 보지만 고된 노동과 정신적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강물에 빠져 죽고 만 한스의 행적이, 더 이상 뾰족해질 수 없을 만큼 날카로운 종이의 끝에서 느껴진다. 신학교 학생으로서 성경 공부를 포기하면서부터 설 자리를 점점 잃어 갔던 한스. 끝내 인생의 수레바퀴에 치여 생을 마감한 한스.
가위가 난도질을 멈추자 침같이 삐쭉하게 각진 모습으로 피하던 종이의 움직임도 멈춘다. 가위가 난도질을 멈추면 이 예각의 생이 끝나진 않을 것이다.
직각은 진부할 정도로 익숙한 각이다. 네 귀퉁이가 직각인 것이 이 세상에 무수히 많다. 아파트, 책상, 책. 눈만 뜨면 직각으로 된 천장을 보고 직각으로 된 벽을 본다. 직각인 냉장고, 직각인 텔레비전 화면은 보기 싫더라도 매일 봐야 하는 가족과도 같다.
각을 지운 둥근 식탁이 생겼다. 그것을 본 누군가 집도 둥글게 만들어 봤으면, 했다. 집이 둥글면 냉장고, 방, 천장…, 이 모든 것도 둥근 원이 되고 침대도 둥근 벽 선을 따라 둥글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누군가 사람도 머리와 몸을 돌돌 말아서 동글동글 굴러다닐 걸 상상하여 박장대소를 한 적이 있다. 사각의 틀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고정관념을 깨 보기 위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파트가 막상 만들어지면 불편해 못 살겠다고 처음에는 아우성을 칠 거다. ‘원이 각을 숨긴다’고 각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네 각이 직각인 하얀 A4 용지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 한참 동안 들여다보자니 그 속에서 바다가 연상된다.
「노인과 바다」에서 샌디에고 노인은 소년마저 떠나 버리고 만,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기다림을 바다에서 홀로 감수했다. 84일간을 망망대해에서 대어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심심하면 공중을 나는 새와 이야기를 나누고 하늘의 별과 대화를 했다. 노래를 부르며 옛날을 추억하면서 지냈다. 85일 만에야 청새치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길이 2미터 50센티인 대어를 야위고 초췌한 노인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홀로 밧줄을 당겨 올리느라 손에 피가 나고 땀으로 온몸이 목욕을 하면서도 노인의 의지는 굽힐 줄 몰랐다. 상어까지 달려들어 노인의 생명을 위협하고 청새치의 살을 뜯어먹어 청새치는 뼈만 앙상하게 남았지만 노인은 끝까지 버티며, 낚아 올린 고기를 자신의 집까지 운반해 놓고서야 쓰러진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하얀 A4 용지에서는, 샌디에고 노인이 꾸었던 으르렁대는 사자의 꿈까지 연상된다.
다시 가위를 들고 둔각을 만들어 본다. 둔각은 직각보다 더 넓은 것 같지만 쓸모는 적다. 둔각에는 책을 꽂아도 침대를 놓아도 책상을 놓아도, 쓸데없는 자투리 공간이 남아 신경 쓰이게 하고 모양새도 나지 않는다. 그 넓음은 불필요한 자투리일 뿐이다. 둔각은 「목걸이」에 나오는 로와젤 부인의 허영심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예각이 가시 같다고 하여 얄밉지 않다. 직각이 흔하다고 구태의연해 보이지도 않는다. 둔각이 넓다고 모든 걸 끌어안을 수 있는 건 더욱 아니다.
예각의 날카로운 면에 호감이 간다. 예각은 직각과 둔각을 위해 희생한 각이다. 자신의 터를 ‘쫍히면서도’ 부정한 일에 일침까지 가한다면, 좁은 예각일지라도 멋진 나의 멘토르가 되겠다.
원 vs 환
등을 맞댄 자끼리 마주 보려면 지구를 한 바퀴 돌아야 한다는데 아이는 지금 줄넘기로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돌리고 있다. 아이는 돌아가는 원주 속으로 양 발을 번갈아 들여놓다가 두 발을 모아 뛴다. 줄이 점점 빠르게 돌아가면 아이의 팔과 발도 같은 빠르기와 세기로 돌아가면서 각기 다른 길이의 원주를 그려낸다. 팔에 의해 줄이 돌아가고 줄에 의해 발이 움직이는 이 놀이는 손끝과 발끝의 각도만 삐끗해도 모든 원이 소멸된다. 톱니바퀴처럼 정치하게 맞물려야 둥글게 살아 있다.
두 번째 온 아이는 쌩쌩 가위표 돌리기를 한다. 줄을 보이지 않을 만큼 빨리 돌리고 발을 아무리 재빠르게 바꾸는 고난도의 줄넘기일지라도 아이가 그리는 원은 마음을 편안하고 경쾌하게만 한다. 빠르나 조급하지 않게 돌아가는 원의 질감과 선율이 그대로 느껴진다. 셋째 아이가 오자 아이들은 눈빛을 마주하고 숨 쉬기까지 맞춰 가며 함께 줄을 넘기 시작한다. 한 아이가 만들어 내는 원주 안으로 둘은 교대로 들오고 나가기를 한다. 해님이 무대 조명등처럼 운동장을 동그랗게 비춘다. 그 속으로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 아이들이 떼 지어 온다.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돌아서 돌아서 땅을 짚어라~ 꼬마야 꼬마야 자알 가거라.
운동장은 아이들의 유토피아가 된다. 운동장 복판에는 아이들 키의 서너 배쯤 되는 줄 하나가 놓여 있다. 두 아이가 뛰어가 줄의 양쪽 끄트머리를 하나씩 잡고 동서로 갈라 진다. 너무 팽팽하면 돌릴 수 없어 줄이 땅에 닿을 만큼 느슨한 거리에서 마주 선다. 하나 두울 셋. 양쪽 아이의 웃음 띤 눈빛이 마주치자 직선으로 굳어 있던 줄이 금세 유연한 원이 된다. 돌아가는 아이의 팔에서 굴렁쇠만 한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줄은 놀이 기구인 지구본 크기의 원으로 회전한다. 아이들은 차례를 기다렸다가 한 명씩 한 명씩 하늘과 땅을 돌리는 원주 안으로 들어간다. 꼬마야 꼬마야 뒤를 돌아라 돌아서 돌아서 땅을 짚어라~ 꼬마야 꼬마야 자알 가거라.
원이 순환을 반복한다. 직선이던 팔과 줄이 둥근 원으로 창조되는 줄넘기에 나도 마음의 발을 들여놓고 푹 빠져 있다.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순수의 미학이다. 아이들과 줄이 서로에게 몰입하여 지구를 돌리는 동심의 BE, 존재로서의 아름다움.
원은 원으로 있어라.
무엇이 환이 될까. 원이 평면이라면 환은 부피의 이미지다. 손가락 두 개로 그려지는 고리(環)는 단순한 원이 아니라 돈을 지칭한다. 톱니바퀴처럼 세상과 맞물려 세상을 돌리고 자신도 세상 따라 도는 돈. 어른이 돌리는 돈줄에는 숨결이 있고 역사가 있다. 고대의 자급자족 시기에는 돈이 필요 없었지만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상품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돈이 나타났다. 처음에 조개껍데기와 소금이었다가 금은 주화를 거쳐 지폐에서 전자 화폐로 변천하고 있는 돈줄이 세상 곳곳에서 돌고 있다.
물질이면서 물질이 아닌 돈줄을 돌리며 삶의 줄넘기를 하는 공간 Money Zone. 사이버 시대가 되면서 돈이 머무는 공간은 보이지 않게 그 영역을 넓혀 간다. 노하우와 아이템이라는 비물적 자산으로 있고 사이버 머니라는 이미지로 존재한다. 현대로 오면서 점점 빠르고 광범하게 돌고 있는 돈줄은 이제 신의 집사처럼 행세한다. 모든 어른에게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에게 그렇다는 거다. 돈이 행차하면 악마의 시중도 들고 돈이 있으면 처녀의 마음도 산다. 대통령도 만들고 남자를 여자로도 바꾼다. 돈은 군주 중의 군주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돈줄과 어른들 사이에는 팽팽한 기류가 조성된다. 돈줄에 의해 인간미가 옥죄게 되더라도 돈줄은 만인의 만인을 위한 만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줄넘기 품목이다. 돈줄은 뫼비우스 띠처럼 끝없이 뻗어 있고 어른들은 그 끝까지 좇아가 돈줄을 잡고 돈줄을 돌리며 돈줄을 넘으려 애쓰는 곤고한 시지프스가 되어 간다.
햇빛 밝은 동그란 운동장보다 컴컴한 장소에서 생명력이 강한 돈줄인지라 지갑 속이나 과일 박스 속에서도 세력을 줄이지 않는다. 온 세상을 돌다 보니 더러워질 수밖에 없어 암암리에 세탁된다. 은행에서 세탁을 하지만 본질까지 더러워진 돈은 세탁할수록 더욱 추해지고 어른을 점점 조급하고 초조하게 한다. 뭇 인생을 삼켜 버리기도 한다. 인생은 박살내더라도 돈줄은 자신의 수리적인 질서와 규칙에 따라 세상을 돌리고 사람을 돌리고 자신도 돌린다. 깜깜 세상에 제아무리 구겨 두어도 짚불처럼 되살아나는 돈줄은 어른을 지배하는 전지전능의 환이면서 돈줄을 쥔 자도 모르는 사이에 독환(毒丸)으로 변하기도 한다. 삶의 토양과 존재의 바탕을 잃게 되더라도 돈줄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지독스런 환. 독환. 돈이 돌리는 고리에 갇혀 돈의 노예가 되어 가도 새것이 아름답다는 광고 문구에 눈을 돌리게 하는 물욕의 환.
갇힐 줄 뻔히 알면서 돈 고리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 속에는 선뜻 발을 빼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내 모습도 보인다. 돈줄이 인생 제1의 목표인 양 고달픈 줄넘기를 끝없이 하도록 어른들을 붙들어 맨 족쇄의 HAVE, 소유욕에 눈먼 만국 공용어.
원은 환이 되지 말거라.
│남홍숙 작품론│
삶의 근원에 대한 물음
신 재 기
문학평론가, 경일대학교 교수
문학 언어에 대한 인식
창작 과정에서 수필가들이 깊게 빠질 수밖에 없는 고민은 무엇일까? 그 고민의 내용과 색깔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하지만, 문학으로서 품격을 갖추어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떨쳐 버리기 어려운 공통된 관심거리임이 분명하다. 이때 문학은 수필가로서의 자긍심과 창작 원리까지도 담보해 주는 가치다. 그것은 작가가 도달해야 할 희망의 등불이면서, 감당해야 할 부담이다. 왜냐하면, 문학은 늘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추상이고 관념이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수많은 풍문으로 전해지는 것이 문학이다. 누가 문학에 관해 무엇을 큰소리로 외치는 순간 그것은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며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내 부정형의 소문으로 바뀌고 만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법이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으니, 여기서 가능한 방법은 두 가지다. 문학을 우상으로 섬기든지, 아니면 미련 없이 그것을 버리는 일이다. 어쨌든 그러고 나면 어느 정도는 가벼워질 것이다. 수필 창작에서는 문학을 섬기기보다는 의식하지 않는 쪽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는지 모른다. 문학에 발목을 잡혀 수필이 내적인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자주 목격하기 때문이다.
물론 수필이 문학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문학이고자 하는 열망이 문학 원리주의나 상투적인 관행으로 변질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수필과 문학의 연결 끈을 느슨하게 풀어 두고 충분한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 느슨해지고 거리가 멀어져도 수필에서 문학의 그림자가 지워지지 않을 부분에 주목하자. 그것은 언어 문제다. 수필 창작도 언어 운용 문제에서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문학 작품이 언어로 표현되므로 언어를 중시해야 한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다. 문학 언어의 일반적인 속성뿐만 아니라, 수필의 특수한 언어 사용까지도 고려하는, 언어에 대한 폭넓은 인식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학 언어는 본질적으로 시적인 사용을 지향한다. 시적인 언어 사용을 시어라고 했을 때, 시어는 의미의 투명한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 언어와는 기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시어는 언어의 도구적인 효용성을 거부한다. 일반 언어는 사회적인 언어 체계를 전제로 하여 대상을 기계적으로 재단하기 때문에 존재와 사물의 실상을 가리거나 왜곡시킬 가능성이 크다. 폭력적일 때도 있다. 반면에 시어는 기존 일반 언어와 의미를 거부하고 위반한다. 여기서 창조가 이루어진다. 문학은 일반 언어의 관습적인 체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창조는 부분적으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속성을 지닌다. 서구의 ‘에세이’가 ‘새로운 시도’라는 의미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수필이 문학이 되는 빠른 길은 ‘에세이’의 기본 성격을 적극적으로 살리는 일일 것이다.
남홍숙은 바로 이런 대목에서 돋보이는 수필가다. 그는 수필가로서 새로운 시도와 실험을 꾸준하게 추구해 온 작가다. 이번 특집에서 대표작으로 선별 수록된 작품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뚜렷하게 노출되지 않았으나 기존에 발표된 작품을 보면 강도 높은 실험성을 확인하고도 남는다.
① 꽃봉오리는 이제 온전한 꽃이 되었다(化). 그 꽃(花)을 본 나는, 무엇과 어울릴(和) 수 있는가.(「화(化花和)」에서)
② 아름답다의 어원은 세 갈래다.
·아름〓알음〓앎〓‘지식인답다.’
·고어에서 아름은 나를 가리키는 말로, ‘나답다.’
·팔을 한 아름 벌려 누군가를 안아 준다는 데서 파생한 말로 ‘안아 준다는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이 아름다움이란 것이다.(「한 문장+한 문장=더 아름답다」에서)
우선 수필 쓰기의 실험성을 잘 보여 준다. 위의 예문보다 그 실험성이 과격하게 드러나는 작품도 많다. 여기에는 거의 같은 길이에, 별다를 것 없는 주제에, 엇비슷한 어조로 양산되는 수필에 대한 비판 정신이 깔려 있다. 수필 쓰기의 천편일률적인 방법을 해체하고 다양성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이려는 시도다.
남홍숙의 이 같은 전략은 언어 사용 방법에서 출발한다. 일반적인 글쓰기가 언어의 의미를 조직하는 데 한정하는 반면에, 그는 언어 자체의 물리적 모양까지 활용한다. 더 나아가서는 음성과 문장의 결합에도 관심이 미친다. 그의 수필에서 가장 이상적인 언어는 대상을 지시하는 의미론적 기능에 못지않게 의미가 육화된 기호 자체의 물질성을 지향한다. 언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자연스럽게 문학 타령을 배제한다. 작가의 서정이 풍성하게 녹아나고 표현의 날렵한 기교 과잉을 문학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수필의 언어는 단지 의미를 실어 나르거나 다양한 정서를 안개처럼 피우는 것이 아니라, 기존 언어 사용을 위반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홍숙의 수필은 결국 수필의 문학 되기를 입에 담지 않았지만, 수필의 문학성을 실험적인 방법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강변한 셈이다.
존재와 삶의 근원을 찾아
문학은 인간 삶의 본질적인 문제와, 삶과 관련된 현실에 관해 말한다. 즉, 문학은 현실을 반영한다. 인간 삶은 문학의 중심 내용이다. 그런데 ‘반영’이라는 말을 종종 오해한다. 문학이 현실이나 대상을 거울에 비추듯이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반영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를 리얼리즘의 기본 정신으로 파악하는 것은 거듭 오해하는 꼴이다. 문학은 삶과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며, 가능하다 해도 그것은 별 가치가 없다. 문학이 삶을 반영한다는 것은 인간 삶의 현실이나 본질을 수동적인 입장에서 기계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상 충실성을 문학 혹은 리얼리즘의 본질로 보는 것은 큰 오해다. 문학은 ‘삶’이란 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다. 대상 자체의 진실도 문제지만, 해석에서 중요한 것은 해석 주체의 관점이다. 세계관적인 태도가 해석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이런 점에서 문학이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은 인간 삶에 관한 시인이나 작가의 태도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창작 방법상 허구적인 상상력에 토대를 두는 시와 소설에서 실제적인 현실의 비전환적인 표현인 수필로 넘어오면, 문학이 가지는 삶에 대한 해석이라는 측면이 더욱 축소되고 만다. 물론 이런 생각도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허구적인 상상력에 의존하든 실제 현실을 그대로 말하든 간에 언어로 표현된 결과물로서 문학은 이미 작가에 의해 해석된 것이다. 루카치는 「에세이의 운명과 형식」이라는 글에서 삶에 대한 이러한 해석적인 입장 표명을 ‘형식’이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형식은 하나의 세계관이고, 하나의 입장이다.” 삶을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을 형식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모든 체험과 감정은 이 같은 형식에 의해 용해되고, 압축된다.
세계를 해석하는 작가의 뚜렷한 관점, 즉 ‘형식’의 중요성이 남홍숙 수필 창작의 또 다른 출발점이다. 수필 창작 과정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알(수필의:필자)을 키우기 위해 때와 장소를 바꿔 가면서 양분을 섭취한다. 내게 건조한 철학과 과학으로만 가득할 때는 거미가 베놈(venom)이라는 독소를 쏘아 제 먹이를 액체로 소화시키듯이 꽃이나 나무를 보면서, 근원에 질문을 던지는 철학과 논리를 적용하는 과학으로 용해한다.
여기서 ‘알’은 일상 체험으로서 수필의 소재가 될 수 있는 화제다. 작가의 시각에 포착된 삶의 현실로서 알은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려고 부화 과정을 겪는다. 남홍숙은 이를 두고 “알을 키우기 위해 때와 장소를 바꿔 가면서 양분을 섭취한다.”라고 했다. 이는 삶을 해석하는 데 요구되는 작가의 관점을 확립하는 과정을 말한다. 누구든 자기 나름대로 이 세상을 보는 태도를 보인다. 문제는 태도가 편협하지 않고 보편성을 얼마만큼 확보하느냐이다. 보편성 또한 기존의 철학적인 원리나 명제를 확인하는 수준에서 끝나고, 자신만의 창의적인 고유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다. 그래서 작가는 철학이 과학처럼 건조함으로 가득할 때는 ‘베논’이라는 효소를 품어 액체로 소화시킨다고 하였다. 작가마다 자신만의 창의적인 관점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수필이 일상 체험을 일차적으로 단조롭게 배열하는 데서 크게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한 결점을 감추려고 무거운 메시지를 날것으로 첨가하는 작품도 자주 본다. 그럴수록 수필은 작품성을 잃고 교훈적인 윤리를 강요하는 것이 되고 만다. 문학이나 수필에서 삶의 체험은 작가에 의해 형식화된 것이다. 사물과 대상을 바라보는 그 작가만의 관점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즉, 대상을 실제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수필 쓰기라는 뜻이다. 해석하고 가치를 정립하는 일은 존재 대상의 본질이나 근원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 점과 관련하여 남홍숙은 “근원에 질문을 던진다.”라고 했다.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는 것이다. 존재나 삶의 겉모습에 머물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는 것이 수필 쓰기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본질에 매달리는 이 같은 태도는 ‘문학 하기’보다는 ‘철학 하기’에 가깝지 않은가? 남홍숙의 수필 쓰기는 결국 철학의 범주에 속한다는 말인가? 그는 이러한 우려를 이미 감지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
지성으로 경화되어 있는 머리에 감성을 부여하여 중화시킨다. 반대로 텅 빈 하얀 날에는 또다시 책을 읽어 지성으로 무게를 잡는다. 내 영혼을 촉촉이 적시면서 수필 알을 키운다.
작가의 많은 창작 경험을 토대로 하는 이 같은 발언은 예사롭지 않다. 수필에서 존재와 세계의 근원을 찾아가는 길은 철학적인 논리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지성적인 논리의 그물을 가지고는 뼈대 사이에 엉켜 있는 삶의 세부적인 진실을 건져 올릴 수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은 감성이다. 지성과 감정이 조화롭게 만나는 지점에서 수필 작품성이 확보된다. 그 지점은 수필가의 영혼이 촉촉이 배어 있는 진실의 공간이다. 따라서 남홍숙의 수필 쓰기가 존재의 근원 탐색이라고 할 때, 그것은 작가의 영혼이 깃든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지성과 감성 사이에서
『장자』서에서 곽상(郭象)은 장자를 ‘광언(狂言)’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고, 근본을 탐구하는 그의 말을 두고 “응하지만 부합하지 않으면 비록 정확할지라도 쓸 곳이 없으며, 말이 사람이나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비록 고원할지라도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응(應)’하지만 ‘회(會)하지 못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사리에는 맞지만 현실적인 구체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사람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 말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언어는 발설되는 순간 대상과 분리되고 거리를 지니게 된다. 사물과 부합하는 언어란 존재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언어를 버리고 침묵하는 방법이다. 그다음으로는 사물이나 존재의 현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그치고, 그 안에 내포하는 어떤 의미도 해석하지 않는 방법이다. 그런데 존재의 근본을 말하려면 현상의 묘사만으로 불가능하다. 근본에 도달하려는 언어는 원천적으로 현실적인 구체성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사물의 구체성을 잃지 않으려면 근본으로부터 떨어져야 하고, 근본으로 나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대상의 물질성을 소외시켜야 한다. 이같이 모순 관계에 있는 언어의 두 가지 사용은 문학이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온 대목이다.
오늘의 수필 창작 방법도 이 지점에서 고민을 떨쳐 버리기 어려울 것이다. 자아의 세계화라는 수필의 장르적 원리는 사물과 현실의 보편성을 확보하는 일, 즉 근원을 탐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대상의 겉에만 머물 수 없고, 수필가의 해석적인 관점의 개입이 필수적이라면, 수필은 태생상 관념적인 철학으로서 현실적 구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는 말인가. 이와 관련해서는 여기서는 문제만을 제기하고 넘어간다. 다만, 사물이나 삶의 구체성을 가볍게 여기고, 그것의 숨겨진 의미를 찾는다는 핑계로 지나치게 추상화된 원리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근원을 찾아가는 길에서도 겸손의 자세를 상실해서는 안 된다. 선지자적 과욕이 넘치는 수필은 도덕 교과서 바로 직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수필가 남홍숙은 지성과 감상 중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말로써는 쉽지만, 창작을 통해 실천하기란 어렵다. 남홍숙의 이 같은 발언도 자신의 작품 세계가 철학적인 관념의 세계로 기울 수 있음을 경계하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① 예각의 날카로운 면에 호감이 간다. 예각은 직각 둔각을 위해 희생한 각이다. 자신의 터를 ‘쫍히면서도’ 부정한 일에 일침까지 가한다면, 좁은 예각일지라도 멋진 멘토르가 되겠다. (「각」에서)
② 이 대담한 꽃짓에 내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바르르 몸이 떨린다. 이보다 더 정(淨)하고 이보다 더 비애로운 물음이 있을까. 카메라 렌즈 속에서 관능 시의 도드라진 주체가 된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밀었다 당겼다 하는 바람의 결에 순응하는 그의 태도가 보랏빛 오르가슴으로 물결치는 것 같기도 하다. (「보라, 그 낭만에 빠지다」에서)
①이 ‘지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②는 상대적으로 ‘감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이러한 구분이 정확할 수가 없고 작가가 의식했던 바도 아니다. 그러나 남홍숙의 수필은 ①쪽에 기조를 두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자체는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수필가의 고유한 개성으로 인정해야 한다.
근래에 일본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글이 던진 파문은 뜻밖에 큰 것 같다. 강한 인상을 주었던 그의 발언과 논리는 우리로 하여금 문학에 대한 오래된 생각을 폐기하도록 압박하는 것 같았다. 그는 오랫동안 유지해 왔던 문학의 지위와 영향력이 축소되었고, 전통적으로 승인해 왔던 문학의 역할이 끝났다고 진단한다. 사실 이 같은 진단은 이미 많은 사람이 기회 있을 때마다 부분적으로 언급했다. ‘문학의 죽음’이란 선언적인 발언은 들은 지 꽤 오래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새삼 고진의 이러한 문학 현실에 대한 진단은 그리 충격적인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왜 파문을 일으키는가? 막연하게 감지해 오던 것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자신의 수필 작품이 독자에게 큰 감동으로 다가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기 이를 데 없다. 고진의 주장대로 문학이 세상과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별다른 역할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이는 문학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문학이나 수필이 독자에게 영향을 주려고, 혹은 가르치려고 의욕을 보이면 보일수록 독자와 멀어진다는 점을 우회적으로 말해준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문학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홍숙 수필 세계가 화려하지 않지만 진정성과 문학으로서 품격을 깐깐하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런 데에서 생성된다.
│문학적 자전│
진실, 한 조각을 뽑는 작업
남 홍 숙
빛으로 가득한 산야다. 나무의 잎맥에도 개울물의 입자에도 빛살이 닿아 있다. 빛은 무지개 빛깔과, 그 이상의 색을 낸다. 빛을 쪼러 온 새가 빛의 색이 고와서 어느 것을 쫄지 주저하다가 나뭇잎이 세고 있던 빛 한 모금 물고 달아난다. 그러자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빛살의 문양까지 떨게 한다. 유년의 어느 날 잎맥 하나를 새가 쪼았을 때 내 심장이 떨렸던 그 풍경처럼.
내 유년은 단조로웠다.
눈앞에 보이는 건 산과 들, 하늘과 개울이었다.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은 동성동본의 친척들이었다. 단조로운 시간과 자연한 공간 때문이었을까. 내 안에서는 아무런 꿈도 발현되지 않고 있었다. 들풀이나 곡식들처럼 소리 없이 커 가고 있었다. 반 시간 정도 걸어서 학교에 갈 때도 아이들 무리에 묻혀서 다니고 있었다.
초등 4년 때던가. 군내 글짓기대회에서 입상을 하고 크레파스와 주판을 상품으로 받았다. 크레파스를 책상 위에 갖다 놓자 아이들은 크레파스 위에 있는 뽁뽁이를 터트리는 재미로 몰려들었다. 왠지 창피했다. 크레파스 주인인 나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얼굴이 발개져 있었다. 그 후에도 글짓기 상을 받은 덕에 스스로 글 잘 쓰는 아이가 되었고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슴에 심은 것 같다. 참나무 씨앗을 품은 나무는 참나무밖에 될 수 없듯이 나의 꿈은 하나였다. more라는 가능성이 아니라 only라는 단일성으로 꿈의 씨앗이 맺히게 되었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마친 시간은 문학에 올인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날 때마다 꼬박 꼬박 일기를 썼고 어딘가에 긴 편지를 자주 보냈다. 신문사와 잡지사에 글을 투고하기도 했다. 일기나 편지를 쓸 때마다, 단어 수가 강가의 조약돌 숫자만큼 된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 국어사전을 통째로 외운다는 말에 솔깃하여 국어사전을 가지고 다니며 외우는 척도 했다. 하지만 머리가 나빠서인지 사전을 외운 기억은 전혀 없다. 참나무의 나이테가 세월이 가면 원을 더하듯이 문학에 대한 시간도 일하고 공부하고 노는 시간에 묻혀서 흘러갔다. 내 속에서 발아된 문학은 어떤 잠재 태를 지니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이를 먹어 갔다.
30대에 들어서 문학을 구체적으로 갈망했고 많은 장르 중에 수필을 선택했다. 내게 시는 난해했고 소설은 허구라서 맘에 들지 않았다. 리얼한 삶을 담는 수필에 매료되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선택하라면 소설이나 시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수필은 세상에 영혼의 나신을 너무 드러내어 내 삶이 가여워지기 때문이다.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리기보다, 수필로써 뭇 독자의 가슴에 다가가 감동 하나 얹어 주기를 기도하며 쓴다.
작은 한마디의 단어, 스쳐 지나치던 풀꽃이 어느 날 각별한 인연이 된다. 그 보잘것없어 보이던 대상들이 내 수필의 알(egg)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알은 하루아침에 새가 되지는 못한다.
내가 충분한 자양분을 섭취하면 할수록 느낌이 강한 ‘수필의 새’로 진화해간다. 그 자양분은 나의 영혼이다. 나는 알을 키우기 위해 때와 장소를 바꿔 가면서 양분을 섭취한다. 내게 건조한 철학과 과학으로만 가득할 때는 거미가 베놈(venom)이라는 독소를 쏘아 제 먹이를 액체로 소화시키듯이 꽃이나 나무를 보면서, 근원에 질문을 던지는 철학과 논리를 적용하는 과학으로 용해한다. 지성으로 경화되어 있는 머리에 감성을 부여하여 중화시킨다. 반대로 텅 빈 하얀 날에는 또다시 책을 읽어 지성으로 무게를 잡는다. 내 영혼을 촉촉이 적시면서 수필 알을 키운다.
그러나 한 달이 훌쩍 지나갈 때도 있고 서너 달이 넘어도 알이 온전히 자라기는커녕 착상조차 안 될 때가 많다. 운이 좋으면 일주일 만에 수필로 태어나기도 하지만 그때는 대부분 미숙아가 된다.
착상이 되고 나면 세상과 알 사이의 수많은 대상과 관계를 맺어 본다. 알은 우주가 되기도 한다. 그 우주를 탁, 깨트려 산산이 부서진 껍질을 만져 보며 촉감을 실험해 보기도 한다. 흩어진 껍질은 파편화되어 아픈 뭇 인생으로도 본다. 그뿐 아니다. 세상 속 수십 종류의 네트워크를 알과 연관시켜 본다. 그러다 지친 나는 심한 몸살을 앓는다.
알이, 높이 비상하는 새가 되길 원한다. 그 누군가의 귓가에 다가가 그가 깨어나길 노래하고 그에게 건강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심어 주는 새가 되길 원한다.
낯선 모습이길 갈망한다. 무작정 튀어 보려고 낯설게 표현하는 건 아니다. 누군가의 영혼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삶의 본질을 보다 더 명징하게 교감하기 위해서다.
글을 쓰다가 머리가 엉겨지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 본다. 비워지면서 상(想)이 잘 맺히기 때문이다. 상이 맺힐 때, 몇 번 되뇌기를 반복하여 날아가지 않게 잘 기억해 두었다가 작품에 옮긴다.
나의 ‘고뇟줄’을 타고 탄생한 수필은 누군가의 시선 아래 반나체의 형상으로 놓여진다. 어떤 독자도 수필을 물끄러미 보는 게 아니다. 명민한 정신을 수필에 고도로 집중시키고 스탠드 조명의 톤도 더 밝게 키우고 본다. 눈을 내리깔고 본다. 그러나 이미 새가 된 수필은 그 앞에서 이제 당당하다. 그의 말초를 자극하기 위해 한 겹 한 겹씩 옷을 벗는다.
그는 벗겨지는 내 수필의 옷을 자신의 지적, 정서적 함량과 비교할 것이다. 아주 가끔은 충격도 받을 것이고 더러는 픽, 하고 조소를 던질 게다. 그러다 은연중에라도 내 벗은 옷들이 그의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거나, 그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긴요한 한 텍스트로서 작용을 하기를 감히 원한다. 그러기를 바라며 나는 절망 속에서도 거듭 수필을 쓴다.
수필을 짓는 것은 내 자아를 좇아가는 영적인 여정에서, 낯선 진실 한 조각을 뽑아 보려는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