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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행복해
매일매일 행복 하다고 질투하지마세요.
누구나 누릴 수 있으니까요.
친구와 오붓하게 한잔 할 때 행복 하고..
아들이 아침 준비할 때 틀어주는 음악이 있어서 행복하고...
Clean and dirty 라는 곡을 들을 때 살아있음에 기뻐합니다.
휴일에 일산 호수공원에 가서 내 다리통보다 크게 자란
비단잉어에게 과자 던져 줄때 행복했습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잉어들이 몰려오더군요.
물론 우리 강아지 두 마리가 항상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있고,
학원 아이들이 내가 그려놓은 여인의 누드 보고 찌찌라고 웃을때...
"야 너희들 찌지 먹고 안자랐냐?
소젖 먹었냐?
우리 딸은 소젖을 멕여 키웠더니 잘 드리 받드라."
"ㅎㅎㅎㅎ"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가 아빠하고 미술 전시장에 갔는데 아빠가 선생님작품 “메두사”
보시려구 할 때에 자기 두 손으로 양쪽 젖을 가렸다고 해서 ㅎㅎㅎㅎ
오후 되면 몰려와서 재잘대며 말동무 해주고 가는 어린 제자들이 있기에...
나 이렇게 즐겁게 산다우.
2004년10월13일
우정
컴도 말을 안듣고..
눈도 별루 않좋구...
신정연휴라 부부동반 여행이다 해외관광이다 야단인데.
왠지 나만 가난해서 부자 양반들 하구 같이 뭉쳐 다니지 못해 혼자 삐져 있었죠.
부질없는 맘고생이니 맘 고쳐먹어야죠.
사실 삐지면 삐질수록 나만 외로워지는데 말여유.
어젠 새집으로 이사 한 친구한테 갔다 왔어요.
속 뒤집히게 부자 아니구 소박하고 맑은 친구.
청량리 현대 백화점에서 크리스탈 양주잔 두개 사구 술은 복분자술 두병 .
선물로 갖구 갔죠.
친구는 이따금 혼자 포도주를 즐기거든요.
청평 댐에 갔을 때 시어머니 친정어머님 함께 모시기 힘들어 하던 친구.
몇해 전에 하늘나라 두 분 다 보내드렸지요.
하늘나라 가신 양반들이 착한 며느리한테 깨끗한 새집 선물 했나 봐요.
늦은 점심먹구 낮잠까지 살포시 자구 해거름엔 식탁에 우아하게 안주 놓고,
조명 드리 우구, 음악 틀구, 같이 쨍그랑 하구 찬-찬-찬- 했쥬.
내 낮잠 깨울까봐 설거지도 안했다는 마음씨 고운 친구, 실은 나 설거지해도 잘자는데..
그리구 시 한수 읊었쥬.
우정은 산길 같아서
자주 찾지 아니하면
잡초가 우거져
그 길은 없어지나니
오고감을 게을리 하지 말라
또 유안진님의 지란지교가 어쩌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어둑한 먼길을 따듯한 전철에서 졸면서 돌아 왔죠.
나 맨날 조는 줄 알겠네요 ㅎㅎㅎ
먼 곳에 있는 친구를 찾아 갑시다.
먼 곳으로 부터 친구가 찾아 왔을때 기쁘지 않습니까? 2005년1월3일
무우꽃
몸뚱아리가 여기저기 거뭇거뭇
험집투성이 못 생긴 커다란 무 하나
냉장고 속이 온통 김장김치로 만원인지라
싱크대 도마옆에서 몇 날 인가 굴러다니더니...
어느날 파아란 잎을 삐죽이 여러개 내밀고 있었다.
아랫도리를 칼로 평평히 도려내어
냉면대접에 물을 붓고 세워 놓으니
날마다 잎을 내고 줄기를 키우더니
마침내 꽃 봉오리를 만들고 기어이 연보라빛 꽃을 피워낸다.
나: "얘가 가을 인줄 알고 꽃을 피우나 봐요".
남편: "봄인줄 알고 피우는 거여".
신기하여 들여다 보니 꽃향기가 그윽한 꿀 내음 이라...
흰나비라도 불러 들이고파 창문을 열어보니
대지는 온통 얼어붙은 겨울인지라
"무우꽃아! 미안하다 나비들이 모두 잠자러 갔구나.
그저 수 십송이 피우고 마는 줄만 알았드니
어머!어머! 수백송이를 피워 내내.
오! 하느님!
당신은 정말 정~말 대단 하십니다.
2005년1월29일
예수사랑
날나리 교인 시절을 꽤나 여러해 (40년)보냈었죠.
교회에서 집사 하랄까봐 진심으로 싫어하고..
절대 헌금 마니 안내고...
십일조 절대 안내고...
주일 아침예배로 딱 끝내고...
신방 오는것 부담스러워 하고...
교회 자꾸 건축하는것 보면 왼지 밉고...
예수가 진짜 하나님 아들인가?
사람들이 추측 한걸거라 생각했고...
나쁜짖 해도 하나님이 금방 벼락 때리는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자신 절대 죄 지은일 없는 착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런데... 그런데...쫌 변화 되었읍죠.
왜냐?
담임목사님 사모님이 친히 성경공부를 1:1 로 갈쳐주러 온신다는 바람에
송구 스러워서 거절 못하고 오시라 했죠.
더구나 사모님의 모습이 넘넘 귀여우시거든요.
지점토인형 같애요.
벌써 두달째 주 1회 성경공부를 했어요.
성경을 아무리 읽으려구 해두 졸려워서 못 읽겠드만
그것두 순서가 있읍디다.
한영성경을 젤 큰 놈으루 사다 놓구
일단 요한복음을 읽었어요.
일부러 소리 내어서 읽었죠.
난 주기도문이 사람들이 만들어서 다듬고 다듬어서 전해 내려온 줄 알았었는데
알고 보니 예수님이 직접 갈쳐주신 것 이더군요.
그리구 예수님이 직접 자기는 하느님아들이라 칭했더군요.
난 그것 두 사람들이 하나님아들이라 짐작 한 것 인 줄 알았었죠.
이것이 꾸며낸 소설이 아니구나.
있었던 일이구나 !
그리구 원수를 사랑하라 는 말을 깊이깊이 생각 해볼때
예수님이 어찌나 존경스러운지 감동의 눈물을 흘렸죠.
좋은 일 만 하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바로 인간들이죠.
그중에 나도 포함 된거라 죄인측이 된거죠.
기독교 방송을 첨 들어 보구 공감을 했죠.
나 예수님 사랑해요!!!
2005년1월25일
장뇌삼
딸의 친구로 부터 장뇌삼 두 뿌리를 선물 받았다.
귀한것 이라고 생각하고 고맙게 받아 남편에게 먹기를 권하였다.
"놔둬!!" 짜증스런 반응 이었다.
무슨 속일까? 현찰이면 좋아 하려나? 사실 현찰을 누가 주면 장뇌삼 사먹긴 어려울거다.
그거 빨리 먹어야 하는데...
딸이 걱정이다.
얼려도 안 되고 썩어도 안 되니 덮고 있는 이끼에 물을 뿌려주고 여러 날을 버티었다.
웬일인지 냉장고에 야채가 자꾸 얼어서 냉장고에 넣질 못했다.
"당신 장뇌삼 언제 먹을 려구 그래요?"
" 그거 먹구 부작용 나서 죽으라구 그래?!!!!!!!!!!"
"누가 그런 것 사 달랬어?"
심장이 벌떡 놀래도록 꽥 소릴 지른다. 기가 막히다.
늬우스에서 장뇌삼 잘 못 먹구 119 타구 갔대는 소린 못 들어 봤다.
오히려 최근 뉴스에서 장뇌삼이 산삼성분하고 꼭 같다는 소린 들었다.
“걔가 산것은 아니래요. 그래도 귀한 것 이니 누굴 줄까? 생각했겠지요.
줄 사람은 많아요. 그중에서 당신이 선택 된 거요".
"가만있어봐 주치의 한테 물어 보구 먹을 테니까".
신경질 난다는 듯이 말한다.
내가 빨리 죽어야지 그딴 소리 할땐 언제구 부작용날까봐 겁은 되게 낸다.
그리구 또 여러 날이 흘렀죠.
내가 안타까워서 들여다보니 이끼 주변에 곰팡이가 보이기 시작 했어요.
" 여보 장뇌삼 주변에 곰팡이가 피니 차라리 말려 둘까 봐요".
" 아 낼 이라두 먹으면 되지 뭘 말려!!!!.
"낼 먹을 테니깐 씻어 놔 봐.
에그머니 ~먹겠다니 그리 반가울 수 가 없어서 깨끗이 씻어 이틀에 걸쳐 먹게 됬답니다
그러니까 2월 5일에 받아 놓은것을 2월 17일에 먹게 되었다.
그 옘병할 놈의 장뇌삼 멕이기 드럽게 힘드네.
2005년2월18일
해질 녘 (나의 생활수기)
새벽 4시! 아침 밥을 지어 아들의 도시락을 싸놓고, 남편이 깰세라 조용히 현관을 나선다.
코끝에 스치는 5월의 싱그러운 새벽 공기가 발걸음을 가볍게 해 주는것같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주머니를 더듬어 돈뭉치를 확인한다.
아직도 풍겨오는 담장너머의 라일락의 향기를 맡으며 골목길을 빠져 나온다
첫차로 동대문 의류 도매시장으로 가서 메모해온 옷가지를 산다.
내 몸보다 더 보따리를 어깨에 메고 다시 인천계산동 나의 가게로 돌아온다.
컵라면 한 개를 먹고 칸막이 뒤의 창고로 들어 간다 .
시간을 보면 아직 8시30분 전후이다.
창고의 벽에는 몇일 전 붙여놓은 노루지가 있다.
130x162cm크기이니 바닥에서부터 한 뼘을 띠어서 붙였으니 내 키 보다 한자는 높다.
4B연필로 뎃생을 한다.
실제 다자란 크기의 옥수수 그림을 채색으로 그리기 위한 밑그림이다.
그리 멀지 않은 옥수수 밭에 이른 아침에 나가 스케치북에 옥수수의 뎃셍을 해다 놓았었다.
“학상 들 가르치는 미술선상님 인가 봐유,
저리 가면 옥수수열매가 달린 놈두 있으니께 그리루 가 봐유"
고맙게도 옥수수 농사짓는 영감님께서 도와주신다.
내키 보다 높은 종이 끝자락에 그릴때 에는 의자를 놓고 올라가야 눈높이가 맞는 것이다.
간판 그리는 사람들이 사다리를 놓고 그리듯이 의자위에서 열심히 여러 날 뎃생을 하였다.
몇일후 화방에 주문해두었던 캔바스가 왔다
나무로 된 문살에 여러겹의 배접을 한 동양채색을 그리는 동양화 캔바스 이다.
100호 캔바스를 받은 나느 새하얀 종이만 보고도 감격해 하였다.
100호라 함은 132cmx162cm 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백지 캔바스를 처음 대했을 때의 기쁨,
어느 정도 진행되어가는 중도의 아름다움,
또 마무리 지어 완성 시켰을 때 의 성취감,
이런 여러 가지의 행복감 때문에 예술의 세계에 푹 빠지는 것이다.
여기 저기서 셔터문 열리는 소음이 나기시작한다.
어쩔수 없이 나도 셔터를 올리고 장사할 채비를 한다.
새로 가져온 옷을 진열하고 밖으로 수백장의 옷을 내놓는다.
거의 한시간반이나 가게문 열기와 청소를 한다.
한숨 돌리고 앉아있을 때 쯤 아들의 등교를 거들어주고 남편이 내려온다.
그리도 잘되던 장사가 IMF 이후 신통치 않다.
남편을 앉혀놓고 잠시라도 그림을 그리러 뒤에 들어가면"아줌마는 어디 갔어요?
하고 손님들이 꼭 나를 나오게 만드니 아예 장사 할 동안은 그림에 손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주로 새벽 장에 가지 않는날 아침 일찍 내려와 작품에 매달리기를 6개월...
새벽6시면 내려와 그림을 그렸으니 6개월동안 남편은 말없이 아침밥을 혼자 차려 먹었다.
붓을 들고 그리는 동안기억의 저편에 있던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 처럼 머리속을 스쳐간다.
나는 어려서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고 7남매중 막내딸이었다.
친정집은 그시절로서는 넉넉한 편이었다.아버지께서는 건설회사 사장이셨다.
계동에 점포가 3개 방이 9개나있는 디귿자 (ㄷ) 2층 집이 우리집 이었으니까,
재동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미술반에 있었고 화가가 되겠다는 꿈은 변한 적이 없었다.
이화여중을 졸업할 무렵 이화여고로 진학할 줄로 믿고 있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하여
중3 담임선생님께 7장의 편지를 썼다.
내용은 부모님께서 진학 상담을 오셨을 때에 연자는 꼭 예고에 가야할 사람 이라고
당부 해 달라는 선생님께 간청 하는 내용이었다.
공부도 열심히 그림도 열심히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열심히 한 덕분에 부모님께서 예고에 가는것을 허락 하셨고 미술과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수석입학생은 대학교를 마칠때 까지 7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강의 장학금이 나왔었다.
그러나 학교측에서 우리집이 잘사는 집이라고 다른 어려운학생에게 그 장학금을 주게 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고3 이 되었을 무렵 우리집은 아버지의 건축업의 고전과 오빠의 사업실패로 나는 미술대학의 꿈을 접어야만 하였다.
미술대학이라는 것이 등록금만 간신히 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졸업후에 어머니께서 분양 받아놓으신 백화점에 나가 열심히 아동복 장사를 하였다.
그러나 장사가 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집 살림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MBC 탤런트가 된 언니와 나 남동생이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갔다.
그러나 병드신 아버지의 치료비와 염치없이도 어머니를 졸라대어
사업자금을 여러차례 가져가는 오빠 때문에 집안은 점점 기울어만 갔다.
내나이 27살 되던해에 3년동안 자리하고 병드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 이듬해에 나는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하였다.
남편은 77년도에 부동산을 하여 큰돈을 벌게 되었다
아마도 집 몇채 값은 되는 돈으로 땅투기를 했는데
정부의"토지투기억제정책"으로 5 년 간이나 매매가 안되어 답답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5년후 고향 친구 동업자인 사람한테 백지 위임장을 써주었다.
그 결과 한푼도 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돈을 없애고 가슴앓이를 하는 남편은 술만 마시고 살았다.
건설회사 임시직도 그만두고 뜬 구름이나 잡으려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집에서 어린 아들과 딸에게 영어동화와 영어 노래, 한문을 가르쳤다.
아이들이 잠이들면 벽에 합판 한장을 기대놓고 수채화를 그렸다.
그때 그린 수채화중 하나가 "그리운 정동골목"이다
아이들은 지금도 그 어린 시절 외운 영어동화를 하나도 안 잊어버리고 있다.
그리고 한문 공부는 내가 붓글씨로 크게 100자씩 써서
단칸방에 있는 미닫이 문에 100자를 써 붙였다.
벽에다가 100자, 미싱앞에 100자, 이렇게 삼백자를 써붙이고 매일 내가 소리 내어 읽었다.
아들이 네 살이었 었는데 나를 따라 읽다가 어느날 갑자기 줄줄 외우게 되었다.
지금도 방안에서 아들이 네 살때 뿅뿅카를 타고 천자문을 달달 외우는 사진을 갖고 있다.
나는 동양화 공부 의 준비과정으로 서예를 하고 있었다.
서예 또 한 나 에게는 빠져드는 공부였다 하지만
또 한번의 가슴 아픈 붓을 놓았다.
우선 당장 생활비를 벌어야 했으니까,
나는 조그마한 가게를 얻어서 악세사리와 수입품가게를 했다.
몇 년 잘 하고있을 무렵 점포의 주인이 가게를 비워달라는 것이었다.
바로 길건너 편에 새건물을 짓고는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돈은 겨우 그 새 건물 임대 보증금의 10%에 불과했다.
89년 늦은 가을 우리는 빚을 얻어 10평짜리 가게의 주인이 되었다.
업종은 "가방" 상호는 "계동가방" 몇 년간 장사가 곧잘 되었다.
아들은 컴퓨터 학원에 보내고, 딸은 피아노 학원에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학원비를 줄때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하고 또 얘기하였다.
"지금은 내가 너희들을 학원에 보낸다 마는 이 다음에 너희들이 커서 돈을 벌 때에는 엄마를 꼭 화실에 보내줘!" 라고 했다.
아이들이 어버이날 쓴 편지 속에
"제가 이 다음에 돈 많이 벌어서 엄마 화실을 꼭 차려 드릴께요" 이 문장은 꼭 들어있었다.
장사가 그런대로 잘 되어서 가게 세를 내고도 빚을 갚아 나갔다.
몇 년간 잘 되던 장사가 근처에 나드리 백화점이 생기고 바로 코앞에 가방가게가
생기더니 매상이 급격히 떨어지게 되었다.
궁리 끝에 의류업 으로 바꾸기로 하고 또다시 빚을 내어 숙녀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계절은 쉴 새없이 바뀌었다.
계절마다 새 물건을 수 백만원 어치씩 해오다 보니 빚은 산더미 처럼 불어났다.
비싸게 가져온 물건은 재고로 남기 일쑤였다.
나중에는 더 이상 빚을 얻을 수도 없었다.
가게를 처분하여 빚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가게에 들어온지 5년 째 되는해였다.
그리고 단골 택시기사한테 가게를 내놓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어느날 새벽 그 기사가 상의를 해왔다.
"아줌마! 아줌마네 가게앞 다이 좀 빌려줘요!"
"다다구리"(손벽치고 떠들면서 파는 행위) 를 칩시다.
그러면 손님이 많이 꼬이고 그렇게 하면 권리금도 더 많이 받을 수 가있지요 !"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도 시장에서 10년이상 경험이 있는터라 "그러면 차라리 그 덤핑 물건을 나를 줘요.
내가 다다구리를 쳐볼게"그렇게 말하고 몇일후부터 덤핑물건을 사기로 하였다.
그때 마침 아들이 졸업하고 찾은 학생저축예금 180만원이 있었다.
그 돈은 전에 들여놓은 아들의 컴퓨터값을 지불 해야할 돈이었다.
만약 컴퓨터 수금사원이 왔더라면 나는 그돈을 내어 주었을 것이었다.
기적적으로 그 돈으로 덤핑장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훨씬 여러날 뒤에 컴퓨터 수금사원이 오게 되었다.
그때에는 이미 컴퓨터값을 주고도 남을 정도로 주머니가 두둑 했다.
유능한 땡칠이(물건을 땡쳐 오는 사람)를 알게 되었다.
땡칠이가 첫날 바지 150장을 주었다."아줌마 이걸 가져가서 떠들면서 팔면 아마 한 70장 정도가 팔릴꺼요". 라고 말한다.
구입한 가격은 4000원 판매가격은 6000원이다.
나는 물건을 펼쳐놓고 용기를 내었지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6000원이요! 6000원 바지가 한 장에 단돈 6000원! 구경하고 가세요.
살림에는 눈이 보배요. 날이면 날마다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자- 입어보고 사세요. 사가시면 오늘 돈 벌어가는 겁니다!"
손님이 하나 둘 모여들어 물건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신바람이 나자 점점 목소리는 커졌다.
사람들은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가게 안에는 바지를 입어 보려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바지는 몇시간 만에 바닥이 보였고 총 130장이나 팔려버렸다.
벽에 걸려있던 다른 물건 까지도 다 팔려 버렸다.
94년 2월 말 남편은 제사 보러 정읍에 가 있을때였다.
나는 전화를 남편에게 걸었다.
“여보! 빨리 올라와요!. 손님이 너무 많아요!.
나 혼자선 안돼요. 당신이 있어야 겠어요."
"정말이야? 정말?"
남편은 믿을 수가 없다면서 놀라서 울고 있었다.
바로 몇일 전에 점포를 내놓겠다고 했었으니 믿을 수 가 없을 수 밖에.....
남편과 함께 열심히 덤핑장사를 하였다.
매일 새벽 4시면 나는 일어나서 동대문으로 물건을 받으러 나갔다.
매일 매상이 백 만원을 넘어 돈세기도 귀찮았다.
월 소득이 오백을 넘으니 4식구 생활비를 쓰고도 월300만원씩 저축이 되었다.
1년 만에 대추나무에 연 걸리듯 했던 빚을 다 갚고 나니 숨통이 트였다
하늘이 도운 것 만 같았다.
어떻게 이런 기적 같은 일이 나에게 일어난단 말인가?
그리고 2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방 3개가 있는 아파트를 샀다.
20년 묵은 가구를 몽땅 새것으로 바꾸고 아이들 방에 침대와 책상 옷장을 사주었다.
96년 3월 이었으니 내 나이 47살이었다.
나하고 딸은 7년간을 가겟방에서 전자 요에 몸을 의지하며 살았었다.
딸이 그 방에서 고2 까지를 보냈다.
딸하고 나는 후일 가겟방 을 생각하면 눈물지을 것이다.
아들과 남편은 단칸방에 자고 아침이면 나만 부산하다.
가겟방에서 딸의 도시락 싸놓고 집으로 가서 아들의 도시락 싸야 했다.
이제 집을 샀으니 안방을 부부의 방으로 쓰게 되어 좀 어색하기도 하여,
"우리 아파트에 이사 가도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방을 쓸까?"
물으니 중3 아들은
"아니요. 어머니 하고 아버지가 안방 쓰세요" 하고 말한다.
돈벌고 집을 사게 되어 7년 만에 신혼 생활까지 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누추한 곳에서 살다보니 깨끗한 아파트가 나의집이란 것이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남의 집 에 잠시 얹혀 있는 것 같아 조심스러웠다.
이게 내집 인가? 하는 신기함이 무려 육개월 이나 갔다.남편은 하도 새집으로 이사를 오지 않아서 내가 데리러 갔다.
"싫어, 싫어. 그 집은 내 집이 아니야 김연자네 집이야. 이러면서 오질 않았다.
모두들 이사 나가고 곧 헐리게 될 으시시한 집에 혼자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 취한 남편의 손을 잡고 벼개를 옆구리에 끼고 아파트로 데리고 왔다.
무슨 마음에서 였을까? 자기보다 내가 더 많이 애쓴 것이 미안해서 였겠지...
그러나 내가 새벽장을 갔을 때 아들의 등교를 보살폈고 온갖 일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장사가 잘 되기를 4년이 지나고 IMF가 왔다.
북적이던 시장은 한산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비상금 까지 통장에 두둑 하니 겁날 것이 없었다.
위기가 기회다 싶어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 동양화를 배우기로 했다.
예고 동창생 홍대 김태호 교수 에게 전화로 상의를 하였다
김태호 교수의 안내로 홍대로 동양화 공부를 다니기로 한 것이다.
지금도 잊지 못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5개월 이나 기다리고 기다려서 9월 3일부터 홍대에 첫 수업을 하러가는 날이 다가왔다.
그러나 9월 2일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119를 타고 인하대학 병원으로 가게 되었다.
7시에 검사와 함께 수술을 하게 되었다.
한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술이 순조롭게 되어 목숨을 구사일생으로 건지고 남편은 중환자 실에 누워 있었다.
누워있는 환자에게 물을 떠먹이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일 홍대에 가야 하는데...
아마도 미술공부 하지 말라는 신의 계시 인가 봐요"라고 했드 니 뜻밖에도 남편이
"당신 내일 학교 갔다 와! 첫날인데 빠지면 어떻게 해.
어차피 중환자실 보호자는 밖에 있어야 하니까, 간호사한테 부탁하고 학교에 갔다와!"
나는 너무나도 머리 이 혼란했지만 그 다음날 학교에 갔다.
9월 오후의 뜨거운 태양은 내리쪼이고 특히나 신촌은 왜 그리 덥던지..
버스정거장을 헤매는 나는 꼭 미친 사람만 같았다.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미쳤나봐! 아빠는 중환자실에 눞 혀 놓고..."
"엄마! 미쳐야 뭐가 되는 거야!" "미쳐야 되"
돌아오는 전철 속에서 남편과 딸이 고마워서 남 몰래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었다.
홍대에서 채색을 1년 배우고 국전에 출품하려는 욕망으로 100호짜리를 그리게 된 것 이었다.
난 오직 나 홀로 옷가게의 창고에서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아침마다 작품에 매달리기를 6개월.
그동안 남편은 아침식사를 물론 혼자 하였지만 한 번도 불평 하지 않고 나를 격려 하였다.
"당신 작품이 최고야!" 남편도 채색화에 빠져있었다.
술이 좀 취 했을때 나의 작품을 바라보며 눈물지었다.
“저게 당신이 그린거야?” 정말이야?“
99년 10월 50살이 되는 내 생일날 나는 제18회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출품을 하였다.
작품명은 "해질 녘" 노을 진 하늘 밑에 있는 옥수수 밭 의 풍경 이었다.
어떤 친구가 채색 겨우 일 년 하러 다니다가 국전에 낸다고 어이가 없어 했다.
남들은 10년 공부를 해도 떨어지는 판이란다.
몇 일후 새벽 신문에 난 “대한민국미술대전합격자발표”를 보고 나는 소리쳤다.
"여보! 합격이야! 합격!" 잠자던 남편이 놀라서 마루로 뛰어나왔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둘이같이 소리 내어 울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혹시 동명 2인이 아닐까? 아침 9시 가 지나 한국 미 협으로 전화를 걸었다.
접수번호까지 확인하고 그때서야 형제자매들 에게 전화를 걸어 기쁜 소식을 알렸다.
경사가 겹쳐 아들이 연대에 합격을 하였고 나는 경기미전에 인물화로 특선을 하였다.
점점 의류경기가 없어지고 재래시장의 상인들이 하나둘 떠나갔다
의류업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에라 모르겠다“.
죽이 되든 밥이되든 죽을 때 까지 그림이나 그려보자!"
창고에 수천장의 옷을 끌어 내었다.
그리고 옷을 몽땅 쎄일로 처분해버렸다.
유리문을 다 열어젖히고 나는 빈 가게에서 마음 놓고 큰 그림을 그렸다.
그때 그린 그림이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이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구경을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옷장사 아줌마가 웬일 입니까?"
헤일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나의 작품을 구경 하였다.
그 놀라운 시선을 보는 것은 큰 기쁨 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런 말을 하였다
“대단해” “놀라워‘
너무 칭찬을 많이 받고 보니 나도 앞으로 남을 칭찬해 주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어떤 전시회도 그런 광경은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옷장사인 나를 가엾게 보던 부잣집 여인까지 내 앞에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상담을 청해왔다.
그리고 수 십 명의 학생들이 그림을 배우러 오게 되었다.
"열린 미술 교실" 이렇게 써 붙였다.
옷장사로 꾸려가던 살림은 어느듯 수강생의 수업료로 꾸려가게 되었다.
값비싼 강남 컴퓨터학원에 접수 했다고 심하게 야단맞고 나간 딸 한테서 전화가 왔다.
인하대학교 지리정보학과에 학비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다고.
신기한 것은 하느님이 계시면 옛날에 놓쳐버린 7년 장학금이 나의 아들이나 딸한테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기도 비슷하게 중얼 거렸었는데
한 시간도 채 안되어서 딸에게 2년간의 대학원 장학금이 나오게 된 것이다.
70세 연세인 엄마 같은 큰 언니에게 메일로 소식을 전하였다.
눈물이 흘러내려 편지를 쓸수가 없었다.
온 집안이 경사가 겹쳐 축하받기에 정신이 없었다.
요즈음 살아있음을 느낀다. 살아있는 동안 좋은 작품을 열심히 그려 놓아야지...
매일 매일 이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남편은 기쁜 마음으로 나를 도와주느라 바쁘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마음속으로 외친다.
"나는 그림을 그려요! 죽을 때 까지 그릴 꺼 예요!
죽고 난후에 내 그림을 알아 줄 지라도 혼신의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릴 겁니다!!!"
2003년11월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