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날자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방어진의 어느 유흥가에서
두 후보는 후보 통합을 알렸고
통합방안은 여론조사 방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여론조사 방식에서 앞선 사람이 후보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밤에
나는야 술 마시느라 자지 않고 있었지만
전 국민의 반 이상은 잘 무렵 밤 10시 이었던가..
그렇게 한쪽에서 후보 통합을 일방적으로 파기 선언을 하였고
어쩌면
우리나라의 그 시기에는 그렇게
나라의 큰 어른을 뽑게 될 운명이었나 보다.
그렇게 선거가 치루어졌고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하루만에 번복 덕분인지
아니면 그렇게 불행의 단초였는지...
세상에 욕구가 없는 사람이 나라의 아버지가 되겠다고 나서겠는가???
온 세상의 모든 후보는 나름대로의 욕구가 이룩하겠다는
구체적이거나
막연하거나
그렇게 나름대로 꿈과 목표를 가지고 출사표를 던진다.
대의 민주주의 에서
직접 선출하는 방식은 정말로 신기하기도 할 정도로 기묘하지만
지금껏 이렇게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 직접 자신의 의사를 나타내어
머리를 정하는 방식
그 절묘한 방식의 그 신출함에도
수천년 인류 역사에서
희랍의 민주주의 방식이나
로마의 원로들의 의견 토출 방식때 부터
내가 하겠다는 지원자가 끊임없이 나타나
나름대로 자신의 목적과 목표 방법을 제시하고 출사표를 던져왔다.
얼마전 부터 저는
선게에 공탁금제도가 없었다면
"아마 선거구마다 한 만명이 출마를 할것이다."
아니 공탁금 제도가 있다손 치더라도
선거후에 공탁금을 득표율에 상관없이 돌려 준다면
그래도 " 한 만명이 출마 할 것이다."
물론 저의 그 특이한 과장의 표현일 것이다.
사회 첫 발을 내 디디면서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상태에서
현장을 자원하였다.
그것도 일이 가장 힘들다고 하는 마지막 공정의 공장을 자원하였다.
스스로가 지금껏 무엇을 해 본적도 없고
해 보려고 노력도 해 본적이 없는 무능력의 표상인 스스로를
조금이라도 충실해 지기 위하여..
그렇게 시작한 현장생활은 처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우선 사람과의 관계를 하여 보질 않아서 서먹서먹하고 도무지 내키질 않았다.
임을 보아야 뽕을 따던지 말던지 할 터인대
몸과 마음이 다가 가질 않으니...
나름대로 곰곰히 생각하였다.
30년 가까이 살아 오면서
스스로 무엇을 제대로 해본 일이 하나도 없고
사람들과의 교류도 해 본 일이 없고
더 더욱이나 지시나 명령
복명과 전달 나아가 승화..
그렇게 모든것이 겉 돌아가고
허무한 생각마져 들기 시작하자
지병과
허리 통증
두통 까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지병이라 해봐야
중학생때 테니스장 롤러에 오른쪽 발이 끼어 삔적이 있는대 그때 완치 하지 못하고 넘어간것
군대에서 얻은 훈장인 무좀과 치칠..
발등의 탈골 통증이 그렇게 되 살아 나니
도무지 걸음걸이가 쉽지가 않아
마침 오래전에 그 통증으로 어머니가 안내하신 혜인당 한의원
전농동 로타리에 자리 하였던 그 한의원
어머니의 성화에도 저는 그 때까지 한방의 효력에 대하여
단 1%의 믿음은 갖고 있질 않았다.
아니 그 의학이라는 것에 대한 불신이 너무나 커서
사기꾼집단 정도로 보아왔던 터이다.
들어선 곳
안에는 간이 침대가 있었다.
누우라길래 엉겁결에 누웠는대
어딘가에 침을 놓는듯 했는대
그리고 30여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침을 빼고 일어나라 하길래 일어났고
발을 디뎌 보라 하여 디디니
조금전 엉금엉금 기어 들어왔는대
전혀 아픈것을 못 느낄 정도..
걸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내일 다시 오라고 하였지만
그 다음날에도 전혀 불편함을 못느끼고 통증도 없어
그 이후로 한번도 이 병으로 병원을 찾은적이 없엇다.
신입 사원
이렇게 아무런 생각도 목적도 목표도 없는 한 아이가
이렇게 공장에 빨려 들어 갔다.
그때 저는
일생에서 처음으로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모든 것에는 의미와
모든 일에는 방법이
모든 논리에는 개념이
모든 인간관계에서는 작용 반작용
모든 세상의 몫은 자신의 노력
등
그렇게 모든 것의 개념을 단순화 할 필요로 하였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복잡 다단한 관계를 처리할 능력도 방법도 없었다.
지금의 기억으로는
제일 시급한 것이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지 가 제일 급선무..
근무 초기부터 모든 것의 상황을 하나 하나를 수치화 하여 보았다.
우선 현장근무자의 인적사항 부터..
연령,학력,부모관계,형제관계,출신지,결혼여부,시급,재산정도,자격증,군복무,현주소,취미,특기 등
모든것을 수치화하였다.
그리고 나중에는 근무성적에서 부터
그 개개인의 업적등도 수치화 하여 나아갓다.
고졸 75%
이 수치는 제게 어떤 명제를 주었고
방법론도 마련해 주었다.
일을 주는 사람은 방법론 제시
일하는 사람은 제시한 방법대로 시행하여 결실을
그리고 업무외에는 철저히 직접,평등,함께 를 원칙으로
모든 가정을 방문하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결혼후 집들이는 말할것도 없고
이사,돐,부모님 회갑,형제 결혼,심지어는 백일까지
이외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밤을 함께하였다.
이일이 잦아 지면서
그 악착같은 질김에 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하는 것이 않하는 것보단 낫다라는 생각 밖에 하질 못했다.
사석에서 빼 놓지 않고 들은 얘기로는
저 같은 사람이 함께 자리하고
권하는 술잔을 거부하지만 않아도 그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겠다는 생각..
오지 그하나의 생각으로 인하여
일과후
일년 365일
수십년
그렇게 살아왔다.
몸에서 술이 받아주니 그렇게 하였을게다.
언제 부터인지는 기억이 없지만
어릴때 정말로 터무니 없을정도로 허약하고
특히나 빈혈이 많아
학교가다가 쓰러지길 여러 차래
그렇게 허약하고 나약하던 제가
그렇게 생산 현장에 밀려 들어갔고
일상을 어떻게 살아 가야 할 것인가 하는 명제 앞에 택한
직접,평등,함께 를 지키려 한다.
그것 때문에 얻은 오해,기피,누명이 수없이 많았겠지만
그것 때문에 얻은 동의,함께,격려 또한 수없이 많았을 터이니
富는 그 사람 갖고 있는 능력 만큼만 가져야 한다..
권력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게다.
권력은 아무리 욕심을 내어도 그의 한계 이상은 가져지지도 않는다.
억지로 가지려 한다면...
아파질 것이다.
한계 밖의 부를 가진다면..
불행이 찾아 올 것이다.
아니 결혼식에 오기로 하였던 권용목씨가 오질 못하여
피치 못할 일이 있었다라고는 하였지만
제 스스로가 너무 무관심 하였었나 보다.
그리고 얼마 후에 들은 그의 사망 소식은
20살 20살 후반의 청년들이 그렇게 애써 왔던 그 시절의 뜻이
이렇게 사라지게 되는구나 하는 깊은 시름으로 빠지게 만든다.
지난해 만났을때 좀 더 구체적으로 상의하여
나서서 대안을 만들어 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자책감이 엄습해 온다.
옛에 영어생활 중
몰래 면회다니던 시절...
사내에서 그는 일하는 사람의 인권에 대하여 정말로 많은 부분에 대해 제자리에 놓아달라 하였는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금까지도 제게 전화하는 ㅊ 씨 한번 찾아가야지
생각만 하였지 실천을 못하고 있다.
무엇이 우선인지 ..
그것 조차 모르고 살아 가고 있는것 같다.
모두들 죽었다고 알고있는 ㅊ 씨
어쩌면 그렇게 모두 경멸의 대상이었던 관리자인 저를
그는 이렇게도 한가닥 남은 기억의 끈을 아직도 제게 이어오고 있는대
얼마전 부재중 전화에 답신을 하지못한 이후로 전화 없어
항상 밟혀지는대
오늘은 전화나 해 보아야 겠다.
........................................
!!!!!!!!!!!!!!!!!!!!!!!!!!!!!!!!!!!!!!!!
~~~~~~~~~~~~~~~~~~~~~
그 다음날 투표 결과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성공하였다" 라는 평가에
지금껏 순탄 하였지만 "가장 불행한 길에 들어선 것 같다" 라는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은 얘기가
지금껏 목에 걸려 있다.
오호라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ㄱㄱㄱㄱㄱㄱㄱㄱㄱㄱ
이 나라에 어찌 이런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는가!!!!! !!!!!

세상의 모든이의 죽음은 위로 되어져야 합니다.
더욱이나 우리 나라의 전 국부게서 서거 하셨읍니다.
모든 사람은 논쟁을 그만두고
모두 모두 나라의 앞일을 걱정하며
깊은 조문을 해야겠읍니다.
개인의 생각이 아무리 다르다 하드라도..
첫댓글 가슴에 와닿는 글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종하체육관 분양소를 찾았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고 또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