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셈의 교환 법칙
지난 1년 반 동안 되든 안 되든 영어로 살아 왔고, 영어 잘하는(?) 미국 녀석 동료들의 맥주 마시러 가자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1년 내내 야간 학원에 결석 한번 안하고 꼬박꼬박 다녔는데도 (물론 복습은 한 적이 없지만), 아직까지도 계속 실수하는 것이 “Yes” “No” 입니다. 부정문 형태로 질문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판단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Yes/No 이야기는 동양 사람들한테는 영원한 숙제인 것 같습니다.
간혹 동/서양 간의 사고의 차이 때문에 당황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다음 이야기는 동양과 서양의 사고 방식 차이 때문에 아이 학교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먼저, 여러분도 아래 그림을 보시고 3개의 네모 칸에 들어갈 숫자를 써 보세요 (고민하시지 마시고 인형이 20개니까 간단하게 20초 만에 푸십시오. 초등학교 2학년에서 곱하기의 원리를 배우는 문제입니다).
언젠가 퇴근을 했더니 아이가 인사도 안하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학교에서 수학 쪽지시험을 보았는데 빵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엄마가 집에서 가르쳐 준대로 했는데, 선생님은 20 문제 모두 X 표를 쳤다는 것입니다. 첫째 녀석은 여기 학교에서 이제 2학년이 끝나 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3학년 1학기), 요즘 한창 곱하기의 원리를 배우고 있습니다. 왜 0점인지 유심히 보았더니 제 눈에는 틀린 것이 없고, 100점이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위 그림에서 3개의 빈 칸에 무슨 숫자를 넣었습니까? 선생님이 왜 모두 X 처리를 했는지 저는 잠시 고민을 한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4개씩 든 바구니가 5개 있다고 생각했고 (4 X 5 = 20 순서로 채웠고), 벨기에 선생님은 5바구니에 각각 4개씩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가 봅니다 (그래서 정답은 5 X 4 = 20 순서). 선생님은 이 그림을 보고 4개짜리가 5바구니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가 이해가 가지 않는가 봅니다. 문제는 어떻게 아이에게 설명을 해주는가 입니다. 우리 가족은 유럽에서 영원히 밥 먹고 살 사람들이 아닌데, 유럽식으로 5 X 4 로 생각하라고 하면 한국에 돌아가서 또 혼돈을 일으킬 것 같고… 한국에서는 4 X 5 가 맞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하라고 하자니 지금 당장이 문제이고… 결국 최종적으로 내린 선택은, 앞으로도 계속 “생각”은 4 X 5 로 하고, 벨기에 학교에서는 종이에 적는 순간에 순서만 바꾸어 적으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날 또 이런 종류의 문제로 쪽지 시험이 있었는가 봅니다. 퇴근해서 집에 가니까 아이는 자랑스럽게 한마디 합니다. “아빠, 종이에 적는 순간 순서를 확 바꾸어서 적었더니 이번에는 선생님께서 잘 한다고 하셨어요.” 나중에 우리 아이가 곱셈의 교환법칙이 성립된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면 벨기에 선생님을 어떻게 평가할 지 모르겠습니다.
유럽 대륙과 북미 대륙 (우리나라)간에도 사회 시스템의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서는 건물 층을 세는 방법과 숫자에서 천의 자리를 표기하는 방법입니다. 여기 유럽은 건물에 ?2, -1, 0, 1, 2처럼 0층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1층을 여기서는 0층, 2층을 여기서는 1층이라고 합니다. 이 정도는 좀 지내다 보니까 익숙해 졌는데,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되는 것이 숫자의 천자리 표기 방식입니다. 유럽에서는 천의 자리 표기는 마침표(.)를, 소수점 표기는 쉼표(,)를 사용합니다. 공공 기관, 은행, 상점 등에서 숫자를 표기할 때 모두 이 시스템을 따르기 때문에 돈을 다룰 때 조금 주의해야 합니다.
작년에 여기 도착해서 중고차를 계약한 후 잔금을 직접 업자의 계좌로 transfer 시킬 때의 일입니다. 큰 돈을 보내는 것이니까 제 딴에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저와 상대방의 계좌번호와 “265,000 BEF”를 아예 인쇄를 해서 은행 창구 직원에게 내밀었습니다. 잠시 후, transfer 직전에 제가 sign 해야 하는 confirmation sheet를 보고는 수정을 요구해야 했습니다. 그 용지에는 265,00 (265 프랑) 이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265.000,00 (2십6만5천 프랑)이라고 수정을 해야 했습니다.
유럽에서도 미국식처럼 천의 자리 표기를 쉼표로, 소수점 표기를 마침표로 하는 곳이 있는데, 바로 과학기술 분야입니다. 실험 데이터 정리나 논문을쓸 때는 유럽에서 발행되는 journal 이나 proceedings 이라 할 지라도 미국식을 따릅니다. IMEC에서 유럽 출신 사람들이 meeting 시간에 발표하는 자료를 보면, 미국식을 잘 따르다가도 어느 페이지에서는 갑자기 유럽식으로 숫자를 표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미팅 직전에 시간에 쫓겨 정신없이 자료를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유치원부터 영어 알파벳을 필기체로 배우기 때문에 필기체가 생활화 되었고 우리나라에서 쓰는 필기체 스타일과 또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hand writing 한 글을 제가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imec 내의 누군가가 제가 찾아가고자 하는 곳의 약도를 그려 주면서 주소를 적어 주면, 제 스스로 무슨 spelling 인지 완전히 알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꼭 한번씩은 “이것은 무슨 spelling 이냐고” 되물어 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옆에 앉아 있는 프랑스나 독일 assignee에게 보면 주면 그 녀석들은 신기하게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spelling을 정확히 읽습니다.
유럽 사람들의 hand writing style과 관련하여 진짜 조심해야 되는 부분은 “1” 자와 “7”자의 구분입니다 (미국도 유럽과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아래 보인 예에서 보듯이 1에서 꼭지에 아무것도 없으면 1자가 아니고 slash(사선)로 간주하며, 1자에는 반드시 꼭지에 한 획이 더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기서 많이 실수하는 것 중의 하나가 7자를 쓰면 아래 그림에서 one 의 둘째 스타일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one 의 셋째 스타일로 1을 주로 쓰며, 이렇게 1자를 쓰는 사람들은 글씨에 멋을 잔뜩 넣는 “달필가” 축에 드는 사람들입니다. 한편, 7자에는 오른쪽 다리에 “반드시” 한 획을 더 그어주어야 합니다. Slash에 한 획을 더 그어 주어도 7자로 읽습니다. 한국에서도 7자를 이런 식으로 쓰는 분들이 있어서 별로 중요한 것 같지 않지만, 유럽에 출장 오셔서 이렇게 유럽식으로 쓰지 않으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입니다.
작년에 어느 분이 여기에 1년 사시다가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7 자의 오른쪽 다리에 한 획을 추가하지 않아서 낭패를 당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쓰고 남은 몇 푼의 돈을 한국의 자기 계좌로 송금을 의뢰했습니다. 송금의뢰서에 싸인한 후 집에 와서 우연히 송금의뢰서를 유심히 보고는 뒤로 넘어 졌다고 합니다. 자기는 윗 그림에서 중앙의 one 같은 글씨로 ***7*** 라는 식으로 계좌번호를 손으로 써서 창구에 주었는데, 인쇄된 송금 의뢰서에는 입금 계좌번호가 ***1*** 로 인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출국일자는 곧 다가오지, 이미 송금한 돈은 한국에 가서 계좌번호와 소유주가 일치하지 않아야 다시 되돌아 온다고 하지… 7자 다리에 붙어야 할 막대기 하나 때문에 한국에 있는 은행에 국제전화하고 하는 식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숫자의 writing style 이나 천자리 표기 등은 생활에서 돈이라는 것과 직결되기 때문에 유럽에 출장 오시는 분들은 한번쯤 명심하셔야 합니다. 유럽에는 한국보다 IT 산업이 덜 발달되어서 영수증 발급 등 아직도 손으로 직접 글씨를 쓰는 것을 생활 속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2002. 07.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