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터키, 그리스 순례기 11- 팔미라 3
기도해 주신 덕분에 4박 5일 피정 잘 다녀왔습니다. 아주 좋은 시간이었지요. 나중에 피정 장소였던 Prince of Peace Abbey라는 분도회 피정집에 대해 나눌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20 세기 인류 최대의 발견인 사해의 문서들이 있는 '꿈란의 대발견'이 우연히 베두인 양치기 소년들에 의해 시작되듯이 팔미라 유적의 발견도 한 여인이 밭을 갈다가 땅속에 묻혀 있는 석판 하나를 발견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팔미라의 발견'이 바로 '꿈란의 대발견'에 이어 20 세기 두 번째의 대발견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원형극장 정면
팔미라 유적의 발견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실크로드가 이곳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것이지요. 1877년 독일 학자 리히트호펜이 중국~중앙아시아~서북 인도 사이의 교역로 연변에서 고대 중국의 비단 유물이 발견된 사실을 중시해 이 길을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센’ 곧 ‘실크로드’라고 지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독일의 동양학자 헤르만은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 동쪽 해안의 팔미라까지 이어지는 오아시스 곳곳에서 중국 비단 유물이 발견된 사실을 내세워 실크로드, 우리말로 비단길을 팔미라로 이어지는 지중해 연안까지 연장하게 된 것이지요.
이름 모르는 어느 신전의 석주
성모상처럼 보이는 돌
제가 사진에서 팔미라의 상징이라고 한 개선문을 중심으로 동서로 뻗은 너비 11m의 열주도로는 원래 길이가 1100m나 된다고 하는데, 아직 4분의 1도 채 발굴이 되지 않았지만 양쪽에는 높이 솟은 코린트식 석주가 수없이 늘어서 있는 것을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치 개선문으로 돌아가는 길
요한나 수녀님과 아이들
위의 사진은 요한나 수녀님께서 아이들에게 붙들린 장면입니다. 결국 물건을 사지 않는다고 꼬집히시고 아프다고 말도 못하셨지요. 하하.
팔미라의 원형 극장에서 가수로 데뷰하신 이옥순 요한나 수녀님
가이드 말에 의하면, 기둥의 위쪽 끝에는 돈을 많이 낸 부자들이 기증의 표시로 자기들의 얼굴을 새겨 만든 석상을 붙였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그런 기부금으로 그런 석주들을 만든 것이지요. 지금은 석상들은 거의 다 떨어져 나가고 석상을 얹으려고 만든 받침대가 약간 튀어나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얼굴이 곧 이름이었고, 이름을 새겨 주어야만 돈을 기부하는 것은 예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나 봅니다. (물론 이름 상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홍천 영혼의 쉼터'에 기부해 주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늘 감사한 마음이지요. 그래도 이름 새겨 드리기를 원하시는 분들 이름 새겨 드릴 터이니, 안심하시고 많이 기부하시기 바랍니다. 하하.) 부자들은 주로 교역 대상들이었지요. 받침대 밑에 그들의 공덕을 찬양하는 명문이 그리스·팔미라어로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팔미라인들이 얼마나 교역을 중시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증거도 되지요.
제가 팔미라의 상징이라고 했던 아치형 개선문이 로마식 도로의 기점이지요. 200 A.D년 경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고 하네요. 1930년 복원되었다고 하는 이 아치형 개선문 193년에서 211년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던 세베루스의 기념아치라고 합니다. 양쪽에 출입문 달린 개선문에 들어서서 열주 도로를 따라 나가다 보면, 오른쪽에 293~303년 경에 지은 것으로 추측되는 목욕탕이 있고, 좀 더 가면 왼쪽으로 원형 야외극장이 나옵니다. 전형적인 로마식 극장이고 비교적 보존이 잘 된 극장입니다. 양 옆에는 소음 차단벽도 설치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순례자 중의 한 분이신 심태년 헬레나님이 기가 막힌 노래 솜씨를 뽐내었지요. 이어서 우리들의 성가 대장 요한나 수녀님도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우리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극장의 맨 꼭대기 오른쪽 끝에 가서 들었는데 그 울림이 대단하더군요.
극장 바로 곁에는 원로원 의사당이 붙어 있고, 당시의 세관으로 쓰였던 건물이 있었고, 밖으로 나오면 아고라, 시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시장에서 나오면 커다란 탑 모양으로 된 또 하나의 신전 기둥이 인상적입니다. 그 기둥의 석상 하나는 성모상처럼 보였습니다. 그곳에서 무더기 사진을 찍었고, 천천히 옛 로마식 거리를 걸어나와서 뙤약볕 속에서 버스로 갔습니다. 다리가 아프시기도 하지만 용감한 어느 여성께서 베두인의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지요. 하하. 잠깐 버스를 타고 간 곳은 시장 터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에 무덤의 계곡이 있다는 설명을 들었던 곳, 바로 무덤 계곡이었습니다.
가장 보존이 잘 된 무덤 엘레벨 무덤으로 이동하여 잠시 내려 사진 한 장씩 찍었지요.
엘레벨 무덤
팔미라 무덤군은 지상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지하묘도 있다고 합니다. 지하묘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1990년 팔미라유적 발굴조사단은 '지중 레이더'라는 최신기술을 이용한 탐사로 '동남 묘지'라는 A∼E까지의 5개 지하묘를 발굴하였다고 합니다. 널방의 전체 길이는 약 18m이고, 돌계단을 이용하여 널에 이르는 길이는 30m나 된다고 하네요. 널방 제일 안쪽에는 이 무덤을 건조한 사람과 그 가족의 돌널 3개가 ㄷ자형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그 뚜껑 위에는 가족의 연회를 나타내는 등신대의 조각이 장식되어 있으며, 무덤은 대개 가족묘의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합니다.
무덤은 대개 정방형의 모습이고, 멀리서 보면 그냥 탑처럼 보입니다. 계단 형태의 기단 위에 벽돌을 쌓아 올린 것입니다. 언급한대로 엘레벨 무덤이라고 불리는 무덤이 가장 보존이 잘 된 무덤인데, 이 무덤은 128년에 건조된 것임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시간 관계상 무덤 내부를 들어가지는 않았고 외부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무덤 계곡은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당시 이곳에 살았던 라바티안인들은 사후 세계를 믿었기 때문에 사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무덤을 두고 수시로 찾아갔다고 하네요. 팔미라 무덤군의 특징은 가족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화려했던 팔미라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272년 이곳을 지배하던 제노비아 여왕이 로마 황제 아우렐리우스에게 패배한 후 다시 재건이 되지만, 크게 빛을 발하지 못하다가 서서히 역사 속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16만평에 달하는 거대한 유적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것은 11세기였다고 합니다.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완전히 매몰돼 버린 것이지요.
솔로몬이 말했다고 하네요.
"이 세상의 영광이 아무리 크고 화려할지라도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다.”
아직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인 팔미라. 복원 중에도 방치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안타까운 유적 팔미라는 지나가는 나그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인장 하나를 새겨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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