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이 주로 창작활동을 한 1935년 이후 해방이 되기까지는 우리민족사상 가장 혹독한 시련기인 일제 말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에 일제는 대륙정복의 야심을 갖고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소위 15년 전쟁을 도발하게 된다. 이에 따라 그들은 조선을 대륙정복의 전진 기지로 삼고 전쟁에 소용되는 모든 물자와 식량, 인적 자원들을 약탈해 가게 된다. 일제의 가혹한 수탈로 조선의 현실은 극도로 피폐해져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는 농민이 급증하게 되며, 이러한 현상은 단지 경제적인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농경생활을 기반으로 한 우리 민족의 공동체적 삶과 풍속도를 파괴하는 민족적 위기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일제말기에 가해진 일련의 황국신민화정책은 우리의 민족성마저 빼앗기 위한 악랄한 것으로써 문인들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에게 역사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안겨주기에 모자람이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민족의식의 함양을 중시하던 오산학교를 졸업,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신문사 편집인과 교사를 두루 거쳤던 백석은 지식인이자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이러한 역사의 질곡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안정된 직장과 고향을 등지고 만주일대를 유랑한 삶의 궤적이나 직장에 있을 때도 끊임없이 유랑 길에 오르곤 했던 백석의 행보는 물론 기질적인 면도 있겠지만 이러한 당시의 상황과도 결코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느 누구보다 토착어나 토속적 세계에 깊은 천착을 보이던 시인이었기에 강요된 근대화로 인한 전통세계의 파괴는 감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지식인으로서의 백석이 겪어야 했던 방황과 회의, 그리고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 그는 어떠한 방식으로 현실과 맞서며 어떻게 절망을 넘어서고 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춰 그의 작품세계를 분석하고자 한다.
Ⅱ. 상실감을 통한 현실인식
백석은 단 한 번도 구체적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은 작가이며, 이 현실에의 관심은 백석 시의 특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기 작품집인 『사슴』이 비록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여 평화스럽고 자족적인 토속세계를 형상화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으나, 소설 「마을의 遺話」나「여승」「팔원」 등의 몇 몇 작품들은 그의 시들이 어떠한 인식적 기반 위에서 쓰여졌으며, 따라서 어떠한 시각에서 평가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있어 하나의 기준점을 제공해 준다. 그의 시 「여승」은 삶의 근거를 상실하고 결국 여승이 될 수밖에 없었던 한 많은 여인의 일대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를 통해 백석은 일제 식민지 수탈의 잔혹상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던 우리민족이 어떠한 현실적 고난에 직면해야 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일제식민지 사회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해 내고 있는데, 이것은 백석의 시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위에서 쓰여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당시에 민족의 삶 기층에 자리잡고서 그들의 삶을 규정해 가던 본질적인 문제란,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 정책이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민족은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족이 파괴되었던 것인데, 위 작품에서 백석은 이러한 과정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탈 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형상화한 작품에는 쓸쓸함의 정조가 작품의 기본적인 골격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여승」에서는 여승의 한을 자신의 정서체험으로 내면화하면서 ‘佛經처럼 설어워’ 지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八院」에서는 주재소장집을 나서는 어린 계집의 터진 손잔등을 통해 계집아이의 힘들었던 생활을 추상하고 있다. 이로써 시인은 계집아이를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며, 나아가 정서적으로 동질성을 느끼고 있음을 짐작케한다 이러한 시인의 정서적 동일시는 수탈정책과 민족말살정책으로 인해 나라와 고향을 잃고 유랑하는 민중들의 삶의 애환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민족 모두가 공통적으로 처한 절박한 현실의 문제임을 자각하는 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백석은 이러한 인식적 기반 위에서 상실된 민족적 삶과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장치로서 또한 전통적 가치추구를 통한 현실비판으로서 『사슴』의 시 세계를 열어나가게 된 것이다.
Ⅲ. 발견된 세계 - 『사슴』을 중심으로
1) 유년기 체험을 통한 전통적 삶의 형상과 현실부정
먼저 백석의 시에서 주목할 점은 유년기의 가족공동체적 체험이 중심축을 이루며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초기 시인 「오리 망아지 토끼」나 「고방」에는 고향인 평안도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한 시인의 유년체험이 유년의 시적 자아를 통해 잘 묘사되어 있다. 시「오리 망아지 토끼」는 유년시절 아버지와의 정겨웠던 추억을 통한 아버지와 아들간의 훈훈한 가족애가 묘사되어 있다. 어린이의 눈을 통해 제시되는 시골의 삽화와 같은 정경은, 개인적인 차원의 일상적이고도 소박한 삶의 모습이다. 그것은 미소를 자아내게 할 만큼 우리에게는 친근감 있는 세계이며, 또한 가족 간의 따뜻한 유대로 정신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백석의 시에서 이러한 삶의 모습은 가족공동체적인 결속이 파괴되기 이전의 삶으로, 「여승」이나 「팔원」에서 보여지는 현실 세계와는 철저하게 대비되는 세계로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백석의 시에 나타나는 유년기 모습은 가족체험에만 머물지 않고, 보다 깊고도 지속적인 전통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양상으로 발전한다. 그의 이러한 측면은 시집『사슴』에서 보여지는 과거 지향적인 일면이 단순히 옛날로의 회귀가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에게 있어 과거는 풍요롭던 유년기의 삶이 존재하던 장소이며, 일제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인 전통적 삶의 모습이 평화롭게 자리한 공간이다. 그것은 또한 각박해져만 가는 현실세계와 정면으로 상충하는 세계이며, 현재에 시인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원형적 공간으로써 의미를 띤다. 시인은 이러한 공간에서 세계와 조화를 이룰 수 있었으며, 풍요로운 삶을 형성해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이러한 유년체험은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전통적 삶이 파괴당하던 당시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안목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최두석의 평가대로 백석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모더니즘 작가들의 일반적 경향이었던, 도시의 삶을 시적 소재로 택하지 않은 것은 여기서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석이 자신의 유년기 체험을 전통적 삶의 모습 속에 풍성하게 재현해 냄으로써 그것이 지니는 의미를 개인적 차원에서 민족적 차원으로 확대시키고 있는 것은, 전통적 삶의 풍속도가 파괴되어 가는 현실의 세태에 반성적 충격을 가하고, 나아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2) 서민들의 모습을 통한 민족성 탐구와 회복의 염원
백석의 시에는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이 배면에 스며있다. 그러나 서민을 향하고 있는 그의 시각은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위의 인용시 「여승」이나 「팔원」에서 보여지듯이 일제 식민지지배 아래서 생활고에 신음하고 있는 유랑민들에게 던져지는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파괴되기 이전의 전통적 모습을 지니고 있는 절박한 서민들의 삶에 주어지는 시각이다. 백석은 이 두 가지의 시각을 선명히 교차시킴으로써 전자를 통해서는 왜곡되어 가고 있는 식민지현실에 대한 개탄을, 후자를 통해서는 민족성에 대한 탐구와 회복의 염원을 나타내고 있다. 「三千浦」는 1연에서 사람 뒤를 ‘졸레졸레’ 따라가는 돼지새끼들과 귀밑이 ‘재릿재릿’할 정도로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2연에서는 볏단 위에 올라앉은 까치와 이를 잡으려고 따라 오르는 아이들, 그리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병치시킴으로써 평화로운 배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3연에서는 이런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이 자연과 동화된 세계로 묘사되고 있다. 특히 4연을 거쳐 5연의 감탄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시인의 감정의 흐름은, 南行詩抄연작들에서처럼, 조화된 세상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감정이 깔려 있음을 짐작케 한다. 백석이 바라보는 민족 본래의 삶의 모습이란 이처럼 가난하지만 인정을 품고 따뜻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인 것이다. 자연과의 대립보다는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삶이기에, 시인은 ‘모도들 따사롭고 가난함’을 지닌 한 폭의 담채화 같은 정경에 감동 받는 것이며, 나아가 순박한 민족성을 지닌 서민들 삶의 세계가 회복되기를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Ⅳ. 시적 자아의 의식성장과 지식인으로서의 절망
1) 시적 자아의 의식성장을 통한 비극적 현실인식
『사슴』에는 풍요롭던 삶의 모습과 피폐해진 삶의 모습이 동시에 전개된다. 이러한 사실은 현실의 부정적인 모습들과 이에 맞서고자 하는 시인의 저항의식이 대등한 관계로 설 수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현실과 대등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때 시인은 대상을 통해 세계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며, 그 대응방식 또한 현실과 대비되는 세계의 객관적인 묘사로 나타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기 시에 오면 이러한 균형은 깨지고 만다. 즉, 자아가 세상과 대등함을 이루지 못하고 일방적인 열세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에서 후반부로 갈수록 절망적이고 회의적인 색채가 짙게 드러나는 것은 이러한 사정에서 연유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작품 내에서 시적 자아의 의식성장을 불러오게 된다. 성숙된 시적 자아는 더 이상 동화적이지도 설화적이지도 않은 시선으로 세상과 조우하며, 동경을 품은 낭만적 시선으로 서민들의 삶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이러한 현실의 수용에서 오는 시인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백석의 중기 시에는 감정의 절제를 보여주던 시적 자아는 사라지고, 작품 전면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현재화된 모습의 시적 자아가 등장하게 된다. 시 「꼴뚜기」는 세상이 더 이상 속신적인 세계가 아니라 생존논리가 지배하는 냉엄한 현실세계로 시적 자아에게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갈매기는 전통세계의 질서를 대표해 주는 하나의 표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갈매기의 말은 시인이 유년기에 어른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던 전설적이고 동화적이던 이야기와 등가를 이룬다. 그러나 정작 뱃사람들은 새끼 꼴뚜기를 잡은 것에 실망하고, 커다란 꼴뚜기의 전설을 이야기하며 스스로를 자위하는 것인데, 이는 더 이상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불가능하게 됐음을 시인이 깨닫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는 현실과의 타협을 통해 자신의 안락을 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추운거리의 그도추운 능당쪽을 걸어가며 우쭐대고, ‘맑고 가난한’ 친구와 더불어 ‘이못된놈’의 세상을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이다. 이 시 「가무래기의 樂」에는 비정한 세상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겠다는 백석의 결연한 의지가 표출돼 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초연함을 잃지 않겠다는 개인적인 차원의 결단일 뿐, 현실과 투쟁하며 개혁하고자 하는 지사적인 모습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는 세상의 흐름을 변화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비극적 현실인식이 백석의 태도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2) 무력한 지식인으로서의 절망 일제 말기라는 시대적 상황은 백석에게 가혹한 굴레로 작용했을 것이다. 속악해져 가는 민족현실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려는 초연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높은 벽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는 지식인으로서 무력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아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시 「멧새소리」는 무력한 지식인으로서의 모습과 그로 인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시인의 심정이 나타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꽁꽁 얼’어서 고드름처럼 되어버린 명태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해는 저물고 볕은 서러웁게 차가운 현실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얼어버린 행동의 냉각상태. 그에게 현실은 인식되는 대상일 뿐이지, 자신의 의지대로 개혁해 나갈 수 있는 대상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현장 위에서 시인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처마 끝에 매달려 있는 ‘파리’한 명태란 시인의 그러한 상황과 심리 상태까지도 함축하고 있는 정서적 동일물인 것이다. 결국 ‘길다란 고드름’이란 시인의 절망감에 다름 아닐 것이다.
3) 역사에 대한 가책과 유랑의 반성적 의미조선일보 편집일과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직을 전전하며 유랑시를 발표하던 백석은 1940년 한반도를 떠나 만주의 신경 지방으로 주거지를 옮긴다. 이곳에서 그는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소작인등의 일을 하다가 실직하여 다소 궁핍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석은 그의 걸작이라고 평가되는 작품들을 이 시기에 몇 편 발표하게 되는 데, 한 가지 주목되는 점은 이 시편들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시간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초기시가 무시간적인 향토적 세계에 근거해 있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 시기 백석은 고형진의 평가대로 영탄을 통해 짙은 감상성을 노출하기도 하지만, ‘비릿한 구릿한 맛’을 통해(「북관」), ‘털도 안뽑은 고기를 시껌언 맨모밀 국수에 언저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야성의 관찰을 통해(「북신」) 민족의 역사와 교감하고자 하는 내적 욕망을 은밀히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초기시가 무시간적인 향토적 세계에 근거해 있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내적 욕망은 지사적 모습으로까지 확장되지는 못하더라도 ‘추운거리’에서 ‘그도추운 능당쪽을 걷’는 행위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만주행은 악화일로에 있던 고국에서 현실적 기반을 찾지 못한 백석이 감행할 수 있었던 최후의 보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주에서 씌어진 작품들에서 두드러지는 역사적 시간성은 「수박씨, 호박씨」 「高麗墓子」 「국수」 「조당에서」 「두보나 이백같이」처럼 여러 편의 시에서 나타난다. 가령 「수박씨, 호박씨」에서는 수박씨, 호박씨를 입에 넣고 까먹는 습속이 어리석고 게으른 풍습일지 모르나, 그 마음 안에는 아득한 지혜와 오랜 인정이 배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비록 우리나라의 풍습은 아니지만 여기서 보여지는 논법은 「목구」의 논법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법은 보다 주관적, 직접적으로 언표되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결국 『사슴』이 지향하고 있는 시적 지향과 동일한 맥락에 서 있다고 판단된다. 그가 만주로 떠나면서 남긴 “넓은 벌판에 와서 시(詩)한 백편을 얻어가지고”오겠다는 각오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만주행은 문학을 통해 민족적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찾으려는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北方에서」를 통해 이러한 자신과의 싸움이 부질없었음을 토로하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범과 사슴과 너구리를 배반하고/ 송어와 메기와 개구리를 속’이는 행위로 민족에 대한 배신행위로까지 생각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민족과 역사를 위해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한 자신의 삶에 가혹한 채찍을 드는 것이다.
Ⅴ. 운명의 수용을 통한 절망의 극복
만주에서의 유랑을 마친 백석은 고향인 정주로 돌아와 심각한 회의와 절망에 빠진다. 앞서 보았듯이 그것은 황폐해져 버린 고향과 고향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삶에 대한 자책감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에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에 짓눌리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고 죽어야 함을 느끼는 순간, 백석은 새로운 깨달음에 도달한다.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 문구에서 보이는 백석의 깨달음이란 인생에 대한, 그리고 운명에 대한 새로운 자각인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사랑하는 것들이 외롭고 쓸쓸하게만 보이던 것이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무력함에서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생기면서부터 운명지어진 현상이라는「힌 바람벽이 있어」의 시구와 닿아있다. 이처럼 절망을 넘어선 자리에서 백석은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삶의 표상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이다.
Ⅵ. 결 론
백석이 태어나 시인으로서 활동하던 시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일제시대였다. 백석은 어두운 현실에서 투쟁의 문학을 전개했던 것은 아니지만, 역사와 민족 앞에 떳떳하고자 자신과의 괴로운 투쟁을 끊임없이 이어갔던 시인이었다. 이 괴로운 투쟁은 전도 유망한 젊은 시인을 한 곳에 안주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끝내 모든 것을 버리고 만주행을 결심케 하는 내적 동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때때로 그에게 있어 유랑이 운명처럼 읽혀지기도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100여 편의 시 가운데 상당수가 유랑시라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의 유년체험에 대한 형상은 개인적 향수에의 회귀에서 보다 깊고도 지속적으로 전개되는 민속차원의 풍속도나 그 이면의 전통적 세계관으로까지 탐색되어 진다. 이는 백석의 문학이 부조리한 현실을 외면한 공간에서 추상된 것이 아니라 생존의 기반조차 불안정한 상황에서 자기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고 나아가 훼손되어 가던 민족성을 지키고자 한 시인 나름의 대응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초기의 백석 시는 내적 여유를 확보하고, 향토적 세계를 담담히 펼쳐 보임으로써 식민지 현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풍은 오래가지 못하고 현실상황의 악화로 인해 결국 무력감을 표출하고 자신의 삶과 문학에 절망하는 시편들을 낳게 된다. 따라서 후기로 올수록 농도 짙게 드러나는 역사에 대한 가책과 지식인으로서의 절망은 백석의 민족애를 역설적으로 반증하는 본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기 이후 특히 만주에서 발표한 시편들에서 보이는 역사성은, 비록 역사의 굴레를 피해 고국을 떠나긴 했지만 타국에서조차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하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욕망을 발판으로 백석은 자성의 시들을 써 나가게 된다. 백석의 시는 한용운이나 이육사처럼 민족 저항시라는 이름에는 걸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한국적인 시’, ‘낙백한 영혼이 펼쳐보이는 페시미즘의 절창’, ‘한국인의 생활철학과 인생관이 집약된 대표적 사상시’라는 그에 대한 찬사는 외세의 압제 길항하며 절망까지도 넘어서고자 하는 백석의 민족애와 삶의 높은 경지를 잘 반영하고 있는 평가라 할 수 있다.
논문부문 가작 당선 소감
의미야 다르겠지만 어느 시인이 외쳤듯이 ‘가래’를 뱉어내는 심정으로 뒤늦게 응모했다. 버리고 잊었던 것인데 당선됐다는 데 대해 반갑다 못해 이내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그저 한번이라도 뱉어버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무엇. 염치없이 입상을 하게 됐지만, 나의 공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 소감을 쓴다는 것이 거북스럽다. 백석에 대한 연구는 며칠을 들여다 봐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진행돼 있었고, 이들의 공적을 수용하면서 어줍잖은 의견을 하나 더 보탠 것 뿐인데 곱게 봐 주신 심사 위원님께 먼저 감사 드린다. 4년간의 학부생활을 돌이켜 생각하면 문학에 대해, 더러는 일천한 자신의 재능에 철저히 좌절하는 것밖에 배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백석이라는 거대한 시인 앞에 설수록 그 절망감은 더 큰 것이었기에 아이러니컬하게도 짧지 않은 시간을 견딜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기에 이 상은 시인 백석과 그의 호흡을 후학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앞선 연구자들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요한(국문·4)
심사평
황룡문학상 논문분야에 응모한 논문에서 인문과학분야의 응모작 중 2편은 모두 나름대로 각자의 논리를 견지하고 있는 수준작에 이르는 논문이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희곡 ‘보리스를 위한 파티’에 나타난 역할극 연구」는 논문의 독창성과 논리의 조직력이 뛰어났지만 주로 2차인용에 의존하여 의미전달에 무리한 경우가 종종 발견되었다. 상대적으로 「백석시에 나타난 민족의식 연구」는 뛰어난 언어의 구사력을 이용하여 치밀한 논리를 전개하였으며 주제로 접근하는 방식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고심 끝에 「백석시에……」를 당선작으로 밀기로 하였다. 선에 든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모두에게 정진을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