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덥던 여름의 끝자락인 팔월 하순 토요일 아침이었다. 시청 앞에서 원로 몇 분과 함께 탄 전세 버스는 마산역에서 기다리는 회원을 태워 남해고속도로를 달렸다. 문산 휴게소에서 차를 한 잔 나누고 목표한 삼천포의 어느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이날은 두 달에 한 번 있는 어떤 모임의 월례회에 참석하는 길이다. 이 모임은 내가 교직에 들어서기보다 훨씬 그 이전에 시작되었다. 초창기 이 모임을 이끈 은빛 회원은 교원연수원장이나 지역 교육장을 역임하고 정년을 마친지 제법 지난다. 나는 이 모임에서 입회 시기로나 연륜으로나 막내급이다.
이날은 퇴임한 은빛 선배들을 함께 모시는 자리였다. 방문한 학교의 교장이 회원 중 한 분이라 황송할 만큼 환대를 받고 안내를 받았다. 우리 교육이 이렇게 치밀한 준비와 절차를 거쳐 바라는 성과를 거두나 싶었다. 아직 방학중이라 아이들은 나오지 않았으나 그곳 학교 몇 분 선생님들께서 나와 도와주셨다. 잠깐 복도와 일부 교육 환경만 살피고도 그곳 학교의 아이들의 평소 밝고 활기찬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졌다.
진주 쪽에서 온 회원들과 교무실에서 그간의 안부를 묻는 인사를 나누고 모둠학습 정보 자료실로 옮겨 회의가 시작되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진행한 이날 행사에서 가장 의의를 둔 것은 독서발표 토론회였다. 우리 모임의 큰 어른이 직접 사서 주시면서 읽기를 권한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학교"라는 책을 읽고 그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나라 안에서 내로라하는 교육학자가 우리 교육의 오늘에 서서 어제를 짚어 내일을 내다본 책이다. 분야별로 모두 11장으로 진단해 엮어 놓았다.
오늘은 그 중에서 제 1장, 제 2장, 제 3장에 해당하는 내용을 여섯 분 회원이 나누어 발표했다. 발표자로는 교장 교감도 있고 여교사도 있고 후배도 있었다. 나도 제 6장을 준비는 하였지만 시월 모임의 발표 순번이라 이날 자료를 가져가지 않았다. 점심 시간이 늦어지는 관계로 상호 토론을 생략하였지만 아주 실속 있었고 진지한 시간이었다. 방학이지만 우리가 이런 시간을 갖기에 방학에 정액 봉급이 나와도 당당하다 여긴다. 적어도 이날 자리한 서른 명 가까운 우리 모임 회원은 밥값을 한다고 생각했다.
잔잔한 남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서 정담이 오고가면서 장어구이로 점심을 먹었다. 식후엔 바로 곁의 창선 삼천포대교를 버스로 둘러 나와 인근 와룡산 기슭 백천사로 향했다. 약사불로는 세계 최대라는 절이었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산비탈에 자연석 축대를 바쁘게 쌓아 터를 잡아 대웅전을 세우고 그 뒤로 약사전을 세웠다. 소나무 재질로 만든 누워 있는 약사불이 과연 크긴 컸다. 그러나 절 안의 이곳 저곳에서 불사 중창을 안내하는 보살들이 도심 상가 앞의 호객꾼처럼 보였다. 절은 어디까지나 경건한 참배와 수도의 도량이어야 한다.
나는 절 아래 주차장에서 창원으로 돌아가는 전세버스의 다른 회원 분들과 작별했다. 진주로 가는 분들은 그쪽 방면으로 승용차로 가고 나는 인근 지역 장학사로 있는 후배의 차에 동승해 사천까지 나왔다. 그곳 버스 정류소에서 고성으로 향했다. 창원의 동기들과 미리 연락이 닿아 그곳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교육대학 동기들이 통영으로 모이는 길이다. 두 대의 차량에 나누어 타고 온 동기들은 통영 입구 학섬 휴게소에서 잠시 차를 한 잔 나누었다. 뒤따라온 여자 동기 다섯 명 가운데 얼굴이 낯설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세 명이었다.
이날 오후 진주교육대학 18기 전국 동기모임에 가는 길이었다. 모이기로 한 장소는 미륵도 도남관광단지와 가까운 통영시 청소년수련원이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은 아주 좋은 시설이었다. 가까이 있는 마리나 리조트에 못지 않았다. 우리가 대여한 시설은 팔십 평 공간의 콘도형 숙소였다. 오륙십 명 정도는 거뜬히 지낼만한 공간이었다. 이번 모임은 통영 지역의 동기들이 주관하는 행사였다. 이태 전 졸업 20주년 행사를 모교에서 가진 이후 여름방학이면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갖는 행사다.
유치원이 있는지도 몰랐던 내가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으니 정상적인 학번이면 77학번이어야 하고 교대 졸업횟수로는 15기여야 한다. 그런데 나는 80학번으로 입학하여 진주교대 18기다. 이 대목에서는 나는 늘 주눅이 든다. 그러나 내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고 생물학적인 나이에 구애받지 않으려 한다. 지난번 졸업 20주년 행사장에서 나는 저물 무렵 뒷마무리 청소까지 몸 사리지 않았다. 내가 교육대학을 나와 어찌 중등교단으로 옮겨와도 사도의 본질을 깨치고 출발점이 되는 곳이 모교라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사십대 중반에 들어선 동기들이다. 사백 명의 동기들은 주로 경남이 근무지이지만 인근 부산이나 울산 대구는 물론 전국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이태 전 20주년 행사 때에 이백 팔십 명이 마음을 모아 행사에 참여했다. 남자 졸업생이 서른 여섯 명 뿐이라 처음엔 걱정했지만 선배나 후배가 치른 행사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는 평을 받은 것으로 안다. 그 사이 진행을 맡은 회장단의 마음고생과 몸바침이 아주 컸던 것으로 안다. 내야 아주 작은 마음만 보냈을 따름이다.
우리들은 이후 울산과 창원에서 전국 동기 모임을 가졌고 이번 통영 모임이 세 번째다. 이 모임에 여러 지역에서 많은 동기생들이 모인다는 것이 사실 어렵다. 삼십 명 안팎의 회원이 모였다. 울산 모임은 가지 못했고 지난 해 창원 모임은 내가 사는 곳이 창원이라 자리했다. 이번 세 번째는 주변 동기들 함께 가길 권하기에 흔쾌히 따라 나섰다. 모이고 보니 그 넓은 공간이 무안하리만치 참석 인원이 적었다. 그래도 양산에 근무하며 집이 부산인 여자 동기도 오고 진주에서도 남편의 에스코트를 받고 온 동기도 있었다.
통영의 회장단에서는 치밀하게 준비한 회의서류와 식사 자리 등에서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했다. 사실 작년에 통영지역에서 참석한 회원이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떠맡긴 것으로 안다. 그 당시 교육대학이 2년제의 짧은 수학 기간이어서인지 나는 여자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는 동기가 많지 않다. 그리고 중간에 중등으로 전직해서 더 그렇다. 우리는 이제 사십대 중년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당시의 심화 선택 소속 반과 통성명을 하고 현재 근무지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인근에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 매운탕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 회의를 진행했다. 회칙 심의에서 한동안 경조사 부조 부분에 의견 교환을 많이 나누고 내년 개최지는 부산권으로 넘긴다는 결의를 했다. 회의 후 준비한 회를 안주해서 그간 묻어둔 정담들이 오고갔다. 이루어질 뻔한 캠퍼스 커플을 예상하고 앨범을 사지 않아 지금 앨범이 없다는 친구도 있었다. 초임지 섬마을 색시를 아내로 맞아 건어물 가게를 부업으로 하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 우리 나이에 으레 관심사인 승진에 대한 얘기야 빠질 수가 없었다.
밤 열두 시가 다되어서 창원과 진주의 여자 동기들은 자리를 먼저 일어났다. 특히 진주권에서 온 세 명 가운데 한 동기의 듬직한 부군은 우리의 자리가 마칠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해서 바깥에서 기다려 주었다. 남은 여자는 열 남자 부럽지 않은 양산 동기와 통영의 세 명이었다. 창원 김해 밀양에서 온 여섯 명과 통영의 두 명이었다. 우리는 인근 노래방으로 옮겨 아주 즐거운 시간을 오래도록 보냈다. 여흥에 지지리도 소질 없는 나도 노래를 두 곡이나 불렀고 여자 동기들과도 어깨동무하고 춤을 추었다.
흐른 시간이 얼마인지도 모른 채 노래방을 나온 우리는 아쉬워 한 자리 더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유람선 터미널 곁의 운치 있는 포장마차에서 쥐치회와 소라 안주는 서로 주고받는 얘기에 바빠 못다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취중이었지만 나는 자리 사이에 살짝 일어나 한국의 나폴리라는 통영 밤바다의 아름다운 풍광도 놓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니 올림픽 축구 8강전에서 우리가 1 : 0으로 지고 있었다. 이후 그 넓은 숙소에서 축구를 다 보고 잔 친구도 있고 나는 옆방으로 가서 먼저 골아 떨어졌다.
속이 쓰려 잠을 깨니 어지러웠던 거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마 마음결 고운 통영 회원들의 손이 지나갔으리라. 남은 회원이 많지 않아 이용하기로 한 어느 초등학교 실내체육관에서의 배구는 취소하였다. 산양일주 도로의 달아공원과 척포 낚시 어항 구경도 비가 많이 내려 마음을 접었다. 우리는 통영대교를 지나 서호동 선창가의 복집으로 가서 속을 풀었다. 시원한 복국도 복국이지만 전어 밤젖과 톳나물 파래나물의 밑반찬도 좋았다. 바깥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계속 뿌리고 있었다.
그 자리서 누구는 절로 갔다느니 수녀원으로 갔다느니 하는 동기도 있었다. 누구누구는 교통 사고와 연탄 가스 중독으로 유명을 달리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우리 위와 아래의 기수에서는 벌써 교감이 되고 장학사가 오나오기도 했단다. 우리 동기는 아직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수년 후엔 분명 나오긴 할 것이다. 아직 승진자가 없다는 것이 다른 기수보다 능력의 부족이긴 보단 순진하게 묵묵히 교단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먼저 승진한 선배나 후배가 요령이나 잔꾀를 부렸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쉬운 자리가 마쳐질 무렵에 누군가가 이 자리의 누구를 치켜세우면서 차기 교육감 감이라고 했다. 나도 함께 자리하고 있는 그 동기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고 인품을 갖추어 가고 있다고 본다. 또 누군가 한 수 더 거들었다. 우리 동기에서 교육감이 될 사람이 크고 있다고 다른 기수들에게 은근슬쩍 이야기를 흘리고 다니자고 했다. 그렇다.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고 자란 어니스트는 분명 큰 바위 얼굴이 되었다. 내 사랑 18기, 꿈은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