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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누가복음 5장33-39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레위의 집에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던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의인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으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책망을 듣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지자 이번에는 금식에 대한 문제로 예수님께 도전합니다.
1. 금식에 관한 교훈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5:33-35)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 말합니다.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33절) 예수님 당시에 금식은 아주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원래 유대 민족은 금식을 속죄일(7월10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실시하였습니다(레 16:29). 이것은 히브리어로 '이나 네페쉬'('영혼을 괴롭게 하다')라 하여 율법으로 엄히 명한 것이었습니다. 이외에 유대인들은 금식을 국가적 재난이나(삿 20:26), 병들었을 때(시 35:13), 애곡할 때(삼상 31:13), 회개할 때(왕상 21:27), 위험이 임박할 때(대하 20:3), 재앙을 기념할 때나 기근때에 실시했습니다. 그런데 유대 민족은 바벨론 포로생활 당시 희생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결과로 자신들이 당한 재앙에 대한 애도와 회개의 뜻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하는 의미에서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이 금식은 예루살렘 파멸과 관련하여 나흘을 했는데 (1) 성전이 불탄 날(5월 7일 ; 왕하 25:8,9), (2) 그달리야 피살일(7월 2일;왕하 25:23-25), (3) 성전 포위 개시일(10월 10일; 왕하 25:1), (4) 성전 함락일(4월 9일; 왕하 25:3,4)등 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즉,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목요일과 그것을 가지고 내려온 월요일을 기념하여 금식일로 지켰고, 경건한 사람은 더 자주 금식했습니다(외경 유딧서 8:6). 그러나 이 금식의 의미는 갈수록 개인의 경건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과시 행위로 전락하여 외적인 자기 과시와 위선이 많이 개재되어 예수님의 질책의 대상이 되었습니다(마 6:16; 9:14). 예수님은 강제적이고 의식적인 성격을 띤 자기과시나 종교적 공적을 쌓는 행위로서의 금식을 단호히 배격하시고 금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금식을 하셨지만 그것은 자발적 형태로서의 영적 훈련으로 실시하셨던 것입니다(마 4:2; 6:16-18).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 관한 언급은 복음서 여러 곳에서 언급됩니다(7:18; 11:1; 막 6:29; 요 1:35,37). 그러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은 약간의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당시 대다수의 랍비들처럼 제자들을 두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요세푸스와 렝스토르프의 견해처럼 '바리새인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에서 때때로 '예언자의 아들들'(왕하 9:1, 개역성경에는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로 표현)이라는 표현을 '... 의 제자들'이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표현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의 질문 형식으로 묻지 않고 사실을 말하는 형식으로 묻는 것은 교묘한 질문 방식입니다. 30절에서 대적들은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하였으며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당신의 오신 목적이 바로 죄인 구원에 있노라고 대답하셨습니다(31절). 이제 여기서는 대적들이 '먹고 마시는' 일 자체를 가지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적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을 반대 입장에 둠으로써 예수님을 배타적으로 소외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먹고 마시는 일은 인간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요 그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특정한 날을 정하여 금식하는 형식적 행위에 연연한 나머지 그러한 정해진 틀에 얽매이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비난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금식에 관한 형식적 틀을 초월하셨으며 진정 필요할 시에는 금식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셨습니다(35절; 마 9:15).
예수님은 그들에게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십니다(34절).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신랑이라는 표현은 흔히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사 54:5,6; 렘 2:2; 겔 16장; 호 2:16,19).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있는 것을 혼인잔치와 비교하십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써 비교합니다(마 25:1; 요 3:29; 고후 11:2; 엡 5:32; 계 19:7; 21:9).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보통 일주일 동안 베풀어졌습니다. 이 잔치 마지막 날 신랑의 들러리를 맡았던 친구들은 신랑을 신부방에 데려다 주고는 잔치집을 떠납니다. 이 일주일 동안의 잔치는 기쁨과 즐거움 가운데 매우 요란하고 화려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이때 금식일이 닥치어도 금식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랑을 신부방에 데려다 준 연후에 집에 돌아와서 금식에 들어 갈 수 있었습니다. 실로 금식은 강제적이고 형식적 절차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점을 경고하셨습니다. 그가 함께하여 자비로운 사역을 베풀고 생명과 축복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현재는 결혼 잔치와 같은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기 때문에 금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금식의 실행 여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5절) 예수님은 당연히 기뻐해야 하는 결혼식을 비유로 들어 금식에 관한 자기의 뜻을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결혼식에서 신랑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다소 어색한 일입니다.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이는 위경 제 4 에스라 10:1에 나타나는 사상으로 "내 아들이 결혼식장에 들어가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나는 아무것도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며 내가 죽을 때까지 슬퍼하며 금식하기를 작정하노라"는 내용입니다(Jeremias, Theology I, 283). 이러한 사상을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었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으나 어쨌든 이 비유는 분명히 예수님이 죽어서 제자들과 이별하게 되어 제자들이 금식하게 될 것임을 시사합니다.
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5:36-38)
예수님은 또 다른 비유로 말씀하십니다(36절). 비유(譬喩)는 '곁에', '옆에'를 나타내는 '파라'라는 단어와 '두다', '놓다'라는 뜻의 '발로'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옆에 두다', '정도를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특히 수사학에서는 '유사', '비유'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비유는 친근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일상생활 중 많이 접하는 친근한 것들을 예로 들어 비교합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마솰'('비유')을 번역한 것인데 지혜문학에서 이 단어는 현명한 말을 나타내며, 생활로부터의 본보기, 신중함과 정중함의 원칙들, 직업적인 충고, 도덕적 훈계들, 종교적인 지도들을 포함합니다. 또한 묵시문학에서 비유들은 종말론적 가르침을 주는 방법들입니다. 지상의 사건들은 하늘의 사건들을 설명해 줍니다. 하늘과 미래의 신비들에 대한 환상(심판, 부활, 축복받은 자들의 거처)도 역시 비유들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물론 많은 비유를 베푸셨는데, 이 비유는 알려지지 않은 것(그 나라, 하나님의 본성과 행위) 안에 있는 새로운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알려진 세계의 분명한 진리를 사용하는 유비법(類比法)입니다. 막 4:33, 34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이해하는데 더디기 때문에 비유들을 많이 사용한다고 언급합니다.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본성과 일, 인간의 운명 등을 취급합니다. 랍비들의 비유나 율법을 상술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들은 대부분이 종말론적(묵시적은 아닐지라도)입니다. 대부분의 예수님의 비유들은 교훈적인 문맥으로 짜여져 있으나 어떤 것들은 베일 뒤에 있는 메시지를 찾아내도록 청중을 자극합니다(막 12:1). 그분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빛이요 구원이지만, 응답하지 않는 대중들에게는 어두움이요 심판입니다. 그들은 동일한 말을 들으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사 6:9, 10의 예언(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상태) 아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또다시 새 옷과 낡은 옷이 대비를 이루어 나타나고 37, 38절에 가서는 낡은 가죽 부대와 새 부대가 대비되어 등장합니다. 이는 누가의 독특한 기술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의 의미의 선명성 부각에 적절한 효과를 나타냅니다. 한편 '새 옷'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낡은 옷'은 유대주의를 가리키는 말로서 율법을 오해하여 가르친 유대주의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하나로 합쳐질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특히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형식과 위선에 치우친 유대교의 폐단은 복음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기까지 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내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 자체를 버리게 됨은 물론이고, 또한 빨면 새 옷 조각이 줄어들어 낡아빠진 헌 옷을 잡아당겨 뜯기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훼손시키는 유대주의자들과는 반대로,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어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습니다(마 5:17).
고대 사람들은 동물의 가죽으로 부대를 만들어 그 속에 여러 가지 액체를 보관하였습니다. 이 가죽 부대는 동물을 잡은 후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을 잘라내고 그 가죽을 벗겨낸 다음 털이 나있는 쪽을 바깥쪽으로 하여 목 부분만을 제외하고 모든 구멍을 꿰맨 다음 가죽에서 기름기를 제거하고 일정 기간 손질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이는 팔레스틴은 물론 유럽, 남미에서 최근까지도 사용되던 방법입니다. 한편 이 가죽 부대는 오랫동안 사용하게 되면 주름이 잡히며 그 탄력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따라서 발효력이 강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게 되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발생하는 강하고 독한 가스가 가죽 부대를 부식시켜 그 부대를 이내 터뜨리고 맙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항상 새 가죽 부대에 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을 경우 그 부대가 이내 터져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못쓰게 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의 형식주의롤 가리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은혜로운 가르침이 형식 위주의 율법의 낡은 형태 속에 담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사실을 비유로 사용하신 직접적인 이유는 유대주의적이고 율법주의적이며 기쁨이 없는 금식은 그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38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원칙론적으로 유대교의 형식주의적 의식과 종교 체제로서는 생명력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정신을 담지 못함을 가르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원어상 (1) 새 옷, 새 가죽부대에서의 '새'(카이노스)는 '질(質)과 그 신선함'을 강조하고 (2) 새 포도주에서의 '새'(네오스)는 '시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유한 본문의 '새 포도주'를 (2)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서 우리는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 넘어가는 시간적 추이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옛 언약을 온전히 성취시키는 완성자로 오셨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새로워졌습니다. 이제 예수님에 의해 새롭게 제시된 정신과 생활 방식을 요한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따르는 낡고 형식적인 종교 형식으로는 보존될 수 없습니다. 발효력이 강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 다 보존할 수 있는 것 같이, 역동적 생명이신 예수님과 그 복음의 수용을 위해선 이미 고착화된 낡은 형식주의적 신앙 형태가 아닌 신선한 새 부대, 즉 근본적으로 변화된 새 심령과 새로운 신앙 형태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3. 사람들이 묵은 것을 좋아하는 이유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5:39)
예수님은, 새 교훈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39절). 여기서 예수님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논지를 뒤집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새 교훈이 옛 교훈보다 더 낫지 않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의 강조점은 옛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면서 옛 것을 원하고 새 것을 배척하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항상 묵은 포도주만 마시던 사람들은 새 포도주의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묵은 포도주만을 고집하며 새 포도주를 무시하며 거부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낡은 율법주의와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전해지고 제시되는 새로운 영생의 진리를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새로운 영생의 진리를 맛보며 새 복음에 참여하려면 새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옛 종교에 언제까지나 머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형식주의에 빠진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에 대하여 율법이 계시한 그 메시야가 곧 당신 자신임을 드러내셨으며, 자기를 통해 성취될 새 언약으로 돌아오길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적용: 새 언약에 참여하는 자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시므로 우리는 더 이상 옛 언약이 아닌 새 언약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더 이상 옛 언약에 메여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믿음으로 새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새 언약에 참여한 자로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합니까?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잔을 들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20). 그러므로 새 언약에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보혈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고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첫째,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님이심을 믿고 고백하며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종교가 나름대로의 구원의 길을 말하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믿고 살며 이 복음을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의 생명되신 주님 안에 거하며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려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