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무렵의 난, 모든 것이 버거웠다.
학교가 싫었고, 공부가 힘들었다.
20대 중반이라는 나이는 누군가에겐 부러움을 부를 수 있는 나이였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었다.
기억도 어렴풋한 어린 시절, 그러니까 내 또래의 친구들은 에너지파를 쏠 줄 알았다고 믿었던 시절.
그때의 난 구구단다음으로 깨우친게 우리 집안의 사정이였을까. 한번도 부모님께 무언가를 사달라고 졸라본적이 없었다.
어릴 때 가장 부러웠던 사람이 골든키위를 숟가락으로 퍼먹던 같은반 친구놈이였으니까.
되레
“애가 엄청 의젓하네요”,
“벌써 철 들었네, 상엽이 부모님은 좋으시겠어요. 얌전한것좀 봐.”
라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 아른아른 생각난다.
그 때문일까. 고등학생 시절부터 이른 나이에 줄곧 아르바이트를 하곤 했다.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쥐어주면 짜증이 나기보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 모두 다 그 고생의 흔적들이랴.
처음 아르바이트를 통해번 돈으로 어머니와 소박한 외식을 하고 내복을 사드렸을 때, 어머니가 짓던 웃음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아마 그것이, 내게 많은돈을 벌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만든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에게도 하루쯤 마음 놓고 노는 날은 있었다.
중간고사를 마치던 날. 그 날은 꽤나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날이었다.
잠시나마 시험에서 벗어난 20대들은 서현역 거리를 누비며 자유를 즐겼다.
딱히 술을 좋아하지는 않는터라 그저 따분한 일탈이었지만,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는 제법 쏠쏠했다.
아직 6시도 되지 않은 시간인데 서현역의 번잡한 광장에는 중학생부터 고등학생, 데이트를 하는 군인 커플과 가족 단위의 사람들로 가득했다.
선선한 바람에 따스한 햇볕이 그들을 간질였기 때문일까 다들 얼굴에 웃음기를 띄고 있는게 괜스레 나까지 들뜨게 만들었다.
친구도 나와 사정은 마찬가지라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는게 제법 신났던 모양이다.
“오늘 되게 크리스마스 같지않아?”
“그러게 사람 진짜 많다!”
다소 번잡스럽지만 이런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싫지는 않았던 덕인지
이른 저녁시간만의 분위기를 한껏 즐기고,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안부를 묻고 근황얘기를 지나 드디어 저녁메뉴를 고르는 대목에서 친구가 사뭇 진지해진게 웃음이 났다.
친구가 굉장히 중요한 말인냥 얘기했다.
"망했다. 식당에 사람 많을 거 아니야.“
엉뚱하긴. 그러나 틀린 말도 아니라 우리는 보다 더 신중하게 저녁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뭐 먹을까?”
“닭갈비”
누가 친구 아니랄까봐. 결국 우리는 닭갈비로 마음이 통했고 그렇게 식당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닭갈비에 의해 닭갈비를 위해 그리고 닭갈비만을 생각하며 걸었고 그 걷는 모습이 마치 두 마리의 닭같기도 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채..
그때, 사건이 시작됐다.
우린 상가 입구에 들어섰지만 안으로 들어설 수는 없었다. 약속이나 한 듯 멈춰선 발걸음.
“왜?” 친구가 물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바닥엔... 돈이 떨어져있었다.
‘돈이다’
‘돈이다..’
‘돈이다..!’
이 말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세글자랄까?
세상에는 닭갈비보다 강한 세글자는 없을 줄 알았는데..
얼핏 보기에도 꽤 많아 보이는 액수. 하얀색 봉투와 함께 바닥에 5만원짜리들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 있었다.
내 눈앞에 이렇게 큰 돈이 뿌려져있는 광경을 처음봐서 상황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으나, 늘 그랬듯이 항상 본능은 이성보다 한발 빠르더라.
상가입구에 누워있는 신사임당 선생님들이 나를 부르고 있는것만 같았다. ‘크리스마스같다고 해서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미리 주셨구나! 감사합니다. 산타할아버지!’ 상가는 인적이 드문 곳에 있었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나와 친구. 두 사람이 전부였다.
게다가 분명히 신사임당님이 말씀하셨다.
“날 가져가세요,”
아! 이 얼마나 완벽한 삼위일체던가.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뒤늦게 도착한 이성은 누군가 보면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니 우선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돈을 정리하라고 말했다.
봉투가 같이 떨어져 있었던걸 보니, 어떤 학생의 월급이였거나 학원비, 혹은 누군가 아끼던 물건을 중고로 팔고받은 돈들중 하나였을 것 같았다.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때쯤 침묵을 먼저 깬건 친구쪽이였다
“얼마야..?”
“80만원”
“아무도 없는것 같은데..”
이 녀석 역시 이성과 본능의 그 어디쯤에서 헤메고 있는게 분명했다.
우리 둘다 동공이 흔들리는걸 숨길만큼 영악하지는 못했으니까.
이 돈으로 할 수 있는게 자꾸 생각났다.
기타도 사고싶었고, 패딩도 사고싶었고, 더 맛있는것도 먹고싶었다.
아르바이트를 끊임없이 해도 여전히 가난하기만 한 대학생활, 몇달째 먹은 다양한 맛의 컵라면도 이제 진절머리가 났다.
‘ 이 정도 돈이면 전단지를 몇시간을 돌려야 되는거야..?’
‘내 한달 용돈이 10만원인데...’
‘그냥 이대로 1분만 걸어가면 아무도 모를걸 정말 잠깐만 눈감으면 80만원이 생기는 거잖아.’
아마 친구녀석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터.
하지만 그때 마음속에 부모님께서 늘 말씀하셨던게 생각났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아야한다.”
우리집 가훈이 <바르고 굳세게> 였던 건 이 이유였나?
바르기 위해선 굳세야 했던 거다.
신사임당의 부름에도 굳세게, 양심을 바르게 지켜야 했다.
‘그래! 없이는 살아도 부끄럽게 살지는 말아야지. 지금까지 저 돈없이도 잘 살았잖아? 나 사나이 최상엽! 요행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한번 마음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실천하는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신고하자”
“…”
“어차피 우리돈 아니잖아 중요한 돈일수도 있고 배고프니까 빨리 신고하고 밥먹으러가자.”
친구 녀석도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내 말에 순순히 동의했다.
마음을 먹자 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난생처음으로 112에 신고라는걸 해봤고, 5분도 채안되는 시간에 근처에 순찰중이시던 경찰관님들이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설명드리고 봉투에 담겨져있는 80만원을 인계해 드렸는데, 경찰관님중 한분이 말씀하시길.
“잃어버렸다는 신고는 많이 받아도 줏었다는 신고는 처음 받아봤어요. 감사합니다.”
이상하게 감사하다는 말이 왠지 위로가 되었다. 돈의 주인은 만나지 못해 직접 들은 것이 아님에도 왠지 그 감사하다는 말이 나의 찌들어있던 마음을 콕콕찌르는 것 같았다.
그 동안 너무 바쁘게 치열하게 달려오느라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됐다.
흔히들 말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게 있다는 말.
그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마도 그것은 부끄럽지 않을 용기였을 것이다.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 양심앞에서 잠시나마 흔들렸던 나를 다그치고 반성했다.
진심으로 꼭 주인을 찾아주시길 바라며 경찰관님께 몇번이나 당부드렸고, 경찰관님도 최선을 다해 주인을 찾아드리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10월의 크리스마스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청렴할 수 있는 용기를 선물로 받았다.
누군가에게는 미련한짓이라고 치부해버릴 수 있는 일이지만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았음에 자부심을 가지고, 내 것이 아닌 것을 탐하지 않는 방법을 아주 값지게 배웠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런 선택의 기로가 온다면 나는 옳은 선택을 할 것이다.
그게 바르고 굳세게 가는 길이니까
이제는 청렴할 수 있는 용기가 내게 말하고 있다
“날 가져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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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진짜..... 잘 쓰신다 최고.....💙 멋져요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10.13 01:16
몇 번을 읽어도 좋은 소설 책 하나를 읽은 것 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첫번째 줄부터 정말 공감 되고 마치 지금의 나 같았다 정직하게 열심히 살다보면 상엽오빠처럼 빛날 날이 오겠지? 바르고 굳세게 살아야지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10.16 03:51
이 글덕분에 제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한번 더 깨닫게 됐어요 알면 알수록 따듯하고 바르고 진국인 사람이신것 같아요 저의 인생의 한 부분이 상엽님이랑 루시분들 함께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영광입니다🫶🏻
책 많이 읽으신 짬바나온다.. 글 너무 좋아요 가독성도 좋고 결말도 깔끔하공.. 엽님에 대해 많이 알아가는거 같아요. 좋은글 써줘서 고마워요!ㅎㅎ
와.. 등업되고 프롬루시 보는데 내가 오빠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 자부심 뿜뿜 대박이야
내가 정말 멋진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워
오빠한테 부끄럽지 않은 왈왈이가 될 수 있도록 나도 많이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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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책 읽은거같아 오빠가 걸어온 떳떳한 삶 덕에 나도 떳떳하게 오빠를 좋아할 수 있어 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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