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도 그리고 조선족
간도와 우리 민족과의 만남은 조선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1869년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이후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많은 사람들이 간도지방 으로 들어가게 되며 1910년을 전후 일제침탈로부터 벗어나고자 또는 항일 운동의 기지 건설을 위해 이주가 급증하게 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까지 가세되어 1926년에는 간도 농토의 52%를 조선인이 소유하게 된다.
일제에 의한 저항을 배경으로 건너간 간도는 자연스럽게 조선인들의 지원 속에서 1910년대의 의병투쟁, 1920년대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승리의 역사현장이 된다.
이후 해방의 기쁨도 잠시 조국이 분단되는 아픔을 보면서도, 1952년 간도의 주민들은 조선연변 자치주를 구성, 문화적 자존 속에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계승시킨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시련 속에서 간도의 지식인들 또한 반혁명분자로 희생되기도 하나 좌절하지 않고 경제적 문화적 도약을 이루며 높은 교육열 속에서 역경에 굴하지 않는 기백을 보여 준다.
그 결과 연변의 조선족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내 소수민족 가운데 경제·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으로 인정받아 강택민, 등소평으로부터 조선족 자치주가 가장 모범적이라며 휘호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성을 자부해 왔던 조선족이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에 맞물려 90년대 초부터 한국기업의 중국진출이 대규모화되면서 젊은층이 도시로 빠져 나가고 있고 주산물인 쌀값마저 폭락해 경제가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다.
길림성에서는 연변자치주의 조선족 인구비율이 33%까지 떨어질 것을 계기로 향후 5년후 조선족자치주를 해체하고 연룡도(延龍圖)시로 개편을 검토하고 있다. 조선족 비율의 빠른 감소와 함께 비어가는 주택과 토지는 한족들 소유가 되고 있으며 중국인에게 이자 돈을 빌려 쓰거나 중국인 농가에서 삯일을 하는 조선족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한글이 위에 중국어가 아래에 있던 연길시내 간판들은 중국어만 써 넣은 간판으로 바뀌고 있다. ◆ 동북공정 또 다른 아픔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정책과 자본주의 가치관이 만연되면서 계급투쟁 위주의 역사관은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고립상태에 있었던 중국인은 자신들의 낙후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체제에 대해 회의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상당수 조선족은 한국과의 교류 속에서 한국인에 대한 동경심을 갖게 되고, 매년 동북지역에서 수많은 북한 탈북자가 조선족 사회로 유입되면서 한국, 조선족, 북한과 정서적 연계로 조선족들의 정체성이 동요되고 있으며 이것은 향후 한반도 정세변화에 따라 그들이 한반도와 연계가능성을 예시해 주고 있다.
이러 현실에서 중국정부는 남북통일에 대비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중국동북지구와 한반도를 단절시켜 양 지역의 역사적 상관성을 부정함으로써 남북에서 주장하고 있는 만주지역「실지회복론」에 대비하고 조선족 사회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을 차단시키려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배경 하에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 등을 비롯 중화인민공화국 영토 내에 존재했거나 존재하는 모든 민족은 중화민족이고 그들의 역사적 활동은 모두 중국역사의 범주에 속한다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입각 2002년부터 중국사회 과학원 주관아래 역사, 민족, 영토 등에 대한 체계적인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바 이것을「 동북공정 프로젝트」라고 한다.
이러한 전략은 경제적으로 조선족사회가 붕괴되는 추세에서 중국정부의 정치적 문화적 통제를 강화하는 정책으로 귀결되고 있고, 중국정부의 이러한 전략에 편승 한족의 조직적인 연변지역 진출과 한족의 거점 확보를 위한 이주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중국정부는 작년 7월 조선족연변자치주 관할이었단 장백산(백두산) 관할권을 길림성 직속으로 전환, 자치주의 주된 수입원이었던 관광수입마저 차단하고 있어 조선족의 정체성은 경제적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 동북공정 대응전략에 대한 비판
간도 격랑의 한 가운데에서 국내에서는 지식인들 및 일부정치인들은 독도 영유권 분쟁의 연장선상에서 「간도 되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청일 간에 맺어진 간도협약 무효화를 국내 및 국제사회에 확산시켜 내기위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또한 학계에서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항한 고조선, 고구려, 발해에 대한 활발한 연구로, 언론 및 방송에서는 특집대담, 다큐멘타리 및 드라마(주몽, 연개소문 등) 제작 등으로 외화 되고 있으나, 그 대응논리의 건조함은 중국정부만을 자극 하여 우리 조선족들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곤란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첫째, 독도문제는 도서지역 영유권 논란이지만 간도는 국경분쟁으로 질적으로 차이가 있음에도 국제법상 간도협약 무효선언→취득시효 연장→분쟁지역화→국제사법재판소제소와 같은 독도관련 일본의 대응논리를 차용하여 간도문제를 쟁점화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영토는 2차 세계대전 종전이후 각종협약을 통해 정립된 국제질서의 산물이기 때문에 국제제판소를 통해 해결되거나 했던 도서지역 영유권문제와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중-소, 중국-베트남, 중국-인도, 인도-파키스탄 분쟁 등에서 보듯 내륙지역의 국경분쟁은 무력을 동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국제사회에 간도 협약무효화를 공론화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으며, 중국과 외교 및 군사적 긴장관계만을 조성할 뿐이고, 북한이 비상사태에 돌입될 경우 중국이 우리와 우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조-중동맹에 의거 중국인민해방군의 자연스러운 개입과 38선 이북의 점유로 간도가 아니라 한반도 이북에 대한 영향력 까지 상실할 가능성이 높다.
둘째, 우리가 간도를 우리 민족의 역사적 터전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이유는 고조선, 고구려 및 발해의 유적이 그곳에서 발굴되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후손인 조선족이 간도땅위에 우리말과 우리 글, 우리 문화를 계승하며 절대적 인구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발해 멸망 후 간도는 조선 초기 까지 여진족의 터전이었으나, 여진족이 청을 건국 중국 본토로 들어간 후 한족에 동화되어 사라지면서, 다시 우리 민족의 터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간도의 조선족 공동체가 해체된다면 간도는 과거 역사상 여진족의 터전이었던 것과 같이 퇴색된 기록과 유물로만 남을 뿐이며 현재에 있어서 우리 민족에게는 어떠한 시사점도 없게 되는 것이다.
영토란 수많은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의 무대일 뿐이며, 특정 민족·집단이 특정시기 지배했다는 것만으로 그 지역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국수주의 논리일 뿐이다. 과거 선대의 역사에 근거 몽고가 서쪽으로는 지중해 및 발칸 반도부터 북으로는 러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세계인의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즉 동북공정 대응전략으로 민족의 문화적 유산을 발굴하고 학술연구를 통해 그 사료를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있는 역사이며 유물보다 소중한 자산인 우리 민족 - 조선족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고 민족성을 보존하면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동북공정에 대응한 현 단계 가장 중요한 전략이며 선결과제인 바,
첫째, 경제적 측면에서는 백두산 관광과 연계한 관광산업 투자로 연변의 경제를 살려 적극적 고용을 창출하고 조선족의 이탈을 막으며, 장기적으로는 한, 중, 러 등 3국의 연계점인 간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 통일 후에 대비 국제무역 및 상업지대로 발전할 수 있도록 장기 플랜 추진이 요구된다.
둘째, 정치적 측면에서는 조선족을 포함 재외동포의 국내 및 국제사회에서 지위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정부의 전담기구 설치 및 재외동포특별법제정 등을 통한 체계적 지원이 필요하다.
셋째,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제는 중국정부와의 긴밀한 협의 속에서 달성될 수 있도록 뒷받침 되어야 하며, 중국과의 정치·외교적 신뢰 구축을 기반으로 남북통일을 완성해 내는 것이 현 단계 과제이며, 영토 문제로서의 간도문제는 통일 후 과제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용정의 달
지난 5월 어느 날 용정에서 밤하늘을 올려봤다.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들 속에 북두칠성이 시리도록 빛나고 있었으며, 동쪽하늘 비스듬히 한국에서 보았던 바로 그 달이 처연히 밤하늘을 지키고 있었다. 달을 보자 100여년 간도의 역사와 애환, 그리고 그 후손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머릿속에 다가왔다.
황폐화된 들녘을 개간하는 고된 노동 속에서도, 일제의 군견에 마을전체 목숨이 던져지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수난의 역사를 역경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밤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고향하늘에서 보았던 바로 저 달이 있었기에, 눈물로 저 달을 담은 채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삶을 지탱했던 원천이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르자 내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떠나온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낮에는 척박한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는 고달픈 노동 속에서도 민족학교를 세워 밤에는 불 밝혀 인재를 양성하고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헌신했던 선조들, 주민의 피의 대가로 이룬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의 신화를 만들어 냈던 그들에게 우리 내국인들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지고 있는 것이리라. |